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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넉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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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넉번 전투는 1314년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스코틀랜드의 독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스코틀랜드의 스털링 성을 구원하려 했으나,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지형을 활용하고 보병 중심의 전술을 펼쳐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굳건히 하고, 중세 전쟁에서 보병의 중요성을 입증했으며, 잉글랜드는 궁병과 기병의 협동 전술의 어려움을 깨닫게 되었다. 배넉번 전투는 스코틀랜드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다양한 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현재는 기념비와 방문자 센터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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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넉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전투 정보
전투 이름배넉번 전투
일부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날짜1314년 6월 23일 – 24일
장소스코틀랜드, 스털링 남쪽의 배넉번
결과스코틀랜드의 결정적인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스코틀랜드 왕국
교전국 2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지휘관 1로버트 1세
에드워드 브루스
로버트 키스 경
제임스 더글러스
토머스 랜돌프
길버트 2세 드 라 헤이 경
월터 스튜어트
앙구스 오그 맥도날드
알렉산더 세튼 경
지휘관 2에드워드 2세
험프리 드 보운
에이머 드 발렌스
길버트 드 클레어
로버트 드 클리퍼드
헨리 드 보몬트
병력 규모
병력 15,000–8,000명
병력 220,000–25,000명
사상자 규모
사상자 1경미함 (추정 약 100명)
사상자 2기사 및 무장병 700명 사망
기사 및 무장병 500명 포로
보병 최대 11,000명 사망
문화재 지정
지정 종류영국 등록 전장
지정 날짜2011년 3월 21일
지정 번호BTL4
이미지
"스코티크로니콘(c. 1440)에서 묘사한 전투 장면. 로버트 왕이 도끼를 휘두르고 에드워드 2세가 스털링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케임브리지
호컴 성경 (1327-1335)에 묘사된 전투 장면
기타 정보
전투의 다른 이름

2. 배경

1296년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에드워드 1세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군은 던바 전투와 베릭 함락에서 승리하며 우세를 점했다.[71][13] 스코틀랜드의 왕 존 발리올은 왕위에서 물러났다.[13] 1297년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을 격파했으나, 1298년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폴커크 전투에서 승리했다.[13] 1304년 스코틀랜드는 완전히 점령당했으나, 1306년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왕좌를 차지하면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71][13]

에드워드 1세가 죽은 뒤, 1307년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가 즉위하였으나, 아버지와 같은 리더쉽을 보여주지 못했다.[71][13]

1313년, 로버트 1세는 발리올 지지파에게 충성을 요구하며, 잉글랜드 측 요새인 스털링 성의 항복을 요구했다. 스털링 성은 북쪽의 하이랜드 지방으로 가는 길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잉글랜드 군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71][13] 1314년 로버트 1세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가 스털링 성을 포위했고, 1314년 6월 24일까지 포위를 풀지 못하면 항복하겠다는 합의를 했다.[71]

잉글랜드는 이를 무시할 수 없었고, 스코틀랜드 원정을 준비했다. 에드워드 2세는 잉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등지에서 2,000명의 중장기병과 25,000명의 보병을 소집했으나, 실제로는 절반 정도만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이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스코틀랜드 원정이었다. 스코틀랜드군은 6,000여 명으로 추정되며, 기병은 500명 이하였다.[71][67] 스코틀랜드군의 기병은 산병전이나 정찰에만 적합했다. 스코틀랜드군의 보병들은 도끼나 검, 파이크 등으로 무장했으며, 궁수는 소수였다.[71][68]

스코틀랜드군에 비해 잉글랜드군의 정확한 수치적 차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 연구진은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의 1.5배에서 3배 정도라고 추정하고 있다.[72]

홀컴 성서(Holkham Bible), 1330년경: 성서 전투 묘사, 배넉번 전투에서 병사들이 어떻게 무장했는지 보여줌.


