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계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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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변사계회도는 1550년(명종 5)에 제작된, 비변사 관원들의 계회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현존하는 비변사계회도 중 가장 오래된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신광한의 제시와 함께 조선 초기 계회도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그림에는 북악산, 북한산을 배경으로 비변사 건물과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경복궁, 광화문, 세종로 일대까지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서울의 도시 변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신광한의 『기재별집』에는 그림 제작 경위와 시대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회화사적, 사료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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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계회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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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계회도 (備邊司契會圖) | |
![]() | |
국가 | 서울특별시 |
유형 | 유형문화재 |
번호 | 431 |
지정 | 2018년 10월 18일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서울역사박물관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 | 서울역사박물관 |
수량 | 1점 |
문화재청 | 21,04310000,11 |
2. 역사적 배경 및 지정 사유
題備邊司契會圖중국어라고 전서로 제목을 쓰고, 그 아래 북악산, 북한산을 배경으로 비변사 건물과 작은 인물들이 그려졌다. 현존하는 비변사계회도 중 가장 오래된 시기에 제작되었고, 당대의 저명한 사대부이자 문인인 신광한의 제시가 기록되어 있다.[1] 이 제시는 신광한의 企齋別集중국어 권1에 실린 「題備邊司契會圖 幷序중국어」에 그 내용이 적혀있을 뿐 아니라, 계회도가 그려진 경위 및 당시의 시대상황 등을 잘 반영한다.[1]
이 작품은 1550년(명종 5) 비변사 관원들의 계회를 그린 《비변사계회도》이다. 상단에 '題備邊司契會圖'라고 전서로 제목을 쓰고, 그 아래 북악산, 북한산을 배경으로 비변사 건물과 작은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하단의 좌목은 결실되었으나, 화면 우측에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1484∼1555)의 제시와 ‘嘉靖庚戌冬’이라는 연기가 적혀있어 그림에 대한 정보와 제작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1]
하단에 참가자의 좌목을 기록한 부분이 결실되었지만, 상단에는 전서로 기록된 제목이 있고, 중단에는 계회 장면을 그린 실경산수화가 등장하고 있어서 조선 초 계회도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회화 부분의 산수의 묘사도 16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다른 계회도들과 유사하여 시대양식의 이른 사례이고, 특히 경복궁과 광화문, 현재의 세종로 부근의 도시 구조를 그림으로 명확하게 보여주어 가치가 높다.[1]
3. 조사 보고서 및 상세 분석
조선 전기 유명한 문인, 정치가인 신광한의 글이 적힌 점 외에도, 계회도 자체로도 주목할 만하다. 제작 연대가 1550년으로 확실하고, 북악산(백악산)과 북한산(삼각산)을 배경으로 경복궁, 광화문, 현재의 세종로, 종로 일대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 서울의 도시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비변사 위치는 기로소 남쪽임을 확인할 수 있고, 청사 구조와 내부에 앉아있는 낭관들의 모습도 작지만 분명하다. 광화문이 현재와 같은 석조 성문 형식이 아니라, 창덕궁 돈화문처럼 중층 누각으로 지상에 직접 세운 문인 점도 흥미롭다. 이 밖에 경복궁, 세종로 일대의 옛 도시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배경의 북악산 등 산수 표현은 16세기 중반 산수화 양식을 보여주며, 상단의 전서 제목, 신광한의 시를 쓴 서체 등 여러 점에서 조선 초기 문화의 격조를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다.[1]
현존하는 비변사계회도 중 가장 오래된 시기인 1550년에 제작되었고, 당대 저명한 사대부이자 문인인 신광한의 제시가 기록되어 있다. 이 제시는 신광한의 『기재별집(企齋別集)』 권1에 실린 「제비변사계회도병서(題備邊司契會圖幷序)」에 그 내용이 적혀있을 뿐 아니라, 계회도가 그려진 경위 및 당시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1]
하단에 있었을 참가자 좌목을 기록한 부분은 결실되었지만, 상단에는 전서로 기록된 제목이 있고, 중단에는 계회 장면을 그린 실경산수화가 등장하여 조선 초기 계회도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회화 부분은 북악산, 북한산 등 산수 묘사도 16세기 중엽에 제작된 다른 계회도들과 유사하여 시대 양식의 이른 사례로서 가치가 높다.[1]
《비변사계회도》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서 가치가 큰 점은 경복궁, 광화문, 현재의 세종로 부근의 도시 구조를 그림으로 명확하게 보여주는 점이다. 비변사 위치도 문헌에 전하는 바와 같이 기로소 남쪽에 해당하고, 청사 구조와 내부에서 좌정한 낭관들의 모습도 구체적으로 그려져 기록화로서 가치도 높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1]
3. 1. 신광한의 제시와 『기재별집』
신광한의 『기재별집』 권1에 실린 「제비변사계회도병서(題備邊司契會圖 幷序)」에는 이 그림에 대한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1] 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시(원문 및 번역):
3. 2. 그림의 세부 묘사 및 도시사적 가치
이 작품은 1550년(명종 5) 비변사 관원들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그림 상단에는 '題備邊司契會圖(제비변사계회도)'라는 제목이 전서체로 쓰여 있고, 그 아래로 북악산과 북한산을 배경으로 비변사 건물과 인물들이 작게 그려져 있다.[1]
그림 속에는 경복궁, 광화문, 현재의 세종로와 종로 일대가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서울의 도시 변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비변사의 위치가 기로소 남쪽이라는 점, 청사 구조와 낭관들의 모습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1]
또한, 광화문이 현재와 같은 석조 성문 형식이 아니라 창덕궁 돈화문처럼 중층 누각 형태로 지상에 직접 세워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이를 통해 당시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1]
배경의 산수 표현은 16세기 중반 산수화 양식을 잘 보여주며, 전서 제목, 신광한의 시 등은 조선 초기 문화의 격조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1]
4. 문화재적 가치
이 작품은 현존하는 비변사계회도 중 가장 오래된 1550년에 제작되었으며, 당대 저명한 사대부이자 문인인 신광한의 제시가 기록되어 있다. 이 제시는 신광한의 『기재별집(企齋別集)』 권1에 실린 「제비변사계회도 병서(題備邊司契會圖 幷序)」에 그 내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계회도가 그려진 경위 및 당시 시대 상황도 잘 반영하고 있다.[1]
하단에 있었을 참가자 좌목을 기록한 부분이 결실되었지만, 상단에는 전서로 기록된 제목이 있고, 중단에는 계회 장면을 그린 실경산수화가 등장하고 있어서 조선 초기 계회도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회화 부분은 북악산과 북한산 등 산수 묘사도 16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다른 계회도들과 유사하여 시대 양식의 이른 사례로서 가치가 높다.[1]
무엇보다도 이 <비변사계회도>가 서울시유형문화재로서 가치가 큰 점은 경복궁과 광화문, 현재의 세종로 부근 도시 구조를 그림으로 명확하게 보여주는 점이다. 비변사 위치도 문헌에 전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기로소 남쪽에 해당되는 곳에 그려져 있고, 청사 구조와 내부에서 좌정한 낭관들 모습도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기록화로서 가치도 높다. 이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서 지정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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