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간 팬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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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시간 팬서스는 1982년 창설된 USFL의 창립 멤버로, 1983년 USFL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1984년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에 패배했다. 이후 구단주는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와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오클랜드 인베이더스와 합병했고, USFL이 NFL과의 소송에서 패소하며 리그가 중단되었다. 2022년 재개된 USFL에 참여하여 팀을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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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시간주의 미식축구팀 - 디트로이트 라이언스
디트로이트 라이언스는 1930년 창단하여 1934년 디트로이트로 연고지를 이전한 NFL의 프로 미식축구 팀으로, 1950년대 전성기 이후 침체기를 겪다 2023년 지구 우승을 통해 재도약하고 있으며 추수감사절 경기 개최 등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미시간 팬서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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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미시간 팬서스 |
원래 이름 | Michigan Panthers |
현재 | 해당 없음 |
로고 | 해당 없음 |
헬멧 | 해당 없음 |
창단 | 1982년 |
해체 | 1984년 |
연고지 | 폰티액 실버돔, 미시간주 폰티액 |
유니폼 | 해당 없음 |
상징색 | 로열 플럼, 샴페인 실버, 라이트 블루, 하양 |
감독 | 1983년–1984년 짐 스탠리 (24–15) |
구단주 | 1983년–1984년 A. 알프레드 타웁만 |
회장 | 해당 없음 |
사장 | 해당 없음 |
단장 | 해당 없음 |
마스코트 | 해당 없음 |
별칭 | 해당 없음 |
리그 정보 | |
리그 | 미국 축구 리그 (1983년–1985년) |
컨퍼런스 | 서부 컨퍼런스 (1984년) |
디비전 | 센트럴 디비전 (1983년–1984년) |
팀 역사 | 미시간 팬서스 (1983년–1984년) 오클랜드 인베이더스와 합병 (1985년) |
챔피언십 | |
리그 챔피언십 횟수 | 1 |
컨퍼런스 챔피언십 횟수 | 0 |
디비전 챔피언십 횟수 | 1 |
리그 챔피언십 | 1983년 |
컨퍼런스 챔피언십 | 해당 없음 |
디비전 챔피언십 | 1983년 |
플레이오프 진출 횟수 | 1983년, 1984년 |
총 플레이오프 진출 횟수 | 2 |
경기장 정보 | |
홈 경기장 | 폰티액 실버돔 (1983년–1984년) |
2. 역사
미시간 팬서스는 미국 풋볼 리그(USFL)에서 1983년과 1984년 두 시즌 동안 활동한 미식축구 팀이다.
1983년, 쿼터백 Bobby Hebert|바비 에르베르영어와 와이드 리시버 앤서니 카터를 중심으로 USFL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84 시즌에는 앤서니 카터가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에게 3차 연장전 끝에 패배하며(93분 33초) 프로 미식축구 역사상 가장 긴 경기로 기록되었다.[1]
1984 시즌 후, USFL이 가을 시즌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자, 팬서스는 디트로이트 라이언스와의 경쟁 및 미시간 지역 경기장 확보 문제, 팬층 부족 등의 이유로 오클랜드 인베이더스와 합병했다.[2][3] 당시 팬서스 구단주 A. 알프레드 타우브먼은 라이언스 구단주 윌리엄 클레이 포드와 오랜 친구 사이로, 경쟁을 원치 않았다.
