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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첸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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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우첸 강화는 1002년부터 1018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와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과 외교적 협상을 의미한다. 1002년 메르제부르크 회의에서 시작된 갈등은 루사티아와 마이센 변경백령의 영유권을 두고 벌어졌으며, 1005년 포즈난 평화 조약으로 일시적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1007년부터 1013년까지 전쟁이 재개되었고, 1013년 메르제부르크 평화 조약으로 루사티아와 상부 루사티아를 볼레스와프 1세에게 봉토로 인정하는 등 관계가 개선되는 듯했으나, 볼레스와프 1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지원하지 않고 반란을 획책하면서 다시 악화되었다. 1018년 바우첸 조약으로 루사티아와 상부 루사티아를 볼레스와프 1세가 유지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되었으며, 이 조약은 오다와 볼레스와프 1세의 결혼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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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첸 강화
조약 정보
이름바우첸 강화
유형강화 조약
서명일1018년 1월 30일
서명 장소폴란드 공국 부디신 (현재 독일 바우첸)
교전 당사자
관련 정보
독일어프리덴 폰 바우첸 (Frieden von Bautzen)
폴란드어포쿠이 브 부지시니에 (Pokój w Budziszynie)
고지 소르브어부디스키 몌르 (Budyski měr)
기념물부디신 - 부디스키 몌르 기념비
바우첸 기념비

2. 서막 (1002년 ~ 1005년)

1002년 오토 3세 황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권력 승계의 혼란을 겪었다. 바이에른 공작이었던 하인리히 2세[1]는 유력한 황제 후보였으나, 마이센 변경백 에크하르트 1세와 경쟁해야 했다.[2]

1002년 4월, 에크하르트 1세가 푄데에서 암살당했다.[3] 그의 지지자였던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는 마이센 변경백령과 루사티아 변경백령을 점령했다.[4] 이 지역은 대부분 슬라브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볼레스와프 1세는 바우첸마이센을 장악하고 독일군을 몰아냈다.[6]

하인리히 2세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002년 6월 독일 왕으로 즉위했다.[6][7] 1002년 7월 메르제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4][8]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에게 루사티아 변경백령과 마이센 변경백령 동부(상부 루사티아)를 봉토로 주는 대신,[4][8] 마이센 변경백령의 나머지를 반환받고 충성을 맹세받았다.[4][8] 그러나 볼레스와프 1세는 메르제부르크를 떠나던 중 공격을 받았고, 하인리히 2세는 이를 방관했다.[9]

1003년, 볼레스와프 1세는 보헤미아 공국을 정복하고 볼레스와프 3세를 투옥하며 하인리히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4][10] 그는 하인리히 2세에 반대하는 독일 귀족들과 동맹을 맺었으나,[4] 1003년 하인리히 2세는 루티치와 동맹을 맺고 반격에 나섰다.[4][8][10]

1004년, 하인리히 2세는 바우첸을 점령하고 작센 공국에 편입시켰으며,[12] 볼레스와프 1세를 보헤미아에서 몰아냈다.[4][10] 1005년에는 폴란드를 공격하여 오데르 강을 건너 대폴란드로 진격했다.[12] 볼레스와프 1세는 게릴라 전술로 맞섰다.[15]

1005년 포즈난 근처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10][12] 폴란드는 루사티아와 마이센을 포기했지만, 슬로바키아와 모라비아는 유지했다.[15]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12]

2. 1. 메르제부르크 회의 (1002년)

하인리히 2세[1]바이에른 공작 시절(하인리히 4세) 황제 오토 3세의 뒤를 이으려 할 때, 마이센 변경백 에크하르트 1세와 계승을 두고 경쟁했다.[2] 1002년 4월 30일 에크하르트 1세가 푄데에서 암살되자,[3] 그의 지지자였던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는[2] 마이센 변경백령과 루사티아 변경백령(니더루사티아)을 점령했다.[4] 이 지역은 독일인들이 최근에 정복했지만 여전히 대부분 슬라브족이 거주했다.[4] 아마도 에크하르트 가문의 승인을 받았을 것이다.[5] 볼레스와프 1세는 바우첸과 마이센을 장악했고, 주민들은 스스로 독일군에게 도시를 떠나도록 강요했으며, 다른 독일 기사들은 자발적으로 이 지역에서 그의 통치를 인정했다.[6] 한편, 하인리히 4세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통치를 굳건히 하여, 하인리히 2세로서 1002년 6월에 독일 왕으로 즉위했다.[6][7]

1002년 7월 25일[8] 메르제부르크에서 열린 ''호프타크''(제국 회의)에서[4][8] 분쟁은 다음과 같이 해결되었다.

