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베르크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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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밤베르크 대성당은 독일 밤베르크에 위치한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이다. 1002년 하인리히 2세의 지시로 최초 건축이 시작되어 여러 차례 화재와 재건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밤베르크 대성당은 다양한 건축 양식의 혼합, 네 개의 탑, 그리고 틸만 리멘슈나이더가 제작한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의 묘, 밤베르크 기수 등의 예술 작품으로 유명하다. 또한, 돔플라츠, 돔크란츠, 디외체산 박물관 등 주변 건축물과 함께 밤베르크의 중요한 문화 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밤베르크 대성당의 역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가 밤베르크에 교구를 설립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대성당 건설은 1002년에 시작되어 1012년 5월 6일, 하인리히 2세의 생일에 첫 봉헌식을 가졌다.[1] 이 초기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은 약 75m 길이였으나, 1081년과 1185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1][2][3]
2. 역사
현재의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 대성당은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 걸쳐 재건된 것으로, 1237년 5월 6일에 다시 봉헌되었다.[1][3] 이 시기 건설은 안덱스-메라니아 가문 출신 주교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대성당 내부에는 창립자인 하인리히 2세와 그의 아내 쿠니군데 황후를 기리는 틸만 리멘슈나이더의 정교한 조각 묘비(1499-1513년 제작)가 있다.[1] 또한, 1047년 클레멘스 2세의 유해가 로마에서 옮겨와 안장되면서, 밤베르크 대성당은 알프스 산맥 북쪽 지역에서 유일하게 교황의 무덤이 있는 곳이 되었다.[1]
고딕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예술 작품이 추가되었고, 17세기에는 두 차례에 걸쳐 내부가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세 양식 일부가 제거되고 새로운 제단이 설치되는 등 변화가 있었다.[3][4] 18세기에는 건축가 발타사르 노이만에 의해 참사회를 위한 건물이 증축되었다.[1]
1802-1803년 세속화 과정을 통해 밤베르크 주교령은 바이에른 선제후국 영토로 편입되었고, 1817년에는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19세기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는 대성당을 국가적 기념물로 보고, 1828년부터 1837년까지 바로크 양식 장식을 제거하고 중세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정화(Purification)' 작업을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바로크 시대 예술품들이 경매에 넘겨지고 로마네스크 부흥양식 요소들이 도입되었다.[3][5] 가장 최근의 변화는 1969년부터 1974년 사이의 보수 공사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에 따라 주 제단의 위치를 변경하는 등 내부 구조 조정이 이루어졌다.[3]
2. 1. 배경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하인리히 2세는 쫓겨난 아버지 하인리히 2세를 대신하여 995년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그는 밤베르크를 가장 좋아했으며, 1000년 봄 무렵 아내인 쿠니군데에게 결혼 선물로 그곳의 재산을 주었다. 1002년 독일 왕으로 선출된 하인리히는 밤베르크에서 정부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고, 도시에 화폐 주조권, 통행세 징수권, 시장 개설권 등 여러 특권을 부여했다. 1002년 말경 밤베르크에 교구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인리히는 독실한 신자였고, 그와 쿠니군데 사이에는 재산을 물려줄 자녀가 없었다. 