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봉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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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봉 공작은 프랑스 루이 9세의 아들 루이로부터 시작된 부르봉 가문의 당주가 세습해온 작위이다. 1327년 루이 1세가 초대 부르봉 공작으로 책봉된 이후, 부르봉 가문은 백년 전쟁과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에 참여하는 등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23년 샤를 3세의 몰락 이후, 부르봉 공작 작위는 여러 차례 공석이 되거나 다른 왕족에게 수여되었고, 1661년 콩데 공 루이 2세에게 주어져 콩데 가문에서 대대로 사용되었다. 1830년 콩데 가문이 단절된 후, 1950년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알폰소 데 보르본이 이 작위를 부활시켰으나,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법적 근거가 없다.
1327년 루이 1세 드 부르봉이 초대 부르봉 공작이 된 이후, 1523년 샤를 3세 드 부르봉이 사망할 때까지 부르봉 가문이 공작위를 계승했다. 부르봉 공작들은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에 맞서 싸웠고,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에서는 아르마냐크파를 지지하는 등, 왕가인 발루아 가문과 긴밀히 협력하며 동등한 명성을 유지했다.
2. 역대 부르봉 공작
피에르 2세 드 부르봉과 루이 11세의 딸 안 드 프랑스 사이에는 쉬잔 드 부르봉만이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들은 루이 12세의 승인을 받아 쉬잔을 후계자로 삼았다. 안은 부르봉 가문의 방계인 부르봉몽팡시에 분가의 샤를과 쉬잔을 결혼시켜 부르봉 가문의 재산을 통합하려 했다. 그러나 쉬잔이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의 루이즈가 혈연을 이유로 상속권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샤를 3세에게 혼인을 제안했으나, 샤를 3세는 루이즈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거절했다.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 루이즈의 편을 들었고, 샤를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잉글랜드 왕과 음모를 꾸몄다. 이것이 발각되면서 샤를 3세는 1523년 작위와 재산을 몰수당했고, 1527년 사망하면서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부르봉방돔 가문이 부르봉 가문의 상속자가 되었으나, 몰수당한 재산은 상속받지 못했다.
1523년부터 1544년까지 부르봉 공작은 없었다. 1531년 부르봉 공작령은 처음으로 프랑스 왕가의 땅으로 합병되었다. 이후 부르봉 공작 작위는 다음 두 사람에게 수여되었다.
콩데 공작 루이에게 1661년 부르봉 공작 작위가 주어졌다. 그의 후손들 대부분은 예우적 작위인 콩데 공작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부르봉 공작 작위는 일부 콩데 공작의 후손들을 위한 예우적 작위가 되었다. 1830년 루이 6세 앙리가 사망하면서 콩데 가문은 단절되었다.
레지티미스트들이 지지하는 프랑스 왕위 계승자인 스페인 부르봉가 출신 카디스 공 알폰소가 1950년에 부르봉 공작 칭호를 부활시켰다. 이는 부르봉 가문과 모든 카페 왕조 가문 중 가장 오래된 계열임을 상징하지만, 오늘날 프랑스는 공화국이므로 이 칭호는 법적 근거가 없다.2. 1. 부르봉 가문 (1327년–1523년)
루이 1세 드 부르봉이 1327년 초대 부르봉 공작이 된 이후, 1523년 샤를 3세 드 부르봉이 사망할 때까지 부르봉 가문이 공작위를 계승했다. 부르봉 공작들은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에 맞서 싸웠고,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에서는 아르마냐크파를 지지하는 등, 왕가인 발루아 가문과 긴밀히 협력하며 동등한 명성을 유지했다.
피에르 2세 드 부르봉과 루이 11세의 딸 안 드 프랑스 사이에는 쉬잔 드 부르봉만이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들은 루이 12세의 승인을 받아 쉬잔을 후계자로 삼았다. 안은 부르봉 가문의 방계인 부르봉몽팡시에 분가의 샤를과 쉬잔을 결혼시켜 부르봉 가문의 재산을 통합하려 했다. 그러나 쉬잔이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의 루이즈가 혈연을 이유로 상속권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샤를 3세에게 혼인을 제안했으나, 샤를 3세는 루이즈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거절했다.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 루이즈의 편을 들었고, 샤를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잉글랜드 왕과 음모를 꾸몄다. 이것이 발각되면서 샤를 3세는 1523년 작위와 재산을 몰수당했고, 1527년 사망하면서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부르봉방돔 가문이 부르봉 가문의 상속자가 되었으나, 몰수당한 재산은 상속받지 못했다.
