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남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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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로남왜는 명나라가 북쪽의 몽골 세력(북로)과 남쪽의 왜구(남왜)의 침략으로 겪었던 안보 위기를 의미한다. 명나라는 홍무제 이후 북원의 분열로 오이라트와 타타르의 침략을 받았고, 특히 알탄 칸의 침입과 경술의 변으로 큰 위기를 겪었다. 명나라는 융경제 시기에 해금 정책을 완화하고 무역을 허용하여 북로와의 관계를 안정시켰다. 한편, 명나라는 선덕제 때부터 해금 정책을 펼치며 일본과의 무역을 제한했으나 닝보의 난으로 명일 무역이 중단되면서 왜구의 침략을 받았다. 왜구는 중국인 해적을 포함하여 남부 연안을 약탈했고, 명나라는 호종헌, 척계광, 유대유 등의 활약으로 왜구를 진압했다. 북로남왜는 명나라의 안보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의 외교 및 국방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홍무제에 의해 북쪽 초원으로 쫓겨난 원나라의 잔존 세력은 북원이 되었고, 이후 오이라트와 타타르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명나라의 북쪽 변경을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15세기 전반 영락제의 치세 때는 정화의 원정 등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었으나, 선덕제 때부턴 해금정책을 펼치면서 방침을 바꾸었다. 비슷한 시기 포르투갈인들이 가우룽 튄문구를 점령하는 등 명나라는 남동부 연해에서 영향력이 퇴조하기 시작했다.[1]
2. 북로 (北虜)
1546년(가정 25년) 알탄은 칸을 칭했고 명나라에 화평과 호시 개설을 요구했다. 이는 조공 무역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전통적으로 조공 무역은 명나라가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명나라는 이를 거절했고, 분노한 알탄 칸은 1550년(가정 29년) 6월 대동을 유린하고 북경을 포위했다. (경술의 변). 타타르의 위협에 굴복한 명나라는 결국 호시를 열었다. 1553년(가정 32년) 이후 명나라 북쪽 국경은 한동안 평온해졌다.
1570년(융경 4년), 알탄 칸의 손자 바한나기가 명나라에 투항하자 알탄 칸은 명나라와 교섭, 1571년(융경 5년) 명나라는 알탄 칸을 순의왕에 봉하고 북변에 11개의 호시를 열어 무역을 허용했다. 이후 명나라와 타타르는 정식 군신 관계를 맺었고 명나라 북부와 서부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 안정기는 1세기 동안 이어졌고, 북쪽 국경이 다시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여진족이 흥성하여 후금을 세운 뒤의 일이다.[5]
2. 1. 오이라트와 타타르의 흥기
홍무제가 북쪽 초원 지대로 쫓아낸 원나라의 잔존 세력은 북원이 되었지만, 후에 분열하여 오이라트와 타타르로 나뉘었다. 초기에는 오이라트가 강성하여 초원 지대의 패권을 장악하고 명나라의 북쪽 국경을 위협했다.[4]
1449년(정통 14년)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후의 에센 칸)는 명나라와 싸워 정통제를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것이 토목의 변이다.[4] 정통제는 결국 아무런 조건 없이 명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후에도 한동안 오이라트는 만리장성 안쪽에서 명나라를 위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타타르가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투메드부의 알탄 칸이 가정 연간에 중원에까지 진출하여 명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2. 2. 알탄 칸의 등장과 명과의 관계
타타르의 알탄 칸은 16세기 중반 명나라에 화친을 제의하고 호시(무역)를 요구했다.[4] 명나라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경술의 변 이후 호시를 열어 타타르와 교역했다.[4] 1571년 명나라는 알탄 칸을 순의왕으로 봉하고, 양측은 군신 관계를 맺어 북방의 안정을 도모했다.[5]
3. 남왜 (南倭)
3. 1. 해금 정책과 명일 무역의 중단
선덕제 때부터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실시했다. 해금정책 이후 명나라는 일본에 대해서만 감합을 통한 명일무역을 허용했다. 하지만 1523년(가정 2년) 닝보의 난으로 인해 명일무역은 중단되었다.[1]
명일무역이 중단되면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일본 상인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살기 위해 해적으로 변신했는데, 사실 이런 해적들 중에는 일본인보다 일본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중국인 출신이 더 많았다.[1]
3. 2. 왜구의 발호와 진압
명일 무역 중단으로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이 해적으로 변신하여 왜구가 증가했다. 이들 중에는 중국인이 다수였다. 호종헌, 척계광, 유대유 등의 활약으로 왜구는 점차 진압되었다.[1]
4. 북로남왜의 영향과 그 이후
북로남왜는 명나라의 안보 위기를 심화시켰다. 가정제 시대에는 북로남왜로 인해 명나라가 위기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6]
4. 1. 명나라의 대응
융경제는 해금 정책을 완화하고 제한적인 무역을 허용하여 북로남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6]참조
[1]
웹사이트
平倭御虜的民族英雄戚継光
http://www.taizhou.c[...]
中国台州网
2010-04-09
[2]
뉴스
朝鮮儒教思想から見た韓国の対日観 ―日韓相互不理解の淵源を探る―
https://ippjapan.org[...]
평화정책연구소
2019-09-18
[3]
웹사이트
明成祖遠征漠北之戦
http://military.chin[...]
中華网軍事
2005-04-06
[4]
웹사이트
北元蒙古略史
http://www.e56.com.c[...]
東方民族网
[5]
웹사이트
明朝滅亡:争取蒙古的失敗
http://theory.people[...]
人民网
2009-05-15
[6]
간행물
《論隆慶時期“南倭北虜”問題的緩和》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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