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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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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월성지는 조선 중종 5년(1510년) 제주 목사 장림이 고려 시대 명월현에 있던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한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증축되었으며, 동, 서, 남문에 객사, 군기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수군만호 등이 주둔했다. 숙종 28년(1702년)에는 군사 훈련이 실시되었고, 1901년 이재수의 난 당시에는 상무사가 주둔했으나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인들의 기습을 받았다. 현재 성벽은 일부 복원되어 있으며, 마을과 비양도가 조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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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성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명월성지 정면
정면에서 찍은 명월성지
유형기념물
국가제주특별자치도
이름명월성지
지정 번호29
지정일1976년 9월 9일
주소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동명리
소유제주시
면적일곽
좌표''
기타 정보
문화재청 ID23,00290000,50

2. 역사

조선 중종 5년(1510년)에 제주 목사 장림(張琳)이 명월현의 기존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명월성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25년에 목사 이경억에 의해 증축되었다.

명월성은 동서남쪽에 성문이 있었고, 안에는 객사, 군기고, 별창, 사장 등이 있었다. 큰 샘이 있어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수군만호와 휘하 군사들이 성에 주둔했다.

숙종 28년(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은 명월진성에서 군사 훈련과 말 1,064필을 점검하고, 활쏘기 시험을 보아 합격자를 뽑았다. 이 모습은 《탐라순력도》의 「명월조점」과 「명월시사」에 남아 있다.

구한말, 봉세관의 가혹한 세금 징수와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은 천주교인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1901년 제주 유림들이 상무사를 조직하고 명월성에 머물렀다. 그날 밤, 천주교인들과 프랑스 신부가 성을 기습하여 유림 대표들을 납치했다. 그러나 이재수가 도민들을 모아 제주성을 공격, 함락시키고 천주교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를 이재수의 난이라 부른다.

현재 남아있는 명월성지 성벽의 총길이는 1,300m, 높이는 3m이다.

2. 1. 축성 배경

조선 중종 5년(1510년)에 당시 제주 목사였던 장림(張琳)이 과거 고려 시대 명월현이 설치되었던 기존의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명월진성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명월포(明月浦)는 고려 시대 여몽연합군에 쫓겨 진도를 탈출한 삼별초의 별장 이문경(李文京)이 선봉으로서 상륙해 현지의 고려군을 제압한 곳이며, 고려 말 목호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러 온 최영의 군대가 상륙해 목호와 교전한 곳이었다. 제주 목사로 부임해 온 장림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양도(飛揚島)가 있어 왜구가 이 섬을 근거지로 해안을 약탈할 경우를 대비하여 기존의 명월현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당시 성의 둘레는 2,020자, 높이는 8자였는데,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25년에 목사 이경억이 증축하여 둘레 3,050자, 높이 9자가 되었다.

2. 2. 조선 시대

조선 중종 5년(1510년)에 당시 제주 목사였던 장림(張琳)이 고려 시대 명월현이 설치되었던 기존의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명월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명월포(明月浦)는 고려 시대 여몽연합군에 쫓겨 진도를 탈출한 삼별초의 별장 이문경(李文京)이 선봉으로서 상륙해 현지의 고려군을 제압한 곳이며, 고려 말 목호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러 온 최영의 군대가 상륙해 목호와 교전한 곳이었다. 제주 목사로 부임해 온 장림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양도(飛揚島)가 있어 왜구가 이 섬을 근거지로 해안을 약탈할 경우를 대비하여 기존의 명월현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당시 성의 둘레는 2,020자, 높이는 8자였는데,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25년에 목사 이경억이 증축하여 둘레 3,050자, 높이 9자가 되었다.

성은 동쪽과 서쪽, 남쪽에 성문이 있었고, 안에는 객사와 군기고, 별창과 사장 등이 있었으며, 큰 샘이 있어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 물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수군만호와 휘하의 치총 4명, 서기 12명, 포수 12명, 노 젓는 군사 103명, 방위군 452명이 이 성에 주둔하였다.

숙종 28년(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은 11월 13일과 14일에 명월진성에서 성정군(城丁軍)의 훈련과 말 1,064필을 점검하고, 다음 날에는 활쏘기 시험을 보아 합격자를 뽑았다. 이때의 모습은 《탐라순력도》에 「명월조점(明月操點)」과 「명월시사(明月試射)」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다. 이형상이 탐라순력도를 제작할 당시 명월포 방호소의 조방장은 강세건(姜世建)이었고, 명월진성 내 성정군은 모두 412명, 말을 기르는 목자와 보인은 185명, 마필은 1,064필, 창고에 저장된 곡식은 3,300여 섬이었다.