  • 하인리히 2세는 루사티아 변경백령과 마이센 변경백령 동부(''밀스코'' 또는 ''밀체네어랜드'', 상부 루사티아)를 볼레스와프 1세에게 봉토로 주었다.[4][8]
  • 볼레스와프 1세는 축소된 마이센 변경백령을 반환해야 했다.[4]
  • 볼레스와프 1세는 작센 귀족들과 함께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8]


볼레스와프 1세가 메르제부르크를 떠날 때 매복 공격을 받았지만, 슈바인푸르트의 하인리히와 작센 공작 베른하르트 1세의 도움으로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9] 하인리히 2세는 그를 보호하지도, 공격자들을 처벌하지도 않았다.[9]

2. 2. 포즈난 평화 (1005년)

1003년, 볼레스와프 1세는 보헤미아 공국을 정복하고 프르제미슬 왕조의 볼레스와프 3세를 투옥했다.[4][10] 그는 하인리히 2세에게 보헤미아 공국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고,[4] 하인리히 2세는 폴란드의 보헤미아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8][11]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에 반대하는 독일 귀족들과 동맹을 맺었는데,[4] 여기에는 슈바인푸르트의 하인리히, 그의 사촌 에른스트, 하인리히 2세의 형제인 브룬(브루노)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하인리히 2세에 대한 반란에 실패하고 볼레스와프의 궁정으로 도망쳤다.[4] 볼레스와프 1세는 작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았지만, 하인리히 2세는 작센 성직자들에게 의존했다.[9]

1003년,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에 대항하여 이교도인 루티치와 동맹을 맺었고,[4][8][10] 1004년에는 원정을 시작했다.[11]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를 보헤미아에서 몰아내고 야로미르를 보헤미아 공작에 임명했으며,[4][10] 바우첸을 포위, 점령하여 작센 공국에 편입시켰다.[12] 몇 달 후, 하인리히 2세는 벨레티와 체코 동맹군과 함께 다시 원정을 감행했다.[12] 그는 크로스노 근처 오데르 강을 건너 대폴란드로 진격했다. 볼레스와프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게릴라 전술로 황제의 군대를 괴롭혔다.[15]

1005년, 마그데부르크의 타기노 대주교가 포즈난 근처에서 평화를 중재하여 전투가 종결되었고,[10][12] 폴란드는 루사티아와 마이센을 포기했지만, 슬로바키아와 모라비아는 유지했다.[15] 그러나 이 평화는 일시적이었다.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에게 평범한 봉신 이상의 지위를 부여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볼레스와프 1세 역시 그러한 지위를 원치 않았으며, 하인리히 2세의 권력을 하느님에게 직접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다.[12]

3. 전쟁의 재개와 메르제부르크 평화 (1007년 ~ 1013년)



포즈난 평화 조약에도 불구하고, 볼레스와프 1세와 하인리히 2세 사이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1007년 볼레스와프 1세는 바우첸을 포함한 루사티아 지역을 다시 장악했고,[10] 1010년과 1012년에 하인리히 2세가 주도한 군사 원정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0][12] 하인리히 2세는 로마에서의 황제 대관식을 앞두고 있었기에, 1013년에는 작센 귀족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원정을 시작하도록 했다.[12]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1013년 메르제부르크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10][11] 이 조약으로 하인리히 2세는 루사티아 변경주와 상부 루사티아를 볼레스와프 1세에게 봉토로 다시 주었고,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11] 또한, 서로의 원정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11][13] 조약은 미에슈코 2세와 리체자의 결혼으로 확정되었다.[13]

하지만, 이후 볼레스와프 1세는 약속을 어기고 하인리히 2세를 지원하지 않았으며, 루사티아 지역이 자신의 봉토임을 부정했다.[14][15] 오히려 대립교황 그레고리오 6세를 지지하며 하인리히 2세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14] 이에 하인리히 2세는 1013년 가을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1014년 2월 교황 베네딕토 8세로부터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받았다.[14] 한편, 올드르지흐에게 사로잡혔던 미에슈코는 하인리히 2세에 의해 풀려났다.[14]

