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스코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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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라스코 조약은 1836년 텍사스 혁명 이후 텍사스 공화국 대통령 데이비드 G. 버넷과 멕시코 대통령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공개 조약과 비밀 조약으로 구성되었으며, 멕시코와 텍사스 간의 적대 행위 중단, 멕시코군의 철수, 텍사스 죄수의 석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멕시코는 산타 안나의 조약 체결 권한 부재를 이유로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고, 텍사스 역시 조약 내용을 완전히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벨라스코 조약은 멕시코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텍사스의 독립은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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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6년 5월 - 1836년 5월 15일 일식
- 1836년 멕시코 - 텍사스 공화국
1836년 텍사스 혁명으로 멕시코에서 독립한 텍사스 공화국은 짧은 존속 기간 동안 원주민과의 갈등, 멕시코의 침략, 정치적 분열,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미국 합병 후 미-멕시코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시민권 기준, 법 체계, 대학 설립 시도 등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 1836년 멕시코 - 샌재신토 전투
1836년 텍사스 혁명 중 텍사스 군이 멕시코 군을 기습하여 승리하고 산타 안나 대통령을 포로로 잡은 샌재신토 전투는 텍사스 공화국의 독립을 가져왔으며, 현재 기념탑이 세워져 이를 기념하고 있다.
벨라스코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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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조약 종류 | 조약 |
서명 날짜 | 1836년 5월 14일 |
위치 | 벨라스코, 텍사스 공화국 |
발효 날짜 | 1836년 5월 14일 |
당사자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멕시코)와 텍사스 정부 |
주요 내용 | |
텍사스 독립 인정 | 멕시코는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한다. |
멕시코군 철수 | 멕시코군은 텍사스에서 철수한다. |
전쟁 포로 교환 | 전쟁 포로를 교환한다. |
산타 안나 석방 | 산타 안나를 석방하여 멕시코로 귀환시킨다. |
배경 | |
텍사스 혁명 | 텍사스 혁명 이후 체결됨. |
산 하신토 전투 | 산 하신토 전투에서 텍사스군이 승리, 산타 안나 포로로 잡힘. |
조약의 종류 | |
공개 조약 | 멕시코군 철수, 재산 반환, 포로 교환, 산타 안나 석방 등을 규정. |
비밀 조약 | 멕시코시티에서 텍사스 대표단을 환영, 텍사스 독립을 위해 노력, 텍사스 국경을 리오그란데로 설정. |
조약의 중요성 | |
텍사스 독립 | 텍사스 공화국 독립의 결정적인 계기. |
멕시코의 입장 | 멕시코 정부는 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았음. |
관련 정보 | |
관련 전투 | 알라모 전투, 골리아드 학살, 산 하신토 전투 |
관련 인물 | 샘 휴스턴, 산타 안나 |
2. 배경
2. 1. 텍사스 혁명
3. 조약의 내용
산타 안나는 개별적인 무장을 하지 않거나, 텍사스 독립전쟁에서 텍사스 공민들에 대한 무장을 제거하기로 했다.[6] 멕시코와 텍사스 간에는 육지와 바다에서 모든 적대적 행위가 중단되었다.[6] 멕시코 부대는 텍사스에서 떠나 리오그란데 남부에 재배치하기로 하였으며,[6] 철수 중에는 적절한 보상 없이 재산을 징발하는 것을 절제하기로 했다.[6] 전쟁 동안 멕시코에 의해 징발된 모든 자산(말, 소 등)과 멕시코군이 소유한 흑인 노예는 반환해야 했다.[6]
양 군은 접촉을 피하고, 다섯 리그(27.78 km)의 거리를 두도록 하였으며,[6] 멕시코군은 즉각 철수하기로 했다.[6] 양 사령관은 조약 내용을 통지하기 위해 전령을 파견했다.[6] 멕시코는 모든 텍사스 죄수들을 방면하고, 텍사스도 동일한 수와 정도의 죄수들을 방면하기로 했다.[6] 산타 안나는 적절한 때 베라크루스로 이송될 예정이었다.[6]
