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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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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흐하우스는 독일 아이제나흐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생애와 유산을 기리고 있다. 1907년 설립된 이 박물관은 바흐 가문의 역사와 바흐의 아이제나흐 시절을 조명하며, 세계 최초의 바흐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바흐의 유품, 악기, 자필 악보 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역사적 건물과 현대적인 전시 공간을 갖추고 있다. 연간 6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 박물관 중 하나이며, 신 바흐 협회가 소유 및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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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하우스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이제나흐 바흐 하우스, 2020년
아이제나흐 바흐 하우스, 2020년
위치아이제나흐, 튀링겐주, 독일
유형음악 박물관, 전기 박물관, 기념관
개관1907년 5월 27일
방문객 수60,057명 (2016년)
관장외르크 한젠
소유주신 바흐 협회 e.V., 라이프치히
웹사이트바흐 하우스 공식 웹사이트
명칭
독일어 명칭Bachhaus Eisenach

2. 역사

바흐 가문은 16세기 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튀링겐 전역에서 음악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원들을 둔 널리 퍼진 음악가 가문이었다. 이미 1665년에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는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바흐의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는 1671년 아이제나흐 시의회에서 ''Haußmann''(시립 음악 감독) 직책을 맡았다. 가족은 처음에는 리터가세 11번지에 있는 반목조 주택(오늘날 박물관 정원 바로 남쪽)에 방을 임대했으며, 당시 시의 숲 관리인 발타자르 슈나이더가 소유하고 있었다. 시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부동산 소유주뿐이었기 때문에 1674년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는 ''플라이쉬가스'' (아마도 루터슈트라세 35번지)에 집을 샀으며, 그 위치는 오늘날 박물관에서 북쪽으로 100미터 떨어져 있었다.[1]

Lutherstraße 35번지(가운데 진한 회색) 건물 거리 모습
''플라이쉬가스''에 있는 원래의 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두 번 교체되었다.[2] 바흐의 정확한 출생 위치를 오늘날 정확히 식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시민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목적으로 획득한 장소로 이사하지 않고 대신 임대했기 때문이다.[3]
Rittergasse 11번지 건물 (앞: 바흐 하우스 정원)
리터가세에 있는 건물에 암브로시우스 바흐가 처음 방을 사용한 위치와 루터슈트라세의 부동산 소유권을 바탕으로, 바흐의 가족이 도시의 이 지역, 즉 적어도 현재 박물관의 위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4]

바흐 하우스 기념 명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685년 3월 21일[5]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이틀 뒤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인생의 처음 10년을 아이제나흐에서 보냈다. 가족의 음악적 전통은 그를 음악과 음악 직업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그에게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를 가르쳤다.[6]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바흐는 사촌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가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것은 나중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가 되었다.[7] 1692년부터 1695년까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아이제나흐의 라틴 학교에 다니며 학교의 ''chorus musicus''에 합류했으며, 그 구성원들을 위해 일주일에 4일 동안 음악 수업이 학교 시간표에 포함되었다.[8] 1694년 5월 1일, 바흐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바흐가 사망했고, 1695년 2월 20일에는 바흐의 아버지 암브로시우스도 사망했다. 1695년 7월, 요한 제바스티안과 그의 형 요한 야콥은 오르드루프에 있는 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아이제나흐를 떠났다.[9]

아이제나흐의 역사적인 바흐 하우스는 아이제나흐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건물 중 하나이다. 원래는 두 개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동쪽 부분은 1456년에, 서쪽 부분은 1458년에 건설되었다. 1611년경에 두 건물이 합쳐졌다.[10] 1층은 농업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의 악기 홀은 헛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이고, 계단 옆의 방들은 소와 말들을 위한 공간이었을 것이다.[11] 박물관에는 바흐 하우스 정원에서 발견된 1688년의 소 방울이 이러한 과거를 상기시켜 준다. 건물의 2층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유리 창틀과 '작곡 스튜디오'로 장식된 거실의 나무 판넬이 이 집의 이전 거주자들의 시민 신분을 증언하고 있다. 바흐가 태어날 당시 이 집은 라틴 학교 교장이었던 하인리히 뵈르스텔만(Heinrich Börstelmann) 소유였다. 1746년에는 바흐의 사촌이자 친구인 요한 베른하르트 바흐의 딸이자, 요한 에른스트 바흐의 누이인 카롤린 아말리 라우슈 폰 바흐(Caroline Amalie Rausch née Bach) 가족이 이 건물로 이사하여 1779년까지 살았다.[12]

19세기에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로베르트 슈만 등에 의해 촉발된 바흐 르네상스의 여파로, 바흐의 숭배자들은 작곡가의 출생지를 찾기 시작했다.[13] 바흐 전기 작가인 카를 헤르만 비터는 1857년 생존해 있던 요한 베른하르트 바흐의 후손들을 인터뷰하여 바흐가 프라우엔플란 21번지에 있는 집, 이후 "바흐하우스"라고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음을 확인했다.[13] 1868년, 지역 음악 협회는 정문 위에 기념 명판을 설치하여 이곳이 바흐의 출생지임을 공식적으로 알렸다.[14] 하지만 그 이후로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추가적인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터가 접했던 지역 구전의 오류는 바흐 가문 구성원들이 실제로 이 집에 살았던 적이 있지만, 바흐가 태어난 후 한참 뒤의 일이라는 사실에 기인할 수 있다.

1900년에 로베르트 슈만 등이 1850년 설립한 라이프치히의 바흐 협회(Bach-Gesellschaft)가 바흐의 모든 작품을 편집하는 작업을 완료하자, 회원들은 바흐 음악의 보급과 연주를 더욱 촉진하기 위해 이를 ''노이에 바흐게젤샤프트(Neue Bachgesellschaft)'' (새 바흐 협회)로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15] 세 가지 '영구적인' 프로젝트로 매년 발행되는 ''바흐-야부흐(Bach-Jahrbuch)'' (바흐 연감), 2년에 한 번 (오늘날: 매년) 개최되는 ''바흐페스테'' (바흐 축제), 바흐 박물관 설립이 승인되었다.[15] 협회 박물관의 부지로 토마스 학교(Thomasschule zu Leipzig)가 선택되었으나, 라이프치히 시 당국이 1902년에 건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하여 협회의 계획은 좌절되었다.[15] 바흐가 살았던 학교 방의 입구 문은 당시 음악 교사였던 베른하르트 프리드리히 리히터(Bernhard Friedrich Richter)에 의해 파괴로부터 구출되었고, 나중에 바흐 하우스에 헌정되었다.[16]

바흐의 출생지인 아이제나흐의 생가가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협회 회원들에게 전달되자, 노이에 바흐게젤샤프트는 1905년 5월 15일 이 건물을 매입하여 세계 최초의 바흐 박물관을 열기로 결정했다.[17] 이 프로젝트의 후원자로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요제프 요아힘, 구스타프 슈렉, 게오르크 슈만,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 C.F. 페터스가 있었다.[17] 바흐 하우스는 1907년 5월 27일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18] 토마스 교회 합창단(Thomanerchor)은 칸토르 구스타프 슈렉의 지휘를 받았고, 바이마르 호프카펠레는 게오르크 슈만의 지휘를 받으며 노래하고 연주했다.[18]

1907년 5월 27일 바흐 하우스 개관


1928년, 프리츠 롤버그가 도시의 세금 기록을 연구한 결과,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가 아이제나흐의 다른 건물에 대한 세금을 납부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바흐 하우스''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바흐 기념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19] 1972~1973년에 이 집이 완전히 복원되었을 때, 1868년의 기념판이 철거되어 보관되었다가 2007년에 복원되었다. 오늘날 이 역사적 오류는 롤버그가 발견한 세금 파일 중 하나가 전시된 박물관에서 설명된다.