1272년에 즉위한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 정복자이자 "스코틀랜드의 망치"였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 전쟁에서의 경험을 통해 궁병의 가치를 확신하고, 왕국 전역에서 많은 궁병을 모집했다. 1296년 잉글랜드군의 스코틀랜드 침공에서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윌리엄 월리스의 지형을 이용한 전술에 패배했지만(1297년, 스터링 브리지 전투), 1298년 팔커크 전투에서는 중장기병과 궁병의 연계 작전으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다. 당시 스코틀랜드군은 밀집대형을 유지하는 많은 창병과 검과 방패를 든 병사들로 구성되었지만, 무장이 열악하여 잉글랜드군과 정면으로 충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팔커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스코틀랜드군은 로버트 1세마저 항복을 제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에드워드 1세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인 스터링 성을 점령했다.

이후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에 항복했다가 반란을 반복하며, 한때 라스린 섬으로 도망칠 정도로 궁지에 몰렸지만, 1307년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하자 급속도로 세력을 회복하여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권위를 확립했다. 에드워드 1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의 군사적 재능을 이어받지 못했고, 결전을 피하고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며, 고립된 성을 점령하는 로버트 1세의 전략 앞에 수세에 몰렸다. 1314년 스코틀랜드군이 스터링을 포위하는 상황에 이르자, 에드워드 2세는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여 스터링 구원에 나섰다. 배넉번은 스터링 성 남서쪽에 위치하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개의 "시내"와 연못이 있는 습지대였고, 남쪽(잉글랜드 측)에서 스터링 성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2. 1.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군사력



1314년 6월 23일 아침, 로버트 더 브루스 왕은 포스 강 너머 북쪽으로 이동할지, 아니면 서쪽으로 강을 따라 이탄지대와 구릉 지대로 이동할지 결정해야 했다.[15] 로버트는 후자를 택했고, 이는 에드워드 2세와 그의 귀족들의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군은 스털링을 "구출"하기 위해 서둘러 진군하며 일주일에 70마일을 행군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에드워드 2세가 숙련된 군대의 지휘관이 아닌 순례자처럼 행동했다고 비판하며, 이로 인해 말과 기병, 보병이 과로와 기아로 극도로 지쳐 있었다고 평가한다.[15]

에드워드 2세와 그의 고문들은 스코틀랜드 군이 도전할 만한 장소를 파악하고, 포스 강 근처 습지에 주둔한 적에 대비해 군대에 준비 명령을 내렸다.[13] 영국군은 4개 부대로 진격했고, 스코틀랜드군은 창을 든 병사들로 구성된 강력한 방어 진형인 쉴트론(schiltron)을 구성했다.[13][16] 모레이 1세 백작 토마스 랜돌프(Thomas Randolph, 1st Earl of Moray)는 스털링 남쪽 약 1마일 지점, 세인트 니니안 교회 근처에 주둔한 스코틀랜드 선봉대를 지휘했고, 왕은 뉴파크 입구에 후위대를 지휘했다. 그의 형제 에드워드는 제3부대를, 제4부대는 명목상으로는 월터 스튜어트 경이, 실제로는 제임스 더글러스 경이 지휘했다.[17] 스코틀랜드 궁수들은 주목 나무로 만든 장궁을 사용했는데, 이는 영국 장궁과 강도가 같았지만 수는 더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18] 전투 직후 포로로 잡힌 카르멜회 수사(Carmelite) 로버트 바스턴이 쓴 시에는 투석기와 석궁병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20]

잉글랜드군은 2,000명의 중장기병과 25,000명의 보병(주로 장궁병)으로 구성되었으나, 실제로는 절반 정도만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코틀랜드군은 약 6,000명으로 추정되며, 기병은 500명에 불과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고, 장비도 부족했다. 현대 연구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의 1.5배에서 3배에 달하는 병력과 맞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전투

에드워드 2세는 웨일스, 잉글랜드 중부 및 북부 주에서 2만 명이 넘는 군대를 소집했다. 주력은 궁병과 중장기병이었으며, 이들은 스코틀랜드군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한편, 로버트 1세도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보병이었고 기병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로버트 1세는 수적 열세와 아군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전장을 배넉번(Bannockburn)으로 선택했다. 또한, 잉글랜드군의 중장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작은 함정(落とし穴)을 여러 개 파게 했다.

