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에우게니 폰 바텐베르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빅토리아 에우게니 폰 바텐베르크는 바텐베르크 공자 하인리히와 영국 공주 베아트리스의 장녀로,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혈우병 보인자라는 점과 종교적 차이로 결혼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1906년 결혼에 성공했다. 결혼 후 장남의 혈우병 발병으로 인해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국민을 위한 의료, 구빈, 교육 활동에 힘썼으며 스페인 적십자사 재건에 기여하여 교황으로부터 황금 장미를 수여받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으로 망명 생활을 시작했으며, 1969년 스위스 로잔에서 사망하여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5남 2녀를 두었으며, 유언을 통해 왕실에 중요한 보석들을 남겼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알폰소 13세 - 코파 데 라 코로나시온
코파 데 라 코로나시온은 1902년 알폰소 13세의 즉위를 기념하여 스페인에서 열린 최초의 전국 축구 대회이며, 클루브 비스카야가 우승을 차지하고 코파 델 레이의 시초가 되었으며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첫 경기가 열린 대회이다. - 알폰소 13세 -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스페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쿠데타를 통해 1923년부터 1930년까지 스페인에서 독재 정치를 펼쳤다. - 바텐베르크가 - 에든버러 공작 필립
1921년 그리스에서 태어난 에든버러 공작 필립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으로, 해군 복무 후 왕실 배우자로서 70년 이상 공무를 수행하며 왕실 현대화에 기여하고 자선 활동을 펼쳤다. - 바텐베르크가 - 빅토리아 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녀
헤센 대공녀 빅토리아는 루트비히 4세와 앨리스 공주의 장녀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바텐베르크 공자 루이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으며, 밀퍼드 헤이븐 후작부인이 되었고, 전쟁과 혁명의 비극을 겪은 후 손자 양육에 기여하다 켄싱턴 궁전에서 생을 마감했다. - 독일계 스페인인 - 펠리페 2세
펠리페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 이탈리아, 아메리카 등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아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며 종교 개혁 세력을 탄압하다가 1598년에 사망했다. - 독일계 스페인인 - 푸슈카시 페렌츠
푸슈카시 페렌츠는 1950년대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마법의 마자르"의 핵심 공격수이자 부다페스트 혼베드 FC와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활약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은퇴 후에는 감독으로서도 유러피언컵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FIFA 푸슈카시상의 이름으로 그의 업적이 기려진다.
빅토리아 에우게니 폰 바텐베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왕비 칭호 | 스페인 왕비 |
재위 기간 | 1906년 5월 31일 – 1931년 4월 14일 |
전체 이름 | 빅토리아 에우헤니 훌리아 에나 |
출생일 | 1887년 10월 24일 |
출생지 |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 |
사망일 | 1969년 4월 15일 |
사망지 | 스위스 로잔 |
매장일 | 1969년 4월 18일 (로잔, 성심 가톨릭 교회) 1985년 4월 25일 (재매장, 스페인 엘에스코리알) |
배우자 | 알폰소 13세 (1906년 결혼, 1931년 별거) |
자녀 | 아스투리아스 공 알폰소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 인판타 베아트리스 인판타 마리아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인판테 곤살로 |
가문 | 바텐베르크가 |
아버지 | 바텐베르크 공자 하인리히 |
어머니 | 영국 공주 베아트리스 |
종교 | 성공회 → 로마 가톨릭교회 |
2. 생애
바텐베르크 공자 하인리히와 영국 공주 베아트리스 사이의 장녀로,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헨리)는 알렉산더 폰 헤센다름슈타트 공자와 율리아 하우케 사이에서 태어난 3남이며, 어머니 베아트리스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이다. 알폰소 13세와 결혼하여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으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알폰소 13세는 코넛의 패트리샤 공주에게 청혼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으나, 패트리샤보다 빅토리아 유제니에게 매료되었다.[9] 바텐베르크가의 낮은 신분, 종교 차이(성공회 신자인 빅토리아 유제니와 가톨릭 신자인 알폰소 13세), 혈우병 보인자 가능성 등의 문제로 알폰소 13세의 모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반대했다.[9] 그러나 알폰소 13세의 고집으로 결혼이 성사되었다. 빅토리아 유제니는 1906년 3월 5일 산세바스티안의 미라마르 궁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06년 5월 31일 마드리드 산 헤로니모 데 레알 교회에서 빅토리아 유제니와 알폰소 13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 후 왕궁으로 가는 길에 무정부주의자 마테오 모랄이 발코니에서 국왕 부부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모랄 사건이 발생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빅토리아 유제니는 산타 마리아 교회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알폰소 13세는 그런 빅토리아 유제니를 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무사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유제니의 웨딩드레스는 마차 근처에 있던 근위병의 피로 물들었다.