또한 그의 왕국 동쪽 국경에는 교구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아이히슈테트 주교와 뷔르츠부르크 주교는 각각 자신의 교구 영토 일부를 잃게 되어 반대했지만, 1007년 만성절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제국 시노드(Reichssynode)는 밤베르크 교구 설립을 결정했다. 새 교구에는 왕실 영토, 특히 밤베르크 주변과 필라흐 근처의 땅이 기증되었으며, 쿠니군데는 밤베르크 자체를 기증했다. 초대 주교(재임 1007년~1040년)는 하인리히의 전 참사관이었던 에버하르트 1세였으며, 그는 이전 왕궁(Königspfalz)에 거처를 정했다. 1007년에서 1020년 사이에 밤베르크 교구는 교황 직할이 되어 마인츠 대주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하인리히 왕(101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은 대성당의 장의원이 되었다.[1]
2. 2. 건설 과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는 995년 바이에른 공작이 된 후 밤베르크를 가장 좋아했으며, 1000년경 아내인 쿠니군데에게 결혼 선물로 그곳의 재산을 주었다. 1002년 독일 왕으로 선출된 하인리히는 밤베르크에서 정부 업무를 수행하며 도시에 화폐 주조권, 통행세, 시장 개설권 등 여러 특권을 부여했다. 아마도 1002년 말, 그는 밤베르크에 교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그의 독실함, 후사가 없는 점, 그리고 왕국 동쪽 국경에 교구가 부족했던 상황 등이 배경이 되었다. 아이히슈테트 주교와 뷔르츠부르크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00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제국 시노드에서 밤베르크 교구 설립이 결정되었다. 교구는 왕실 영토, 특히 밤베르크 주변과 빌라흐 근처의 영토를 기증받았으며, 쿠니군데는 밤베르크 자체를 기증했다. 초대 주교(1007-1040)는 하인리히의 전 참사관이었던 에버하르트 1세였다. 1007년 또는 1020년에 교구는 교황 직속이 되어 마인츠 대주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났고, 하인리히 왕(1014년 황제 즉위)은 대성당의 장의원이 되었다.[1]
밤베르크 대성당의 첫 건축은 1002년 두 개의 지하실 공사로 시작되어, 1012년 5월 6일 하인리히의 생일에 성별(聖別)되었다. 이 첫 대성당은 서쪽에 주(主)합창단, 동쪽에 두 번째 합창단이 있는 십자형 바실리카 양식이었으며, 각 합창단은 지하실 위에 자리했다. 동쪽 정면에는 두 개의 탑이 있었고, 신랑은 평평한 나무 천장으로 덮여 있었다. 이 대성당은 현재 건물보다 작아 길이가 약 75m 정도였다. 그러나 1081년 부활절 주간에 화재가 발생하여 내부 예술품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건물 자체의 손상은 비교적 경미했다. 복구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어 1087년에는 시노드를 개최할 수 있을 정도였다.[1] 오토 폰 밤베르크 주교는 교회를 완전히 재건했고, 1111년에 다시 성별되었다.[2][3] 하지만 재건된 교회 역시 1185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1]
한편, 1047년에는 클레멘스 2세 교황(1040~1046년 밤베르크 주교)의 시신이 로마에서 밤베르크로 옮겨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9세기 초 함부르크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있던 베네딕토 5세 교황의 묘가 파괴되면서, 이 묘는 알프스 북쪽 지역(독일)에서는 유일한 교황의 무덤이다. 다른 교황들은 모두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안장되었다.[1]
현재의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 대성당은 안덱스-메라니아 가문 출신의 오토 6세 폰 안덱스(1177~1196년 주교), 에크베르트 폰 밤베르크(1203~1237년 주교), 포포 폰 안덱스-메라니엔(1237~1242년 주교) 등 세 주교에 의해 짧은 중단기를 거치며 건설되었다.[1] 대성당 참사회의 재력과 안덱스-메라니아 가문의 후원으로 크고 화려한 건물이 세워졌으며, 1237년 5월 6일에 성별되었다.[1][3]
창립자인 하인리히는 1146년, 쿠니군데는 1200년에 시성되었으며, 1499년부터 1513년까지 조각가 틸만 리멘슈나이더가 이들의 묘비를 제작했다. 고딕 시대에는 많은 다른 예술 작품들이 추가되었다.[1]
