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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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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 출병은 1861년 멕시코의 외채 지불 유예 선언 이후, 프랑스, 영국, 스페인이 멕시코에 개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영국과 스페인이 철수한 후, 프랑스는 멕시코를 점령하고 군주제를 수립하려 했으나, 미국의 반대와 멕시코 공화파의 저항에 직면했다. 미국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프랑스에 철수를 요구했고, 프랑스군은 1866년에 철수를 시작했다. 1867년, 프랑스군의 지원을 잃은 막시밀리안 황제는 처형되었고, 멕시코 공화국이 복원되었다. 멕시코 출병은 멕시코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프랑스 제2제국의 종말을 앞당겼으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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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출병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푸에블라 공방전 - 1863년 3월 29일
제2차 푸에블라 전투 중 프랑스군의 공격
시기1861년 12월 8일 – 1867년 6월 21일
장소멕시코
결과멕시코 공화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멕시코 제2연방 공화국
교전 2프랑스 제2제국
멕시코 제2제국
지휘관
멕시코 공화국베니토 후아레스
포르피리오 디아스
이그나시오 사라고사(자연사)
헤수스 곤살레스 오르테가
호세 마리아 아르테아가(처형)
미겔 네그레테
안토니오 로하스(전사)
마리아노 에스코베도
헤로니모 트레비뇨
페드로 호세 멘데스(전사)
비센테 리바 팔라시오
호세 로페스 우라가 (1862–1864)
프랑스/멕시코 제국나폴레옹 3세
프랑수아 아실 바제
엘리 프레데리크 포레
아벨 두에
오귀스트 앙리 브랭쿠르(항복)
피에르 조제프 잔닝로
막시밀리아노 1세(처형)
후안 알몬테
산티아고 비다우리(처형)
토마스 메히아(처형)
미겔 미라몬(처형)
레오나르도 마르케스(항복)
마누엘 로사다 (1865–1866)
라몬 멘데스(처형)
호세 로페스 우라가(항복) (1864–1867)
병력 규모
멕시코 공화국70,000명 (미국 지원: 1867년 3,000명)
프랑스/멕시코 제국프랑스: 38,493명
멕시코 제국: 16,200–24,000명
스페인: 23,285명
영국: 700명
오스트리아: 7,859명
벨기에: 1,462명
이집트: 424명
남부 연합: 2,000명
폴란드: 472명
피해 규모
멕시코 공화국사망 31,962명 (처형 11,000명 포함), 부상 8,304명, 포로 33,281명
프랑스/멕시코 제국사망 14,000명 (세부 내역은 아래 참조)
피해 규모 상세
프랑스사망 6,654명 (전사 1,729명, 질병으로 인한 사망 4,925명), 부상 2,559명
멕시코 제국사망 5,671명, 부상 2,159명, 포로 4,379명
벨기에사망 573명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인 사망 455명 (질병으로 인한 사망 199명 포함), 헝가리인 사망 177명
이집트사망 126명 (질병으로 인한 사망 46명 포함)

2. 역사적 배경

멕시코는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정했다. 특히 보수파와 자유주의파 간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으며, 이는 외세 개입의 빌미를 제공했다.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멕시코는 독립 직후 제1 멕시코 제국이라는 군주제를 채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13] 이후에도 멕시코 군주주의자들은 멕시코를 제1 멕시코 제국과 같은 군주제로 복원하려는 오랜 희망을 품고 있었다.[13]

1861년 멕시코의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2년 만기 국채 이자 지불 중단을 선언하자,[15] 멕시코 채권자인 프랑스, 스페인, 영국이 분노하였다. 나폴레옹 3세자유 무역 관련 외교적 주장을 통해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고 멕시코에 친프랑스 정권을 수립하여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의 연결을 확보하려 했다.[15]

2. 1. 제1 멕시코 제국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멕시코는 독립 직후 제1 멕시코 제국이라는 군주제를 채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13] 멕시코는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 국가로 시작했을 때, 황제 아구스틴 1세가 통치했었다.[13]

2. 2. 멕시코 보수주의자들의 오랜 희망

멕시코 군주주의자들은 멕시코를 멕시코 독립 전쟁 이전, 즉 아구스틴 1세 황제가 통치했던 제1 멕시코 제국과 같은 군주제로 복원하려는 오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 남북 전쟁 (1861–65)으로 인해 미국이 국내 문제에 집중하면서, 프랑스는 먼로 독트린을 위반하고 멕시코에 개입할 기회를 얻었다.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에 프랑스가 지원하는 군주제를 수립하면 라틴 아메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13]