재위 기간 | 이름 | 비고 |
---|---|---|
1327년–1342년 | 루이 1세 드 부르봉 | |
1342년–1356년 | 피에르 1세 드 부르봉 | |
1356년–1410년 | 루이 2세 드 부르봉 | |
1410년–1434년 | 장 1세 드 부르봉 | |
1434년–1456년 | 샤를 1세 드 부르봉 | |
1456년–1488년 | 장 2세 드 부르봉 | |
1488년–1488년 | 샤를 2세 드 부르봉 | 추기경, 리옹 대주교 |
1488년–1503년 | 피에르 2세 드 부르봉 | |
1503년–1521년 | 쉬잔 드 부르봉 | |
1505년–1523년 | 샤를 3세 드 부르봉 | 몽팡시에 백작, 오베르뉴 도팽 |
2. 2. 부르봉 가문의 몰락과 프랑스 왕가 (1523년–1574년)
샤를 3세 드 부르봉은 쉬잔 드 부르봉과 결혼하여 부르봉 가문의 재산을 통합하려 했으나, 쉬잔이 아이 없이 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즈가 혈육상 가깝다는 이유로 상속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샤를 3세와 혼인하여 평화롭게 해결하려 했으나, 샤를 3세는 루이즈의 나이가 많다며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거절했다.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 루이즈의 편을 들었고, 샤를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잉글랜드 왕과 음모를 꾸몄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샤를 3세는 1523년에 작위와 재산을 압류당했고, 1527년에 사망하면서 부르봉몽팡시에 가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다음 본가인 부르봉방돔 가(방돔 공작가)는 몰수당한 재산을 상속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1527년부터 부르봉 가문의 남계 상속자는 방돔 공작 샤를로 이어졌다. 샤를은 프랑스 왕에게 충성했지만, 프랑수아 1세는 그의 부르봉 가 상속과 그의 아내 프랑수아즈 달랑송(알랑송 공작 샤를 4세의 여동생)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샤를의 아들 방돔 공작 앙투안은 나바라의 왕 안토니오 1세가 되었고, 그의 아들 앙리 4세는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오늘날 모든 부르봉 가문 출신들은 그의 후손들이다. 새롭게 군림한 왕가인 부르봉방돔 가는 짧게 부르봉 가문으로 불린다.
1523년부터 1544년까지 부르봉 공작은 없었다. 1531년 부르봉 공작령은 처음으로 프랑스 왕가의 땅으로 합병되었다. 이후 부르봉 공작 작위는 다음 두 사람에게 수여되었다.
- 1544년–1545년: 오를레앙 공작 샤를 - 프랑수아 1세의 막내 아들로, 아이를 두지 못 하여 작위가 왕가에 돌아갔다.
- 1566년–1574년: 앙주 공작 앙리 - 샤를 9세의 막내 아들로, 1574년에 왕위에 오르며 작위는 왕위에 합쳐졌다.
2. 3. 부르봉콩데 가문 (1661년–1830년)
콩데 공작 루이에게 1661년 부르봉 공작 작위가 주어졌다. 그의 후손들 대부분은 예우적 작위인 콩데 공작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부르봉 공작 작위는 일부 콩데 공작의 후손들을 위한 예우적 작위가 되었다.재위 기간 | 이름 |
---|---|
1661년–1667년 | 콩데 공작 루이 |
1667년–1670년 | 앙리 드 부르봉 (전임자의 손자, 유아 때 사망) |
1670년–1709년 | 콩데 공작 루이 (전임자의 형제) |
1709년–1736년 | 부르봉 공작 루이 앙리 (전임자의 아들) |
1736년–1772년 | 콩데 공작 루이 조제프 (전임자의 아들) |
1756년–1830년 | 부르봉 공작 루이 앙리 (전임자의 아들, 1830년에 사망하여 콩데 가문 단절) |
앙리 4세의 삼촌인 콩데 공 루이 1세를 시조로 하는 부르봉-콩데 가문에서는 “대 콩데”라 불리는 콩데 공 루이 2세 이후로 부르봉 공작의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부르봉-콩데 가문은 빈번한 근친혼의 영향 때문인지 정신 질환을 앓는 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1830년 루이 6세 앙리의 자살로 부르봉-콩데 가문은 단절되었다.
