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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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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하(傅嘏)는 조위(曹魏) 시대의 인물로, 약관의 나이에 명성을 얻어 사공 진군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섰다. 조상, 하안과의 갈등으로 면직되기도 했으나, 사마의의 종사중랑으로 발탁되어 사마씨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관구검·문흠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사마사가 죽은 후 사마소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가 섭정을 돕는 데 기여했다. 47세에 사망하여 태상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원후(元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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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부하
원어 이름傅嘏
로마자 표기Fu Gu
자(字)란시 (蘭石) / 자오셴 (昭先)
시호원후 (元侯)
작위양향후 (陽鄉侯)
출생209년
출생지야오저우구, 퉁촨시, 산시성
사망255년 (향년 46세)
소속조위
가족 관계부개자 (선조)
부서 (조부)
부훈 (숙부)
아버지부충
자녀부지
관직
역임 관직상서 (尚書)
하남윤 (河南尹)
녹상서사 (錄尚書事)
녹상서사 임명 시 직위대장군 (大將軍) 휘하

2. 생애

부구(傅嘏)는 후한대군 태수를 지낸 부예(傅睿)의 손자이며, 황문시랑 부충(傅充)의 아들이다.[3] 약관의 나이에 명성을 떨쳤고, 사공 진군의 부름을 받아 사공연(司空掾)으로 출사하였다.[3] 산기상시 유소가 고과법(考課法)을 만들었을 때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3]

정시 초년(240년)에 상서랑(尚書郎)을 거쳐 황문시랑(黃門侍郎)이 되었다.[3]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조상의 측근 하안을 비판했다가 그의 눈 밖에 나 면직되기도 했으나,[3] 이후 태부(太傅) 사마의에게 발탁되어 종사중랑(從事中郎)이 되었다.[3]

가평 원년(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실각한 후 하남윤(河南尹)으로 임명되어 혼란했던 지역을 안정시켰으며, 이후 상서(尚書)로 승진했다.[3] 가평 4년(252년), 동오 정벌 논의가 일었을 때 신중론을 펼쳤으며, 실제로 동흥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가 패배하면서 그의 견해가 옳았음이 드러났다.[3] 이 시기에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받았다.[3] 정원 원년(254년), 조모가 즉위하자 무향정후(武鄉亭侯)로 작위가 올랐다.[3]

정원 2년(255년), 관구검문흠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관구검·문흠의 난), 왕숙, 종회 등과 함께 사마사에게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할 것을 권유했다.[3] 사마사는 이를 받아들여 부구를 상서복야(尚書僕射)로 삼아 함께 출정했다.[3] 반란 진압 중 사마사가 허창에서 병사하자, 황제 조모는 사마소의 군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부하는 종회와 함께 조모의 명을 따르지 않고 사마소를 도와 낙양으로 귀환하여 사마소가 정권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3]

이 공로로 양향후(陽鄉侯)로 봉해지고 식읍이 1천 2백 호로 늘어났으나, 같은 해(255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사후 태상(太常)으로 추증되었고, 원후(元侯)라는 시호를 받았다.[3]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부구(傅嘏)의 할아버지는 후한 말 동한 시대 대군(代郡) 태수(太守)였던 부예(傅睿)이며, 아버지는 황문시랑 부충(傅充)이었다.[3] 그는 아들 부지(傅祗)를 두었고, 부현(傅宣)과 부창(傅暢)은 그의 손자였다.

부구는 약관의 나이에 이미 명성을 떨쳤다.[3] 당시 위나라에서 가장 유명했던 관리인 하안, 등양, 하후현 등을 싫어했고 거리를 두었으며, 대신 순찬과 교류했다. 같은 고향 출신인 이풍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풍이 결국 자신의 명성을 망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사공 진군의 천거를 받아 사공연으로 출사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3] 산기상시 유소가 고과법(考課法)을 만들었을 때에는 유소의 논의를 반박하기도 했다.[3]

정시 초년(240년)에는 상서랑을 제수받았고, 이후 황문시랑으로 옮겼다.[3] 당시 조상이 보정하고 하안을 이부상서로 임명하여 인사를 담당하게 하자, 부구는 조상의 동생 조희(曹羲)에게 하안에게 중요한 책임을 맡길 수 없다고 조언하며 비판했다. 이 말이 하안에게 전해지면서 부구는 하안의 눈 밖에 나 사소한 이유로 면직되었다.[3] 이후 형양태수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했다.[3]

얼마 후 태부 사마의가 청하여 종사중랑으로 삼았다.[3] 가평 원년(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주살된 후에는 하남윤을 지냈으며, 상서로 승진했다.[3]