개입 지도


1861년 멕시코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가 외국 부채 지불 유예를 선언하자, 프랑스, 영국, 스페인은 런던 협약을 체결하고 멕시코에 공동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1861년 12월 8일, 세 나라 해군은 베라크루스에 상륙했다. 그러나 영국과 스페인은 프랑스의 진정한 목표가 멕시코 점령임을 알고 멕시코와 별도로 합의한 후 철수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제2 멕시코 제국 (1864–1867)을 수립했다. 미국은 먼로 독트린 위반을 이유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14]

나폴레옹 3세는 단순한 부채 회수뿐만 아니라 정권 교체를 원했다. 황후 외제니 드 몽티호의 영향으로, 멕시코 군주주의 망명자들과 접촉한 그는 멕시코에 유럽 왕자를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 남북 전쟁 발발은 먼로 독트린으로 인한 미국의 반대를 무력화시켰고, 후아레스의 부채 유예는 개입의 명분을 제공했다.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에 친프랑스 군주제를 수립하여 멕시코 자원, 특히 은에 대한 접근을 확보하고,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억제하고자 했다.[15][16]

2. 3. 미국의 남북 전쟁과 먼로 독트린

미국 남북 전쟁(1861-1865)으로 인해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적극적으로 시행할 수 없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군주국 설립을 시도하는 유럽에 대항하여 라틴 아메리카 공화국에 대한 동정을 표명했지만[113], 현실적으로 프랑스의 멕시코 개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864년 4월,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H. 수어드는 멕시코에 군주국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미국의 불편함을 표명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유 공화주의 제도의 유지가 미국의 안전과 운명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113] 같은 날, 의회는 멕시코 공화국의 상황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담은 공동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14]

전쟁이 끝날 무렵인 1865년 햄튼 로즈 회담에서는 남북 화해를 위해 멕시코 문제에 공동 대응하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115] 같은 해, 멕시코 대리인들은 미국에서 멕시코 채권을 판매하여 1600만달러에서 1800만달러를 모금했고, 이 자금은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가 미국의 전쟁 물자를 구매하는 데 사용되었다.[115] 1865년부터 1868년까지 허먼 스텀 장군은 후아레스가 이끄는 멕시코 공화국에 총과 탄약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116] 1866년 필립 셰리던 장군은 배턴 루지 군수창고에서 3만 정의 소총을 포함한 추가 보급품과 무기를 자유주의 군대에 전달했다.[117]

1867년, 수어드는 미국의 정책을 전환하여 프랑스에 철수를 요구하며 전쟁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먼로 독트린을 언급하며, 1868년에는 이 독트린이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고 선언했다.[118]

2. 4. 프랑스의 개입 목적

1861년 멕시코의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2년 만기 국채 이자 지불 중단을 선언하자, 멕시코 채권자인 프랑스, 스페인, 영국이 분노하면서 멕시코 출병이 시작되었다.[15]

나폴레옹 3세자유 무역 관련 외교적 주장을 통해 군사 개입을 정당화했다. 그는 멕시코에 친프랑스 정권을 수립하여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의 연결을 확보하려 했다.[15]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에서 채굴되는 을 원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나폴레옹 3세는 스페인, 영국과 연합하여 1861년 10월 31일 런던 조약을 체결하고 멕시코에 이자 지불을 요구하기 위해 이듬해 공동 출병했다.[15]

스페인과 영국은 큰 이권이 없어 개별적으로 채권 이자 지불 교섭을 진행하여 1862년에 철병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가톨릭 포교에 대한 종교적 관심을 가진 외제니 드 몽티조(나폴레옹 3세의 황후)의 영향과, 미국의 성장을 견제하며 라틴 아메리카에 친유럽 제국을 건설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의향으로 출병을 계속했다.[15]

푸에블라 전투에서 프랑스는 패배했지만, 프랑스 외인 부대 등 3만 명으로 병력을 증강하여 1863년 6월 멕시코시티를 함락시켰다.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요제프 막시밀리안 대공황제로 세운 괴뢰 정권(멕시코 제2제국)을 수립했다.[15]

프랑스는 멕시코 북서부의 풍부한 광산 자원,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톨릭 제국 발전을 통한 프로테스탄트와의 세력 균형, 솔페리노 전투 등에서 적대했던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화해 등 멕시코 문제에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15]