결혼 생활은 장남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바텐베르크를 출산하면서 개선되는 듯했으나, 알폰소 왕자는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빅토리아 유제니는 혈우병 보인자였으며, 장남과 막내 아들은 혈우병 환자로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 알폰소 13세는 빅토리아 유제니가 스페인 왕실에 혈우병을 퍼뜨렸다며 비난했다.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으로 왕가가 망명길에 오르자, 빅토리아 에우게니는 알폰소 13세와 별거 후 영국으로 갔으나, 영국 정부의 출국 요구로 스위스로 이주하여 로잔 교외에 '비에유 퐁텐(Vieille Fontaine)'이라는 저택을 구입하여 생활했다.
1968년, 증손자 펠리페 왕자의 세례식 때 대모를 맡기 위해 일시적으로 스페인에 돌아왔다. 1969년 로잔에서 사망했고, 1985년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남편 알폰소 13세 곁에 안장되었다.
자녀 |
---|
2. 1. 어린 시절
바텐베르크 공자 하인리히와 영국 공주 베아트리스 사이의 장녀로,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헨리)는 알렉산더 폰 헤센다름슈타트 공자와 율리아 하우케 사이에서 태어난 3남이며, 어머니 베아트리스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이다. 빅토리아 유제니의 이름은 외할머니 빅토리아, 대모인 프랑스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 친할머니 율리아에서 따왔으며, 마지막에 붙은 Ena는 "이브(Eve)'의 의미를 가지는 게일어인데 세례를 맡은 성직자가 잘못 읽어 "에나(Ena)"가 되었다. 이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에나'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된다.[1]빅토리아 여왕은 베아트리스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여, 에나를 포함한 베아트리스의 아이들은 빅토리아 여왕 곁에서 자랐다. 에나는 윈저 성, 모럴, 와이트 섬 오스본 하우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 때, 빅토리아 에우게니는 오스본에서 조랑말에서 떨어져 땅에 머리를 부딪혀 심한 뇌진탕을 겪었다.[6] 빅토리아 여왕의 의사들은 "뇌압의 명백한 징후, 아마도 출혈"과 같은 "위험한 증상"을 발견했다. 그녀의 이모 빅토리아 공주는 " [빅토리아 에우게니]가 눈치채거나 눈을 뜰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고 썼다.[6]
빅토리아 에우게니는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가까웠다. 그녀는 "그녀의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우리에게 두 번째 어머니와 같았다. 그녀는 매우 친절했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야 하는지에 대한 구식 생각을 가지고 매우 엄격했다"고 회상했다.[7] 빅토리아 에우게니가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자 빅토리아 여왕이 그녀를 바로잡았다. "어린 아가씨, 공주라면 '이제 물러날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6] 빅토리아 여왕은 "나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자신의 부모만큼이나 사랑한다"고 썼고 빅토리아 에우게니를 "작은 보물"이라고 불렀다.[6]
아버지 헨리는 여왕을 설득하여 남아프리카에서의 전쟁에 참전하려다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였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죽은 뒤, 베아트리스 공주와 4명의 아이들은 런던 켄싱턴 궁전에서 살았다.
2. 2. 결혼과 스페인 왕비
알폰소 13세는 코넛의 패트리샤 공주에게 청혼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으나, 패트리샤보다 빅토리아 유제니에게 매료되었다.[9] 바텐베르크가의 낮은 신분, 종교 차이(성공회 신자인 빅토리아 유제니와 가톨릭 신자인 알폰소 13세), 혈우병 보인자 가능성 등의 문제로 알폰소 13세의 모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반대했다.[9] 그러나 알폰소 13세의 고집으로 결혼이 성사되었다. 빅토리아 유제니는 1906년 3월 5일 산세바스티안의 미라마르 궁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1906년 5월 31일 마드리드 산 헤로니모 데 레알 교회에서 빅토리아 유제니와 알폰소 13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 후 왕궁으로 가는 길에 무정부주의자 마테오 모랄이 발코니에서 국왕 부부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모랄 사건이 발생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빅토리아 유제니는 산타 마리아 교회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알폰소 13세는 그런 빅토리아 유제니를 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무사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유제니의 웨딩드레스는 마차 근처에 있던 근위병의 피로 물들었다.

