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는 군인 가문 출신으로, 모로코, 쿠바, 필리핀 등지에서 군 경력을 쌓았다. 1923년, 그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 불안을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 의회 정부를 전복하고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사회 기반 시설 확충, 경제 개혁을 추진했지만, 언론 통제, 노동 운동 탄압 등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쳤다. 경제 위기와 군부 및 국왕의 지지 상실로 인해 1930년 사임했으며, 이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호세 안토니오는 스페인 파시스트 정당을 창당했고, 그의 통치는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정권의 사회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페인의 백작 - 바르셀로나 백작
바르셀로나 백작은 카탈루냐 지역을 다스린 역사적 작위로,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하여 세습 작위로 독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아라곤과의 결혼을 통해 아라곤 연합왕국 형성에 기여했으며, 현재는 스페인 국왕이 계승하는 작위이다. - 스페인 국민주의자 - 산티아고 아바스칼
산티아고 아바스칼은 스페인 극우 정당 복스의 당수이자 하원 의원이며, 반이민, 반이슬람, 유럽회의주의적 입장을 표명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 스페인의 외무장관 - 하비에르 솔라나
하비에르 솔라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 출신으로 문화부 장관, 교육부 장관, 외무부 장관 등 주요 각료직을 역임하고 NATO 사무총장과 유럽 연합 공동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를 지낸 스페인의 물리학자이자 정치인, 외교관이다. - 스페인의 외무장관 - 카를로스 웨스텐도르프
카를로스 웨스텐도르프는 스페인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외무부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여 유럽 공동체 가입에 기여하고 외무부 장관, 유엔 대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고위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웨스텐도르프 인터내셔널 S.L.의 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이 오르바네하 |
출생 | 1870년 1월 8일 |
출생지 |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 스페인 |
사망 | 1930년 3월 16일 (60세)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안장 장소 | 라 메르세드 교회, 헤레스 |
국적 | 스페인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애국 연합 |
군사 경력 | |
복무 | 스페인 육군 |
복무 기간 | 1884년–1923년 |
최종 계급 | 중장 |
참전 전투 | 멜리야 전쟁 케르트 작전 |
훈장 | 성 페르난도 로렐 십자훈장 |
주요 직책 | |
직책 | 스페인 총리 |
재임 기간 | 1923년 9월 15일 – 1930년 1월 28일 |
군주 | 알폰소 13세 |
이전 | 마누엘 가르시아 프리에토 |
이후 | 다마소 베렌게르 |
직책 | 모로코 주재 스페인 고등판무관 |
재임 기간 | 1924년 10월 16일 – 1925년 11월 2일 |
이후 | 호세 산후르호 |
직책 | 스페인 국무장관 |
재임 기간 | 1927년 2월 20일 – 1930년 1월 30일 |
군주 | 알폰소 13세 |
이전 | 호세 데 양구아스 |
이후 | 하코보 피츠제임스 스튜어트 (국무장관으로서)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카실다 사엔스 데 에레디아 (1902년 결혼, 1908년 사별) |
자녀 | 6명 (호세 안토니오 포함), 미겔, 필라르 |
서명 | |
![]() |
2. 초기 생애와 군 경력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의 유서 깊은 군인 가문에서 태어나 톨레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소위로 임관하여 모로코, 쿠바, 필리핀 등 당시 스페인의 주요 식민지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발렌시아,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사령관과 같은 중요한 군 지휘관 직책을 역임하며 군 내부에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의 군 경력 중 특히 모로코 북부 리프 지역에서 베르베르족과의 전투 경험과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의 패배는 그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로코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스페인이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소모하며 북아프리카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쿠바, 필리핀 등을 상실하며 스페인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당시 스페인의 무능한 정치 지도자들과 불안정한 의회 제도에 대해 깊은 불신과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09년 이후에도 군 복무를 계속하며 1911년에는 케르트 전역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고[7], 같은 해 준장으로 진급하는 등 군사적 경력은 꾸준히 이어갔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심화된 경제난과 노동 운동, 카탈루냐 지역의 분리주의 움직임, 1909년 바르셀로나에서 발생한 비극의 주간과 같은 사회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특히 1921년 모로코에서 스페인군이 안누알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군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고 정치적 위기감이 고조되자, 프리모 데 리베라를 포함한 군부 내에서는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과 시대적 배경은 그가 훗날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1. 가문과 성장 배경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의 토지를 소유한 군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퇴역한 대령이었으며, 증조부인 베르트랑 프리모 데 리베라(1741–1813)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항한 스페인 저항군의 장군이자 영웅이었다. 그의 가문인 프리모 데 리베라 가문은 카디스 주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의 명문가였다.미겔의 삼촌 중 한 명인 페르난도는 마드리드의 사령관이었고, 1875년 혼란스러운 제1차 스페인 공화국을 종식시키고 입헌 군주제를 복원하는 데 기여하여 초대 에스텔라 후작이 되었다. 또 다른 삼촌인 프란시스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은 1878년에 제2차 카를로스 전쟁을 종결시킨 공로로 에스테야 후작(Marqués de Estellaes) 작위를 받았다. 프란시스코가 사망한 후 미겔이 제2대 에스테야 후작위를 계승했다.