구한말 제주에 파견된 봉세관 강봉헌의 가혹한 세금 징수와, 프랑스 세력까지 등에 업은 천주교인들의 횡포에 맞서 대정군수(大靜郡守) 채구석(蔡龜錫)은 제주 유림들을 규합해 상무사를 조직하고, 제주 목사에게 실정을 호소하고자 대정을 출발해 명월성에서 묵게 되었는데, 천주교인 800여 명과 프랑스 신부 마르셀 마크루는 총칼로 무장하고 1901년 5월 14일 한밤중에 성을 기습해 장두(狀頭)였던 유림 오대현(吳大鉉)을 비롯한 우두머리 여섯 명을 납치하였다. 그러나 대정현의 관노였던 이재수(李在守)가 대정으로 달아나 다시 도민들을 모아 제주성(濟州城)으로 쳐들어갔고, 제주성에서 천주교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맞섰으나 결국 5월 28일에 성이 함락되고 몇백 명에 달하는 천주교인들이 도민군에게 살해되었다(이재수의 난).

2. 3. 구한말과 이재수의 난

조선 중종 5년(1510년)에 제주 목사 장림(張琳)이 명월현의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한 명월성은 임진왜란 이후 증축되었다. 숙종 28년(1702년)에는 제주 목사 이형상이 명월진성에서 군사 훈련과 점검을 실시한 기록이 《탐라순력도》에 남아있다.

구한말, 봉세관 강봉헌의 가혹한 세금 징수와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은 천주교인들의 횡포에 맞서, 1901년 제주 유림들은 상무사를 조직하고 제주 목사에게 실정을 호소하려 했다. 이들은 명월성에서 묵게 되었는데, 5월 14일 밤, 천주교인 800여 명과 프랑스 신부 마르셀 마크루는 무장하고 성을 기습하여 유림 대표들을 납치했다. 그러나 관노였던 이재수가 대정에서 도민들을 모아 제주성으로 진격, 5월 28일 성을 함락시키고 천주교인들을 살해했다. 이를 이재수의 난이라 부른다.

3. 구조 및 시설

조선 중종 5년(1510년)에 제주 목사였던 장림(張琳)이 고려 시대 명월현에 있던 기존의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명월진성 근처 명월포(明月浦)는 고려 시대 여몽연합군에 쫓겨 진도를 탈출한 삼별초의 별장 이문경(李文京)이 상륙해 고려군을 제압한 곳이며, 고려 말 목호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러 온 최영의 군대가 상륙해 목호와 교전한 곳이었다. 제주 목사 장림은 근처에 비양도(飛揚島)가 있어 왜구가 이 섬을 근거지로 해안을 약탈할 경우를 대비하여 기존의 명월현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성은 동쪽, 서쪽, 남쪽에 성문이 있었고, 안에는 객사, 군기고, 별창, 사장 등이 있었으며, 큰 샘이 있어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 물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숙종 28년(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은 명월진성에서 성정군(城丁軍) 훈련과 말 1,064필을 점검하고, 다음날 활 쏘는 사람을 시험하여 뽑았다. 이 모습은 《탐라순력도》에 「명월조점(明月操點)」과 「명월시사(明月試射)」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다.

1901년 이재수의 난 당시,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은 천주교인들이 명월성을 기습하여 유림들을 납치하기도 했다.

3. 1. 성곽

조선 중종 5년(1510년)에 제주 목사였던 장림(張琳)이 고려 시대 명월현에 있던 기존의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명월진성 근처 명월포(明月浦)는 고려 시대 여몽연합군에 쫓겨 진도를 탈출한 삼별초의 별장 이문경(李文京)이 상륙해 고려군을 제압한 곳이며, 고려 말 목호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러 온 최영의 군대가 상륙해 목호와 교전한 곳이었다. 제주 목사 장림은 근처에 비양도(飛揚島)가 있어 왜구가 이 섬을 근거지로 해안을 약탈할 경우를 대비하여 기존의 명월현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당시 성의 둘레는 2,020자, 높이는 8자였는데,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25년에 목사 이경억이 증축하여 둘레 3,050자, 높이 9자가 되었다.

성은 동쪽, 서쪽, 남쪽에 성문이 있었고, 안에는 객사, 군기고, 별창, 사장 등이 있었으며, 큰 샘이 있어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 물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수군만호와 휘하 치총 4명, 서기 12명, 포수 12명, 노 젓는 군사 103명, 방위군 452명이 이 성에 주둔하였다.

숙종 28년(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은 명월진성에서 성정군(城丁軍) 훈련과 말 1,064필을 점검하고, 다음날 활 쏘는 사람을 시험하여 뽑았다. 이 모습은 《탐라순력도》에 「명월조점(明月操點)」과 「명월시사(明月試射)」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다. 당시 명월포 방호소 조방장은 강세건(姜世建)이었고, 명월진성 내 성정군은 412명, 목자와 보인은 185명, 마필은 1,064필, 창고 곡식은 3,300여 섬이었다(「명월조점」 부기).