몇몇 팬서스 선수들은 인베이더스 소속으로 1985년 USFL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했으나, 볼티모어 스타스에게 패했다. 이후 USFL은 NFL과의 소송에서 패소하며 운영을 중단했고, 팬서스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1. 창단 배경 및 초기 (1982~1983)
미시간 팬서스는 1982년 5월 11일, 미국 풋볼 리그(USFL)의 창립 멤버로 선정되었다. 당시 소유주 그룹의 수장은 미국의 대표적인 부동산 개발업자 중 한 명인 A. 알프레드 타우브먼이었으며, 피터 B. 스피박 판사, 맥스 M. 피셔 등이 그룹에 포함되었다.[1]1982년 8월 26일, 팬서스는 캐나다 풋볼 리그(CFL)의 서스캐처원 러프라이더스 단장인 짐 스파비탈을 단장으로 임명했다.[2] 1982년 11월 18일, 미시간은 조지 퍼레이스가 미시간 주립 스파르탄스 풋볼의 코치를 맡기로 결정한 후 짐 스탠리를 헤드 코치로 고용했다.[3] 스탠리는 SMU 머스탱스 풋볼, UTEP 광부 풋볼, 오클라호마 주립 카우보이스 풋볼, 해군 미드십맨 풋볼을 거쳐, CFL의 위니펙 블루 보머스와 NFL의 뉴욕 자이언츠, 애틀랜타 팰컨스에서 주로 어시스턴트 코치를 역임하며 풍부한 코칭 경험을 쌓았다.[3] 스탠리는 팀의 유일한 헤드 코치였다. 코칭 스태프는 래리 코이어, 피트 로드리게스, 딕 로치(수비 코치), 조지 딕슨, 밥 레이히, 켄트 스테판슨으로 구성되었다.[3]
팬서스의 홈구장은 폰티악 실버돔이었다.[4] 1980년대에는 대부분의 NFL 팀이 홈구장 일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지 못했는데, 이는 원래 USFL 이후에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4] 따라서 디트로이트 라이언스는 팬서스를 막을 수 없었다(공개적으로 라이언스는 USFL에 대한 논의를 피했다).[4] 갓스톡의 배후 인물인 C. 브루스 마틴은 미시간 팬서스의 치어리더로 활동하며 프로 풋볼 팀 최초의 남성 치어리더가 되었다.
1983년 1월 4일, USFL의 첫 번째 대학 드래프트가 열렸다. 팬서스는 위스콘신 SS 데이비드 그린우드를 1라운드(전체 10순위)로 지명했다.
USFL 지역 드래프트를 통해 미시간 WR 앤서니 카터를 영입했다. 이는 USFL 팀이 일련의 지역 대학 졸업생 최대 25명을 보호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팬서스는 미시간 대학교, 미시간 주립 대학교, 이스트 미시간 대학교, 센트럴 미시간 대학교, 웨스턴 미시간 대학교에 대한 지역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팬서스는 이 드래프트를 통해 노보 보이비치와 미시간의 알리 하지-셰이크 두 명의 플레이스 키커를 선택했다. 셰이크는 팬서스를 거절하고 NFL의 뉴욕 자이언츠와 계약했다.
1983년, 미시간은 미시간 WR 앤서니 카터, 털사 RB 켄 레이시, 위스콘신 SS 데이비드 그린우드, 노스웨스턴 주립 대학교(루이지애나) QB 바비 헤버트 등, 최고의 젊은 NCAA 유망주를 영입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또한, NFL 경험이 있는 몇몇 핵심 선수들을 보유했다. 태클 레이 피니와 타이론 맥그리프는 슈퍼볼 우승팀인 피츠버그 스틸러스에서 뛰었다. 라인배커 존 코커는 휴스턴 오일러스에서 3시즌을 뛰었다. 팬서스는 러닝백 클레오 밀러, 수비수 올리버 데이비스, 쿼터백 마크 밀러 등, 전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선발 선수 3명을 영입했다. NFL의 캔자스시티 치프스에서 뛰었던 전 올-프로 펀터 밥 그럽도 영입했다. 그러나 그럽은 캔자스시티에서 한 시즌만 활약했고, 몇 주간의 일관성 없는 경기 후 방출되었으며, 안전요원 데이비드 그린우드가 팀의 펀터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미래의 버팔로 빌스 라인배커이자 아동 도서 작가인 레이 벤틀리도 미시간 팬서스 선수였다.