2. 4. 부르봉앙주 가문 (1950년–현재)
레지티미스트들이 지지하는 프랑스 왕위 계승자인 스페인 부르봉가 출신 카디스 공 알폰소가 1950년에 부르봉 공작 칭호를 부활시켰다. 이는 부르봉 가문과 모든 카페 왕조 가문 중 가장 오래된 계열임을 상징하지만, 오늘날 프랑스는 공화국이므로 이 칭호는 법적 근거가 없다.- 1950년-1975년: 카디스 공작 알폰소 (프랑스 국왕 알퐁스 2세)
- 1975년-1984년: 프란시스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 알폰소의 장남
- 1984년-현재: 앙주 공 루이스 알폰소 (프랑스 국왕 루이 20세) - 프란시스코의 동생
3. 부르봉 가문의 분가
부르봉 가문은 여러 분가로 나뉘어 발전했다. 주요 분가는 다음과 같다:
가문 | 설명 |
---|---|
부르봉몽팡시에 가문 | 루이 1세 드 부르봉을 시작으로, 샤를 3세 드 부르봉까지 이어졌으나 1527년 단절되었다. |
부르봉방돔 가문 | 1527년부터 부르봉 가문의 남계 상속을 담당했으며,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프랑스 왕가가 되었다. |
부르봉콩데 가문 | 콩데 공 루이에게 부르봉 공작 작위가 주어졌으나, 주로 콩데 공 칭호를 사용했다. 1830년 단절되었다. |
부르봉앙주 가문 | 스페인 부르봉가에서 시작되었으며, 레지티미스트들이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지지하는 가문이다. 현대 프랑스 공화국에서는 법적 근거가 없다. |
부르봉 가문은 백년 전쟁 기간에는 잉글랜드에 맞서 싸웠고,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 때는 아르마냐크파를 지지하는 등 프랑스 왕가인 발루아 가문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 1. 부르봉몽팡시에 가문
부르봉 공작 루이 1세가 1327년부터 1341년까지 초대 공작을 맡았고,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 뒤를 이어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1341–1356), 부르봉 공작 루이 2세(1356–1410), 부르봉 공작 장 1세(1410–1434), 부르봉 공작 샤를 1세(1434–1456)가 공작위를 이었다. 부르봉 공작 장 2세(1456–1488), 부르봉 공작 샤를 2세(1488), 부르봉 공작 피에르 2세(1488–1503)가 연이어 공작위를 계승했다.피에르 2세와 그의 아내 앙네는 루이 12세로부터 부르봉 공녀 슈잔느를 상속인으로 인정받았다. 앙네는 부르봉 가문의 재산을 통합하기 위해 슈잔느를 몽팽시에 백작 샤를과 결혼시켰지만, 슈잔느가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사보이의 루이즈가 상속권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에게 결혼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샤를 3세는 작위와 재산을 박탈당했다. 1527년 샤를 3세가 사망하면서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은 단절되었다.