1944년 11월 23일 공습과 1945년 4월 5일 밤 미군 부대의 포격으로 바흐 하우스의 지붕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0]
1945년 4월 6일 도시 포격 이후의 바흐 하우스
1945년 4월 29일, 미군 사령관 크누트 한스톤 중령은 박물관을 즉시 수리하라고 명령했다.[21] 1년 후인 1946년 6월 22일, 독일 주둔 소련 군정(Soviet Military Administration in Germany)은 아른슈타트와 아이제나흐에 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박물관의 재개관을 명령하고, 1923년부터 바흐 하우스 관장을 맡았던 콘라드 프라이세의 임명을 확인했다.[21]

1973년, 건물들은 완전히 복원되었고 동독(GDR)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전시회가 새롭게 디자인되었다.[23] 박물관은 바흐 하우스 서쪽에 있는 프라우엔플란 21a 건물도 포함했다.[24] 박물관 소유주가 여전히 노이에 바흐게젤샤프트(Neue Bachgesellschaft)였기 때문에, 바흐 하우스는 라이프치히의 바흐 아카이브(Bach-Archiv)와 달리 GDR의 국가 연합체인 ''국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연구 및 기념관 DDR''에 통합되지 않았다.[25] 당시 노이에 바흐게젤샤프트는 정치적으로 분단된 독일 양쪽(그리고 서유럽과 동유럽 전체, 그리고 미국에서도)에 3,000명이 넘는 회원을 둔 국제 협회였다. 방문객 수 증가와 1985년 바흐의 해로 인해 1980년 바흐 하우스 서쪽에 있는 프라우엔플란 23 건물로 박물관이 더 확장되었다.[26]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바흐 하우스 서쪽 건물을 새로운 박물관 건물로 교체하고, 역사적인 건물은 복원 공사를 거쳤으며, 전시 내용도 완전히 현대화되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튀링겐 자유주, 독일 연방 공화국 정부, 유럽 연합의 보조금으로 총 430만 유로가 지원되었다.[27] 신 바흐 협회는 회원들의 기부금으로 프라우엔플란 21a와 23번지 부동산을 매입했다. 2001년에는 바흐 하우스 정원 뒤편에 학교 학생들을 위한 학습관과 도서관을 갖춘 작고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 2000년과 2001년에 바흐 하우스 서쪽에 있는 19세기 건물 철거는 아이제나흐 시민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28]

새로운 박물관 건물은 카셀 출신의 건축가 베르톨트 펜크후스(Berthold Penkhues) 교수가 설계했다. 그는 프랭크 게리의 제자로, 현대적인 유기 건축 디자인을 선보였다. 펜크후스의 디자인은 2002년 신 바흐 협회가 초청한 건축 디자인 공모전에서 12개 출품작 중 1등을 차지했다.[29] 새로운 전시는 슈투트가르트 출신 우베 브뤼크너(Uwe Brückner) 교수가 디자인했다.[30]

2007년 5월 17일, 박물관은 재개관했다. 재개관 당일, 토마스 교회 합창단은 당시 토마스칸토어였던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빌러의 지휘 아래 콘서트를 열어 새로운 박물관 건물을 공식적으로 개관했다.[31]

2007년 5월 17일 박물관 재개관


2007년 5월 17일 새로운 바흐 하우스 로비에서 노래하는 라이프치히의 토마너 합창단


바흐 하우스 정원

2. 1. 건립 이전

바흐 가문은 16세기 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튀링겐 전역에서 음악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원들을 둔 널리 퍼진 음악가 가문이었다. 이미 1665년에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는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바흐의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는 1671년 아이제나흐 시의회에서 ''Haußmann''(시립 음악 감독) 직책을 맡았다. 가족은 처음에는 리터가세 11번지에 있는 반목조 주택(오늘날 박물관 정원 바로 남쪽)에 방을 임대했으며, 당시 시의 숲 관리인 발타자르 슈나이더가 소유하고 있었다. 시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부동산 소유주뿐이었기 때문에 1674년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는 ''플라이쉬가스'' (아마도 루터슈트라세 35번지)에 집을 샀으며, 그 위치는 오늘날 박물관에서 북쪽으로 100미터 떨어져 있었다.[1] ''플라이쉬가스''에 있는 원래의 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두 번 교체되었다.[2] 바흐의 정확한 출생 위치를 오늘날 정확히 식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시민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목적으로 획득한 장소로 이사하지 않고 대신 임대했기 때문이다.[3] 리터가세에 있는 건물에 암브로시우스 바흐가 처음 방을 사용한 위치와 루터슈트라세의 부동산 소유권을 바탕으로, 바흐의 가족이 도시의 이 지역, 즉 적어도 현재 박물관의 위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4]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685년 3월 21일[5]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이틀 뒤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인생의 처음 10년을 아이제나흐에서 보냈다. 가족의 음악적 전통은 그를 음악과 음악 직업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그에게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를 가르쳤다.[6]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바흐는 사촌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가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것은 나중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가 되었다.[7] 1692년부터 1695년까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아이제나흐의 라틴 학교에 다니며 학교의 ''chorus musicus''에 합류했으며, 그 구성원들을 위해 일주일에 4일 동안 음악 수업이 학교 시간표에 포함되었다.[8] 1694년 5월 1일, 바흐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바흐가 사망했고, 1695년 2월 20일에는 바흐의 아버지 암브로시우스도 사망했다. 1695년 7월, 요한 제바스티안과 그의 형 요한 야콥은 오르드루프에 있는 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아이제나흐를 떠났다.[9]

2. 1. 1. 바흐 가문과 아이제나흐

바흐 가문은 16세기 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튀링겐 전역에서 음악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원들을 둔 널리 퍼진 음악가 가문이었다. 1665년에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는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1]

바흐의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는 1671년 아이제나흐 시의회에서 ''Haußmann''(시립 음악 감독) 직책을 맡았다. 가족은 처음에는 리터가세 11번지에 있는 반목조 주택(오늘날 박물관 정원 바로 남쪽)에 방을 임대했으며, 당시 시의 숲 관리인 발타자르 슈나이더가 소유하고 있었다. 시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부동산 소유주뿐이었기 때문에 1674년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는 ''플라이쉬가스'' (아마도 루터슈트라세 35번지)에 집을 샀으며, 그 위치는 오늘날 박물관에서 북쪽으로 100미터 떨어져 있었다.[1] ''플라이쉬가스''에 있는 원래의 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두 번 교체되었다.[2] 바흐의 정확한 출생 위치를 오늘날 정확히 식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시민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목적으로 획득한 장소로 이사하지 않고 대신 임대했기 때문이다.[3] 리터가세에 있는 건물에 암브로시우스 바흐가 처음 방을 사용한 위치와 루터슈트라세의 부동산 소유권을 바탕으로, 바흐의 가족이 도시의 이 지역, 즉 적어도 현재 박물관의 위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4]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685년 3월 21일[5]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이틀 뒤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인생의 처음 10년을 아이제나흐에서 보냈다. 가족의 음악적 전통은 그를 음악과 음악 직업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그에게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를 가르쳤다.[6]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바흐는 사촌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가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것은 나중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가 되었다.[7] 1692년부터 1695년까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아이제나흐의 라틴 학교에 다니며 학교의 ''chorus musicus''에 합류했으며, 그 구성원들을 위해 일주일에 4일 동안 음악 수업이 학교 시간표에 포함되었다.[8] 1694년 5월 1일, 바흐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바흐가 사망했고, 1695년 2월 20일에는 바흐의 아버지 암브로시우스도 사망했다. 1695년 7월, 요한 제바스티안과 그의 형 요한 야콥은 오르드루프에 있는 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아이제나흐를 떠났다.[9]

2. 1. 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탄생과 유년기

바흐 가문은 16세기 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튀링겐 전역에서 음악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원들을 둔 널리 퍼진 음악가 가문이었다. 1665년에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는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바흐의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는 1671년 아이제나흐 시의회에서 ''Haußmann''(시립 음악 감독) 직책을 맡았다. 가족은 처음에는 리터가세 11번지에 있는 반목조 주택(오늘날 박물관 정원 바로 남쪽)에 방을 임대했으며, 당시 시의 숲 관리인 발타자르 슈나이더가 소유하고 있었다. 시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부동산 소유주뿐이었기 때문에 1674년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는 ''플라이쉬가스'' (아마도 루터슈트라세 35번지)에 집을 샀으며, 그 위치는 오늘날 박물관에서 북쪽으로 100미터 떨어져 있었다.[1] ''플라이쉬가스''에 있는 원래의 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두 번 교체되었다.[2] 바흐의 정확한 출생 위치를 오늘날 정확히 식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시민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목적으로 획득한 장소로 이사하지 않고 대신 임대했기 때문이다.[3] 리터가세에 있는 건물에 암브로시우스 바흐가 처음 방을 사용한 위치와 루터슈트라세의 부동산 소유권을 바탕으로, 바흐의 가족이 도시의 이 지역, 즉 적어도 현재 박물관의 위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4]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685년 3월 21일[5]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이틀 뒤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인생의 처음 10년을 아이제나흐에서 보냈다. 가족의 음악적 전통은 그를 음악과 음악 직업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그에게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를 가르쳤다.[6]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바흐는 사촌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가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것은 나중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가 되었다.[7] 1692년부터 1695년까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아이제나흐의 라틴 학교에 다니며 학교의 ''chorus musicus''에 합류했으며, 그 구성원들을 위해 일주일에 4일 동안 음악 수업이 학교 시간표에 포함되었다.[8] 1694년 5월 1일, 바흐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바흐가 사망했고, 1695년 2월 20일에는 바흐의 아버지 암브로시우스도 사망했다. 1695년 7월, 요한 제바스티안과 그의 형 요한 야콥은 오르드루프에 있는 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아이제나흐를 떠났다.[9]