2. 2. 1983 시즌: USFL 챔피언십 우승
미시간 팬서스는 1983년 3월 7일 앨라배마주 버밍햄의 리전 필드에서 버밍햄 스탤리온스를 9-7로 꺾고 시즌을 시작했다. 이 경기는 ESPN에서 방송된 최초의 프로 미식축구 경기였다.[1] 세르비아 출신 키커 노보 보요비치가 경기 종료 직전 48야드 지점에서 결승 필드 골을 성공시켰다.[1]이후 팬서스는 4연패를 당하며 부진했지만, 피츠버그 스틸러스와 뉴욕 자이언츠 출신 선수들을 영입하며 공격 라인을 보강했다.[1] 이 중 톰 돈브룩과 타이론 맥그리프는 1983년 USFL 올리그 팀에 선정되었다.[1]
5월 23일, 버밍햄 스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연장전 끝에 패배했지만,[1] 이후 스티브 스퍼리어가 이끄는 탬파베이 밴디츠를 42-7로 대파하는 등 13경기 중 11경기를 승리하며 12승 6패로 정규 시즌을 마쳤다.[1] 시카고 블리츠와 동률을 이루었으나, 정규 시즌 맞대결에서 승리하여 센트럴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1]
플레이오프에서 팬서스는 60,237명의 관중 앞에서 서부 디비전 챔피언 오클랜드 인베이더스를 37-21로 꺾고 USFL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했다.[1]
1983년 7월 17일, 팬서스는 필라델피아 스타스를 24-22로 꺾고 USFL 첫 번째 챔피언십을 차지했다.[1] 쿼터백 바비 에르베르는 319야드 패스와 3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경기 MVP로 선정되었다.[1]
팬서스는 시즌 후반 13승 2패(플레이오프 포함)를 기록하며 NFL 수준의 선수들을 영입한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1] 그러나, 시즌 동안 600만달러를 지출하며 데이비드 딕슨이 권장한 금액의 3배를 사용했다.[1]
다음은 1983 시즌 미시간 팬서스의 경기 결과이다.
주차 | 요일 | 날짜 | 상대 | 결과 | 기록 | TV | 경기장 | 관중 |
---|---|---|---|---|---|---|---|---|
정규 시즌 | ||||||||
1 | 월요일 | 3월 7일 | 버밍햄 스탤리온스 원정 | 승 9–7 | 1–0 | ESPN | 리전 필드 | 30,305 |
2 | 토요일 | 3월 12일 | 탬파베이 밴디츠 원정 | 패 7–19 | 1–1 | ABC | 탬파 스타디움 | 38,789 |
3 | 토요일 | 3월 19일 | 오클랜드 인베이더스 | 패 27–33 | 1–2 | ESPN | 폰티액 실버돔 | 28,952 |
4 | 일요일 | 3월 27일 | 워싱턴 페더럴스 원정 | 패 16–22 | 1–3 | ABC | RFK 스타디움 | 11,404 |
5 | 월요일 | 4월 4일 | 덴버 골드 | 패 21–29 | 1–4 | ESPN | 폰티액 실버돔 | 11,279 |
6 | 일요일 | 4월 10일 | 뉴저지 제너럴스 원정 | 승 21–6 | 2–4 | ABC | 자이언츠 스타디움 | 17,648 |
7 | 일요일 | 4월 17일 | 시카고 블리츠 | 승 17–12 | 3–4 | ABC | 폰티액 실버돔 | 11,634 |
8 | 토요일 | 4월 23일 |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 승 34–24 | 4–4 | ESPN | 폰티액 실버돔 | 13,184 |
9 | 일요일 | 5월 1일 | 보스턴 브레이커스 원정 | 승 28–24 | 5–4 | ABC | 니커슨 필드 | 10,971 |
10 | 토요일 | 5월 7일 | 애리조나 랭글러스 원정 | 승 21–10 | 6–4 | 선 데빌 스타디움 | 20,423 | |
11 | 월요일 | 5월 16일 | 뉴저지 제너럴스 | 승 31–24 | 7–4 | ESPN | 폰티액 실버돔 | 32,862 |
12 | 월요일 | 5월 23일 | 버밍햄 스탤리온스 | 패 20–23 | 7–5 | ESPN | 폰티액 실버돔 | 20,042 |
13 | 월요일 | 5월 30일 | 탬파베이 밴디츠 | 승 43–7 | 8–5 | ESPN | 폰티액 실버돔 | 23,976 |
14 | 일요일 | 6월 5일 | 필라델피아 스타스 원정 | 패 20–29 | 8–6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19,727 |
15 | 일요일 | 6월 12일 |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원정 | 승 42–17 | 9–6 |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 16,023 | |
16 | 토요일 | 6월 18일 | 워싱턴 페더럴스 | 승 27–25 | 10–6 | 폰티액 실버돔 | 26,418 | |
17 | 일요일 | 6월 26일 | 시카고 블리츠 원정 | 승 34–19 | 11–6 | ABC | 솔저 필드 | 25,041 |
18 | 일요일 | 7월 3일 | 애리조나 랭글러스 | 승 33–7 | 12–6 | ABC | 폰티액 실버돔 | 31,905 |
플레이오프 | ||||||||
디비전 플레이오프 | 일요일 | 7월 10일 | 오클랜드 인베이더스 | 승 37–21 | — | ABC | 폰티액 실버돔 | 60,237 |