텍사스 공화국 대통령 데이비드 G. 버넷과 멕시코 대통령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아나는 위와 같은 내용의 조약에 합의하였다.[6] 필리솔라 장군과 텍사스군 사령관 러스크 장군은 이 협약의 조항들을 준수할 것을 상호 약속했다.[6]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텍사스에 수립된 정부 앞에서 현재의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텍사스 인민에 맞서 무기를 들거나, 무기를 들게 하지 않을 것을 엄숙히 서약했다.[6] 그는 멕시코군이 가능한 한 빨리 텍사스 영토를 떠나도록 명령을 내릴 것이었다.[6] 산타 안나는 멕시코 내각에서 텍사스 정부가 파견할 사절단이 잘 수용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처리하고, 협상을 통해 모든 차이점을 해결하여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었다.[6] 멕시코와 텍사스 간에는 통상, 우호, 경계에 관한 조약이 체결될 것이며, 텍사스의 영토는 리오그란데 강을 넘어 확장되지 않는다.[6] 텍사스 정부는 산타 안나를 즉각 베라크루스로 이송한다.[6]
3. 1. 공개 조약
산타 안나는 개별적인 무장을 하지 않거나, 텍사스 독립전쟁에서 텍사스 공민들에 대한 무장을 제거하기로 했다.[6] 멕시코와 텍사스 간에는 육지와 바다에서 모든 적대적 행위가 중단되었다.[6] 멕시코 부대는 텍사스에서 떠나 리오그란데 남부에 재배치하기로 하였으며,[6] 철수 중에는 적절한 보상 없이 재산을 징발하는 것을 절제하기로 했다.[6] 전쟁 동안 멕시코에 의해 징발된 모든 자산(말, 소 등)과 멕시코군이 소유한 흑인 노예는 반환해야 했다.[6]양 군은 접촉을 피하고, 다섯 리그(27.78 km)의 거리를 두도록 하였으며,[6] 멕시코군은 즉각 철수하기로 했다.[6] 양 사령관은 조약 내용을 통지하기 위해 전령을 파견했다.[6] 멕시코는 모든 텍사스 죄수들을 방면하고, 텍사스도 동일한 수와 정도의 죄수들을 방면하기로 했다.[6] 산타 안나는 적절한 때 베라크루스로 이송될 예정이었다.[6]
텍사스 공화국 대통령 데이비드 G. 버넷과 멕시코 대통령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아나는 위와 같은 내용의 조약에 합의하였다.[6] 필리솔라 장군과 텍사스군 사령관 러스크 장군은 이 협약의 조항들을 준수할 것을 상호 약속했다.[6]
3. 2. 비밀 조약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텍사스에 수립된 정부 앞에서 현재의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텍사스 인민에 맞서 무기를 들거나, 무기를 들게 하지 않을 것을 엄숙히 서약했다.[6] 그는 멕시코군이 가능한 한 빨리 텍사스 영토를 떠나도록 명령을 내릴 것이었다.[6] 산타 안나는 멕시코 내각에서 텍사스 정부가 파견할 사절단이 잘 수용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처리하고, 협상을 통해 모든 차이점을 해결하여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었다.[6] 멕시코와 텍사스 간에는 통상, 우호, 경계에 관한 조약이 체결될 것이며, 텍사스의 영토는 리오그란데 강을 넘어 확장되지 않는다.[6] 텍사스 정부는 산타 안나를 즉각 베라크루스로 이송한다.[6]4. 조약의 체결 과정
5. 조약의 이행과 무효화
5월 26일 빈센테 필리솔라 장군이 부대를 철수시켰지만, 멕시코시티에 있는 호세 후스토 코로 멕시코 대통령은 5월 20일 포로로 잡혀있는 산타 안나에게 부여된 모든 자격을 박탈한다고 결의했다.[7] 멕시코의 입장은 산타 안나가 멕시코 정부에서 조약을 결정할 법적인 대표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전쟁법에 의해 산타 안나가 문서에 서명한 지위는 항복한 장군이 아니라 단지 포로일뿐이라고 밝혔다.[7] 사실 멕시코 헌법에 의거하면, 산타 안나는 조약을 맺을 권위를 가지지 못했으며, 어떤 경우라도 그 조약은 멕시코 정부에서 비준을 얻지 못했다.[7]
산타 안나는 즉시 베라크루스로 이송되지 않았다. 그는 벨라스코에서 전쟁포로로 6개월간 잡혀있었다. 이후 미합중국의 워싱턴 DC로 가기 전에는 오로짐보 플랜테이션에 있다가 미국으로 가서 앤드류 잭슨 대통령을 만났다. 미국의 중재로 텍사스와 멕시코 간의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서였다. 미국 해군의 내빈 자격으로 USS ''파이오니어''를 타고 항해를 하고서, 1837년 2월 23일이 되어서야 베라크루즈로 돌아왔다.