배넉번 전투 첫째 날의 양상


대부분의 중세 전투는 길어도 수 시간 동안만 지속되었지만, 배넉번 전투는 이례적으로 이틀 동안 지속되었다.[13] 1314년 6월 23일, 잉글랜드군은 두 개의 기병대를 진격시켰다. 그중 하나는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운이 이끌었다.[13] 이들은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과 맞닥뜨렸고, 로버트 1세와 험프리 드 보운의 조카 헨리 드 보운은 서로 교전을 시작했다. 헨리 드 보운은 완전한 전투 장비를 갖추고 창을 든 채 로버트 1세에게 돌격했으나, 로버트 1세는 전투 도끼로 헨리 드 보운의 머리를 쪼개 죽였다.[13][33]

이 일기토 승리는 스코틀랜드군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켰다.[36]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에 돌격했고, 잉글랜드군은 배넉번을 건너 어렵게 후퇴했다.[35] 글로스터 백작은 전투 중 부상을 입고 말을 잃었으며, 그의 부하들에 의해 구조되었다.[79]

한편, 로버트 클리포드와 헨리 드 보몽이 이끄는 또 다른 잉글랜드 기병대는 스털링 성을 향해 진군했으나, 토마스 랜돌프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게 저지당했다.

배넉번 전투 둘째 날의 양상


밤사이 잉글랜드군은 배넉번 강을 건너 평야에 진을 쳤다.[13][71] 잉글랜드군에 가담했던 스코틀랜드 출신 기사 알렉산더 세턴은 잉글랜드군을 탈영하여 로버트 1세에게 잉글랜드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정보를 제공하며 공격을 권유했다.[13][71]

다음 날 이른 아침, 스코틀랜드군은 숲을 나와 잉글랜드군 진영으로 진격했다.[13][71]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코틀랜드 창병들이 숲 속에서 나타나 진격하는 것을 본 에드워드 2세는 놀라 "저들은 자비를 구하는구나!"라고 말했고, 그의 시종은 "네, 자비를 구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신에게서 말입니다. 저 사람들은 승리하거나 죽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38]

잉글랜드군의 글로스터 백작과 헤리퍼드 백작은 선봉 지휘권을 두고 다투었고, 글로스터 백작은 왕에게 전투를 연기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으나, 왕은 그를 비겁하다고 비난했다. 그 비난에 자극받은 글로스터 백작은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진격했고, 스코틀랜드군 전열에 도달하자마자 포위되어 죽임을 당했다.[13][71]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의 쉴트론에 의해 점차 밀려났으며,[13]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아군 사격을 우려하여 사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9] 잉글랜드군은 장궁병들을 측면으로 우회시키려 했으나, 마리샬 로버트 키스 경이 이끄는 500명의 스코틀랜드 기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39][80]

잉글랜드 기병대는 배넉번에 몰려 기동하기 어려웠고, 대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붕괴되었다.[13] 에이머 드 발렌스는 에드워드 2세에게 어떤 수를 써서든 안전하게 대피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500명의 경호 기사들과 함께 왕을 전장에서 이탈시켰다.[41][80]

전투에서 벗어나자 질 다르장탕은 왕에게 자신은 도망치지 않겠다 말하고 스코틀랜드군 대열로 돌격하여 죽임을 당했다.[42] 에드워드 2세는 호위무사와 함께 도망쳤고, 나머지 군대는 공황 상태에 빠져 대패했다.[43] 에드워드 2세는 먼저 스털링 성으로 도망쳤으나, 성주 필립 드 무브레이 경은 곧 스코틀랜드군에 성을 항복할 예정이었기에 그를 거절했다.[43] 이후 에드워드 2세는 던바 성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베릭으로 갔다.[43] 배넉번 전투에서 살아남은 잉글랜드군은 남쪽으로 90마일 떨어진 잉글랜드 국경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많은 이들이 스코틀랜드군이나 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44]

역사가 피터 리스는 "보병의 3분의 1조차 영국으로 돌아왔는지 의심스럽다"는 결론을 내렸고,[8] 영국 연대기 작가 토마스 월싱엄은 사망한 영국 기사의 수를 700명으로 기록했으며,[45] 500명의 기사는 몸값을 위해 살아남았다.[7] 스코틀랜드의 손실은 비교적 적었으며, 사망자 중 기사는 두 명뿐이었다.[46]

3. 1. 전장

배넉번 전투가 일어난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현재의 기념비와 관광 안내소가 위치한 유적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73][74][21][22][23]

많은 장소들이 제시되었지만 현대의 연사가들은 단지 두 곳만이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75][24]