스페인에서 빅토리아 유제니는 환영받지 못하고 고립된 생활을 했다. 결혼 생활은 장남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바텐베르크를 출산하면서 개선되는 듯했으나, 알폰소 왕자는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빅토리아 유제니는 혈우병 보인자였으며, 장남과 막내 아들은 혈우병 환자로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 알폰소 13세는 빅토리아 유제니가 스페인 왕실에 혈우병을 퍼뜨렸다며 비난했다.
2. 3. 불행한 결혼 생활과 망명
알폰소 13세와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결혼식 후 왕궁으로 가는 길에 무정부주의자의 폭탄 테러 미수 사건이 발생했고, 왕세자 알폰소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다. 빅토리아 에우게니는 혈우병 보인자였으며, 장남과 막내 아들이 혈우병 환자로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13] 알폰소 13세는 이 때문에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고, 여러 여자들과 불륜을 저질렀다.부부 사이는 악화되었지만, 빅토리아 에우게니는 왕비로서 국민 의료, 구빈, 교육 활동에 힘썼고, 스페인 적십자사 재구성에 진력했다. 1923년에는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황금 장미를 수여받았는데, 이는 1555년 메리 1세 이후 영국 출신 여성에게 수여된 첫 사례였다.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으로 왕가가 망명길에 오르자, 빅토리아 에우게니는 알폰소 13세와 별거 후 영국으로 갔으나, 영국 정부의 출국 요구로 스위스로 이주하여 로잔 교외에 '비에유 퐁텐(Vieille Fontaine)'이라는 저택을 구입하여 생활했다.
1968년, 증손자 펠리페 왕자의 세례식 때 대모를 맡기 위해 일시적으로 스페인에 돌아왔다. 1969년 로잔에서 사망했고, 1985년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남편 알폰소 13세 곁에 안장되었다.
3. 자녀
빅토리아 에우헤니아와 알폰소 13세는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알폰소와 막내아들 곤살로는 혈우병을 앓았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알폰소 | 1907년 5월 10일 | 1938년 9월 6일 | 혈우병을 앓았으며, 1933년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193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 | 1908년 6월 23일 | 1975년 3월 20일 | 1933년 신체적 허약함을 이유로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
스페인 공주 베아트리스 | 1909년 6월 22일 | 2002년 11월 22일 | 1935년 알렉산드로 톨로니아와 결혼했다. |
페르난도 | 1910년 5월 21일 | 1910년 5월 21일 | 사산 |
스페인 공주 마리아 크리스티나 | 1911년 12월 12일 | 1996년 12월 23일 | 1940년 엔리코 마로네친차노와 결혼했다. |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 1913년 6월 20일 | 1993년 4월 1일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 공주와 결혼하여 후안 카를로스 1세를 낳았다. 1941년부터 스페인 왕가 당주로 추대되었다. |
인판테 곤잘로 | 1914년 10월 24일 | 1934년 8월 13일 | 혈우병을 앓았으며, 오스트리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3. 1. 알폰소 (아스투리아스 공, 1907-1938)

알폰소는 1907년 5월 10일에 태어나 1938년 9월 6일에 사망했다. 1933년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1] 코바동가 백작부인 에델미라와 결혼했다가 이혼했으며, 이후 로카포르트알투사라의 마리아와 재혼했다. 그는 193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1]
3. 2. 하이메 (세고비아 공, 1908-1975)
하이메는 1908년 6월 23일에 태어나 1975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 그는 에마누엘라 데 담피에레와 결혼했다가 이혼했으며, 이후 샤를로테 티데만과 재혼하여 2남을 두었다. 1933년 6월 21일, 그는 자신의 신체적 허약함을 이유로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 | 1908년 6월 23일 | 1975년 3월 20일 | 1933년 6월 21일 (그의 신체적 허약함으로 인해)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1935년 3월 4일 도나 엠마누엘 드 댕피에르와 결혼하여 1947년 5월 6일에 이혼했으며 자녀가 있다. 1949년 8월 3일 샬롯 티데만과 재혼했다. |
3. 3. 베아트리스 (1909-2002)
베아트리스는 1935년 1월 14일 알렉산드로 톨로니아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3. 4. 페르난도 (1910)
Fernandoes는 1910년 5월 21일에 태어났으나 사산되었다.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페르난도 | 1910년 5월 21일 | 1910년 5월 21일 | 사산 |
3. 5. 마리아 크리스티나 (1911-1996)

1911년 12월 12일에 태어나 1996년 12월 23일에 사망했다. 1940년 6월 10일 제1대 마로네 백작 엔리코 마로네친차노와 결혼하여 슬하에 4녀를 두었다.[4]
3. 6. 후안 (바르셀로나 백작, 1913-1993)