2. 2. 15세기 ~ 18세기: 건물의 기원

아이제나흐의 역사적인 바흐 하우스는 아이제나흐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건물 중 하나이다. 원래는 두 개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동쪽 부분은 1456년에, 서쪽 부분은 1458년에 건설되었다. 1611년경에 두 건물이 합쳐졌다.[10] 1층은 농업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의 악기 홀은 헛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이고, 계단 옆의 방들은 소와 말들을 위한 공간이었을 것이다.[11] 박물관에는 바흐 하우스 정원에서 발견된 1688년의 소 방울이 이러한 과거를 상기시켜 준다. 건물의 2층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유리 창틀과 '작곡 스튜디오'로 장식된 거실의 나무 판넬이 이 집의 이전 거주자들의 시민 신분을 증언하고 있다. 바흐가 태어날 당시 이 집은 라틴 학교 교장이었던 하인리히 뵈르스텔만(Heinrich Börstelmann) 소유였다. 1746년에는 바흐의 사촌이자 친구인 요한 베른하르트 바흐의 딸이자, 요한 에른스트 바흐의 누이인 카롤린 아말리 라우슈 폰 바흐(Caroline Amalie Rausch née Bach) 가족이 이 건물로 이사하여 1779년까지 살았다.[12]

2. 3. 19세기: 바흐 출생지 논쟁

19세기에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로베르트 슈만 등에 의해 촉발된 바흐 르네상스의 여파로, 바흐의 숭배자들은 작곡가의 출생지를 찾기 시작했다.[13] 바흐 전기 작가인 카를 헤르만 비터는 1857년 생존해 있던 요한 베른하르트 바흐의 후손들을 인터뷰하여 바흐가 프라우엔플란 21번지에 있는 집, 이후 "바흐하우스"라고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음을 확인했다.[13] 1868년, 지역 음악 협회는 정문 위에 기념 명판을 설치하여 이곳이 바흐의 출생지임을 공식적으로 알렸다.[14] 하지만 그 이후로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추가적인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터가 접했던 지역 구전의 오류는 바흐 가문 구성원들이 실제로 이 집에 살았던 적이 있지만, 바흐가 태어난 후 한참 뒤의 일이라는 사실에 기인할 수 있다.

2. 4. 20세기: 바흐 하우스 설립과 발전

1900년에 로베르트 슈만 등이 1850년 설립한 라이프치히의 바흐 협회(Bach-Gesellschaft)가 바흐의 모든 작품을 편집하는 작업을 완료하자, 회원들은 바흐 음악의 보급과 연주를 더욱 촉진하기 위해 이를 ''노이에 바흐게젤샤프트(Neue Bachgesellschaft)'' (새 바흐 협회)로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15] 세 가지 '영구적인' 프로젝트로 매년 발행되는 ''바흐-야부흐(Bach-Jahrbuch)'' (바흐 연감), 2년에 한 번 (오늘날: 매년) 개최되는 ''바흐페스테'' (바흐 축제), 바흐 박물관 설립이 승인되었다.[15] 협회 박물관의 부지로 토마스 학교(Thomasschule zu Leipzig)가 선택되었으나, 라이프치히 시 당국이 1902년에 건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하여 협회의 계획은 좌절되었다.[15] 바흐가 살았던 학교 방의 입구 문은 당시 음악 교사였던 베른하르트 프리드리히 리히터(Bernhard Friedrich Richter)에 의해 파괴로부터 구출되었고, 나중에 바흐 하우스에 헌정되었다.[16]

바흐의 출생지인 아이제나흐의 생가가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협회 회원들에게 전달되자, 노이에 바흐게젤샤프트는 1905년 5월 15일 이 건물을 매입하여 세계 최초의 바흐 박물관을 열기로 결정했다.[17] 이 프로젝트의 후원자로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요제프 요아힘, 구스타프 슈렉, 게오르크 슈만,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 C.F. 페터스가 있었다.[17] 바흐 하우스는 1907년 5월 27일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18] 토마스 교회 합창단(Thomanerchor)은 칸토르 구스타프 슈렉의 지휘를 받았고, 바이마르 호프카펠레는 게오르크 슈만의 지휘를 받으며 노래하고 연주했다.[18]

1928년, 프리츠 롤버그가 도시의 세금 기록을 연구한 결과,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가 아이제나흐의 다른 건물에 대한 세금을 납부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바흐 하우스''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바흐 기념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19] 1972~1973년에 이 집이 완전히 복원되었을 때, 1868년의 기념판이 철거되어 보관되었다가 2007년에 복원되었다. 오늘날 이 역사적 오류는 롤버그가 발견한 세금 파일 중 하나가 전시된 박물관에서 설명된다.

==== 제2차 세계 대전과 동독 시기 ====

1944년 11월 23일 공습과 1945년 4월 5일 밤 미군 부대의 포격으로 바흐 하우스의 지붕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0] 1945년 4월 29일, 미군 사령관 크누트 한스톤 중령은 박물관을 즉시 수리하라고 명령했다.[21] 1년 후인 1946년 6월 22일, 독일 주둔 소련 군정(Soviet Military Administration in Germany)은 아른슈타트와 아이제나흐에 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박물관의 재개관을 명령하고, 1923년부터 바흐 하우스 관장을 맡았던 콘라드 프라이세의 임명을 확인했다.[21]

1973년, 건물들은 완전히 복원되었고 동독(GDR)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전시회가 새롭게 디자인되었다.[23] 박물관은 바흐 하우스 서쪽에 있는 프라우엔플란 21a 건물도 포함했다.[24] 박물관 소유주가 여전히 노이에 바흐게젤샤프트(Neue Bachgesellschaft)였기 때문에, 바흐 하우스는 라이프치히의 바흐 아카이브(Bach-Archiv)와 달리 GDR의 국가 연합체인 ''국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연구 및 기념관 DDR''에 통합되지 않았다.[25] 당시 노이에 바흐게젤샤프트는 정치적으로 분단된 독일 양쪽(그리고 서유럽과 동유럽 전체, 그리고 미국에서도)에 3,000명이 넘는 회원을 둔 국제 협회였다. 방문객 수 증가와 1985년 바흐의 해로 인해 1980년 바흐 하우스 서쪽에 있는 프라우엔플란 23 건물로 박물관이 더 확장되었다.[26]

2. 4. 1. 제2차 세계 대전과 동독 시기

1944년 11월 23일 공습과 1945년 4월 5일 밤 미군 부대의 포격으로 바흐 하우스의 지붕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0] 1945년 4월 29일, 미군 사령관 크누트 한스톤 중령은 박물관을 즉시 수리하라고 명령했다.[21] 1년 후인 1946년 6월 22일, 독일 주둔 소련 군정(Soviet Military Administration in Germany)은 아른슈타트와 아이제나흐에 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박물관의 재개관을 명령하고, 1923년부터 바흐 하우스 관장을 맡았던 콘라드 프라이세의 임명을 확인했다.[21]

1973년, 건물들은 완전히 복원되었고 동독(GDR)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전시회가 새롭게 디자인되었다.[23] 박물관은 바흐 하우스 서쪽에 있는 프라우엔플란 21a 건물도 포함했다.[24] 박물관 소유주가 여전히 노이에 바흐게젤샤프트(Neue Bachgesellschaft)였기 때문에, 바흐 하우스는 라이프치히의 바흐 아카이브(Bach-Archiv)와 달리 GDR의 국가 연합체인 ''국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연구 및 기념관 DDR''에 통합되지 않았다.[25] 당시 노이에 바흐게젤샤프트는 정치적으로 분단된 독일 양쪽(그리고 서유럽과 동유럽 전체, 그리고 미국에서도)에 3,000명이 넘는 회원을 둔 국제 협회였다. 방문객 수 증가와 1985년 바흐의 해로 인해 1980년 바흐 하우스 서쪽에 있는 프라우엔플란 23 건물로 박물관이 더 확장되었다.[26]

2. 5. 21세기: 현대적 확장과 재개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바흐 하우스 서쪽 건물을 새로운 박물관 건물로 교체하고, 역사적인 건물은 복원 공사를 거쳤으며, 전시 내용도 완전히 현대화되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튀링겐 자유주, 독일 연방 공화국 정부, 유럽 연합의 보조금으로 총 430만 유로가 지원되었다.[27] 신 바흐 협회는 회원들의 기부금으로 프라우엔플란 21a와 23번지 부동산을 매입했다. 2001년에는 바흐 하우스 정원 뒤편에 학교 학생들을 위한 학습관과 도서관을 갖춘 작고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 2000년과 2001년에 바흐 하우스 서쪽에 있는 19세기 건물 철거는 아이제나흐 시민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28]

새로운 박물관 건물은 카셀 출신의 건축가 베르톨트 펜크후스(Berthold Penkhues) 교수가 설계했다. 그는 프랭크 게리의 제자로, 현대적인 유기 건축 디자인을 선보였다. 펜크후스의 디자인은 2002년 신 바흐 협회가 초청한 건축 디자인 공모전에서 12개 출품작 중 1등을 차지했다.[29] 새로운 전시는 슈투트가르트 출신 우베 브뤼크너(Uwe Brückner) 교수가 디자인했다.[30]

2007년 5월 17일, 박물관은 재개관했다. 재개관 당일, 토마스 교회 합창단은 당시 토마스칸토어였던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빌러의 지휘 아래 콘서트를 열어 새로운 박물관 건물을 공식적으로 개관했다.[31]

3. 전시 및 소장품

악기 홀


''바흐 고블렛''


시립 피퍼스 룸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와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파스텔 어린이 초상화


''작곡 스튜디오''


바흐의 신학 도서관


''워커블 컴포지션''이 있는 현대 건물 내부


바흐 하우스의 바흐 그림, 2014년


1798년 이전의 ''괴벨''의 바흐 초상화


바흐 하우스의 바흐 두개골과 흉상


바흐 하우스의 바흐 자필 악보


바흐 하우스의 클라브생 로얄


2004년 이후, 바흐하우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별 전시회가 열렸다.