  • 발쿠히더록 마을 외곽의 드라이필드(Dryfield)라고 알려진 토탄 지대. 전통적인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져 있다.[76][25]
  • 전통적인 위치에서 북동쪽으로 약 2.4km 떨어진 발쿠히더록의 카스(Carse of Balquhiderock). 이 위치는 스코틀랜드 국립 신탁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위치로 받아들입니다.[77][26]

3. 2. 전투 첫째 날 (1314년 6월 23일)



대부분의 중세 전투는 길어도 수 시간 동안만 지속되었지만, 배넉번 전투는 이례적으로 이틀 동안 지속되었다.[13] 1314년 6월 23일, 잉글랜드군은 두 개의 기병대를 진격시켰다. 그중 하나는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운이 이끌었다.[13] 이들은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과 맞닥뜨렸고, 로버트 1세와 험프리 드 보운의 조카 헨리 드 보운은 서로 교전을 시작했다. 헨리 드 보운은 완전한 전투 장비를 갖추고 창을 든 채 로버트 1세에게 돌격했으나, 로버트 1세는 전투 도끼로 헨리 드 보운의 머리를 쪼개 죽였다.[13][33]

이 일기토 승리는 스코틀랜드군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켰다.[36]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에 돌격했고, 잉글랜드군은 배넉번을 건너 어렵게 후퇴했다.[35] 글로스터 백작은 전투 중 부상을 입고 말을 잃었으며, 그의 부하들에 의해 구조되었다.[79]

한편, 로버트 클리포드와 헨리 드 보몽이 이끄는 또 다른 잉글랜드 기병대는 스털링 성을 향해 진군했으나, 토마스 랜돌프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게 저지당했다.

3. 3. 전투 둘째 날 (1314년 6월 24일)

밤사이 잉글랜드군은 배넉번 강을 건너 평야에 진을 쳤다.[13][71] 잉글랜드군에 가담했던 스코틀랜드 출신 기사 알렉산더 세턴은 잉글랜드군을 탈영하여 로버트 1세에게 잉글랜드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정보를 제공하며 공격을 권유했다.[13][71]

다음 날 이른 아침, 스코틀랜드군은 숲을 나와 잉글랜드군 진영으로 진격했다.[13][71]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코틀랜드 창병들이 숲 속에서 나타나 진격하는 것을 본 에드워드 2세는 놀라 "저들은 자비를 구하는구나!"라고 말했고, 그의 시종은 "네, 자비를 구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신에게서 말입니다. 저 사람들은 승리하거나 죽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38]

잉글랜드군의 글로스터 백작과 헤리퍼드 백작은 선봉 지휘권을 두고 다투었고, 글로스터 백작은 왕에게 전투를 연기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으나, 왕은 그를 비겁하다고 비난했다. 그 비난에 자극받은 글로스터 백작은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진격했고, 스코틀랜드군 전열에 도달하자마자 포위되어 죽임을 당했다.[13][71]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의 쉴트론에 의해 점차 밀려났으며,[13]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아군 사격을 우려하여 사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9] 잉글랜드군은 장궁병들을 측면으로 우회시키려 했으나, 마리샬 로버트 키스 경이 이끄는 500명의 스코틀랜드 기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39][80]

잉글랜드 기병대는 배넉번에 몰려 기동하기 어려웠고, 대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붕괴되었다.[13] 에이머 드 발렌스는 에드워드 2세에게 어떤 수를 써서든 안전하게 대피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500명의 경호 기사들과 함께 왕을 전장에서 이탈시켰다.[41][80]

전투에서 벗어나자 질 다르장탕은 왕에게 자신은 도망치지 않겠다 말하고 스코틀랜드군 대열로 돌격하여 죽임을 당했다.[42] 에드워드 2세는 호위무사와 함께 도망쳤고, 나머지 군대는 공황 상태에 빠져 대패했다.[43] 에드워드 2세는 먼저 스털링 성으로 도망쳤으나, 성주 필립 드 무브레이 경은 곧 스코틀랜드군에 성을 항복할 예정이었기에 그를 거절했다.[43] 이후 에드워드 2세는 던바 성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베릭으로 갔다.[43] 배넉번 전투에서 살아남은 잉글랜드군은 남쪽으로 90마일 떨어진 잉글랜드 국경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많은 이들이 스코틀랜드군이나 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44]