어린 미겔은 작가 제럴드 브레넌이 "술을 좋아하고, 여자 관계가 복잡하며, 말을 사랑하는 귀족"들이 "유럽에서 가장 굶주리고 억압받는 농업 노동자들을 지배"했다고 묘사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역사와 공학을 공부하다가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새로 설립된 톨레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84년에 졸업했다.
2. 2. 군사 교육과 초기 경력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의 유서 깊은 군인 가문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퇴역 대령이었으며, 삼촌인 페르난도는 마드리드의 사령관이자 초대 에스텔라 후작으로, 혼란스러웠던 제1공화국을 종식시키고 1875년 입헌 군주제를 복원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었다. 증조부 베르트랑 프리모 데 리베라(1741–1813) 역시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 스페인 저항군의 장군이었다.그는 제럴드 브레넌이 "술을 좋아하고, 여자 관계가 복잡하며, 말을 사랑하는 귀족"이자 "유럽에서 가장 굶주리고 억압받는 농업 노동자들을 지배"했다고 묘사한 환경에서 자랐다. 처음에는 역사와 공학을 공부했으나, 군인의 길을 선택하여 신설된 톨레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884년 졸업했다.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모로코, 쿠바, 필리핀 등 스페인 식민지 전쟁에 참전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 이후 발렌시아,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사령관과 같은 주요 군직을 역임했다. 특히 모로코 북부 리프 지역에서 베르베르족과의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여 여러 차례 진급하고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스페인이 막대한 인명과 비용을 소모하면서도 북아프리카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결국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필리핀에서는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끈 필리핀 혁명 당시 부관으로 참전했으며, 비악나바토 조약 체결 후에는 홍콩에서 필리핀 망명객들과 함께 인질 생활을 하기도 했다. 1898년에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굴욕적으로 패배하며 스페인 제국이 사실상 붕괴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 패배는 프리모 데 리베라를 포함한 많은 스페인인들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고, 그는 국가 질서를 유지하거나 경제 발전을 이끌지 못하면서 과거 제국의 영광마저 지키지 못하는 정치인들과 의회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후 마드리드로 돌아와 삼촌 페르난도와 함께 육군부에서 근무했다. 젊은 시절부터 이어져 온 연애 행각으로 유명했으며, 1902년 쿠바계 스페인 여성인 카실다 사엔스 데 에레디아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아내 카실다는 1908년 막내 페르난도를 낳은 후 사망했다. 1909년에는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로 군사 임무를 수행했다.