구한말 봉세관 강봉헌의 가혹한 세금 징수와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은 천주교인들의 횡포에 맞서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은 제주 유림들을 규합해 상무사를 조직하고, 제주 목사에게 실정을 호소하고자 대정을 출발해 명월성에서 묵었는데, 천주교인 800여 명과 프랑스 신부 마르셀 마크루는 총칼로 무장하고 1901년 5월 14일 밤에 성을 기습해 장두(狀頭)였던 유림 오대현(吳大鉉) 등 여섯 명을 납치하였다. 그러나 대정현 관노였던 이재수(李在守)가 대정으로 달아나 도민들을 모아 제주성(濟州城)으로 쳐들어갔고, 제주성에서 천주교인들은 성문을 닫고 맞섰으나 5월 28일에 성이 함락되고 몇백 명에 달하는 천주교인들이 도민군에게 살해된다(이재수의 난).

현재 잔존한 명월성지 성벽의 총길이는 1300m, 높이는 3m이다. 현재 넓은 도로 옆의 성만 일부분 복원되었으며, 나머지는 옛 모습 그대로 마을 남쪽에 남아 있다. 성 위에 올라서면 마을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비양도가 내려다 보여 당시 해안으로 침입해 오는 적들을 신속히 격퇴했음을 알 수 있다.

3. 2. 내부 시설

조선 중종 5년(1510년)에 제주 목사 장림(張琳)이 고려 시대 명월현의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명월성지가 축조되었다. 성 안에는 객사, 군기고, 별창, 사장 등이 있었고, 큰 샘이 있어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수군만호와 휘하 병력들이 주둔하였다.

숙종 28년(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은 명월진성에서 군사 훈련과 함께 말 1,064필을 점검하고 활쏘기 시험을 실시했다. 당시 명월진성에는 성정군 412명, 목자와 보인 185명, 말 1,064필, 곡식 3,300여 섬이 있었다.

1901년 이재수의 난 당시,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은 천주교인들이 명월성을 기습하여 유림들을 납치하기도 했다.

현재 명월성지 성벽은 총길이 1,300m, 높이 3m로 일부 복원되었으며, 나머지는 마을 남쪽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성 위에 올라서면 마을과 비양도가 내려다 보인다.

4. 주둔군

수군만호와 휘하 치총 4명, 서기 12명, 포수 12명, 노 젓는 군사 103명, 방위군 452명이 이 성에 주둔하였다. 숙종 28년(1702년) 이형상이 《탐라순력도》를 제작할 당시 명월포 방호소의 조방장은 강세건(姜世建)이었고, 명월진성 내 성정군은 모두 412명, 말 기르는 일을 맡은 목자와 보인은 185명, 맡고 있던 마필은 1,064필, 창고에 저장된 곡식은 3,300여 섬이었다.

5. 《탐라순력도》와 명월진성

조선 중종 5년(1510년)에 제주 목사였던 장림(張琳)이 고려 시대 명월현이 있던 곳에 있던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한 것이 명월진성이다.

명월포(明月浦)는 삼별초의 별장 이문경(李文京)이 여몽연합군에 쫓겨 진도를 탈출하여 상륙한 곳이며, 고려 말 최영목호를 진압하러 온 곳이기도 하다. 제주 목사 장림은 비양도(飛揚島)를 근거지로 한 왜구의 해안 약탈을 대비하여 명월현 목책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임진왜란 이후 선조 25년에 목사 이경억이 성을 증축하였다. 증축 이전의 성은 둘레 2,020자, 높이 8자였고, 증축 이후에는 둘레 3,050자, 높이 9자가 되었다.

성에는 동서남쪽에 성문이 있었고, 객사, 군기고, 별창, 사장 등이 있었으며, 큰 샘이 있어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었다. 수군만호와 휘하 군사들이 성에 주둔하였다.

1702년(숙종 28년), 제주 목사 이형상은 명월진성에서 군사 훈련과 말 점검을 하고 활쏘기 시험을 하였다. 이 모습은 《탐라순력도》의 「명월조점(明月操點)」과 「명월시사(明月試射)」에 남아 있다. 당시 명월진성에는 성정군 412명, 목자와 보인 185명, 말 1,064필, 곡식 3,300여 섬이 있었다.

1901년 이재수의 난 당시, 봉세관 강봉헌의 가혹한 세금 징수와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은 천주교인들의 횡포에 맞서 대정군수 채구석은 유림들을 규합해 상무사를 조직하고 명월성에서 묵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과 프랑스 신부 마르셀 마크루는 밤에 성을 기습하여 유림 지도자들을 납치하였다. 이후 이재수가 도민들을 모아 제주성(濟州城)으로 쳐들어가 천주교인들을 살해하였다.

6. 현재 상태

현재 명월성지 성벽의 총 길이는 1,300m, 높이는 3m이다. 넓은 도로 옆의 성만 일부분 복원되었으며, 나머지는 옛 모습 그대로 마을 남쪽에 남아 있다. 성 위에 올라서면 바로 앞으로 마을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비양도가 내려다보여 당시 해안으로 침입해 오는 적들을 신속히 격퇴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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