1527년부터 부르봉 가문의 남계 상속권은 방돔 공작 샤를 드 부르봉의 부르봉방돔 가문으로 넘어갔다. 샤를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샤를의 아들 나바라의 앙투안은 나바라 국왕이 되었고, 그의 손자 앙리 4세는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3. 2. 부르봉방돔 가문
1527년부터 부르봉 가문의 남계 상속자는 부르봉방돔 가문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 대표자는 방돔 공작 샤를이었다. 샤를은 프랑수아 1세에게 충성했지만, 프랑수아 1세는 샤를의 부르봉 가 상속과 그의 아내(알랑송 공작 샤를 4세의 여동생)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샤를의 아들 방돔 공작 앙투안은 나바라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헨리케 3세는 프랑스의 왕 앙리 4세가 되었다. 오늘날 모든 부르봉 가문 사람들은 앙리 4세의 후손이다. 새롭게 왕위를 계승한 부르봉방돔 가문은 짧게 부르봉 가문으로 불린다.3. 3. 부르봉콩데 가문
1661년 프랑스 장군이자 부르봉 가문의 부르봉콩데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 콩데 공 루이에게 부르봉 공작 작위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와 그의 후손들은 콩데 공이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부르봉 공작 작위는 콩데 공의 상속인이 사용하는 예우 칭호가 되었다.부르봉 공작을 역임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루이 2세 (1661년 - 1686년)
- 앙리 (앙리 3세 드 콩데 공)의 장남, (1667년 - 1670년)
- 루이 3세 (1670년 - 1709년)
- 루이 4세 앙리 (1709년 - 1736년)
- 루이 5세 조제프 (1736년 - 1772년)
- 루이 6세 앙리 (1756년 - 1830년)
부르봉-콩데 가문은 근친혼의 영향으로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1830년 루이 6세 앙리가 자살하면서 부르봉-콩데 가문은 단절되었다.
3. 4. 부르봉앙주 가문
스페인 부르봉가 출신으로, 레지티미스트들이 지지하는 프랑스 왕위 계승자 카디스 공 알폰소가 부르봉 공작 칭호를 부활시키면서 부르봉앙주 가문이 시작되었다. 이 칭호는 부르봉 가문과 모든 카페 왕조 가문 중 가장 오래된 계열임을 상징하지만, 오늘날 프랑스가 공화국이므로 법적 근거는 없다.4. 부르봉 가문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
부르봉 공작들은 역사 대부분 동안 왕가인 발루아 가문과 밀접한 동맹 관계를 맺어, 동등한 명성을 유지했다. 이들은 백년 전쟁 기간에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싸웠고,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 때는 아르마냐크파에 가담했다.
피에르 2세 드 부르봉과 루이 11세의 딸 안 드 프랑스 사이의 유일한 자녀는 쉬잔 드 부르봉이었다. 루이 12세는 쉬잔을 후계자로 승인했다. 안은 샤를 3세 드 부르봉에게 쉬잔을 시집보내 부르봉 가문의 재산을 통합하려 했다. 하지만 쉬잔이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즈가 상속권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샤를 3세에게 혼인을 제안했으나, 샤를 3세는 이를 모욕적으로 거절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 편을 들었고, 샤를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잉글랜드 왕과 음모를 꾸몄다. 이로 인해 샤를 3세는 1523년에 작위와 재산을 압류당했고, 1527년에 사망하면서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부르봉방돔 가는 몰수당한 재산을 상속받지 못했다.
1527년부터 부르봉 가문의 남계 상속자는 방돔 공작 샤를이었고, 1537년에 사망했다. 샤를은 프랑수아 1세에게 충성했지만, 프랑수아 1세는 그의 부르봉 가 상속과 그의 아내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샤를의 아들 앙투안 드 부르봉은 나바라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앙리 4세는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오늘날 모든 부르봉 가문 출신들은 그의 후손들이다. 새롭게 군림한 왕가인 부르봉방돔 가는 부르봉 왕조로 불린다.