5. 1. 멕시코의 비준 거부
5월 26일 빈센테 필리솔라 장군이 부대를 철수시켰지만, 멕시코시티에 있는 호세 후스토 코로 멕시코 대통령은 5월 20일 포로로 잡혀있는 산타 안나에게 부여된 모든 자격을 박탈한다고 결의했다.[7] 멕시코의 입장은 산타 안나가 멕시코 정부에서 조약을 결정할 법적인 대표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전쟁법에 의해 산타 안나가 문서에 서명한 지위는 항복한 장군이 아니라 단지 포로일뿐이라고 밝혔다.[7] 사실 멕시코 헌법에 의거하면, 산타 안나는 조약을 맺을 권위를 가지지 못했으며, 어떤 경우라도 그 조약은 멕시코 정부에서 비준을 얻지 못했다.[7]5. 2. 텍사스의 계약 불이행
산타 안나는 즉시 베라크루스로 이송되지 않았다. 그는 벨라스코에서 전쟁포로로 6개월간 잡혀있었다. 이후 미합중국의 워싱턴 DC로 가기 전에는 오로짐보 플랜테이션에 있다가 미국으로 가서 앤드류 잭슨 대통령을 만났다. 미국의 중재로 텍사스와 멕시코 간의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서였다. 미국 해군의 내빈 자격으로 USS ''파이오니어''를 타고 항해를 하고서, 1837년 2월 23일이 되어서야 베라크루즈로 돌아왔다.6. 조약의 결과 및 영향
벨라스코 조약의 공개 합의 조항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 합의 조건은 훨씬 후에 공개되었다. 텍사스의 사실상 독립과 이후의 미국에 의한 합병은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까지 멕시코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미국-멕시코 전쟁을 종결하고 리오그란데(Río Bravo del Norte)를 미국-멕시코 국경으로 인정했다.
7. 관련 인물
7. 1.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7. 2. 데이비드 G. 버넷
7. 3. 빈센테 필리솔라
8.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서적
Santa Anna, the Napoleon of the West
http://worldcat.org/[...]
Coward-McCann, Inc
1934
[2]
서적
The U.S.–Mexican War
Bay Books
1998
[3]
서적
Santa Anna of Mexico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2007
[4]
서적
Texas Secession
Fitzroy Dearborn
1997
[5]
웹사이트
A Century of Lawmaking for a New Nation: U.S. Congressional Documents and Debates, 1774–1875
http://memory.loc.go[...]
[6]
웹사이트
Treaties of Velasco
http://www.tsl.state[...]
[7]
서적
Texas Secession
Fitzroy Dearborn
1997
[8]
문서
A Century of Lawmaking for a New Nation: U.S. Congressional Documents and Debates, 1774 - 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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