역사가 피터 리스는 "보병의 3분의 1조차 영국으로 돌아왔는지 의심스럽다"는 결론을 내렸고,[8] 영국 연대기 작가 토마스 월싱엄은 사망한 영국 기사의 수를 700명으로 기록했으며,[45] 500명의 기사는 몸값을 위해 살아남았다.[7] 스코틀랜드의 손실은 비교적 적었으며, 사망자 중 기사는 두 명뿐이었다.[46]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에드워드 2세는 개인 경호대와 함께 도망쳤으며 이 소식을 접한 남은 잉글랜드군은 혼비백산이 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먼저 스털링 성으로 도주했으나 성의 지휘관 필립 드 모브레이는 성이 곧 항복할 것이라며 그를 거절했다.[81]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제임스 더글라스가 이끄는 추격대를 피해 던바 성으로 후퇴했고 배를 통해 베릭으로 도주했다. 남은 잉글랜드 군사들은 전장으로부터 남쪽으로 145km 떨어진 잉글랜드 국경의 안전한 곳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많은 패잔병들이 스코틀랜드 군대나 그들이 거쳐간 시골의 주민들에 의해서 죽었다.

이 전투는 로버트 1세가 전투를 통해 자신의 왕위를 합법화하려는 시도였다. 중세 전쟁에 관한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306년부터 1329년 사망할 때까지 스코틀랜드 국왕이었던 로버트 더 브루스(Robert Bruce)는 전장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반대 세력과 잉글랜드 정권을 압도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절정에 달하여 자신의 왕권을 합법화하고 왕국을 해방시켰다."[27] 이 전투는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왕좌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에드워드 2세로 하여금 자신을 국왕으로 인정하게 하기를 바란 전투였다. 브루스는 또한 "발리올 가문, 브루스 가문,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왕위를 놓고 다툰 스코틀랜드 정치 세력" 사이에서 스코틀랜드 왕관을 둘러싼 내부 투쟁에도 직면했다.[28] W. M. 맥켄지의 말처럼, "배넉번 전투의 승리는 국익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스코틀랜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 팔커크 전투와 쿠트라 전투(1302년)에서 플랑드르 보병이 프랑스 기사들을 격파한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이 전투는 중세 전쟁술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했는데, 적절히 운용된 보병이 그동안 전투의 모든 부담을 짊어졌던 기마 기사보다 우월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패배한 측은 그 교훈을 신속하게 배우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적용했다.[29] 이것은 많은 국가들이 이 보병 중심의 중세 전장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스코틀랜드 창병이 유럽 무대에서 차지하는 엄청난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기병에서 벗어나 보병의 지배로 나아가고 있었다. 또 다른 측면은 이 전투가 기본적으로 스털링 성의 권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로버트 1세는 스털링 성이 주요 전략 거점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성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허버트 맥스웰은 "브루스의 입장은 에드워드 왕이 스털링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해졌다"고 말하면서 이를 뒷받침했다.[30]

스털링 성,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중 하나가 로버트 1세에게 항복하면서 즉각적인 여파가 나타났다. 그는 다시 함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을 파괴했다. 거의 비슷하게 중요한 것은 많은 영국 귀족들, 허퍼드 백작을 포함하여, 보스웰 성에 피신했던 무리가 항복한 것이었다.[47] 동시에 던바와 제드버러의 에드워드 왕조의 거점들도 함락되고 있었다. 1315년까지 로버트의 통제를 벗어난 곳은 버윅뿐이었다.[48] 포로로 잡힌 귀족들과 교환으로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드 버그, 자매인 크리스티나 브루스, 메리 브루스, 딸인 마조리 브루스와 글래스고의 주교인 로버트 위샤트를 석방하여 8년간의 영국 감금 생활을 끝냈다. 전투 후 로버트 1세는 엘롤의 길버트 헤이 경에게 스코틀랜드 상속 대원수의 직책을 하사했다.