  • 2004: ''나는 부지런해야 했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그의 아이제나흐 시절[32]
  • 2005: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관점의 문제''[33]
  • 2007: ''황금 조끼를 입은 남자''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 관하여)[34]
  • 2008: ''의학의 거울을 통한 바흐''[35]
  • 2009: ''피와 영 – 바흐, 멘델스존과 그들의 음악, 제3제국에서''[36]
  • 2010: ''바흐의 수난곡 – 루터교 전통과 이탈리아 오페라 사이''[37]
  • 2011: 반다 란도프스카의 추억''[38]
  • 2012: ''루터와 [바흐의] 음악''[39]
  • 2013: ''바흐 & 친구들''[40]
  • 2014: ''"B+A+C+H = 14": 바흐와 숫자''[41]
  • 2015: ''베를린의 바흐''[42]
  • 2016: ''루터, 바흐 – 그리고 유대인''[43]
  • 2017: ''텍스트: 루터 & 음악: 바흐''[44]
  • 2018: ''여성과 바흐의 음악''[45]
  • 2019: ''그림 퍼즐 – 바흐 도상학에 관하여''[46]


2013년부터 바흐 하우스는 베를린 대성당에서도 전시회를 열고 있다.[47]

== 역사적 건물 내 전시실 ==

바흐하우스의 전시실 컬렉션은 1907년 네덜란드 수집가 파울 데 비트가 기증한 4개의 악기와, 1910년 자신과 전 연인이었던 오페라 가수 안나 셔터를 살해한 음악학자이자 지휘자 알로이스 오브리스트의 상속인들이 기증한 164개의 악기로 시작되었다.[48]

이 컬렉션의 현악기에는 1725년 바흐의 라이프치히 친구이자 협력자인 요한 크리스티안 호프만이 제작한 7현 비올라 다 감바,[49] 5현 비올론첼로 피콜로(북부 보헤미아, 약 1750년)[50] (바흐가 9개의 칸타타와 (일부 견해에 따르면) 첼로 모음곡 BWV 1012를 위해 요구했다), 그리고 6개의 거트 연주 현과 6개의 금속 공명 현이 옥타브 위에 있는 비올라 다모레(빈, 1700년경)[51]가 포함되어 있다.

1973년부터 매시간 바로크 건반 악기 5대가 음악 연주에서 시연되고 있다.[52] 여기에는 두 개의 포지티브 오르간(스위스, 약 1750년,[53] 튀링겐, 약 1650년), 프렛이 있는 클라비코드(약 1770년),[54] 그리고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판매하는 것을 도왔던 고트프리트 질버만의 조카인 요한 하인리히 질버만이 스트라스부르에서 1765년에 제작한 스피넷이 포함되어 있다.[55] 튀링겐 포지티브 오르간의 역사와 바흐의 생애는 겹쳐진다. 1714년부터 바흐가 당시 궁정 오르간 연주자였던 바이마르에서 약 15km 떨어진 클라인슈바우젠의 교회 오르간으로 사용되었다. 바흐의 제자이자 가족 친구인 궁정 오르간 제작자 하인리히 니콜라우스 트렙스는 1724년과 1740년에 오르간을 수리했고, 바흐의 제자이자 궁정 오르간 연주자 후임인 요한 카스파르 포글러는 1738년, 1740년, 1744년에 오르간을 시험했다. 공국의 오르간을 점검하는 것은 궁정 오르간 연주자의 의무였기 때문에, 박물관에서는 바흐가 이 악기를 알고 연주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56]

전시품에는 바흐가 착용했던 것으로 오랫동안 여겨져 온 소위 '바흐 안경'[57]과 '바흐 고블렛'이 포함되어 있다. 누가 고블렛을 기증했는지, 바흐가 어떤 경우에 그것을 받았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58] 바흐의 두 번째이자 훨씬 어린 아내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 항상 신선한 노란색 카네이션 꽃다발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 그녀는 ''große Liebhaberin von der Gärtnerey'' (정원 가꾸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große Liebhaberin von der Gärtnereyde)였고, 이 꽃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59]

역사적인 바흐 하우스의 위층 3개의 방에는 역사적인 생활 공간(침실, 거실, 주방)이 있다. 이 방들의 가구는 1906년 바이마르 궁정 골동품 수집가가 1700년경의 지역 품목(문 손잡이와 부속품 포함)으로 처음 장식한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60]

2017년부터는 역사적인 생활 공간 사이에 있고 검은색으로 덮인 방에서 ''바흐의 내면 세계'' 전시 공간이 열리고 있다.[61] 여기에는 바흐가 개인적으로 소유했던 81권의 책에 묶인 52개의 신학 서적 제목을 열거한 서면 유산을 통해 복원된 바흐의 신학 서재가 전시되어 있다.[62]

== 악기 컬렉션 ==

파울 데 비트가 1907년에 기증한 4개의 악기와, 알로이스 오브리스트의 상속인들이 1910년에 기증한 164개의 악기로 바흐하우스의 악기 컬렉션이 시작되었다.[48] 이 컬렉션의 현악기에는 요한 크리스티안 호프만이 1725년에 제작한 7현 비올라 다 감바,[49] 5현 비올론첼로 피콜로(북부 보헤미아, 약 1750년),[50] 6개의 거트 연주 현과 6개의 금속 공명 현이 옥타브 위에 있는 비올라 다모레(빈, 1700년경)가 포함되어 있다.[51]

1973년부터 매시간 바로크 건반 악기 5대가 음악 연주에서 시연되고 있다.[52] 여기에는 두 개의 포지티브 오르간(스위스, 약 1750년,[53] 튀링겐, 약 1650년), 프렛이 있는 클라비코드(약 1770년),[54] 고트프리트 질버만의 조카인 요한 하인리히 질버만이 스트라스부르에서 1765년에 제작한 스피넷이 포함되어 있다.[55] 튀링겐 포지티브 오르간은 1714년부터 바흐가 바이마르에서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있을 때 약 15km 떨어진 클라인슈바우젠의 교회 오르간으로 사용되었다. 바흐의 제자이자 가족 친구인 하인리히 니콜라우스 트렙스는 1724년과 1740년에 오르간을 수리했고, 요한 카스파르 포글러는 1738년, 1740년, 1744년에 오르간을 시험했다. 박물관에서는 바흐가 이 악기를 알고 연주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기록은 없다.[56]

== 바흐의 유품 ==

바흐하우스의 전시실 컬렉션은 1907년 네덜란드 수집가 파울 데 비트가 기증한 4개의 악기로 시작되었고, 1910년 자신과 전 연인이었던 오페라 가수 안나 셔터를 살해한 음악학자이자 지휘자 알로이스 오브리스트의 상속인들이 기증한 164개의 악기로 시작되었다.[48]

전시품에는 바흐가 착용했던 것으로 오랫동안 여겨져 온 소위 '바흐 안경'[57]과 '바흐 고블렛'이 포함되어 있다. 누가 고블렛을 기증했는지, 바흐가 어떤 경우에 그것을 받았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58] 바흐의 두 번째이자 훨씬 어린 아내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 항상 신선한 노란색 카네이션 꽃다발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 그녀는 ''große Liebhaberin von der Gärtnerey'' (정원 가꾸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große Liebhaberin von der Gärtnereyde)였고, 이 꽃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59]