17세기에는 두 차례에 걸쳐 대성당 내부가 바로크 양식으로 변경되었다. 첫 번째는 요한 고트프리트 폰 아슈하우젠 주교 시절로, 중세의 채색 유리창이 제거되고 1626년 이후 내부는 흰색으로 칠해져 프레스코화가 덮였다. 두 번째는 30년 전쟁 이후 1648년부터 1653년까지 멜키오르 오토 포이트 폰 잘츠부르크 주교 시절에 이루어졌는데, 이때 하인리히와 쿠니군데의 묘비가 옮겨지고 성가대 칸막이(rood screen)가 철거되었으며, 두 합창단에 새로운 제단이 설치되었다.[3][4] 1729년부터 1733년까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뷔르츠부르크 궁전의 건축가 발타사르 노이만이 대성당 참사회를 위한 행정 사무 공간인 장실을 추가했다.[1]
1802년에서 1803년 사이 밤베르크 주교령은 세속화되어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영토가 되었고, 1817년 밤베르크는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는 대성당을 국가 기념물로 여겨, 1828년부터 1837년까지 바로크 양식의 변경 사항들을 제거하는 "정화" 작업을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를 원래의 중세 상태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바로크 시대의 제단과 다른 조각상들이 경매에 부쳐졌고, 그 자리는 로마네스크 부흥양식 예술품으로 대체되었다.[3][5]
가장 최근의 변화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의 보수 공사 중에 이루어졌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주 제단을 동쪽 합창단에서 서쪽 합창단 앞으로 옮기는 등의 변경이 있었다.[3]
2. 3. 근현대
17세기에는 두 차례에 걸쳐 대성당 내부가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첫 번째는 요한 고트프리트 폰 아슈하우젠 주교 시절에 이루어졌는데, 중세의 채색 유리창이 제거되었고 1626년 이후 내부는 흰색으로 칠해지면서 프레스코화가 덮였다. 두 번째는 30년 전쟁이 끝난 후 1648년부터 1653년까지 멜키오르 오토 포이트 폰 잘츠부르크 주교 시절에 이루어졌다. 이때 하인리히와 쿠니군데의 묘비가 옮겨졌고, 성가대 칸막이(rood screen)는 철거되었으며, 두 성가대에 새로운 제단이 설치되었다.[3][4]
1729년부터 1733년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뷔르츠부르크 궁전의 건축가 발타사르 노이만이 대성당 참사회(chapter)를 위한 행정 건물(chapter house)을 추가했다.[1]
1802/3년에 밤베르크 주교구는 세속화되었고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일부가 되었다. 1817년에 밤베르크는 대교구가 되었으며, 이 관구에는 슈파이어 교구, 뷔르츠부르크 교구, 아이히슈테트 교구가 포함된다.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는 대성당을 국가 기념물로 여겼고, 그의 지시에 따라 1828년부터 1837년까지 "정화" 작업이 이루어져 바로크 양식의 변경 사항들이 제거되었다. 교회를 원래의 중세 상태로 되돌리려는 시도 속에서 제단과 다른 조각상들이 경매에 부쳐졌고, 바로크 예술은 로마네스크 부흥 양식 예술로 대체되었다.[3][5]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이루어진 보수 공사 중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회가 변경되었는데, 예를 들어 주 제단을 동쪽 성가대에서 서쪽 성가대 앞으로 옮기는 작업이 이루어졌다.[3]
3. 건축
3. 1. 외관
현재의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 대성당은 안덱스-메라니아(Andechs-Merania) 가문의 세 인물, 즉 오토 6세 폰 안덱스(Otto VI. von Andechs, 1177~1196년 주교), 에크베르트 폰 밤베르크(Ekbert von Bamberg, 1203~1237년 주교), 그리고 포포 폰 안덱스-메라니엔(Poppo von Andechs-Meranien, 1237~1242년 주교)에 의해 건설되었다.[1] 1237년 5월 6일에 성별되었다.[3] 대성당의 길이는 약 94m, 너비는 28m, 높이는 26m이며, 네 개의 탑은 각각 약 81m 높이이다.
오랜 건축 기간 때문에 대성당의 여러 부분에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합되어 사용되었다. 이 두 양식 사이의 전이 양식은 신랑(nave) 부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현존하는 건물은 네 개의 큰 탑을 가진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동쪽 탑은 원래 더 낮았으나, 1766년 이후 건축가 요한 야코브 미하엘 퀴헬(Johann Jacob Michael Küchel)에 의해 첨탑이 뾰족한 박공지붕이 추가되어 서쪽 탑과 같은 높이로 높아졌다.[1] 서쪽 탑은 초기 고딕 양식이다.