영국 역사가 휴 토마스는 그에 대해 "몇 주 동안 엄청나게 열심히 일한 다음 집시들과 함께 춤추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후에르가''를 즐기기 위해 사라지곤 했다. 그는 오페라 망토를 두르고 마드리드 거리를 거의 혼자 걸으며 한 카페에서 다른 카페로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장황하고 때로는 취한 듯한 통신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아침에 종종 취소해야 했다."라고 묘사했다.[6]

1909년부터 1923년까지 그의 군 경력은 계속 발전했지만, 스페인의 상황에 대한 실망감은 더욱 커져갔다. 1911년 10월, 케르트 전역에서 대령으로 보병 연대를 이끌고 전투 중 부상을 입기도 했다.[7] 스페인령 모로코로 복귀한 후 1911년 육군사관학교 동기 중 처음으로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국내 상황은 불안정했다. 1909년 바르셀로나에서는 제2차 리프 전쟁을 위한 군대 징집에 반발하여 카탈루냐의 급진 공화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총파업을 벌인 비극의 주간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자 폭력 사태로 번졌고, 반성직주의 폭도들이 교회와 수도원을 불태우는 등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정부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효과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고, 사회 전반의 좌절감은 깊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난이 겹치면서 스페인의 사회 불안은 더욱 심화되었다. 입헌 군주제 하의 코르테스 헤네랄레스(스페인 의회)는 실업, 노동 파업, 빈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1921년, 스페인군은 모로코에서 벌어진 안누알 전투에서 참패하며 군의 위신은 물론 북아프리카 정책 전체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1923년에 이르러서는 코르테스 의원들 사이에서 알폰소 13세 국왕과 군 수뇌부의 책임론을 제기하며 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군 내부의 부패에 대한 소문까지 퍼지면서 정치적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2. 3. 스페인-미국 전쟁의 경험
프리모 데 리베라는 군인으로서 모로코, 쿠바, 필리핀 등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전쟁에 소위로 참여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특히 필리핀에서는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끈 필리핀 혁명 당시 부관으로 활동했으며, 비악나바토 조약 이후에는 홍콩에서 필리핀 망명객들과 함께 인질 생활을 하기도 했다.이러한 식민지에서의 경험, 특히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의 굴욕적인 패배는 그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스페인이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등을 상실하며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이 패배는 프리모 데 리베라를 포함한 많은 스페인 국민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당시 스페인의 정치인들과 의회 제도가 국가적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경제 발전을 이끌지도 못하며, 얼마 남지 않은 제국의 영광마저 지키지 못한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전쟁 경험과 제국 상실의 충격은 그가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정치적 배경과 쿠데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은 경제 침체, 사회 갈등 심화, 스페인령 모로코에서의 전쟁 장기화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총체적 난국 속에서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팽배했다. 이를 배경으로 1923년 9월 13일, 바르셀로나 총독이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군부와 보수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기존 정치인들의 부패와 무능을 질타하며 강력한 국가 재건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당시 의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왕 알폰소 13세는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프리모 데 리베라를 총리로 임명함으로써 그의 집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8] 이 쿠데타로 스페인의 부르봉 복고 왕정 시대 의회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유럽 간전기 독재의 한 축인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 독재가 시작되었다.
3. 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의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경제는 침체되었고, 노동 운동이 거세졌으며, 카탈루냐 지방이나 바스크 지방에서는 자치 또는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등 경제적,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0년부터는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베르베르인 리프족이 일으킨 반란으로 제3차 리프 전쟁이 발발하여 스페인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총체적인 위기는 이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쿠데타와 군사 독재 정권 수립의 배경이 되었다.
3. 2. 정치권에 대한 불신

1923년 9월 13일, 바르셀로나의 사령관이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기존 의회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프리모 데 리베라는 유럽 간전기 독재 시기의 독재자가 되었다. 그는 쿠데타 직후 발표한 선언문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는데, 이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당시 알폰소 13세 국왕 역시 의회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에, 프리모 데 리베라를 총리로 임명하며 쿠데타를 사실상 승인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며 "우리의 목표는 스페인의 헌정 생활에 짧은 괄호를 열고, 정치 조직의 악덕에 물들지 않은 인물들을 국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즉시 이를 재건하는 것이다."[8]라고 선언했다. 이는 그가 기존 정치인들이 스페인을 망쳤으며, 국가나 민족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한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정치 혼란과 경제난에 지쳐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던 일부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이들은 군부의 지원을 받는 지도자가 국가를 바로잡아 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의회가 무시당하고 민주주의 원칙이 훼손된 것에 대해 분노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자신이 정치인들이 만든 혼란을 청산하고 경제를 현대화하며 노동 계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재를 유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집권 초기,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8명의 군인으로 최고 위원회를 구성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또한 지방의 민간 정치인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군 장교들로 채웠다. 국회의원들이 국왕에게 항의하자, 알폰소 13세는 의회를 해산해버렸고, 프리모 데 리베라는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며 독재 체제를 공고히 했다. 그는 바스크와 카탈루냐의 분리주의 운동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스페인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지식인인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초기에 "군사 위원회가 부과한 과업의 시작과 끝은 낡은 정치를 끝내는 것이다. 그 목적은 매우 훌륭하여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 낡은 정치는 끝나야 한다."라고 쓰며, 기존 정치권 청산이라는 측면에서 일말의 기대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겔 데 우나무노나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와 같은 다른 지식인들은 독재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며 망명길에 올랐다. 이처럼 프리모 데 리베라의 집권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깊은 불신을 배경으로 이루어졌으나, 동시에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비판과 함께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
