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규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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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영규는 후백제의 장군이자 고려 태조 왕건의 측근으로, 후백제 왕 견훤의 사위이다. 전라도 승주 출신으로, 경명왕의 후손이며, 후백제 멸망 과정에서 고려에 투항하여 후삼국 통일에 기여했다. 고려 건국 후 태조로부터 높은 대우를 받았으며, 딸들을 왕건과 정종에게 시집보내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삼중대광의 칭호를 받았으며, 드라마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등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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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후백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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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박영규 |
한자 표기 | 朴英規 |
로마자 표기 | Bak Yeong-gyu |
출생 | 미상 |
출생지 | 신라 |
사망 | 미상 |
사망지 | 고려 |
배우자 | 견애복 |
자녀 | 아들 2명 (이름 미상), 동산원부인, 문공왕후, 문성왕후 |
아버지 | 박언지 강남대군 (朴彦지 江南大君) |
가계 | |
본관 | 밀양 박씨 |
가문 | 순천 박씨 |
경력 | |
소속 왕조 | 신라, 후백제, 고려 |
직업 | 후백제의 무신 |
2. 생애
승평군(昇平郡)의 호족(豪族) 출신으로,[9] 후백제(後百濟) 왕(王) 견훤(甄萱)의 사위이자 장군으로 활동했다. 935년 장인 견훤이 아들 견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자 그의 탈출을 도와 고려(高麗)로 귀부하게 했으며,[3] 이듬해인 936년 자신도 부인 국대부인 견씨(甄氏)와 상의 후 고려(高麗)에 투항 의사를 밝히고 내응을 약속하여 후삼국 통일에 기여했다.[4]
고려 건국 이후에는 태조로부터 좌승(佐丞) 벼슬과 토지 1,000결을 하사받고,[5] 유천궁, 황보제공과 함께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는 등[6] 고려 조정에서 중용되었다. 또한 태조와는 형제처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7] 자신의 세 딸 중 동산원부인은 태조에게,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정종에게 시집보내 왕실과 깊은 인척 관계를 맺었다.[7]
2. 1. 후백제 시기
승평군(昇平郡)의 호족(豪族) 출신으로,[9] 전라남도 승주에서 태어났다.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후손으로도 알려져 있다.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의 사위가 되어 장군으로 활동하며 그를 섬겼다.935년 3월, 장인인 견훤이 맏아들 견신검 등이 일으킨 정변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3] 박영규는 같은 해 6월,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高麗)에 귀부하는 과정을 도왔다.[3]
936년 9월, 박영규는 부인 국대부인 견씨(甄氏)와 상의한 후[4] (부인은 견훤의 딸로 알려져 있다) 고려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투항 의사를 밝혔다. 그는 왕건이 견신검을 공격할 경우 내부에서 호응하겠다고 약속하며 고려군을 환영할 뜻을 전했다.[4] 왕건은 박영규의 귀부 의사를 크게 기뻐하며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4] 이후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킬 때 박영규는 약속대로 내응하여 후삼국 통일에 기여했다.[4]
고려로 귀부한 후, 박영규는 태조로부터 좌승(佐丞) 벼슬과 함께 토지 1,000결(또는 1,000경)[5]을 하사받았다. 그의 두 아들 역시 벼슬을 받았으며, 부인 견씨는 말 35필을 하사받았다.[5] 박영규는 유천궁, 황보제공과 더불어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삼중대광(三重大匡)의 칭호를 받았다.[6]
삼중대광으로서 박영규와 그의 부인은 태조와 형제처럼 지낼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7]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박영규는 자신의 딸들을 왕실과 혼인시켰다. 맏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은 태조의 17번째 부인이 되었고, 다른 두 딸 문공왕후(文恭王后)와 문성왕후(文成王后)는 태조의 아들이자 고려 제3대 왕인 정종(定宗)의 왕비가 되었다.[7]
2. 2. 고려 건국 이후
935년 3월, 장인인 견훤이 아들 견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자, 같은 해 6월 견훤이 탈출하여 고려로 귀부하는 것을 도왔다.[3] 이후 936년 9월, 박영규는 부인 견씨와 상의한 뒤 사신을 고려에 보내 투항 의사를 전하고, 태조가 후백제를 공격할 경우 내응하겠다고 약속했다.[4] 태조는 이를 매우 기뻐하며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4]이후 태조가 후백제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과정에서 박영규는 약속대로 내응하여 후삼국 통일에 기여했다.[4] 고려에 귀부한 뒤 박영규는 태조로부터 좌승 벼슬과 함께 토지 1,000결(頃)을 하사받았으며, 그의 두 아들도 관직을 받았다.[5] 또한 그의 부인 견씨에게는 말 35필이 하사되었다.[5] 박영규는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유천궁, 황보제공과 함께 삼중대광(三重大匡)의 칭호를 받았다.[6]
삼중대광의 지위에 오른 박영규는 태조와 형제처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7] 이를 바탕으로 큰딸 동산원부인을 태조의 17번째 부인으로 시집보냈고, 다른 두 딸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태조의 아들이자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종의 왕비가 되었다.[7]
3. 가계
아들 : 이름 미상 (순천 박씨)
아들 : 이름 미상 (순천 박씨)
딸 :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 고려 태조의 제17비
딸 : 문공왕후(文恭王后) - 정종의 제1비
딸 : 문성왕후(文成王后) - 정종의 제2비
4. 평가
후백제 견훤의 사위이자 장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936년 고려 왕건에게 서신을 보내 견신검을 칠 경우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 행동은 결과적으로 후백제 멸망과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후백제 멸망 후 고려로부터 우대를 받았으며, 그의 딸 두 명이 고려 제3대 정종의 왕비(문공왕후, 문성왕후)가 되는 등 새로운 왕조에서도 가문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웹사이트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가 귀부해오다
http://db.history.go[...]
2021-09-01
[2]
서적
朝鮮朝領議政朴元宗研究
https://books.google[...]
National Studies Archive
2001
[3]
서적
인물로 읽는 라이벌 한국사: 우리 역사를 바꾼 숙명의 라이벌 28인
https://books.google[...]
Apple Books
2015
[4]
웹사이트
「박영규전설」 - 디지털순천문화대전
http://suncheon.gran[...]
2021-09-01
[5]
서적
김갑동교수의태조왕건
https://books.google[...]
Ilbit
2000
[6]
서적
이야기 고려왕조실록 (상)
https://books.google[...]
Taoreum
2009
[7]
서적
朝鮮朝領議政朴元宗研究
https://books.google[...]
National Studies Archive
2001
[8]
웹사이트
'달의 연인' 최병모, 계략가 박영규로 본격 활약..브라운관-스크린의 신스틸러
https://m.breaknews.[...]
2016-09-28
[9]
문서
승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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