== 역사적 생활 공간 ==

파울 데 비트가 1907년에 기증한 악기 4점과 알로이스 오브리스트의 상속인들이 기증한 악기 164점으로 1907년 바흐하우스의 전시실 컬렉션이 시작되었다.[48] 역사적인 바흐 하우스의 위층 3개의 방에는 역사적인 생활 공간(침실, 거실, 주방)이 있다.[60] 이 방들의 가구는 1906년 바이마르 궁정 골동품 수집가가 1700년경의 지역 품목(문 손잡이와 부속품 포함)으로 처음 장식한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60]

== 바흐의 신학 서재 ==

2017년부터 역사적인 생활 공간 사이에 있고 검은색으로 덮인 방에서 ''바흐의 내면 세계'' 전시 공간이 열리고 있다.[61] 여기에는 바흐가 개인적으로 소유했던 81권의 책에 묶인 52개의 신학 서적 제목을 열거한 서면 유산을 통해 복원된 바흐의 신학 서재가 전시되어 있다.[62]

== 현대 건물 내 전시실 ==

요하네스 하이시히의 2004년 그림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토마너합창단과 함께 칸타타를 연주하는 바흐를 묘사하고 있다.[63] 바흐 도상학의 역사는 현대 건물 북쪽 벽에서 다루어지며, 당시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그중에는 1720년경의 바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 야콥 일레의 그림과, 찰스 샌포드 테리가 1936년에 카를 필립 엠마누엘 바흐가 소유했던 바흐 초상화라고 식별했지만, 이후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운 파스텔 그림이 있다.[64] 또한 1798/99년 ''음악신보(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제1권의 표지에 사용된 ''게벨''의 초기 바흐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다.[65][66] 마지막으로, 원본은 라이프치히 구 시청에서 찾을 수 있는 엘리아스 고틀로프 하우스만의 의심할 여지 없는 진품 그림의 1910년 복사본이 있다. '가족'으로 배열된 39개의 오리지널 판화는 바흐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 수세기를 거쳐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묘사한다.[67]

신 바흐 전집(Neue Bach-Ausgabe)에 포함되기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바흐의 오리지널 자필 악보가 전시되어 있다. 이 자필 악보는 칸타타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BWV 72(Alles nur nach Gottes Willen, BWV 72)의 바소 콘티누오 파트이다. 바흐의 칸타타 주기를 위한 대부분의 손으로 쓴 기악 파트와 마찬가지로 협업 작품이다. 전시된 악보의 오른쪽 면(합창, 레치타티보)은 바흐의 제자이자 조카인 요한 하인리히 바흐(오르드루프 출신인 바흐의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671–1721)의 아들)가 썼고, 왼쪽 위 면(아리아)은 바흐의 아내 안나 마그달레나 바흐가 썼으며, 마지막 코랄의 음악과 모든 제목, 부제, 그리고 "피네"(Fine)라는 단어까지의 수정 사항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필체로 쓰여졌다.[68] 또 다른 전시품은 ''Clavecin Royal''(요한 고틀로프 바그너, 드레스덴 1788)이다.[69]

== 바흐 도상학 ==

요하네스 하이시히의 2004년 그림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토마너합창단과 함께 칸타타를 연주하는 바흐를 묘사하고 있다.[63] 바흐 도상학의 역사는 현대 건물 북쪽 벽에서 다루어지며, 당시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그중에는 1720년경의 바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 야콥 일레의 그림과, 찰스 샌포드 테리가 1936년에 카를 필립 엠마누엘 바흐가 소유했던 바흐 초상화라고 식별했지만, 이후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운 파스텔 그림이 있다.[64] 또한 1798/99년 ''음악신보(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제1권의 표지에 사용된 ''게벨''의 초기 바흐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다.[65][66] 마지막으로, 원본은 라이프치히 구 시청에서 찾을 수 있는 엘리아스 고틀로프 하우스만의 의심할 여지 없는 진품 그림의 1910년 복사본이 있다. '가족'으로 배열된 39개의 오리지널 판화는 바흐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 수세기를 거쳐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묘사한다.[67]

== 바흐 자필 악보 ==

신 바흐 전집(Neue Bach-Ausgabe)에 포함되기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바흐의 오리지널 자필 악보가 전시되어 있다. 이 자필 악보는 칸타타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BWV 72(Alles nur nach Gottes Willen, BWV 72)의 바소 콘티누오 파트이다. 바흐의 칸타타 주기를 위한 대부분의 손으로 쓴 기악 파트와 마찬가지로 협업 작품이다. 전시된 악보의 오른쪽 면(합창, 레치타티보)은 바흐의 제자이자 조카인 요한 하인리히 바흐(오르드루프 출신인 바흐의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671–1721)의 아들)가 썼고, 왼쪽 위 면(아리아)은 바흐의 아내 안나 마그달레나 바흐가 썼으며, 마지막 코랄의 음악과 모든 제목, 부제, 그리고 "피네"(Fine)라는 단어까지의 수정 사항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필체로 쓰여졌다.[68]

== 클라브생 로얄 ==

요한 고틀로프 바그너가 1788년 드레스덴에서 제작한 ''Clavecin Royal''이 전시되어 있다.[69]

== 도서관 ==

박물관에는 일반 개관 시간에 대중에게 공개되는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약 5,500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 바흐와 그의 동시대 인물, 악기, 그리고 일반적인 음악사에 관한 책들이다.[70] 책은 OPAC로 검색할 수 있다.

최초이자 오랫동안 유일한 바흐 박물관으로서, 박물관은 새 바흐 협회로부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그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그의 수용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71] 그러나 1907년 박물관이 설립되었을 때, 이 임무는 이미 수행하기 불가능했다. 알려진 모든 바흐 자필 악보의 80%는 (그리고 여전히) 베를린 국립 도서관이 소유하고 있었으며,[72] 당시에도 소장품을 기꺼이 처분하려는 개인 수집가들은 사립 협회가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을 요구했다.[73]

이후 컬렉션은 오스카 폰 하세, 라이프치히 악보 출판사 C.F. 페터스와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의 기증, 그리고 필리프 슈피타, 빌헬름 루스트, 파울 그라프 발더제, 알로이스 오브리스트, 빌헬름 히스, 크리스토프 트라우트만의 유산으로 성장했다.

또한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세 권의 학교 노트, 1747년의 음악 헌정 초판(A부), 바흐의 유실된 ''음악 바흐 가계도''의 출처 C, 유실된 바흐 결혼 칸타타 ''Sein Segen fließt daher, wie ein Strom'' (BWV Anh. 14, 임마누엘 티에체, 라이프치히 1725)의 유일하게 알려진 가사, 오르드루프 바흐 가문의 실루엣 컬렉션, 카를 헤르만 비터와 같은 19세기 바흐 연구가들의 편지, 그리고 빌헬름 히스와 카를 제프너에 의한 (추정되는) 바흐 유골 발굴과 관련된 문서, 측정 및 주형(석고 및 청동 두개골 주형 포함)이 소장되어 있다.[79] 2013년, 바흐 하우스는 원래 152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손으로 쓴 합창 파트 중 62개를 획득했는데, 이 합창 파트는 펠릭스 멘델스존이 바흐 사후 처음으로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징아카데미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연주했을 때 합창단이 사용했던 것이다.[80]

== 기타 소장품 ==

1715년의 튀링겐 하프시코드가 전시되어 있다.[75] 야곱 하르트만의 하프시코드(약 1765년),[76] 요한 하인리히 실버만의 두 번째 스피넷(1765년),[77] 페달 클라비코드 (약 1815년)도 주목할 만하다.[78]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학교 노트 세 권, 1747년의 음악 헌정 초판(A부), 바흐의 유실된 ''음악 바흐 가계도''의 출처 C, 유실된 바흐 결혼 칸타타 ''Sein Segen fließt daher, wie ein Strom'' (BWV Anh. 14, 임마누엘 티에체, 라이프치히 1725)의 유일하게 알려진 가사, 오르드루프 바흐 가문의 실루엣 컬렉션 등이 소장되어 있다.[79] 카를 헤르만 비터와 같은 19세기 바흐 연구가들의 편지와, 빌헬름 히스와 카를 제프너에 의한 (추정되는) 바흐 유골 발굴과 관련된 문서, 측정 및 주형(석고 및 청동 두개골 주형 포함)도 보관되어 있다.[79]

2013년에는 펠릭스 멘델스존이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징아카데미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바흐 사후 처음으로 연주했을 때 합창단이 사용했던, 손으로 쓴 합창 파트 악보 62개(원래 152개 추정)를 획득했다.[80]

3. 1. 역사적 건물 내 전시실

파울 데 비트가 1907년에 기증한 악기 4점과, 알로이스 오브리스트의 상속인들이 1910년에 기증한 악기 164점으로 바흐하우스의 전시실 컬렉션이 시작되었다.[48]

이 컬렉션의 현악기에는 1725년 바흐의 라이프치히 친구이자 협력자인 요한 크리스티안 호프만이 제작한 7현 비올라 다 감바,[49] 5현 비올론첼로 피콜로(북부 보헤미아, 약 1750년)[50] (바흐가 9개의 칸타타와 (일부 견해에 따르면) 첼로 모음곡 BWV 1012를 위해 요구했다), 그리고 6개의 거트 연주 현과 6개의 금속 공명 현이 옥타브 위에 있는 비올라 다모레(빈, 1700년경)[51]가 포함되어 있다.