영국의 패배는 스코틀랜드의 영국 북부 침략을 가능하게 했고, 스코틀랜드의 아일랜드 침략을 가능하게 했다.[13][39] 교황이 스코틀랜드 독립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확보하기 위한 아브로스 선언이 실패한 후,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1328년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으로 이어졌다.[39] 이 조약에 따라 영국 왕관은 스코틀랜드 왕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로버트 1세를 정당한 왕으로 인정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로버트 1세 재위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높은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의 강함을 인식한 로버트 1세는 군사 행동을 제한하고 다시는 큰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로버트 1세는 초토화전술과 소규모 전투로 잉글랜드군에 대항하여 1319년과 1322년 에드워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하였고, 1327년에는 젊은 에드워드 3세의 대군을 보급로 차단으로 붕괴시켰다.

로버트 1세는 죽기 직전 데이비드 2세에게 탁 트인 곳에서 잉글랜드군과의 전투를 피하고 게릴라전과 기습을 염두에 두라고 조언했지만, 데이비드 2세와 섭정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 시대에 궁병과 기사의 조합을 갈고 닦은 잉글랜드군은 1330년대가 되면 스코틀랜드군을 압도하게 된다.

잉글랜드군에게 배넉번 전투는 궁병과 기마 공격을 결합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 전투였다. 그래서 잉글랜드군 기사들은 기승하지 않고 싸움으로써 궁병과의 연계를 강화해 나갔다. 하마 기사는 중앙에서 적의 공격을 막고, 좌우의 궁병이 롱보우 사격으로 적을 소모시키는 전술이다. 이 전술은 스코틀랜드군과의 전투에서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하여 백년전쟁의 크레시 전투아쟁쿠르 전투의 승리로 이어진다.[65]

4. 1. 잉글랜드군의 패배와 피해

에드워드 2세는 개인 경호대와 함께 도망쳤고, 이는 잉글랜드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대패로 이어졌다.[43] 에드워드 2세는 스털링 성으로 도주했으나 성주 필립 드 모브레이는 성이 곧 항복할 것이라며 거절했다.[81] 이후 에드워드 2세는 제임스 더글러스의 추격을 피해 던바 성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베릭으로 갔다. 살아남은 잉글랜드 군사들은 남쪽으로 145km 떨어진 잉글랜드 국경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많은 이들이 스코틀랜드 군대나 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44]

역사가 피터 리스는 "보병의 3분의 1조차 영국으로 돌아왔는지 의심스럽다"는 결론을 내렸다.[8] 그의 추정이 정확하다면, 16,000명의 영국 보병 중 약 11,000명이 사망한 것이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토마스 월싱엄은 사망한 잉글랜드 기사의 수를 700명으로 기록했고,[45] 500명의 기사는 몸값을 위해 포로로 잡혔다.[7]

다음은 이 전투에서 주목할 만한 사상자와 포로들이다.

사망포로


4. 2. 스코틀랜드의 승리와 독립

배넉번 전투의 승리로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27][28] 이 전투는 중세 전쟁사에 큰 영향을 미쳐, 보병이 기병보다 우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29]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대한 사기를 크게 높였으며, 독립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전투 직후,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중 하나인 스털링 성이 로버트 왕에게 항복하였고, 함락을 막기 위해 파괴되었다.[47] 보스웰 성에 피신했던 허퍼드 백작을 포함한 많은 영국 귀족들이 항복하였고, 던바와 제드버러의 에드워드 왕조 거점들도 함락되었다.[47][48] 포로로 잡힌 귀족들과의 교환으로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드 버그, 자매인 크리스티나 브루스와 메리 브루스, 딸인 마조리 브루스와 글래스고의 주교인 로버트 위샤트를 석방했다.[47]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와의 군사적 충돌을 최소화하고, 게릴라 전술과 초토화 작전을 통해 잉글랜드를 압박했다. 1319년과 1322년에는 에드워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하였고, 1327년에는 에드워드 3세의 대군을 보급로 차단으로 붕괴시켰다. 영국의 패배는 스코틀랜드의 잉글랜드 북부 침략과 스코틀랜드의 아일랜드 침략을 가능하게 했다.[13][39]

아브로스 선언을 통해 교황에게 스코틀랜드 독립을 외교적으로 승인받는 데는 실패했지만, 결국 1328년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39]

로버트 1세는 죽기 직전 데이비드 2세에게 탁 트인 곳에서 잉글랜드군과의 전투를 피하고 게릴라전과 기습을 염두에 두라고 조언했지만, 데이비드 2세와 섭정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 시대에 궁병과 기사의 조합을 갈고 닦은 잉글랜드군은 1330년대가 되면 스코틀랜드군을 압도하게 된다.