3. 1. 메르제부르크 평화 조약 (1013년)



1007년에서 1013년 사이에 볼레스와프 1세와 하인리히 2세 사이의 전쟁이 계속되었다.[11] 1007년, 볼레스와프 1세는 바우첸 요새와 함께 루사티아를 다시 장악했다.[10] 1010년에 하인리히 2세가 이끈 원정은 벨게른에서 시작되었으나, 하인리히 2세가 야리나 성에서 병에 걸려 일부 주교들과 함께 돌아갔고, 남은 군대는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키는 데 그쳤다.[12] 1012년의 작센 원정도 성공하지 못했다.[10] 하인리히 2세는 1013년 전에 로마에서 대관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센 귀족들을 동원하여 원정을 시작했다.[12]

1013년, 볼레스와프 1세와 하인리히 2세는 메르제부르크에서 평화 조약을 맺었다.[10][11]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하인리히 2세는 루사티아 변경주와 상부 루사티아를 볼레스와프 1세에게 다시 봉토로 주었다.[11]
  •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에게 다시 충성을 맹세했다.[11]
  •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의 로마 원정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11]
  •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의 키예프 원정을 기사 500명과 함께 지원하기로 약속했다.[13]


이 조약은 오토 3세의 조카인 리체자와 볼레스와프 1세의 아들인 미에슈코 2세의 결혼으로 확정되었다.[13] 이 의식 동안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를 위해 검을 들었다.[12]

그러나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의 이탈리아 원정을 돕지 않았고,[14] 루사티아와 상부 루사티아가 자신의 봉토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15] 대신, 그는 대립교황 그레고리오 6세를 지지하고 하인리히 2세를 상대로 이탈리아에서 음모를 꾸몄는데, 하인리히 2세는 Pöhlde에서 그레고리오를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다.[14] 하인리히 2세는 1013년 가을에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하여 크레센티아누스파의 동맹국들을 격파하고 교황 베네딕토 8세에게 1014년 2월 14일 로마에서 그를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하게 했다.[14] 한편, 올드르지흐는 볼레스와프 1세의 아들 미에슈코를 사로잡아 하인리히 2세에게 넘겼지만, 하인리히 2세는 그를 풀어주었다.[14]

4. 바우첸 평화 (1018년)

1018년 1월 30일, 바우첸(현재의 Bautzen|바우첸de)에서 하인리히 2세와 볼레스와프 1세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14] 이 조약으로 볼레스와프 1세는 루사티아 변경주와 상부 루사티아(''밀스코/밀제넬란트'')를 계속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독일의 주요 연대기 작가인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는 볼레스와프 1세가 이 땅을 유지한 조건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독일 역사가 슈나이데뮐러는 볼레스와프 1세가 이 땅을 제국 봉토로 유지했다고 보았고,[8][14] 폴란드 역사가 파베우 야시에니차는 제국에 대한 어떠한 의무도 없이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케임브리지 중세사영어는 이 땅이 볼레스와프에게 "단지 명목상의 종주권 조건"으로 유지되었다고 언급한다.[18]

티트마르는 폴란드인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이지 않았으며,[19] 평화에 대해 "non ut decuit sed sicut fieri potuit"(마땅히 그래야 할 대로가 아니라, 상황에서 가능했던 대로)라고 평가했다.[20][21]

양측은 인질을 교환했고,[8] 하인리히 2세는 협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후 볼레스와프 1세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지 않았다.[8] 이 평화 조약은 마이센의 오다와 볼레스와프 1세의 결혼으로 더욱 굳건해졌다.[3] 오다는 에카르트 1세의 딸로, 볼레스와프 1세에게는 네 번째 결혼이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이전 결혼에서 낳은 딸 레겔린드를 이미 오다의 오빠인 마이센의 헤르만 1세와 결혼시킨 상태였다.[3]

하인리히 2세는 같은 해에 볼레스와프 1세의 키예프 원정을 300명의 기사로 지원해야 했다.[17]

4. 1. 군사 작전과 정치적 배경 (1015년 ~ 1017년)