3. 1861년: 외채 지불 유예 선언과 런던 조약

1861년, 베니토 후아레스 정권은 국내 경제적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채권 이자 지불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132] 이에 채권국인 프랑스, 스페인, 영국은 무력 제재를 가하기로 합의하고 공동 출병을 감행했다. 당시 미국남북 전쟁으로 멕시코 내정에 간섭하기 어려워진 상황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영국, 스페인, 프랑스 함대는 1861년 12월 8일부터 17일에 걸쳐 베라크루스에 도착하여 멕시코의 채무 지불을 압박했다.[132] 스페인 함대는 산 후안 데 울루아 요새를 점령하고, 12월 17일에는 베라크루스를 장악했다.[132]

4. 1862년: 연합군의 개입과 프랑스의 침공

1861년 12월, 스페인, 영국, 프랑스의 삼국 연합군은 멕시코 베라크루스에 상륙했다.[17] 이는 베니토 후아레스 공화국 정부가 멕시코 정부 채권 지급을 중단한 것에 대한 강제 조치였다. 당시 멕시코는 미국-멕시코 전쟁 등 계속된 내정 간섭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미국남북 전쟁으로 인해 중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약해진 상황이었다.

스페인 함대는 12월 14일 베라크루스를 점령했고,[17] 프랑스와 영국군은 1862년 1월 7일에 도착했다. 스페인 장군 후안 프림은 동맹국이 정복이나 새 정부 강요 의도가 없다고 밝혔지만,[18] 영국과 스페인은 프랑스의 멕시코 점령 의도를 알게 된 후 멕시코와 협상을 통해 철수했다.

1862년 1월 14일, 멕시코 정부에 청구서가 제출되었고, 외무 장관 마누엘 도블라도는 협상을 제안했다.[19] 1월 23일, 협상이 타결되어 연합군은 내륙으로 이동하고 오리사바에서 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은 후아레스 정부와 멕시코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20]

그러나 프랑스는 침공을 계속하여 제2 멕시코 제국을 수립했다.

4. 1. 오리사바 협정 결렬

프랑스군은 1864년 1월 과달라하라를 점령하고, 2월에는 아과스칼리엔테스사카테카스를 점령하는 등 멕시코 내륙으로 진군했다.[36][38]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멕시코에 대한 간섭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영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결국, 프랑스의 일방적인 행동은 영국과의 오리사바 협정 결렬로 이어졌다.

4. 2. 푸에블라 전투 (신코 데 마요)

1861년, 베니토 후아레스 정권은 국내 경제적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채권 이자 지불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채권국인 프랑스, 스페인, 영국은 무력 제재를 가하기로 합의하고, 이듬해 공동 출병을 감행했다.

영국, 스페인, 프랑스 함대는 1861년 12월 8일부터 17일에 걸쳐 베라크루스에 잇따라 도착했다. 이는 멕시코가 채무를 지불하도록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였다.[132] 스페인 함대는 산 후안 데 울루아 요새를 점령했고, 이어서 12월 17일에 수도 베라크루스를 장악했다.[132] 유럽군은 오리사바, 코르도바로 진격했다.[132] 캄페체는 2월 27일 프랑스 함대에 항복했고, 샤를 드 로렌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이 3월 5일에 입성했다. 스페인과 영국은 프랑스가 멕시코를 점령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4월 9일에 철수했고, 4월 29일에는 멕시코에서 떠났다.

프랑스군은 1862년 5월 5일 푸에블라 전투에서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5월 5일, 신코 데 마요는 현재도 멕시코의 공휴일이다.

5. 1863년: 프랑스의 멕시코시티 점령과 제2 멕시코 제국 수립

프랑스군은 1863년 1월 15일 베라크루스를 포격했고, 3월 16일에는 포레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푸에블라 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바젠 장군은 푸에블라 해방을 시도한 코몬폴트 장군의 멕시코군을 산 로렌소에서 격파했고, 5월 17일 푸에블라는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5월 31일,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정부와 함께 도시에서 탈출하여 북쪽 엘 오아소 데 노르테로 후퇴했고, 이후 치와와로 이동하여 1867년까지 망명 정부를 유지했다.[63]

바젠 지휘 하의 프랑스군은 1863년 7월 7일 멕시코시티에 도착했고, 주력 부대는 포레 장군이 이끌고 3일 후에 입성했다.

1864년 9월 26일, 제국주의자들은 바그다드 항구를 점령하여 걸프 해안의 모든 주요 항구를 장악했다. 바그다드 주둔군의 지휘관인 후안 코르티나는 이후 제국주의로 전향했다.[49]

누에보 레온코아우일라의 주지사인 산티아고 비다우리는 1864년 3월 초에 후아레스와 결별하고, 제국 가입에 대한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50] 공화주의 군대는 그를 텍사스로 몰아냈지만, 비다우리에게 충성하는 군대는 그 지역에서 계속 활동했다. 1864년 8월 15일, 비다우리스트 군대는 몬테레이를 점령했고, 후아레스 대통령은 간신히 탈출했다.[51] 승리한 비다우리는 수도로 향했고, 막시밀리안 황제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말까지 제국주의자들은 누에보 레온코아우일라 대부분을 리오그란데 강둑까지 통제했다.