4. 1. 백년전쟁 시기
루이 1세 드 부르봉이 1327년부터 1342년까지, 피에르 1세 드 부르봉이 1342년부터 1356년까지,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1356년부터 1410년까지, 장 1세 드 부르봉이 1410년부터 1434년까지, 샤를 1세 드 부르봉이 1434년부터 1456년까지 부르봉 공작을 역임했다. 부르봉 공작들은 역사 대부분 동안 왕가인 발루아 가와 밀접한 동맹 관계를 맺어, 동등한 명성을 유지했다. 백년 전쟁 기간에는 잉글랜드에 맞서 싸웠고,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 때는 아르마냐크파에 가담했다.4. 2.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 시기
부르봉 공작들은 백년 전쟁 기간에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싸웠고,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 때는 아르마냐크파에 가담했다.4. 3. 샤를 3세의 몰락
피에르 2세와 루이 11세의 딸 안 드 프랑스 사이에는 쉬잔만이 유일하게 생존한 자식이었다. 그들은 루이 12세로부터 쉬잔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승인을 받았다. 안은 차세대 부르봉 가문의 본가가 되는 부르봉몽팡시에 분가의 몽팡시에 백작 샤를에게 쉬잔을 시집보냈다. 이 결혼으로 부르봉 가문의 방대한 재산이 통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쉬잔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실패했고,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루이즈가 혈육상 가깝다는 이유로 상속을 주장하였다. 루이즈는 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샤를 3세와의 혼인을 제안했다. 그러나 루이즈의 나이가 45세로 너무 많았기 때문에 샤를 3세는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거절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 루이즈의 편을 들었고, 샤를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잉글랜드 왕과 함께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가 발각되면서 샤를 3세는 1523년에 작위와 재산을 압류당했다. 1527년에 샤를 3세가 사망하면서 부르봉몽팡시에 가문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그 뒤를 이은 본가인 부르봉방돔 가문(방돔 공작가)은 몰수당한 재산을 상속받지 못했다.4. 4. 부르봉 왕조
백년 전쟁에서 부르봉 공작들은 왕족인 발루아 가문과 긴밀히 동맹을 맺고 영국에 맞서 싸웠으며, 아르마냐크-부르고뉴 전쟁에서는 아르마냐크 파벌의 편을 들었다.부르봉 공작 피에르 2세와 그의 아내 앙네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딸)는 쉬잔느라는 외동딸을 두었다. 그들은 루이 12세로부터 쉬잔느를 상속인으로 인정받았다. 앙네는 부르봉 가문의 다음 서열인 부르봉-몽팽시에 가문이 상속권을 주장할 것을 우려하여, 딸 쉬잔느를 몽팽시에 백작 샤를과 결혼시켰다. 이 결혼으로 부르봉 가문의 광대한 재산이 통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쉬잔느는 자식 없이 사망했고,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사보이의 루이즈가 혈연의 근접성을 이유로 상속권을 주장했다. 루이즈는 부르봉 공작에게 결혼을 제안하여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 했으나, 공작은 이미 45세였던 루이즈를 모욕적인 언사로 거절했다. 국왕은 어머니의 편을 들어 공작을 황제 및 잉글랜드 왕과의 음모 혐의로 몰아 1523년에 작위와 재산을 박탈했다. 1527년 공작이 사망하면서 부르봉-몽팽시에 가문은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다음 서열인 부르봉-방돔 가문은 몰수된 토지를 상속받지 못했다.
1527년부터 부르봉 가문의 남계 상속권은 부르봉-방돔 가문의 방돔 공작 샤를에게 넘어갔으며, 그는 1537년에 사망했다. 샤를은 프랑수아 1세가 부르봉 가문의 상속권과 그의 아내(알랑송 공작 샤를 4세의 누이)의 상속권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샤를의 아들 나바라의 앙투안은 나바라의 왕이 되었고, 그의 손자 앙리 4세는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현재 부르봉 가문의 모든 구성원은 앙리 4세의 후손이다. 부르봉-방돔 가문은 부르봉 왕조로 불리게 되었다.
부르봉 공작 작위는 1544년까지 공석이었다가 프랑수아 1세와 브르타뉴 여공작 클로드의 막내 아들인 샤를 2세에게 수여되었다. 앙굴렘 공작이자 오를레앙 공작이었던 그는 1544년에 부르봉 공작 작위를 받았으나 곧 사망했다. 그의 사망으로 작위는 왕실로 돌아갔다. 1566년, 부르봉 공작 작위는 앙리에게 다시 주어졌는데, 그는 앙굴렘 공작, 오를레앙 공작, 앙주 공작이었으며, 후에 앙리 3세가 되었다. 1574년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부르봉 공작 작위는 다시 왕실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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