1973년부터 매시간 바로크 건반 악기 5대가 음악 연주에서 시연되고 있다.[52] 여기에는 두 개의 포지티브 오르간(스위스, 약 1750년,[53] 튀링겐, 약 1650년), 프렛이 있는 클라비코드(약 1770년),[54] 그리고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판매하는 것을 도왔던 고트프리트 질버만의 조카인 요한 하인리히 질버만이 스트라스부르에서 1765년에 제작한 스피넷이 포함되어 있다.[55] 튀링겐 포지티브 오르간의 역사와 바흐의 생애는 겹쳐진다. 1714년부터 바흐가 당시 궁정 오르간 연주자였던 바이마르에서 약 15km 떨어진 클라인슈바우젠의 교회 오르간으로 사용되었다. 바흐의 제자이자 가족 친구인 궁정 오르간 제작자 하인리히 니콜라우스 트렙스는 1724년과 1740년에 오르간을 수리했고, 바흐의 제자이자 궁정 오르간 연주자 후임인 요한 카스파르 포글러는 1738년, 1740년, 1744년에 오르간을 시험했다. 공국의 오르간을 점검하는 것은 궁정 오르간 연주자의 의무였기 때문에, 박물관에서는 바흐가 이 악기를 알고 연주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56]

전시품에는 바흐가 착용했던 것으로 오랫동안 여겨져 온 소위 '바흐 안경'[57]과 '바흐 고블렛'이 포함되어 있다. 누가 고블렛을 기증했는지, 바흐가 어떤 경우에 그것을 받았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58] 바흐의 두 번째이자 훨씬 어린 아내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 항상 신선한 노란색 카네이션 꽃다발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 그녀는 ''große Liebhaberin von der Gärtnerey'' (정원 가꾸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große Liebhaberin von der Gärtnereyde)였고, 이 꽃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59]

역사적인 바흐 하우스의 위층 3개의 방에는 역사적인 생활 공간(침실, 거실, 주방)이 있다. 이 방들의 가구는 1906년 바이마르 궁정 골동품 수집가가 1700년경의 지역 품목(문 손잡이와 부속품 포함)으로 처음 장식한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60]

2017년부터는 역사적인 생활 공간 사이에 있고 검은색으로 덮인 방에서 ''바흐의 내면 세계'' 전시 공간이 열리고 있다.[61] 여기에는 바흐가 개인적으로 소유했던 81권의 책에 묶인 52개의 신학 서적 제목을 열거한 서면 유산을 통해 복원된 바흐의 신학 서재가 전시되어 있다.[62]

3. 1. 1. 악기 컬렉션

파울 데 비트가 1907년에 기증한 4개의 악기와, 알로이스 오브리스트의 상속인들이 1910년에 기증한 164개의 악기로 바흐하우스의 악기 컬렉션이 시작되었다.[48] 이 컬렉션의 현악기에는 요한 크리스티안 호프만이 1725년에 제작한 7현 비올라 다 감바,[49] 5현 비올론첼로 피콜로(북부 보헤미아, 약 1750년),[50] 6개의 거트 연주 현과 6개의 금속 공명 현이 옥타브 위에 있는 비올라 다모레(빈, 1700년경)가 포함되어 있다.[51]

1973년부터 매시간 바로크 건반 악기 5대가 음악 연주에서 시연되고 있다.[52] 여기에는 두 개의 포지티브 오르간(스위스, 약 1750년,[53] 튀링겐, 약 1650년), 프렛이 있는 클라비코드(약 1770년),[54] 고트프리트 질버만의 조카인 요한 하인리히 질버만이 스트라스부르에서 1765년에 제작한 스피넷이 포함되어 있다.[55] 튀링겐 포지티브 오르간은 1714년부터 바흐가 바이마르에서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있을 때 약 15km 떨어진 클라인슈바우젠의 교회 오르간으로 사용되었다. 바흐의 제자이자 가족 친구인 하인리히 니콜라우스 트렙스는 1724년과 1740년에 오르간을 수리했고, 요한 카스파르 포글러는 1738년, 1740년, 1744년에 오르간을 시험했다. 박물관에서는 바흐가 이 악기를 알고 연주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기록은 없다.[56]

3. 1. 2. 바흐의 유품

바흐하우스의 전시실 컬렉션은 1907년 네덜란드 수집가 파울 데 비트가 기증한 4개의 악기로 시작되었고, 1910년 자신과 전 연인이었던 오페라 가수 안나 셔터를 살해한 음악학자이자 지휘자 알로이스 오브리스트의 상속인들이 기증한 164개의 악기로 시작되었다.[48]

전시품에는 바흐가 착용했던 것으로 오랫동안 여겨져 온 소위 '바흐 안경'[57]과 '바흐 고블렛'이 포함되어 있다. 누가 고블렛을 기증했는지, 바흐가 어떤 경우에 그것을 받았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58] 바흐의 두 번째이자 훨씬 어린 아내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 항상 신선한 노란색 카네이션 꽃다발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 그녀는 ''große Liebhaberin von der Gärtnerey'' (정원 가꾸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große Liebhaberin von der Gärtnereyde)였고, 이 꽃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59]

3. 1. 3. 역사적 생활 공간

파울 데 비트가 1907년에 기증한 악기 4점과 알로이스 오브리스트의 상속인들이 기증한 악기 164점으로 1907년 바흐하우스의 전시실 컬렉션이 시작되었다.[48] 역사적인 바흐 하우스의 위층 3개의 방에는 역사적인 생활 공간(침실, 거실, 주방)이 있다.[60] 이 방들의 가구는 1906년 바이마르 궁정 골동품 수집가가 1700년경의 지역 품목(문 손잡이와 부속품 포함)으로 처음 장식한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60]

3. 1. 4. 바흐의 신학 서재

2017년부터 역사적인 생활 공간 사이에 있고 검은색으로 덮인 방에서 ''바흐의 내면 세계'' 전시 공간이 열리고 있다.[61] 여기에는 바흐가 개인적으로 소유했던 81권의 책에 묶인 52개의 신학 서적 제목을 열거한 서면 유산을 통해 복원된 바흐의 신학 서재가 전시되어 있다.[62]

3. 2. 현대 건물 내 전시실

요하네스 하이시히의 2004년 그림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토마너합창단과 함께 칸타타를 연주하는 바흐를 묘사하고 있다.[63] 바흐 도상학의 역사는 현대 건물 북쪽 벽에서 다루어지며, 당시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그중에는 1720년경의 바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 야콥 일레의 그림과, 찰스 샌포드 테리가 1936년에 카를 필립 엠마누엘 바흐가 소유했던 바흐 초상화라고 식별했지만, 이후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운 파스텔 그림이 있다.[64] 또한 1798/99년 ''음악신보(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제1권의 표지에 사용된 ''게벨''의 초기 바흐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다.[65][66] 마지막으로, 원본은 라이프치히 구 시청에서 찾을 수 있는 엘리아스 고틀로프 하우스만의 의심할 여지 없는 진품 그림의 1910년 복사본이 있다. '가족'으로 배열된 39개의 오리지널 판화는 바흐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 수세기를 거쳐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묘사한다.[67]

신 바흐 전집(Neue Bach-Ausgabe)에 포함되기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바흐의 오리지널 자필 악보가 전시되어 있다. 이 자필 악보는 칸타타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BWV 72(Alles nur nach Gottes Willen, BWV 72)의 바소 콘티누오 파트이다. 바흐의 칸타타 주기를 위한 대부분의 손으로 쓴 기악 파트와 마찬가지로 협업 작품이다. 전시된 악보의 오른쪽 면(합창, 레치타티보)은 바흐의 제자이자 조카인 요한 하인리히 바흐(오르드루프 출신인 바흐의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671–1721)의 아들)가 썼고, 왼쪽 위 면(아리아)은 바흐의 아내 안나 마그달레나 바흐가 썼으며, 마지막 코랄의 음악과 모든 제목, 부제, 그리고 "피네"(Fine)라는 단어까지의 수정 사항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필체로 쓰여졌다.[68] 또 다른 전시품은 ''Clavecin Royal''(요한 고틀로프 바그너, 드레스덴 1788)이다.[69]