1865년 4월, 미국 남북 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나면서 프랑스 간섭은 전환점을 맞았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남북 전쟁이 끝날 때까지 멕시코 공화주의자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다.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미국은 막시밀리안이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도록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희생과 승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62]

5. 1. 카마론 전투

1863년 4월 30일, 장 당주 대위가 이끄는 프랑스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 2명의 장교와 62명의 병사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는 카마론 전투에서 멕시코 보병 및 기병대 3개 대대(약 3천 명)에게 공격받아 아시엔다 카마론에서 포위되었다. 당주는 아시엔다에서의 방어전에서 전사했고, 마지막에는 불과 3명만이 살아남는 처절한 "영광스러운 총검 공격"을 감행했다.[63] 이 전투는 프랑스 외인 부대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이날은 '카메론 데이'로 기념되고 있다.

5. 2. 멕시코 제국 섭정 구성

프랑스는 정부 최고 위원회와 주요 인사 회의를 통해 멕시코를 입헌 군주국으로 만들고,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왕위에 초대하기로 결정했다.[61] 1863년 6월 16일, 알몬테 장군은 상원(포레에 의해 임명되었다)에 의해 멕시코의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61] 상원은 35명의 구성원과 함께 6월 21일에 회의를 가졌으며, 7월 10일 가톨릭 제국을 선언했다. 나폴레옹 3세의 압력을 받아, 제관은 막시밀리안에게 주어졌고, 막시밀리안은 10월 3일에 이를 수락했다.[61]

6. 1864년: 막시밀리안의 즉위와 제국의 통치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 1세


1864년 4월 10일, 막시밀리안은 「미라마르 조약」에 서명하여 정식으로 제관을 수락하고, 5월 28일(5월 29일일 수도 있음)에 오스트리아 해군의 노바라 호를 타고 베라크루스에 내항하여, 부인인 벨기에 공주 샤를로트와 함께 멕시코에 상륙했다.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로 즉위했고, 샤를로트는 스페인어식 이름인 카를로타로 개명했다. 멕시코 제2제국은 프랑스 제2제정의 괴뢰국이었다.[78] 이 제국은 로마 가톨릭 교회, 상류 계급의 보수층, 토착 공동체 등의 지원을 받아 성립되었다.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의 임기(1858년~1871년)는 막시밀리안 1세의 통치(1864년~1867년)로 인해 중단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당시 서양의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로, 입헌군주제를 선호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와 권한을 분담하고, 어린이 노동 폐지, 노동 시간 제한 등의 법률을 제정했다.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서 사실상 농노제로 이어지던 농지 임대 제도를 폐지했다. 그러나 이는 멕시코 보수층에게는 너무 자유주의적이었고, 자유주의자들은 군주제를 거부했기 때문에 양측 모두에게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78]

멕시코 제국은 지주층이나 가톨릭 교회 등 보수층을 기반으로 성립되었지만, 막시밀리안 1세의 자유주의적 정책은 오히려 이들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막시밀리안은 후아레스를 총리로 초빙하여 자유주의자를 포섭하려 했으나, 후아레스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보수파와 자유주의파 양측 모두에게서 지지를 얻지 못하고, 프랑스의 군사력에 의존하여 제국을 유지해야 했다.[78]

프랑스군 사령관 바젠은 멕시코 귀족의 딸과 결혼한 후,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후아레스파와 내통하기도 했다.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프랑스에 철병을 요구하는 동시에 후아레스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여 게릴라전을 도왔고, 국내 정세는 혼란에 빠졌다.[78]

6. 1. 제국주의자들의 중부 멕시코 장악

프랑스-멕시코 군은 멕시코 중부 지역을 장악하고, 주요 도시와 광산, 농지를 통제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865년 7월, 아르테가는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타캄바로로 진격했지만, 1천 명도 안 되는 병력을 이끌던 알프레드 반 데어 스미센 중령에게 패배했다.[71] 미초아칸에서는 레굴레스가 반복적으로 격퇴당해 1866년 4월에 그의 부대가 붕괴될 지경이었으나, 5월에 작전을 재개하여 톨루카 지역으로 진입했고, 시타쿠아로와 게레로 주변에서 동맹군을 찾았다.[80]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오아하카로 도망쳐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려 했다. 1866년 8월 테오티틀란을 점령했지만, 오스트리아-멕시코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10월 초, 디아스는 제국주의자 오로노스 장군을 격파했고, 오로노스는 간신히 탈출하여 오아하카 시로 후퇴했고, 디아스는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디아스는 오스트리아-멕시코 지원군에 맞서기 위해 며칠 동안 포위를 풀었고, 지원군을 격파한 후 1866년 11월 1일 오아하카 시를 점령했다. 그곳에서 그는 오아하카를 완전히 점령하고 푸에블라로 진격했다.[81]