3. 2. 내부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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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 대성당은 13세기에 안덱스-메라니아 가문의 주교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1], 1237년 5월 6일에 성별되었다.[3] 밤베르크 대성당은 양쪽 끝에 합창단(choir)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동쪽 합창단은 대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으로 순수 로마네스크 양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서쪽 합창단은 초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1]
=== 동쪽 합창단 ===
동쪽 합창단은 아래에 암실(Krypta)이 있기 때문에 바닥이 높게 올라가 있으며, 성 조지에게 봉헌되었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 남쪽 합창단 칸막이를 장식하는 인물들 중, 처음 세 쌍의 사도상은 "자비의 문"(''Gnadenpforte'')을 만든 석공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다른 인물들과 북쪽 칸막이에 있는 열두 명의 예언자상은 후대의 양식을 보여준다. 조각된 키메라와 사자들이 있는 합창석은 14세기에 만들어졌다.[1] 앱스의 프레스코화는 비교적 최근인 1927년에서 1928년 사이에 제작되었다.[3]
=== 서쪽 합창단 ===
서쪽 합창단은 초기 고딕 양식이며, 그 둥근 천장은 1232년에 건설되었다.[1] 이곳은 교황을 상징하는 성 베드로에게 봉헌되어 있다. 서쪽 합창단에는 1904년에 제작된 감독좌[3]와 그 뒤편에 클레멘스 2세 교황의 무덤이 있다. 1047년, 클레멘스 2세 교황(1040~1046년 밤베르크 주교)의 시신이 로마에서 밤베르크로 옮겨져 이곳에 안장되었다. 19세기 초 함부르크의 성모 대성당에 있던 베네딕토 5세 교황의 묘가 파괴되면서, 클레멘스 2세의 무덤은 독일에서 유일한 교황의 무덤이 되었다. 다른 모든 교황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묻혔다.[1] 좌우에는 풍부하게 조각된 고딕 양식(14세기 후반)의 합창석이 있다. 뒤쪽에는 "십자가 제대"(''Kreuzaltar'')가 합창단의 중심을 이룬다. 예수,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요한의 인물상은 1652년에서 1653년 사이에 유스투스 글레스커(Justus Glesker)가 금박을 입힌 너도밤나무로 제작했으며, 1835년 정화 과정에서 경매로 팔렸다가 1915년에 다시 사들여 1917년에 세워졌다. 앞쪽에는 20세기의 "민중 제대"(''Volksaltar'')가 있으며, 그 위에는 큰 회전 샹들리에가 있다.[1] 예수의 삶의 장면을 보여주는 여러 개의 청동판이 장착된 이 사암 기단은 1974년에서 1975년 사이에 클라우스 바크문트(Klaus Backmund)가 만들었다.[3]
=== 트랜셉트 ===
북쪽 익랑(Transept)에는 후기 고딕 양식(약 1500년경)의 마리아를 위한 제단, 이른바 뮐하우젠 제단(''Mühlhausener Altar'')이 있다. 이 제단은 원래 뮐하우젠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있었으나, 1781년에 교체된 후 1891년에 매각되었다. 요제프 폰 쇼르크(Joseph von Schork) 대주교에게 기증된 후, 1904년에 대성당에 기증되었다.[1][3]
남쪽 익랑에는 1520년에서 1523년 사이에 예술가 파이트 슈토스(Veit Stoss)가 린든 나무로 제작한 대형 성탄 제단이 있다. 원래는 뉘른베르크의 카르멜리터 수도원(''Karmeliterkloster'') 교회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1524년 종교 개혁이 뉘른베르크에 도래한 후 시의회는 제단 설치를 거부했다. 파이트 슈토스의 아들 안드레아스 슈토스는 1543년에 이 제단을 밤베르크로 가져와 ''오베레 파레'' 교회에 세웠다. 이 제단은 1937년에야 대성당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교회로부터 영구 대여 형식으로 소장되어 있다. 제단은 미완성 상태이며(예: 프레델라는 제작되지 않음), 슈토스 자신이 직접 만든 부분은 일부이고 나머지는 그의 공방에서 제작되었다.[1][3]
=== 본당 및 측랑 ===