3. 2. 1. 바흐 도상학

요하네스 하이시히의 2004년 그림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토마너합창단과 함께 칸타타를 연주하는 바흐를 묘사하고 있다.[63] 바흐 도상학의 역사는 현대 건물 북쪽 벽에서 다루어지며, 당시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그중에는 1720년경의 바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 야콥 일레의 그림과, 찰스 샌포드 테리가 1936년에 카를 필립 엠마누엘 바흐가 소유했던 바흐 초상화라고 식별했지만, 이후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운 파스텔 그림이 있다.[64] 또한 1798/99년 ''음악신보(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제1권의 표지에 사용된 ''게벨''의 초기 바흐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다.[65][66] 마지막으로, 원본은 라이프치히 구 시청에서 찾을 수 있는 엘리아스 고틀로프 하우스만의 의심할 여지 없는 진품 그림의 1910년 복사본이 있다. '가족'으로 배열된 39개의 오리지널 판화는 바흐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 수세기를 거쳐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묘사한다.[67]

3. 2. 2. 바흐 자필 악보

신 바흐 전집(Neue Bach-Ausgabe)에 포함되기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바흐의 오리지널 자필 악보가 전시되어 있다. 이 자필 악보는 칸타타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BWV 72(Alles nur nach Gottes Willen, BWV 72)의 바소 콘티누오 파트이다. 바흐의 칸타타 주기를 위한 대부분의 손으로 쓴 기악 파트와 마찬가지로 협업 작품이다. 전시된 악보의 오른쪽 면(합창, 레치타티보)은 바흐의 제자이자 조카인 요한 하인리히 바흐(오르드루프 출신인 바흐의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671–1721)의 아들)가 썼고, 왼쪽 위 면(아리아)은 바흐의 아내 안나 마그달레나 바흐가 썼으며, 마지막 코랄의 음악과 모든 제목, 부제, 그리고 "피네"(Fine)라는 단어까지의 수정 사항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필체로 쓰여졌다.[68]

3. 2. 3. 클라브생 로얄

요한 고틀로프 바그너가 1788년 드레스덴에서 제작한 ''Clavecin Royal''이 전시되어 있다.[69]

3. 3. 도서관 및 기타 소장품

박물관에는 일반 개관 시간에 대중에게 공개되는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약 5,500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 바흐와 그의 동시대 인물, 악기, 그리고 일반적인 음악사에 관한 책들이다.[70] 책은 OPAC로 검색할 수 있다.

최초이자 오랫동안 유일한 바흐 박물관으로서, 박물관은 새 바흐 협회로부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그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그의 수용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71] 그러나 1907년 박물관이 설립되었을 때, 이 임무는 이미 수행하기 불가능했다. 알려진 모든 바흐 자필 악보의 80%는 (그리고 여전히) 베를린 국립 도서관이 소유하고 있었으며,[72] 당시에도 소장품을 기꺼이 처분하려는 개인 수집가들은 사립 협회가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을 요구했다.[73]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몇 년 동안 바흐 하우스는 여러 자필 악보들을 획득했다.[74] 이후 컬렉션은 오스카 폰 하세, 라이프치히 악보 출판사 C.F. 페터스와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의 기증, 그리고 필리프 슈피타, 빌헬름 루스트, 파울 그라프 발더제, 알로이스 오브리스트, 빌헬름 히스, 크리스토프 트라우트만의 유산으로 성장했다.

전시된 품목 외에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다: 1715년의 튀링겐 하프시코드,[75] 야곱 하르트만의 하프시코드(약 1765년),[76] 요한 하인리히 실버만의 두 번째 스피넷(1765년),[77] 그리고 페달 클라비코드 (약 1815년).[78] 또한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세 권의 학교 노트, 1747년의 음악 헌정 초판(A부), 바흐의 유실된 ''음악 바흐 가계도''의 출처 C, 유실된 바흐 결혼 칸타타 ''Sein Segen fließt daher, wie ein Strom'' (BWV Anh. 14, 임마누엘 티에체, 라이프치히 1725)의 유일하게 알려진 가사, 오르드루프 바흐 가문의 실루엣 컬렉션, 카를 헤르만 비터와 같은 19세기 바흐 연구가들의 편지, 그리고 빌헬름 히스와 카를 제프너에 의한 (추정되는) 바흐 유골 발굴과 관련된 문서, 측정 및 주형(석고 및 청동 두개골 주형 포함)이 소장되어 있다.[79]

2013년, 바흐 하우스는 원래 152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손으로 쓴 합창 파트 중 62개를 획득했는데, 이 합창 파트는 펠릭스 멘델스존이 바흐 사후 처음으로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징아카데미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연주했을 때 합창단이 사용했던 것이다.[80]

3. 3. 1. 도서관

박물관에는 일반 개관 시간에 대중에게 공개되는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약 5,500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 바흐와 그의 동시대 인물, 악기, 그리고 일반적인 음악사에 관한 책들이다.[70] 책은 OPAC로 검색할 수 있다.

최초이자 오랫동안 유일한 바흐 박물관으로서, 박물관은 새 바흐 협회로부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그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그의 수용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71] 그러나 1907년 박물관이 설립되었을 때, 이 임무는 이미 수행하기 불가능했다. 알려진 모든 바흐 자필 악보의 80%는 (그리고 여전히) 베를린 국립 도서관이 소유하고 있었으며,[72] 당시에도 소장품을 기꺼이 처분하려는 개인 수집가들은 사립 협회가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을 요구했다.[73]

이후 컬렉션은 오스카 폰 하세, 라이프치히 악보 출판사 C.F. 페터스와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의 기증, 그리고 필리프 슈피타, 빌헬름 루스트, 파울 그라프 발더제, 알로이스 오브리스트, 빌헬름 히스, 크리스토프 트라우트만의 유산으로 성장했다.

또한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세 권의 학교 노트, 1747년의 음악 헌정 초판(A부), 바흐의 유실된 ''음악 바흐 가계도''의 출처 C, 유실된 바흐 결혼 칸타타 ''Sein Segen fließt daher, wie ein Strom'' (BWV Anh. 14, 임마누엘 티에체, 라이프치히 1725)의 유일하게 알려진 가사, 오르드루프 바흐 가문의 실루엣 컬렉션, 카를 헤르만 비터와 같은 19세기 바흐 연구가들의 편지, 그리고 빌헬름 히스와 카를 제프너에 의한 (추정되는) 바흐 유골 발굴과 관련된 문서, 측정 및 주형(석고 및 청동 두개골 주형 포함)이 소장되어 있다.[79] 2013년, 바흐 하우스는 원래 152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손으로 쓴 합창 파트 중 62개를 획득했는데, 이 합창 파트는 펠릭스 멘델스존이 바흐 사후 처음으로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징아카데미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연주했을 때 합창단이 사용했던 것이다.[80]

3. 3. 2. 기타 소장품

1715년의 튀링겐 하프시코드가 전시되어 있다.[75] 야곱 하르트만의 하프시코드(약 1765년),[76] 요한 하인리히 실버만의 두 번째 스피넷(1765년),[77] 페달 클라비코드 (약 1815년)도 주목할 만하다.[78]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학교 노트 세 권, 1747년의 음악 헌정 초판(A부), 바흐의 유실된 ''음악 바흐 가계도''의 출처 C, 유실된 바흐 결혼 칸타타 ''Sein Segen fließt daher, wie ein Strom'' (BWV Anh. 14, 임마누엘 티에체, 라이프치히 1725)의 유일하게 알려진 가사, 오르드루프 바흐 가문의 실루엣 컬렉션 등이 소장되어 있다.[79] 카를 헤르만 비터와 같은 19세기 바흐 연구가들의 편지와, 빌헬름 히스와 카를 제프너에 의한 (추정되는) 바흐 유골 발굴과 관련된 문서, 측정 및 주형(석고 및 청동 두개골 주형 포함)도 보관되어 있다.[79]

2013년에는 펠릭스 멘델스존이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징아카데미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바흐 사후 처음으로 연주했을 때 합창단이 사용했던, 손으로 쓴 합창 파트 악보 62개(원래 152개 추정)를 획득했다.[80]

4. 특별 전시

5. 운영 및 사회적 기여

모든 부동산과 소장품은 신 바흐 협회(Neue Bachgesellschaft)가 소유하고 있다. 2001년 7월 5일부터 이 박물관은 신 바흐 협회를 유일한 협력사로 하는 등록된 자선 회사인 ''바흐하우스 아이제나흐 유한회사''(Bachhaus Eisenach gemeinnützige GmbH)가 관리하고 있다. 감독 위원회에는 신 바흐 협회, 아이제나흐 시, 루터교회, 튀링겐 자유주 정부의 대표가 참여한다. 박물관의 자금 지원은 신 바흐 협회, 아이제나흐 시, 튀링겐 자유주 간의 계약에 따른다. 공공 기금의 대부분은 튀링겐 주 정부에서 나온다. 티켓 판매, 상점 및 카페에서 발생하는 자체 수입은 박물관 연간 비용의 3분의 2를 충당한다. 기부금은 박물관 소장품 복원 및 구매에 사용된다.