USFL 챔피언십 | 일요일 | 7월 17일 | vs. 필라델피아 스타스 | 승 24–22 | — | ABC | 마일 하이 스타디움 | 50,906 |
2. 3. 1984 시즌: 몰락과 합병
팬서스는 1984년에 3개의 확장팀, 그리고 애리조나 랭글러스와 거의 모든 선수를 교환한 블리츠 팀과 함께 중부 지구에 속하게 되면서 또 한 번의 중부 지구 우승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처음 6경기를 모두 이겼지만, 여섯 번째 경기인 샌안토니오 건슬링어스와의 경기에서 스타 리시버 앤서니 카터가 팔을 다쳐 시즌 아웃되었다. 주요 공격 무기가 없어진 팬서스는 곧바로 부진에 빠져 다음 10경기 중 8경기를 졌고, 8승 8패의 기록으로 떨어졌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위해 오클라호마와 시카고와의 마지막 두 경기에서 이겨야 했던 미시간은 그렇게 했고 10승 8패로 시즌을 마쳤다.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와의 1라운드 플레이오프 경기는 역사상 가장 긴 프로 미식축구 경기로 기록되었다. 팬서스는 4쿼터에 21-13으로 앞서 나갔지만, 스티브 영이 터치다운 패스를 던지고 직접 2점 컨버전을 성공시켜 경기가 종료 52초를 남기고 21-21 동점이 되었다. 팬서스는 1, 2차 연장전에서 승리할 기회를 잡았지만, 키커 노보 보요비치가 두 번 모두 필드 골을 놓쳤다. 마침내 3차 연장전에서 멜 그레이가 24야드를 달려 LA에 27-21 승리를 안겨주었고, 93분 33초의 경기 시간 끝에 프로 미식축구 역사상 가장 긴 하루가 마무리되었다.[1]
이 경기는 팬서스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1984 시즌이 끝나자 USFL 구단주들은 뉴저지 제너럴스 구단주 도널드 트럼프와 시카고 구단주 에디 아이언혼의 영향으로 1986년에 가을 일정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팬서스는 충성스러운 팬들을 확보했지만, 토브먼은 원래의 봄 미식축구 콘셉트를 강력하게 믿었다. 또한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와 경쟁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라이온스 구단주 윌리엄 클레이 포드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토브먼은 라이온스와 경쟁할 의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과 정면으로 맞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적 자원 담당 이사 마이크 켈러에 따르면, 디트로이트에서 합리적인 운전 거리에 있는 유일한 대학들은 가을에 경기를 하는 팬서스 팀에 문을 열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이는 홈 경기를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토브먼은 팬서스가 가을에 실버돔을 임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2] 그 이전에도, 시장 상황에 대한 연구에서 USFL 기준으로는 괜찮은 팬층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광고료와 패배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한 팬층 때문에 팬서스가 "미시간 시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3]
토브먼은 이 상황이 기정사실이라고 느꼈다. 그 결과, 오클랜드 인베이더스와의 합병이 실패한 후, 토브먼은 조용히 인베이더스 구단주 태드 토브에게 자신의 팬서스와의 합병 가능성에 대해 접근했다. 리그 구단주들이 가을로의 이동에 대해 투표하기 위해 만났을 때, 토브먼은 아들 로버트를 커미셔너에게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 만약 팀들이 가을로의 이동에 투표한다면, 팬서스는 인베이더스와 합병하고 인베이더스가 살아남는 팀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가을에 경기를 치르는 것에 대한 투표가 통과되자, 팬서스와 인베이더스는 합병을 발표했고, 토브먼은 인베이더스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2. 4. 해체 이후
몇몇 팬서스 선수들의 지원을 받아 인베이더스는 1984년 USFL 챔피언십 게임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1983년 챔피언십 게임의 일종의 재경기에서 현재의 볼티모어 스타스에게 패했다.합병된 팀이 치른 마지막 경기였다. USFL이 생존을 걸었던 독점 금지 소송에서 NFL을 상대로 단 3USD만 배상받으면서 리그는 운영을 중단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디트로이트 시장에 대한 리그의 포기는 불리한 배심원 평결의 주요 요인이었다. 재판 전에도 테우브먼이 완전히 철수한 후 인베이더스는 운영을 중단했다.