3. 3. 1923년 쿠데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은 경제 침체, 격화되는 노동 운동,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자치 및 독립 요구 증대,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베르베르인 리프족의 반란으로 인한 제3차 리프 전쟁 발발 등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23년 9월 13일, 바르셀로나의 총독이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군부, 교회, 그리고 대토지 소유자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 정부를 전복시켰다. 그는 화려한 문체의 선언문을 통해 쿠데타의 당위성을 국민에게 설명하며 유럽 간전기 독재 시대의 독재자로 부상했다. 기존 정치 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국왕 알폰소 13세는 쿠데타를 사실상 승인하고 프리모 데 리베라를 총리로 임명하여 그의 집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며 "우리의 목표는 스페인의 헌정 생활에 짧은 괄호를 열고, 정치 조직의 악덕에 물들지 않은 인물들을 국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즉시 이를 재건하는 것이다."[8]라고 선언했다. 그는 기존 정치인들이 국가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스페인을 망쳤다고 비판하며, 자신이 애국심을 바탕으로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를 현대화하며 노동 계급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쿠데타 직후 프리모 데 리베라는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8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최고 위원회(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 정부)를 임명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지방의 민간 정치인들을 해임하고 그 자리를 군 장교들로 채웠으며, 국왕 알폰소 13세는 코르테스 의원들의 항의를 묵살하고 의회를 해산시켰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1876년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입법부 기능을 마비시켰으며, 언론 통제를 강화하고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분리주의 운동을 강력히 탄압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에 대한 스페인 사회의 반응은 엇갈렸다. 일부 국민들은 계속되는 혼란과 경제난에 지쳐 강력한 지도자가 군부의 지지를 받아 국가를 안정시키기를 기대하며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많은 좌파 세력과 지식인들은 의회가 무시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에 분노하며 독재 정권에 반대했다. 스페인의 저명한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군사 위원회가 부과한 과업의 시작과 끝은 낡은 정치를 끝내는 것이다. 그 목적은 매우 훌륭하여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 낡은 정치는 끝나야 한다."라고 언급하며 쿠데타의 목적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 초기에 일정한 기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겔 데 우나무노나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와 같은 다른 주요 지식인들은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이로 인해 망명하거나 푸에르테벤투라 섬과 같은 외딴 섬으로 유배되는 탄압을 받았다.
독재 정권 초기, 프리모 데 리베라는 몇 가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20세기 초부터 스페인의 골칫거리였던 모로코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반란 진압의 어려움을 이유로 모로코에서의 철수까지 고려했으나, 리프족 반군이 프랑스령 지역까지 공격하자 상황이 변했다. 1925년, 스페인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반란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작전을 지휘했으며, 1927년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마침내 리프족 반군을 제압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4.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1923-1930)
1923년 9월 13일, 바르셀로나의 총독이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군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 정부를 전복시키고 독재자가 되었다. 당시 의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왕 알폰소 13세는 프리모 데 리베라를 총리로 임명하며 쿠데타를 사실상 승인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기존 정치인들이 스페인을 망치고 있다며,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잠시 헌정 질서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8] 그는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군사 최고 위원회를 구성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지방의 민간 정치인들을 군 장교로 교체했다. 또한 1876년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의 분리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 통치를 시작했다. 언론 검열과 비판 세력 탄압도 이루어져 미겔 데 우나무노와 같은 지식인들이 망명하기도 했다.
독재 초기에는 몇 가지 성과도 있었다. 오랫동안 스페인을 괴롭혔던 스페인령 모로코의 제3차 리프 전쟁에서 프랑스와 연합하여 1927년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경제 발전을 위해 사회 기반 시설 확충에 힘써 댐 건설, 철도망 개선, 바르셀로나 지하철 개통(1924년) 등을 추진했다. 호세 칼보 소테로 재무 장관 주도로 경제 민족주의 정책을 펼치고,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모방한 노사 협력 위원회를 운영하기도 했다. 대규모 공공 사업으로 실업률이 낮아지는 효과도 있었다.[9][10]
그러나 그의 통치는 본질적으로 독재였으며, 언론 탄압, 카탈루냐 문화 억압 등은 계속되었다. 경제 정책 역시 대규모 공공 지출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빈부 격차 심화라는 문제점을 낳았다.[9] 그는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1924년 '애국 연합'(UP)이라는 어용 정당을 창설하고, 1927년에는 자문 기구인 국민 의회를 소집하여 새 헌법 제정을 시도했으나, 국민적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방만한 재정 운용, 페세타화 가치 하락,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경제 위기는 정권의 기반을 흔들었다. 군부와 자본가 등 핵심 지지층마저 등을 돌렸고, 여러 차례 쿠데타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30년 1월, 알폰소 13세는 프리모 데 리베라에게 퇴진을 요구했고, 그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실각했다. 이후 망명지인 파리에서 몇 달 뒤 사망했다.