1907년 바흐하우스 개관 이후 다음 박물관 관장들이 있었다.


  • 게오르크 보르네만 박사, 1907–1918 (조수: 알브레히트 괴러 박사, 작곡가이자 지휘자 게오르크 괴러의 형제, 1912–1914)
  • 에른스트 플라이셔, 1918–1923
  • 콘라트 프라이제, 1923–1964
  • 귄터 크라프트, 1964–1971
  • 일제 도미즐라프, 1971–1990
  • 클라우스 oefner 박사, 1990–2001
  • 프란치스카 넨트비히 박사, 2002–2005
  • 횔크 한센 박사, 2006년 이후

전시 디자이너 아틀리에 브뤼크너(Atelier Brückner)는 2008년 4월 12일 바흐 하우스(Bach House) 상설 전시의 혁신적인 새로운 디자인으로 아트 디렉터스 클럽(Art Directors Club)에서 동상 ADC 어워드를 수상했다.[88] 멀티미디어 설치물 ''워커블 컴포지션(walkable composition)''의 디렉터 마르크 탐쉬크(Marc Tamschick)는 2008년 5월 14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월드 미디어 페스티벌(World Media Festival)에서 최종 후보 디플로마를 받았다.[89] 바흐 하우스(Bach House) 상설 전시의 새로운 디자인으로 아틀리에 브뤼크너(Atelier Brückner)는 2008년 10월 24일 독일 실내 건축가 협회 ''BDIA''로부터 뛰어난 무대 디자인 특별상을 수상했다.[90]

5. 1. 운영 주체 및 재정

모든 부동산과 소장품은 신 바흐 협회(Neue Bachgesellschaft)가 소유하고 있다. 2001년 7월 5일부터 이 박물관은 신 바흐 협회를 유일한 협력사로 하는 등록된 자선 회사인 ''바흐하우스 아이제나흐 유한회사''(Bachhaus Eisenach gemeinnützige GmbH)가 관리하고 있다. 감독 위원회에는 신 바흐 협회, 아이제나흐 시, 루터교회, 튀링겐 자유주 정부의 대표가 참여한다. 박물관의 자금 지원은 신 바흐 협회, 아이제나흐 시, 튀링겐 자유주 간의 계약에 따른다. 공공 기금의 대부분은 튀링겐 주 정부에서 나온다. 티켓 판매, 상점 및 카페에서 발생하는 자체 수입은 박물관 연간 비용의 3분의 2를 충당한다. 기부금은 박물관 소장품 복원 및 구매에 사용된다.

5. 2. 역대 박물관장

신 바흐 협회(Neue Bachgesellschaft)가 소유하고 있는 바흐하우스는 1907년 개관 이후 다음과 같은 박물관장들이 있었다.

  • 게오르크 보르네만 박사, 1907–1918 (조수: 알브레히트 괴러 박사, 작곡가이자 지휘자 게오르크 괴러의 형제, 1912–1914)
  • 에른스트 플라이셔, 1918–1923
  • 콘라트 프라이제, 1923–1964
  • 귄터 크라프트, 1964–1971
  • 일제 도미즐라프, 1971–1990
  • 클라우스 oefner 박사, 1990–2001
  • 프란치스카 넨트비히 박사, 2002–2005
  • 횔크 한센 박사, 2006년 이후


2001년 7월 5일부터 이 박물관은 신 바흐 협회를 유일한 협력사로 하는 등록된 자선 회사인 ''바흐하우스 아이제나흐 유한회사''(Bachhaus Eisenach gemeinnützige GmbH)가 관리하고 있다. 감독 위원회에는 신 바흐 협회, 아이제나흐 시, 루터교회, 튀링겐 자유주 정부의 대표가 참여한다. 박물관의 자금 지원은 신 바흐 협회, 아이제나흐 시, 튀링겐 자유주 간의 계약에 따르며, 공공 기금의 대부분은 튀링겐 주 정부에서 나온다.

5. 3. 방문객 및 관광

바흐 하우스에는 연간 약 6만 명의 방문객이 찾아온다.[83] 이는 독일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음악 박물관 중 하나이며, 본의 베토벤 하우스에 이어 두 번째로 방문객이 많다.[84]

5. 4. 사회적 기여

전시 디자이너 아틀리에 브뤼크너는 2008년 4월 12일 바흐 하우스 상설 전시의 혁신적인 새로운 디자인으로 아트 디렉터스 클럽에서 동상 ADC 어워드를 수상했다.[88] 멀티미디어 설치물 ''워커블 컴포지션''의 디렉터 마르크 탐쉬크는 2008년 5월 14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월드 미디어 페스티벌에서 최종 후보 디플로마를 받았다.[89] 바흐 하우스 상설 전시의 새로운 디자인으로 아틀리에 브뤼크너는 2008년 10월 24일 독일 실내 건축가 협회 ''BDIA''로부터 뛰어난 무대 디자인 특별상을 수상했다.[90]

6. 부속 시설

6. 1. 바흐 기념비

바흐 하우스 앞에 있는 바흐 동상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기리는 두 번째 기념물이자, 작곡가를 전체 조각상 형태로 묘사한 최초의 기념물이다.[85] 조각은 아돌프 폰 돈도르프가, 주조는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의 헤르만 하인리히 호왈트가 맡았다.

1878년 아이제나흐의 문화를 사랑하는 시민들, 그중에서도 시의 칸토어 칼 뮐러-하르퉁과 작가 프리츠 로이터가 설립한 "데크말-위원회"(기념물 위원회)가 이 기념물 제작을 의뢰했다. 클라라 슈만, 한스 폰 뷜로, 요제프 요아힘, 프란츠 리스트는 자선 콘서트를 열어 기금 모금에 기여했고, 요하네스 브람스도 이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기념물은 1884년 9월 28일, 요제프 요아힘이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 바흐의 b단조 미사를 지휘한 연주회 후에 공개되었다. 처음에는 성 게오르기 교회 정문 앞 시장에 세워졌으나, 1938년 프라우엔플란이 재단장되면서 현재 바흐 하우스 앞으로 옮겨졌다.[86]

작곡가는 서 있는 모습으로, 오른손에는 깃털 펜을 들고, 왼손으로는 천사가 들고 있는 악보 더미에 기대고 있다. 기념물 받침대는 옮겨지면서 상당히 짧아졌다. 원래 받침대에 부착되어 있던 교회 음악의 수호성인인 성 체칠리아를 묘사한 부조는 현재 기념물 뒤의 돌담에서 볼 수 있다.[2]

6. 2. 빛 예술 작품

자르브뤼켄 출신의 빛 예술가 잉고 브라케(Ingo Bracke)는 아내 메리앤 키리아쿠(Mary-Anne Kyriakou)와 함께 싱가포르의 i Light Marina Bay 축제에 참여하여 바흐하우스를 위해 "IN VERSUS F: 빛의 악보 - 건축적 멜로디"(IN VERSUS F: A Score of Light – An Architectural Tune)라는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87] 이 작품은 2008년 12월 13일에 처음 공개되었으며, 2011년 3월 21일부터 영구적으로 설치되었다.[87] 일몰부터 오후 11시까지 매주 토요일 저녁과 공휴일 전날 저녁에 전시된다.[87]

참조

[1] 서적 Johann Sebastian Bach
[2] 서적 Bachstätten
[3] 서적 Bachhaus Eisenach
[4] 서적 Johann Sebastian Bach
[5] 문서
[6] 서적 Johann Sebastian Bach
[7] 서적 Johann Sebastian Bach
[8] 서적 Johann Sebastian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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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100 Jahre Bachhaus Eisenach http://www.eisenacho[...] 2011-11-16
[11] 서적 Das Bachhaus Eisenach
[12] 서적 Das Bachhaus Eisenach
[13] 서적 Johann Sebastian Bach Wilhelm Baensch, Berlin 1881
[14] 서적 Das Bachhaus Eisenach
[15] 서적 Bachstätten
[16] 서적 Fünfzig Jahre Bachhaus
[17] 서적 Das Bachhaus Eisenach
[18] 간행물 Drittes deutsches Bach-Fest zur Einweihung von Johann Sebastian Bachs Geburtshaus als Bach-Museum; Fest- und Programmbuch Neue Bach-Gesellschaft, Leipzig: Breitkopf & Härtel 1907
[19] 서적 Das Bachhaus Eisenach
[20] 서적 Fünfzig Jahre Bachhaus
[21] 문서 SMA Order No. 289 1946-07-13
[22] 서적 Fünfzig Jahre Bachhaus Eisen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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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뉴스 Bitte nicht so theatralisch singen https://www.faz.net/[...]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201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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