본당(Nave)은 동쪽과 서쪽 합창단을 연결하며, 교회 전체 길이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본당에는 황제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 황후의 묘소, 유명한 밤베르크 기수상(Bamberger Reiter), 19세기 초의 강단 그리고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두 개의 주목할 만한 제단이 측랑(side aisles)에 있다. 하나는 키르히가텐도르퍼 제단(''Kirchgattendorfer Altar'')으로, 마리아에게 봉헌된 16세기 제단이다. 이 제단은 윗프랑켄(Oberfranken) 가텐도르프(Gattendorf)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1921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다른 하나는 소위 리멘슈나이더 제단(''Riemenschneider Altar'')으로, 1500년경의 다양한 기원을 가진 개별 조각상들을 1926년에 조립한 것이다. 이 제단은 틸만 리멘슈나이더(Tilman Riemenschneider) 작업장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세바스티안 성인상(St. Sebastian)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3]
3. 3. 지하실
밤베르크 대성당 건축은 1002년 두 개의 지하실 공사로 시작되었다. 최초의 대성당은 서쪽 주합창단과 동쪽 두 번째 합창단 아래에 각각 지하실을 두었다.[1]
서쪽 지하실은 한때 돌무더기로 채워져 있었으나, 1987년부터 1995년까지 발굴 및 복원 작업을 통해 재개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인리히 2세 황제가 처음 지었던 대성당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현재 서쪽 지하실은 밤베르크 대주교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사용되고 있으며, 1998년 요제프 슈나이더 대주교(1955-1976 재임)가 처음으로 안장되었다. 또한, 1997년에는 북서쪽 탑 아래에 성당 건립자인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 황후의 두개골을 모시기 위한 예배당('Häupterkapelle', 머리 예배당)이 마련되었다. 두개골은 유리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쿠니군데 황후의 두개골은 이전에는 동쪽 합창단 벽의 '존넨로흐'(Sonnenloch, 햇빛 구멍) 뒤쪽 보관함에 있었다.[3]
동쪽 지하실은 현재의 대성당이 건설되던 시기인 1200년경에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19세기와 20세기에 성당 중앙 통로에서 옮겨온 무덤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11세기와 12세기의 주교들과 독일의 콘라트 3세 왕의 무덤이 있다. 콘라트 3세는 1152년 밤베르크에서 사망했으며, 처음에는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 황후 옆에 묻혔었다. 동쪽 지하실에는 세례 의식에 사용되는 우물도 있다.[3]
3. 4. 예배당
북쪽 트랜셉트에는 후기 고딕 양식(약 1500년경)으로 만들어진 마리아를 위한 제단, 이른바 뮐하우젠 제단(''Mühlhausener Altar'')이 있다. 이 제단은 원래 뮐하우젠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있었으나, 1781년 교체된 후 1891년에 매각되었다. 요제프 폰 쇼르크 대주교에게 기증된 뒤, 1904년에 대성당으로 옮겨졌다.[1][3]
남쪽 트랜셉트에는 예술가 파이트 슈토스(Veit Stoss)가 1520년에서 1523년 사이에 린든 나무로 제작한 대형 성탄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본래 뉘른베르크의 카르멜리터 수도원(''Karmeliterkloster'') 교회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1524년 종교 개혁이 뉘른베르크에 도입되면서 시의회가 제단 설치를 거부했다. 1526년 밤베르크로 이주한 파이트 슈토스의 아들 안드레아스 슈토스가 1543년에 이 제단을 밤베르크로 가져와 ''오베레 파레(Bamberg)'' 교회에 설치했다. 제단은 1937년에야 대성당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해당 교회로부터 영구 대여 형식으로 소장 중이다. 제단은 미완성 상태로, 예를 들어 프레델라는 제작되지 않았다. 또한 슈토스 본인이 직접 만든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그의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1][3]