잉글랜드는 배넉번 전투를 통해 궁병과 기마 공격을 결합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사들이 기승하지 않고 싸움으로써 궁병과의 연계를 강화해 나갔다. 이 전술은 스코틀랜드군과의 전투에서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하여 백년전쟁의 크레시 전투아쟁쿠르 전투의 승리로 이어진다.[65]

4. 3. 군사 전략적 의의

배넉번 전투는 중세 전쟁에서 보병의 중요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29] 스코틀랜드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활용하고 스킬트론 대형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잉글랜드 중장기병을 격파했다.[29]

이 전투는 잉글랜드군에게 궁병과 기병의 협동 전술의 어려움을 인식하게 했다.[65] 이후 잉글랜드군은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보병과 함께 싸우는 전술을 발전시켰다.[65] 하마 기사는 중앙에서 적의 공격을 막고, 좌우의 궁병이 롱보우 사격으로 적을 소모시키는 전술은[65] 백년전쟁의 크레시 전투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5]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군의 강함을 인식하여, 데이비드 2세에게 탁 트인 곳에서 잉글랜드군과의 전투를 피하고 게릴라전과 기습을 염두에 두라고 조언했다.

5. 주요 인물

5. 1. 스코틀랜드

5. 2. 잉글랜드

6. 유산

6. 1. 배넉번 전투 유적지

1932년, 엘긴 및 킨카딘 백작 10대 에드워드 브루스 경의 지휘 아래 배넉번 보존 위원회가 스코틀랜드 국립 신탁에 토지를 기증했다.[49] 1960년과 1965년에 방문객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추가 토지가 매입되었다.[49]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 위의 들판에는 양측 당사자를 묘사한 두 개의 반원형 벽으로 구성된 현대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49] 근처에는 1960년대 필킹턴 잭슨이 제작한 로버트 1세 동상이 있다.[49] 이 동상은 필킹턴 잭슨이 구상했지만 토론토 온타리오 예술 대학의 토마스 테일러 보위에게 제작을 의뢰했다.[49] 이 기념비와 관련 방문자 센터는 이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 중 일부이다.[49]

현대 배넉번 기념비의 반원형 부분


전투터는 스코틀랜드 역사 전투 목록에 포함되어 있으며 2011년 역사 환경 (개정) 법에 따라 스코틀랜드 역사 유적 보존청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49]

스코틀랜드 국립 신탁은 배넉번 방문자 센터를 운영하며, 3월부터 10월까지 매일 개방한다. 2014년 3월, 전투 700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단장한 배넉번 방문자 센터가 문을 열었다.[52] 센터와 인근 전투터 기념비 재개발에는 900만 파운드가 투입되었으며, 컴퓨터 기반 멀티플레이어 게임 등의 명소가 만들어졌다.[52]

2020년 6월 11일, 영국 내 조지 플로이드 시위 중 동상이 낙서로 훼손되었다.[53] 2014년 6월 28일부터 29일까지, 배넉번에서 전투 7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66]

6. 2. 문화적 영향

배넉번 전투는 스코틀랜드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로버트 번즈의 시 "Scots Wha Hae"는 배넉번 전투를 배경으로 한 애국시이다.[55] 스코틀랜드의 비공식 국가인 ''Flower of Scotland''는 배넉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한다.

존 던컨,[56] 에릭 해럴드 맥베스 로버트슨[57]은 모두 브루스와 드 보훈의 조우를 그렸다. 존 필립은 전투 전날 성체를 받는 브루스를 그렸다.[58] 존 해설은 비슷한 주제를 그렸다.[59] 윌리엄 핀들레이의 그림은 전투에서 브루스를 묘사하고 있다.[60]



2016년 스웨덴 메탈 밴드 사바톤은 이 전투를 다룬 노래 "블러드 오브 배녹번(Blood of Bannockburn)"을 그들의 앨범 '''더 라스트 스탠드'''(The Last Stand)에 수록했다.

6. 3. 한국에 주는 시사점 (더불어민주당 관점 반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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