1863년, 프랑스군은 베라크루스를 포격하고, 푸에블라 시를 포위했다. 프랑스 외인 부대는 카마론 전투에서 멕시코군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군 바젠 장군은 푸에블라 해방을 시도한 멕시코군을 격파하고 푸에블라 시를 함락시켰다.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정부와 함께 수도에서 도망쳐 북쪽으로 후퇴했다.[71]

바젠 지휘 하의 프랑스군은 1863년 7월 7일 멕시코 시티에 도달했고, 주력 부대는 포레 장군이 이끌고 3일 후에 입성했다. 알몬테 장군은 상원에 의해 멕시코의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상원은 가톨릭 제국을 선언하고 막시밀리안에게 제관을 주었다.[71]

6. 2. 막시밀리안의 자유주의적 정책과 한계

막시밀리안은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와 권한을 분담하는 입헌 군주제를 선호했으며, 어린이 노동 폐지, 노동 시간 제한 법률 등을 제정했다.[78]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서 사실상 농노제로 전환되고 있던 농지 임대 제도를 폐지했다.[78]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멕시코 보수층에게는 너무 급진적이었고, 자유주의자들은 군주제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양쪽 모두에게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78] 멕시코 제국은 지주층이나 가톨릭 교회 등 보수층을 기반으로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안 1세의 자유주의적 정책은 오히려 이들과의 갈등을 초래했다.[78]

막시밀리안 1세는 베니토 후아레스를 총리로 초빙하여 자유주의 세력을 포섭하려 했으나, 후아레스는 이를 거절했다.[78] 결국 막시밀리안은 보수파와 자유주의파 양쪽 모두에게서 지지를 얻지 못하고, 프랑스 군사력에 의존하여 제국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78]

7. 1865년: 공화파의 저항과 미국의 지원

베니토 후아레스


1861년 베니토 후아레스 정권은 국내 경제적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채권 이자 지불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채권국인 프랑스, 스페인, 영국은 무력 제재를 가하기로 합의하고 이듬해 공동 출병을 감행했다. 당시 미국남북 전쟁에 돌입하여 중미 지역의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것도 배경으로 작용했다.[132]

프랑스군은 1865년 오아하카를 점령하는 등 승리를 이어갔지만, 멕시코 공화파는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을 중심으로 멕시코 제2제국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공화파는 미초아칸주 타칸바로 전투에서 제국군을 격파하는 등 반격을 가했다.

한편,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 후아레스 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7. 1. 흑색 칙령

1865년 10월 3일, 막시밀리아노 1세는 "검은 포고령"으로 악명 높은 "10월 포고령"을 내렸다. 이 포고령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멕시코인을 즉결 처형하는 것을 허용하는 내용이었다.[92] 이는 멕시코 제국에 대항하는 공화파 게릴라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강경책이었다. 이 포고령은 훗날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되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92] 10월 21일, 이 포고령에 따라 공화국군의 고위 장교들이 처형되었다.[92]

7. 2. 북부 및 남부 태평양 전역

제국군은 북부와 남부 태평양 연안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전개했지만, 공화파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1865년 2월 9일, 프랑스군은 오아하카를 점령하고 포르피리오 디아스를 포로로 잡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94] 프랑스 함대는 캘리포니아만에 면한 구아이마스를 공략했다.[94] 그러나 1866년 4월 11일, 공화국군은 미초아칸주의 타칸바로 전투에서 제국군을 격파했다.[94] 같은 해 4월과 5월, 공화국군은 시날로아주치와와주에 다수의 군을 확보하고 리오그란데강 연안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다.[94] 벨기에 의용군은 7월 11일 제2차 타칸바로 전투에서 패배했다.[94]

1866년 10월 3일, 막시밀리안은 "검은 포고령"으로 악명 높은 "10월 포고령"을 내려 전쟁 포로가 된 멕시코인을 즉각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94] 이는 후에 막시밀리안이 처형되는 이유가 되었다.[94] 10월 21일, 이 포고령에 따라 계급이 높은 공화국 군인들이 처형되었다.[94]