나겔카펠레(Nagelkapelle, "십자가 못 성당")는 예전에 대성당 장(章) 수도회원들이 매장되었던 장소이자 회의실이었다. 매장지에서 나온 청동판들은 현재 벽으로 옮겨졌다. 후기 고딕 양식의 방 안쪽에는 약 1500년경에 만들어진 목조 고딕 제단이 있다. "나겔카펠레"라는 이름은 십자가의 못으로 여겨지는 못에서 유래했는데, 이 성물은 14세기부터 밤베르크에서 숭배되어 왔다.[1][3]
과거 안토니우스 또는 게르트루드 예배당이었던 공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74년에 재봉헌되었다. 현재 이곳은 성체를 위한 성사빵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예배당에는 루카스 크라나흐 구세주(Lucas Cranach the Elder)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림(''Rosenkranzgemälde'', 약 1520년경)이 소장되어 있다.[1]
4. 주요 예술 작품
본당(Nave)은 동쪽과 서쪽 합창단(choir)을 연결하며, 교회 전체 길이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본당에는 황제의 묘소, 밤베르크 기수(Bamberger Reiter), 19세기 초의 강단 그리고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측랑(side aisles)에는 두 개의 주목할 만한 제단이 있다. 하나는 키르히가텐도르퍼 제단(Kirchgattendorfer Altar)으로, 마리아에게 봉헌된 16세기 제단이며 1921년 오버프랑켄 가텐도르프(Gattendorf)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다른 하나는 소위 리멘슈나이더 제단(Riemenschneider Altar)으로, 1500년경의 다양한 기원을 가진 개별 조각상들을 1926년에 조립한 것이다. 이 제단은 리멘슈나이더 작업장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성 세바스티안 상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3]
4. 1. 조각상
대성당 내부와 외부에는 많은 조각상들이 있다.
북쪽 트랜셉트에는 후기 고딕 양식(약 1500년경)으로 만들어진 마리아를 위한 제단(뮐하우젠 제단, ''Mühlhausener Altar'')이 있다. 이 제단은 원래 뮐하우젠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있었으나, 1781년에 교체된 후 1891년에 매각되었다. 요제프 폰 쇼르크(Joseph von Schork) 대주교에게 기증된 후, 1904년에 대성당으로 옮겨졌다.[1][3]
남쪽 트랜셉트에는 예술가 파이트 슈토스(Veit Stoss)가 1520년에서 1523년 사이에 린든 나무로 제작한 대형 성탄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본래 뉘른베르크의 카르멜리터 수도원(''Karmeliterkloster'') 교회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1524년 종교 개혁이 뉘른베르크에 도입되면서 시의회는 제단 설치를 거부했다. 파이트 슈토스의 아들 안드레아스 슈토스는 1526년 밤베르크로 이주했고, 1543년에 이 제단을 밤베르크로 가져와 ''오베레 파레(Bamberg)'' 교회에 세웠다. 제단은 1937년에야 대성당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해당 교회로부터 영구 대여 형식으로 보관 중이다. 이 제단은 프레델라 등이 제작되지 않은 미완성 상태이며, 슈토스 자신이 직접 만든 부분은 일부이고 나머지는 그의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1][3]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 황제 부부의 무덤 근처, 북서쪽 합창단 기둥에는 아칸서스 잎 모양 받침대 위에 기마상이 서 있는데, 이를 밤베르크 기수(''Bamberger Reiter'')라고 부른다. 이 기마상이 누구를 묘사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성당의 오랜 역사 동안 선호되는 해석은 계속 바뀌어 왔다. 낭만주의 시대 사람들은 그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독일 황제로 생각했다. 나치 정권은 그를 동쪽으로 새로운 영토 정복을 추구하는 독일적 완벽함의 상징으로 여겨, 기수의 그림을 학교, 숙소, 주택 등에 널리 전시했다.[1]