1015년 7월, 하인리히 2세는 루티치 동맹과 함께 볼레스와프 1세를 상대로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11][14] 마그데부르크에서 시작된 이 작전에서 하인리히 2세의 군대는 루사티아를 거쳐 크로스노로 진군했다. 이곳에서 작센의 베른하르트 2세와 보헤미아의 올드리히가 지휘하는 두 군대가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볼레스와프의 책략으로 실패했다.[12] 전투 중 변방 백작 게로와 200명의 독일 기사들이 폴란드 궁수에게 살해되었고, 볼레스와프는 마이센 주교 에이도에게 시신 수습 및 매장을 허락했다.[16] 이로 인해 하인리히 2세는 철수했고,[12] 볼레스와프 1세와의 협상도 실패했다.[12]

1017년, 하인리히 2세는 라이츠카우에서 그워구프까지 진군했으나, 볼레스와프 1세가 기다리고 있었고,[12] 도시가 견고하여 포위 공격을 포기했다.[16] 대신 님차를 포위했지만, 폴란드 증원군이 두 번이나 도시에 진입하여 포위는 실패했다. 독일 연대기 작가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는 폴란드 방어자들의 용기와 기술을 칭찬했다.[17] 도시 주민들은 황제의 이교도 루티치 동맹을 향해 성벽에 십자가를 세웠다.[17] 질병으로 인해 하인리히는 포위를 풀고 철수했으며, 브로츠와프에 주둔한 볼레스와프의 주력 부대를 피해 보헤미아로 갔다.[12][17]

1017년 님차의 폴란드 방어 성공 기념비


이 기간 동안 하인리히 2세는 작센 귀족 빌룽 가문의 반대에 직면했는데, 이들은 볼레스와프 1세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8] 1017년,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를 "공공의 적"(''hostis publicus'')으로 규정하고 접촉을 금지했다.[8] 1017년 말, 폴란드 군대는 물데 강과 엘베 강 사이의 독일 영토를 침략했다.[17]

4. 2. 바우첸 조약 (1018년)

1018년 1월 30일, 바우첸(현재의 Bautzen|바우첸de)에서 평화 협정이 맺어졌다.[14] 볼레스와프 1세는 루사티아 변경주와 상부 루사티아(''밀스코/밀제넬란트'')를 유지했다. 당시 독일의 주요 연대기 작가인 티트마르는 볼레스와프가 이 땅을 유지한 조건에 대한 정확한 세부 사항을 제공하지 않았다. 독일 역사가 슈나이데뮐러에 따르면, 그는 이를 제국 봉토로 유지했다.[8][14] 반면 폴란드 역사가 파베우 야시에니차는 이 땅이 제국에 대한 어떠한 의무 없이 유지되었다고 주장했다.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케임브리지 중세사영어는 이 땅이 볼레스와프에게 "단지 명목상의 종주권 조건"으로 유지되었다고 언급한다.[18]

당대 독일 연대기 작가 티트마르는 일반적으로 폴란드인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으며,[19] 평화에 대해 "non ut decuit sed sicut fieri potuit"(마땅히 그래야 할 대로가 아니라, 상황에서 가능했던 대로)라고 논평했다.[20][21]

양측은 인질을 교환했다.[8] 하인리히 2세는 협정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후 볼레스와프 1세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지 않았다.[8] 이 평화 조약은 에카르트 1세의 딸인 마이센의 오다와 볼레스와프 1세의 결혼으로 확정되었다.[3] 이는 볼레스와프 1세의 네 번째 결혼이었다. 그의 이전 결혼에서 낳은 딸 레겔린드는 이미 오다의 오빠인 마이센의 헤르만 1세와 결혼한 상태였다.[3]

하인리히 2세는 같은 해에 볼레스와프 1세의 키예프 원정을 300명의 기사로 지원해야 할 의무를 졌다.[17]

참조

[1] 문서 11th-century manuscript of St. Gregory's Moralia in Job Bamberg State Library
[2] 서적 1993
[3] 서적 2006
[4] 서적 2002
[5] 서적
[6] 서적 2007
[7] 서적 2002
[8] 서적 2003
[9] 서적 2002
[10] 서적 2005
[11] 서적 2006
[12] 서적 2002
[13] 서적 2001
[14] 서적 2002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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