8. 1866년: 프랑스군의 철수와 제국의 약화

1866년, 나폴레옹 3세는 미국의 압력과 국내외 정세 변화를 이유로 멕시코 주둔 프랑스군의 철수를 발표했다.[92] 이는 당초 계획보다 앞당겨진 일정이었다. 프랑스군의 철수는 제2 멕시코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12월 말, 프랑스군은 과나후아토를 철수했고, 산루이스포토시에서 철수하는 병력과 케레타로에서 합류한 다음 베라크루스 항구로 향했다. 바쟁은 1867년 2월 5일 멕시코시티를 철수했고, 3월 12일 마지막 프랑스군이 툴롱으로 향했다.[93]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 처형''(1868). 왼쪽은 토마스 메히아 장군, 중앙은 막시밀리안, 오른쪽은 미겔 미라몬 장군.


프랑스 군의 공식 철수로 멕시코 출병은 기술적으로 종료되었지만, 프랑스 군과 멕시코 협력자들이 세운 제국은 몇 달 더 지속되었다. 프랑스 군과 함께 싸웠던 멕시코 장군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계속 수행했고, 수백 명의 프랑스 용병들이 독립적으로 남았다.

제국에게 불행하게도 서부와 동부 군사 지구가 공화파의 수중에 있었고, 푸에블라 남쪽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몇몇 중앙 지방은 적대적인 무리에 의해 점령당했고, 공화파 군대의 침략을 받기 직전이었다. 자금과 자원도 부족했다. 한편 미국에서 무기와 자금이 공화파에게 쏟아져 들어갔다.[95]

1867년 1월 27일, 미라몬은 아과스칼리엔테스를 점령하고 후아레스 대통령을 체포하는 데 거의 성공했지만, 공화파 장군 마리아노 에스코베도는 2월 1일 산 하신토에서 그를 가로막아 패배시켰다. 미라몬은 케레타로로 피신했다. 공화파는 과나후아토와 모렐리아를 점령했다. 제국군은 미초아칸에서 산 루이스 포토시 경계로 후퇴하여 케레타로로 물러났다.[96]

8. 1. 북부 지역 상실

1866년 말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 주둔 프랑스군을 예정보다 일찍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하면서, 멕시코 공화군은 북부 지역 탈환에 나섰다.[92] 프랑스군은 과나후아토, 산루이스포토시를 거쳐 베라크루스 항구로 철수했다.[80] 바쟁 원수가 1867년 2월 5일 멕시코시티를 떠났고, 3월 12일 마지막 프랑스군이 멕시코를 떠났다.[93]

프랑스군 철수 이후에도 멕시코 제국은 몇 달간 더 유지되었지만, 서부와 동부 군사 지구는 이미 공화파의 수중에 있었다.[95] 1867년 1월, 미겔 미라몬 장군이 아과스칼리엔테스를 점령했지만, 마리아노 에스코베도 장군에게 패배하고 케레타로로 후퇴했다.[96] 공화군은 과나후아토모렐리아를 점령했고, 제국군은 미초아칸에서 산루이스포토시 경계, 케레타로로 후퇴했다.[96]

9. 1867년: 제국의 붕괴와 막시밀리안의 처형



막시밀리안은 군사 재판 후 사형을 선고받았다.[108] 빅토르 위고주세페 가리발디를 포함한 유럽의 많은 군주들과 저명인사들은 멕시코에 전보와 편지를 보내 막시밀리안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베니토 후아레스는 이를 거부했다.[108] 그는 멕시코가 외세에 의해 강요된 어떠한 정부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믿었다.[108]

막시밀리안은 1867년 6월 19일[108] 미겔 미라몬과 토마스 메히아와 함께[108] 케레타로 외곽의 언덕인 세로 데 라스 캄파나스에서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다.[108] 멕시코 시는 막시밀리안이 처형된 다음 날 항복했다.

9. 1. 케레타로 포위전

막시밀리안은 레오나르도 마르케스, 미겔 로페스와 함께 케레타로에 합류하여, 미라몬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의 환영을 받았다. 제국군은 약 9,000명, 대포 39문으로 구성되었고, 막시밀리안, 미라몬, 마르케스, 메히아, 멘데스는 제국의 5명의 마법의 M으로 알려졌다.

초기 군사 회의에서는 공화주의자들과 즉시 싸우기로 했으나, 마르케스의 조언으로 이 전략은 거부되었다. 마르케스는 멕시코시티로 퇴각하여 병력을 모으자고 제안했지만, 이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3월 5일, 공화주의 군대가 케레타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미라몬은 3월 17일 산 그레고리오 언덕을 되찾기 위한 반격을 계획했으나, 제국군 본부가 공격받고 있다는 오보로 인해 연기되었다.