2. 2. 조상 정권과의 갈등과 사마의의 중용

정시 초년(240년)에 상서랑(尚書郎)을 제수받았고, 이후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옮겼다.[3] 당시 위나라의 권력은 조상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하안이 이부상서가 되어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부하는 조상의 동생인 조희(曹羲)에게 하안에게 중책을 맡기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3] 이러한 부하의 발언은 하안에게 전달되었고, 결국 부하는 사소한 이유로 면직되었다.[3]

이후 형양태수(滎陽太守)로 임명되었으나 부하는 이를 사임하고 받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부(太傅) 사마의가 그를 청하여 종사중랑(從事中郎)으로 삼았다.[3] 이는 조상 정권과 거리를 두게 된 부하가 사마의와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가평 원년(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실각하고 주살된 후, 부하는 하남윤(河南尹)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상서(尚書)로 승진하였다.[3] 이는 사마의가 정권을 장악한 후 부하가 다시 중용되었음을 보여준다.

2. 3. 사마씨 정권 수립에 기여

태부 사마의가평 원년(249년) 정변을 일으켜 조상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부하는 이전에 조상과 하안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기에 사마의의 신임을 얻어 종사중랑(從事中郎)으로 일하고 있었다.[3] 조상이 주살된 후에는 하남윤(河南尹)을 거쳐 상서(尚書)로 승진했다.[3]

252년, 동오의 황제 손권이 사망하자 위나라의 일부 장수들은 오나라를 공격할 기회로 여겼다. 호준, 왕창, 관구검 등이 공격을 주장했으나, 부하는 신중론을 펼치며 군사 작전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흥 전투가 벌어졌고, 결과적으로 제갈탄 등이 이끈 위나라 군대는 제갈각이 이끄는 오나라 군대에게 크게 패배했다. 부하는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았다.[3]

정원 원년(254년),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는 황제 조방을 폐위하고 조모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이 과정에서 부하는 사마사를 지지했으며, 관내후에서 무향정후(武鄉亭侯)로 작위가 올랐다.[3]

정원 2년(255년), 사마사의 황제 폐위에 불만을 품은 관구검문흠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사마사는 눈병을 앓고 있었기에 직접 출정하기를 주저했으나, 부하는 왕숙, 종회 등과 함께 사마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유했다. 사마사는 이 조언을 받아들였고, 부하를 상서복야(尚書僕射)로 삼아 함께 출정했다.[3] 부하는 반란 진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반란 진압 도중 사마사의 병세가 악화되어 허창에서 사망했다. 황제 조모는 사마소가 형의 권력을 이어받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사마소에게 허창에 머물도록 명하고 부하에게 군대를 이끌고 수도 낙양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부하는 종회와 함께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사마소를 설득하여 함께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사마소는 순조롭게 형의 뒤를 이어 위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3]

부하는 사마소 정권 수립에 기여한 공로로 양향후(陽鄉侯)로 봉해졌고, 식읍은 이전의 6백 호에 더해 총 1천 2백 호가 되었다. 그는 같은 해에 사망했으며, 사후 태상(太常)으로 추증되었고 원후(元侯)라는 시호를 받았다.[3]

2. 4. 관구검·문흠의 난 진압과 죽음

정원 2년(255년), 관구검문흠이 당시 위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사마사에 반발하여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수춘의 세 번의 반란).[3] 당시 사마사는 눈병을 앓고 있었기에, 일부 관리들은 사마부에게 진압을 맡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하는 왕숙, 종회 등과 함께 사마사에게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도록 강하게 권유했다.[3]

사마사는 이 건의를 받아들였고, 부하를 상서복야(尚書僕射)로 삼아 함께 출정했다.[3] 부하는 이 군사 작전에 참여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작전 도중 사마사의 눈병이 악화되어 허창에서 사망했다.[3]

사마사가 죽자, 위나라 황제 조모는 사마사의 동생 사마소가 형의 군사권과 정치적 지위를 승계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조모는 사마소에게 허창에 머물도록 명령하고, 부하에게 군대를 이끌고 수도 낙양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부하는 종회와 함께 사마소를 찾아가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말고 함께 낙양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했다. 결국 사마소는 부하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3]

부하는 이후 종회가 스스로 공을 내세우며 자만하는 기색을 보이자 이를 경계하기도 했다.[3] 반란 진압의 공로를 인정받아 양향후(陽鄉侯)로 봉해졌으며, 이전의 봉읍에 6백 호가 더해져 총 1천 2백 호의 식읍을 받게 되었다.[3] 그러나 같은 해(255년)에 사망하였다. 사후 태상(太常)으로 추증되었고, 원후(元侯)라는 시호를 받았다.[3]

3. 가족 관계

부하의 가족 관계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삼국지 위서종회전
[3]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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