현재는 현대 기술을 통해 조각상에 사용된 원래 색상이 밝혀지면서, 그가 11세기 헝가리의 왕 이슈트반 1세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조각가는 자신의 흔적만 남긴 채 신원을 밝히지 않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는 동쪽 합창단 칸막이의 인물들(마리아와 엘리사벳)과 ''프리스텐포르탈''의 최후의 심판 조각 제작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밤베르크 기수''는 로마 시대 이후 독일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기마상으로 추정된다.[1]
중세 시대 많은 주교들의 무덤이 대성당 내부에 남아 있지만, 후대의 무덤 대부분은 19세기 대성당 "정화" 작업 과정에서 미하엘스키르헤로 옮겨졌다.[1]
4. 2.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의 묘
밤베르크 대성당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예술 작품 중 하나는 대성당의 창시자인 하인리히 2세 황제와 그의 아내 쿠니군데 황후의 묘이다. 이 묘는 조각가 틸만 리멘슈나이더가 1499년부터 1513년까지 14년에 걸쳐 제작하였다.[1] 재료는 광택 처리된 졸른호펜 석회암과 프랑켄 주라산 대리석을 사용했다.묘는 동쪽 합창단 근처에 있으며, 아래에 지하 납골당이 있기 때문에 바닥보다 약 1.7m 높게 설치되어 있다. 묘의 윗부분에는 황제와 황후가 누워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는 후기 고딕 양식의 캐노피가 덮여 있다. 묘의 측면에는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황실 부부의 삶과 관련된 여러 일화를 보여준다. 주요 장면으로는 간통 혐의를 받은 쿠니군데 황후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붉게 달구어진 쟁기날 위를 걷는 모습, 성 슈테판 교회 건설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모습, 성 베네딕토가 하인리히 2세 황제의 병을 고쳐주는 모습, 황제의 죽음과 대천사 미카엘이 그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모습 등이 있다. 이 조각들은 화가 볼프강 카츠하이머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하인리히 2세는 1146년에, 쿠니군데는 1200년에 시성되었다.[1] 17세기 중반, 멜키오르 오토 포이트 폰 잘츠부르크 주교 시절에 대성당 내부를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하면서 이 묘비가 다른 장소로 옮겨지기도 했다.[3][4]
4. 3. 문(Portals)
대성당 내부와 외부에는 많은 조각상이 있다. 세 개의 주요 문에는 수많은 조각 장식이 있다.
동쪽 탑으로 이어지는 아담 문(de)과 마리아 문(de) 또는 은총 문(de)은 각각 하인리히 2세의 원래 대성당에서 가져온 로마네스크 양식의 사자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담 문에는 성 스테파누스, 쿠니군데, 하인리히 2세, 성 베드로,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복제품)이 있다. 은총 문은 롬바르드 양식의 깔때기 모양 문이다. 타이머넘에는 한쪽에는 성 베드로와 성 조지가, 다른 쪽에는 쿠니군데와 하인리히가 경배하는 마리아가 묘사되어 있다.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는 인물들은 왼쪽의 에크베르트 주교, 오른쪽의 안데히스-메라니아의 성당 주임 사제 포포(de)일 가능성이 있는 성직자, 그리고 1229년에서 1231년 사이 공사의 건축가인 "프라터 보르트비누스(la)"를 모델로 한 십자군 전사일 가능성이 있는 중앙 인물로 해석된다.[1]
대성당의 이중 합창단 구조 때문에 서쪽이 아닌 북쪽 벽 중앙에 위치한 주요 문은 제후 문(de)이라고 불리며, 축일(聖日)에만 열린다. 이 문은 북쪽 측면 통로로 연결되며, 후기 로마네스크 시대 장인들(예언자와 사도)이 만들기 시작했지만 초기 고딕 시대 장인들이 완성했다(최후의 심판이 타이머넘에 있다). 기둥 위에 있는 조각상(복제품)은 교회와 회당이다(원본은 1937년에 옮겨졌다). 또한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아브라함과 천사의 조각상도 있다.[1][3]