마르케스는 증원 요청을 위해 멕시코시티로 떠났고, 미라몬은 케레타로의 선두 장군이 되었다. 4월 1일, 미라몬은 산 그레고리오 언덕으로 반격을 이끌었지만, 증원군 부족으로 인해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마르케스의 소식이 없자, 멕시코시티로 사절단이 파견되었지만 실패했다. 제국군 장교들은 항복을 촉구했지만, 막시밀리안은 케레타로에 남기로 결정했다.

제국군은 케레타로에서 탈출하기 위해 싸울 계획을 세웠고, 4월 27일 미라몬은 시마타리오 언덕을 공격했으나, 공화주의 예비군이 도착하여 패배했다. 이후 제국군은 시에라 고르다 산맥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5월 15일 실행 예정이었던 계획은 미겔 로페스 대령의 배신으로 무산되었다. 5월 14일 밤, 로페스는 금품을 대가로 케레타로의 문을 공화주의 군대에게 열었고, 공화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막시밀리안, 미라몬, 메히아를 체포했다.

9. 2. 공화정 복원

베니토 후아레스는 막시밀리안이 처형된 후 멕시코에 공화정을 복원하고 대통령으로 복귀했다.[109] 후아레스는 멕시코가 외세에 의해 강요된 어떠한 정부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자 했다.[108] 그는 진보적인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자유주의 개혁 대부분을 지지했기 때문에 정책에 거의 변화를 주지 않았다.[109]

보수당은 프랑스 군과의 동맹으로 인해 완전히 신뢰를 잃어 사실상 해체되었다. 자유당은 "복원된 공화국" 초기 동안 거의 도전을 받지 않는 정치 세력이었다. 그러나 1871년, 후아레스는 재선 금지 조항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110]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대통령에 반란을 일으켰지만,[110] 1872년 후아레스가 재임 중 사망하면서 이 반란은 무의미해졌다. 프랑스 개입은 공화당이 이끄는 정부가 더욱 안정되고 국내외 세력이 모두 억제되면서 끝났다.

10. 미국의 입장과 먼로 독트린

미국 남북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프랑스의 멕시코 개입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유럽의 군주국 설립 시도에 맞서 라틴 아메리카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113] 1864년 4월, 멕시코 제국 정부 수립 직후, 윌리엄 H. 수어드 미국 국무장관은 멕시코에 군주제를 강요하는 것에 대한 미국의 불편함을 드러내면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그는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자유 공화주의 제도가 지속되는 것에 미국의 안전과 운명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강조했다.[113]

같은 날, 미국 의회는 공동 결의안을 통해 유럽 강국의 후원 아래 아메리카의 공화국 정부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군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정책을 명확히 했다.[114]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햄튼 로즈 회담에서는 멕시코 내 프랑스에 대항하는 공동 행동을 통해 남북 화해를 이루려는 논의가 잠시 있었다. 그 해, 멕시코 대리인들은 미국에서 멕시코 채권을 판매하여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가 미국의 전쟁 물자를 구매할 수 있도록 1600만달러에서 1800만달러를 모금했다.[115] 1865년부터 1868년까지 허먼 스텀 장군은 후아레스가 이끄는 멕시코 공화국에 총과 탄약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116] 1866년 필립 셰리던 장군은 배턴 루지 군수창고에서 3만 정의 소총을 포함한 추가 보급품과 무기를 자유주의 군대에 지원했다.[117]

1867년에 이르러 수어드는 미국의 정책을 후아레스 공화국 정부에 대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지지에서 프랑스의 철수를 압박하기 위한 전쟁 위협으로 전환했다. 그는 먼로 독트린을 언급하며, 1868년에는 "8년 전에는 단순한 이론에 불과했던 먼로 독트린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라고 선언했다.[118]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후아레스 정부를 지지했다. 남북 전쟁 종결 후,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필립 셰리던 장군에게 5만 명의 군사를 미-멕시코 국경 부근에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셰리던의 군단은 국경을 순찰하며 프랑스군에게 위협을 가하는 동시에 후아레스 군에게 무기를 공급했다.[133] 1866년 2월 12일, 미국 의회는 1864년 4월에 수립된 멕시코 제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미국은 먼로 독트린에 따라 프랑스에 멕시코에서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리우그란데강을 따라 배치된 미군은 프랑스군의 추가 상륙을 막기 위해 해상 봉쇄를 실시했다. 또한, 1866년 5월 6일, 미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멕시코에 주둔 중인 오스트리아 의용군에 대해 항의했다.