2015년에 시작할 예정이었던 봄철 풋볼 리그인 A-11 풋볼 리그(A11FL)는 미시간 팬서스를 창립 프랜차이즈 중 하나로 부활시킬 의사를 발표했다.
2021년 11월 22일, 새로운 버전의 USFL은 미시간 팬서스가 2022년 봄 리그 재개 시 8개 팀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4]
3. 경기장
미시간 팬서스는 미시간주 폰티액에 있는 폰티액 실버돔을 1983년부터 1984년까지 홈경기장으로 사용했으며, 80,311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1]
3. 1. 역대 홈경기장
4. 주요 선수
미시간 팬서스는 USFL에서 활동하는 동안 여러 뛰어난 선수들을 배출했다. 다음은 주요 선수 목록이다.
포지션 | 선수 | 비고 |
---|---|---|
WR | 앤서니 카터 | 1983년 USFL 첫 대학 드래프트에서 미시간 지역 선수로 지명. 1984년 부상으로 시즌 아웃. |
RB | 켄 레이시 | 1983년 1,182 러싱 야드 기록. |
SS | 데이비드 그린우드 | 1983년 USFL 첫 대학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 |
QB | 바비 헤버트 | 1983년 USFL 첫 대학 드래프트 지명. 1984년 3,368 패싱 야드 기록. 1983년 USFL 챔피언십 MVP. |
WR | 데릭 할로웨이 | 1984년 1,220 리시빙 야드 기록. |
OT | 레이 피니 | 피츠버그 스틸러스 출신, 슈퍼볼 우승 경험. |
OG | 타이론 맥그리프 | 피츠버그 스틸러스 출신, 슈퍼볼 우승 경험, 1983년 USFL 올리그 팀 선정. |
OG | 톰 돈브룩 | 뉴욕 자이언츠 출신, 1983년 USFL 올리그 팀 선정. |
LB | 존 코커 | 휴스턴 오일러스에서 3시즌. |
RB | 클레오 밀러 | 전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선수. |
DE | 올리버 데이비스 | 전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선수. |
QB | 마크 밀러 | 전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선수. |
P | 밥 그럽 | 전 캔자스시티 치프스 올프로 펀터. |
LB | 레이 벤틀리 | 미래의 버팔로 빌스 라인배커, 아동 도서 작가. |
K | 노보 보이비치 | 세르비아 출신, 센트럴 미시간 대학교 출신. |
K | 알리 하지-셰이크 | 미시간 대학교 출신, 팬서스 거절 후 NFL 뉴욕 자이언츠와 계약. |
5. 기타
미국 풋볼 리그(USFL) 미시간 팬서스의 치어리더였던 C. 브루스 마틴은 프로 풋볼 팀 최초의 남성 치어리더였다.[1] 레이 벤틀리는 미시간 팬서스에서 활동한 선수였으며, 훗날 버팔로 빌스 라인배커이자 아동 도서 작가가 되었다.[2]
6. 역대 시즌
시즌 | 승 | 패 | 무 | 순위 | 플레이오프 결과 |
---|---|---|---|---|---|
1983 | 12 | 6 | 0 | 센트럴 1위 | 디비전 우승 (오클랜드) USFL 챔피언십 우승 (필라델피아) |
1984 | 10 | 8 | 0 | 와일드카드 센트럴 2위 | 쿼터파이널 패배 (로스앤젤레스) |
합계 | 24 | 15 | 0 | (플레이오프 포함) |
참조
[1]
웹사이트
Remember the USFL - USFL's Greatest Game
http://www.remembert[...]
2012-05-19
[2]
서적
The United States Football League, 1982–1986
McFarland & Company
2017
[3]
서적
Football For A Buck: The Crazy Rise and Crazier Demise of the USFL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8
[4]
웹사이트
New USFL to revive eight original team brands
https://sportsbusine[...]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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