1913년 6월 20일에 태어나 1993년 4월 1일에 사망했다.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 공주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1941년부터 스페인 왕가 당주로 추대되었으며, 사후 "후안 3세"로 추존되었다. 그의 아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1975년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했다.1931년 지방 선거에서 공화당이 주요 도시의 다수 권력을 잡으면서 스페인 왕가는 망명길에 올랐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알폰소 13세는 자신의 자발적인 망명이 공화파와 군주파 간의 내전을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1]
1938년, 후안의 장남 후안 카를로스의 팔라초 말타에서의 세례식을 위해 온 가족이 로마에 모였다. 당시 바티칸 국무원장 에우제니오 파첼리가 세례를 집전했는데, 그는 교황 비오 11세의 임종을 대신했으며, 몇 달 후 교황 비오 12세가 되었다.[1] 1941년 1월 15일, 알폰소 13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스페인 왕위에 대한 권리를 아들인 후안에게 넘겼다. 알폰소 13세는 1941년 2월 28일에 사망했다.[1]
3. 7. 곤살로 (1914-1934)
곤살로는 1914년 10월 24일에 태어나 1934년 8월 13일에 사망했다. 혈우병을 앓았으며, 젊은 나이에 오스트리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4. 평가
빅토리아 에우헤니아는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전통적인 왕비의 역할과 근대적인 여성상을 동시에 보여준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스페인 왕비로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결혼식 날부터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고, 스페인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지 못해 인기가 없었다. 장남 알폰소가 혈우병 보인자임이 밝혀지면서 남편 알폰소 13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알폰소 13세는 여러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고, 심지어 빅토리아 에우헤니아의 사촌인 베아트리스와도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러한 개인적인 불행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에우헤니아는 공공 복지와 자선 활동에 헌신했다. 특히 스페인 적십자사의 재편성에 힘썼으며, 1923년에는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황금 장미를 받았다. 이는 1555년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 이후 영국 출신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였다.
참조
[1]
뉴스
HRH Princess Margaret
https://www.bbc.co.u[...]
BBC Radio 4
1981-01-23
[2]
간행물
London Gazette
1886-12-14
[3]
서적
Royal Romances of To-day
1910
[4]
문서
Queen Victoria's Journals
1887-11-23
[5]
웹사이트
'The Duke and Duchess of York and Bridesmaids'
http://www.npg.org.u[...]
National Portrait Gallery
[6]
서적
Born to Rule
[7]
서적
Born to Rule
[8]
서적
Ena Spain's English Queen
[9]
웹사이트
Victoria Eugenia de Battenberg
https://dbe.rah.es/b[...]
2024-07-30
[10]
간행물
no. 150, of 30/05/1906, p. 829.
https://www.boe.es/d[...]
Gaceta de Madrid
1906-05-30
[11]
웹사이트
Royal Styles and Titles of Great Britain: Documents
http://www.heraldica[...]
Heraldica.org
2011-10-25
[12]
간행물
London Gazette
1906-04-03
[13]
뉴스
Pope's Gold Rose for Queens - Victoria of Spain Gets One - King Henry VIII. Got Three
https://www.nytimes.[...]
1923-05-13
[14]
서적
Inside the Vatican of Pius XI
Doubleday
2004
[15]
뉴스
Las joyas que lucirá Letizia como Reina Consorte
https://www.elmundo.[...]
2014-06-07
[16]
웹사이트
Magnificent jewels and noble jewels
http://www.sothebys.[...]
Sotheby's
[17]
뉴스
Royal conch pearl and diamond Cartier bracelet fetches $3.4 million at Geneva auction; Trinket once belonged to Queen Victoria Eugenie of Spain
http://www.nydailyne[...]
2012-11-15
[18]
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Druck und Verlag der K.K. Hof- und Staatsdruckerei
1918
[19]
웹사이트
Ordonnance Souveraine n° 1.757 du 19 avril 1958 décernant la Grand'Croix de l'Ordre de Saint Charles
https://journaldemon[...]
1958-04-21
[20]
서적
El Ex-Libris Tratado general. Su historia en la corona española
Patrimonio Nacional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