11. 멕시코 출병의 결과와 영향

프랑스 제2 제정의 멕시코 침략은 초기에는 영국, 스페인과 함께 시작되었다. 1861년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국채 이자 지불 중단을 선언하자, 채권국인 이들 세 나라는 이듬해 공동 출병했다. 그러나 이권이 크지 않았던 영국과 스페인은 1862년 개별 협상을 통해 철수했다.

프랑스는 푸에블라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병력을 증강하여 1863년 멕시코시티를 함락시켰다. 1864년에는 막시밀리안을 황제로 하는 괴뢰 정권(제2차 멕시코 제국)을 수립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후아레스 정부를 지지했으나, 남북 전쟁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종전 후 앤드루 존슨 행정부는 필립 셰리던에게 군대를 미-멕시코 국경에 배치하게 했다. 셰리던 군단은 프랑스군을 압박하며 후아레스 군을 지원했다.[133] 미국 의회는 1866년 멕시코 제국을 부인하는 결의를 가결하고, 먼로 독트린에 따라 프랑스에 철수를 요구했다. 미군은 리우그란데강에서 해상 봉쇄를 실시, 프랑스군 증원을 막았고,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멕시코 주둔 오스트리아 의용군에 대해 항의했다.

1871년 후아레스가 재선되었으나, 헌법상 재선은 금지였다. 이에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1872년 후아레스의 급사로 실패했다. 디아스는 1876년 다시 반란을 일으켜 1911년까지 장기 집권했다.

멕시코 출병 이전 멕시코는 미국과 영토 분쟁을 겪었으나, 출병 저항 운동에 대한 미국의 지원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후 지역 권력 균형은 미국 우위로 굳어졌다.

분류:멕시코-프랑스 관계

분류:멕시코의 역사

분류:프랑스 제2제국

분류:19세기 멕시코

분류:19세기 프랑스

분류:전쟁

분류:프랑스의 군사사

분류:멕시코의 군사사

분류:식민 전쟁

분류:미국-멕시코 관계

분류:미국-프랑스 관계

분류:괴뢰 정권

11. 1. 멕시코에 미친 영향

프랑스의 멕시코 개입은 멕시코에 큰 혼란과 피해를 가져왔지만,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멕시코 출병 이전에는 영토 문제로 미국과의 갈등이 계속되었지만, 멕시코 출병에 대한 저항 운동을 미국이 지원하면서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후, 이 지역의 권력 균형은 미국 우위로 고정되었다.

11. 2. 프랑스에 미친 영향

프랑스 제2 제정의 멕시코 출병은 프랑스에 여러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선, 막대한 군사 비용 지출로 인해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또한, 멕시코 출병은 국제적으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에서 채굴되는 을 원했고,[3] 멕시코 북서부의 풍부한 광산 자원을 이용하고자 했다.[6] 그러나 멕시코 출병은 실패로 끝났고, 괴뢰 정권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가 총살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7]

이 사건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프랑스가 멕시코 황제를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라는 비난 여론이 형성되었다.[7] 나폴레옹 3세외제니 드 몽티조 황후는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이는 제2제정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7]

11. 3.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프랑스 제2 제정의 멕시코 출병은 당초 영국스페인의 지원을 받았다.[132] 1861년 멕시코의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국채 이자 지불 중단을 선언하자, 멕시코 채권국인 프랑스, 스페인, 영국은 분노하여 10월 31일 런던 조약을 체결하고 공동 출병했다. 그러나 큰 이권이 없던 스페인과 영국은 1862년 중 개별 협상을 통해 철병했다.[132]

반면, 나폴레옹 3세자유 무역을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지속했다. 그는 멕시코에 친프랑스 정권을 수립하여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 간 연결을 확보하고, 멕시코의 을 확보하고자 했다. 또한 외제니 드 몽티조 황후의 영향으로 가톨릭 포교라는 종교적 관심과, 부상하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에 친유럽 제국을 건설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미국남북 전쟁으로 인해 초기에는 개입이 어려웠으나, 전쟁 종결 후 앤드루 존슨 행정부는 필립 셰리던 장군에게 5만 명의 군세를 미-멕시코 국경에 배치하도록 했다.[133] 셰리던 군단은 프랑스군을 위협하며 후아레스 군에게 무기를 공급했다. 미국 의회는 1866년 2월 12일 멕시코 제국을 부인하는 결의를 가결하고, 먼로 독트린에 따라 프랑스에 즉시 철수를 요구했다. 리우그란데강을 따라 미군이 해상 봉쇄를 실시하여 프랑스군의 증원을 막았고, 1866년 5월 6일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멕시코 주둔 오스트리아 의용군에 대해 항의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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