파이트 문(de)은 초기 고딕 시대의 작은 출입구이다. 이 문은 시토회가 프랑스에서 남부 독일로 가져온 양식, 예를 들어 에브라흐 수도원과 같은 양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문은 남쪽 횡단부로 연결된다.[1]
4. 4. 교황 클레멘스 2세의 무덤

클레멘스 2세(1005년~1047년) 교황의 묘는 13세기 전반에 조각된 부조가 네 면 모두에 새겨진 은회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네 면에는 네 추기경 미덕, 교황의 죽음과 미카엘 천사, 낙원의 강, 그리고 세례자 요한(혹은 세상을 심판하는 그리스도)이 묘사되어 있다.[1]
4. 5. 오르간
밤베르크 대성당에 오르간이 처음 설치된 것은 1415년이다. 1868년에 제작된 오르간은 여러 문제를 일으켜 5년 후에 재건축되었지만, 좋은 음색 덕분에 1940년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대성당에 있는 오르간은 1976년 오르간 제작자 리거(Rieger)가 제작한 것으로, 4개의 건반과 페달 건반을 갖추고 있으며 외함 모서리에는 네 개의 천사상이 장식되어 있다. 대성당 역사상 모든 오르간은 최고의 음향을 얻을 수 있는 북쪽 벽에 설치되었다.[3]
매년 대성당에서는 약 40회의 오르간 콘서트가 열린다.
5. 주변 건축물
수도원(클로이스터, cloisters)과 발타사르 노이만(Balthasar Neumann)이 건설한 인접한 장(章)회관에는 현재 디외체산 박물관(Diözesanmuseum Bamberg)(대성당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5. 1. 돔플라츠(Domplatz)

대성당 광장, 즉 돔플라츠에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Alte Hofhaltung|알테 호프할퉁deu과 바로크 양식의 Neue Residenz|노이에 레지덴츠deu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들은 각각 15세기부터 1602년까지, 그리고 1602년부터 1803년까지 밤베르크 주교들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원래 Hofplatz|호프플라츠deu 또는 Burgplatz|부르크플라츠deu로 불렸던 이 광장은 세속화 이후 당시 바이에른의 왕비였던 카롤리네(Caroline Augusta of Bavaria)를 기리기 위해 Karolinenplatz|카롤리네플라츠deu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9년에 이르러서야 Domplatz|돔플라츠deu가 공식 명칭이 되었는데, 이전에는 대성당 바로 주변 지역만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5. 2. 돔크란츠(Domkranz)
돔크란츠(Domkranz)는 돔플라츠(Domplatz)에서 두 개의 넓은 계단으로 오를 수 있는 테라스이다. 이곳에서 아담스포르테(Adamspforte)와 그나덴포르테(Gnadenpforte)를 통해 대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6. 대중문화
밤베르크 대성당(게임 내 이름: 레그니츠 대성당)은 Age of Empires IV에서 신성 로마 제국 문명의 종교 성채 시대 랜드마크로 등장한다.
7. 이미지 갤러리
참조
[1]
서적
Franken – Kunst, Geschichte und Landschaft (German)
Dumont Verlag
[2]
웹사이트
Chronologie: 1081 (German)
http://bamberger-dom[...]
Erzbistum Bamberg
2016-07-20
[3]
서적
Der Bamberger Dom – Schatz des Glaubens (German)
Erzbischöfliches Generalvikariat Bamberg
[4]
웹사이트
Chronologie: 1611 (German)
http://bamberger-dom[...]
Erzbistum Bamberg
2016-07-20
[5]
웹사이트
Chronologie: 1829 (German)
http://bamberger-dom[...]
Erzbistum Bamberg
201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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