4. 1. 권위주의적 통치
1923년 9월 13일, 바르셀로나 총독이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군부와 교회를 중심으로 한 대토지 소유자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는 유럽 간전기 독재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는 화려한 문체의 선언문을 통해 쿠데타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설명하려 했다. 당시 의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알폰소 13세 국왕은 프리모 데 리베라에게 암묵적으로 쿠데타를 승인하고 그를 총리로 임명하며 그의 권력을 공식화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우리의 목표는 스페인의 헌정 생활에 짧은 괄호를 열고, 정치 조직의 악덕에 물들지 않은 인물들을 국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즉시 이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며,[8] 기존 정치인들이 스페인을 망치고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했다고 비판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정권 수립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일부 스페인인들은 계속되는 사회 혼란과 경제난에 지쳐 강력한 지도자가 군부의 힘으로 질서를 바로잡아 주기를 기대하며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의회가 무시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스페인 전역을 순회하며 자신이 스페인을 구원할 애국자임을 강조하는 연설을 통해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만든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독재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며, 국가 주도로 경제를 현대화하고 노동 계급의 어려움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권력을 장악한 프리모 데 리베라는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8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최고 위원회를 설립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지방의 민간 정치인들을 해임하고 그 자리를 군 장교들로 채웠다. 코르테스 의원들이 국왕에게 항의하자, 알폰소 13세는 의회를 해산해버렸고, 프리모 데 리베라는 1876년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또한 바스크 지방과 카탈루냐의 분리 독립 운동을 강경하게 탄압하고 언론 통제를 하여 독재 체제의 강화를 꾀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스페인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지식인인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초기에 "군사 위원회가 부과한 과업의 시작과 끝은 낡은 정치를 끝내는 것이다. 그 목적은 매우 훌륭하여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고 평가하며 낡은 정치 청산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미겔 데 우나무노와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와 같은 다른 지식인들은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결국 망명길에 올랐다. 특히 노동 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우나무노는 정권에 의해 푸에르테벤투라 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독재 정권 초기, 프리모 데 리베라는 몇 가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성공은 20세기 초부터 스페인을 괴롭혀 온 스페인령 모로코 문제 해결이었다. 1920년부터 베르베르인 리프족의 반란으로 제3차 리프 전쟁이 진행 중이었는데, 프리모 데 리베라는 반란을 진압할 충분한 자원이 없으면 식민지를 포기하겠다며 군대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1925년 모로코인들이 프랑스령 지역을 공격하자 프랑스와 연합하여 반란 진압에 나섰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간 그는 1927년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모로코에서의 승리에 힘입어 프리모 데 리베라는 1927년 10월 10일,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 의회를 개회했다. 그러나 이 의회는 정권이 임명한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프리모 데 리베라에게 조언만 할 수 있을 뿐 입법 권한은 없는 허울뿐인 기구였다. 1929년, 의회는 독재자의 지침에 따라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마련했다. 이 초안에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프리모 데 리베라가 여성이 남성보다 정치적 급진주의에 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30년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이 헌법을 통과시킬 계획이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민족주의자로서 국가의 강국화를 목표로 내걸고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중산층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저금리 정책을 폈고, 대규모 공공 사업을 벌여 사회 기반 시설(인프라)을 정비했다. 또한 봉건 제도의 잔재인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고 군 개혁 등에 힘썼지만, 이러한 개혁 시도는 오히려 기존 지지 세력이었던 귀족과 군부의 반발을 사 지지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정적으로 그의 방만한 재정 운용은 국가 재정을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갔다. 1926년에는 여론 악화로 의회를 부활시키고 군인이 점령하고 있던 지방 지사 자리에 문관을 임명하는 등 일부 양보를 강요받았다. 1927년에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모방하여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 '애국 동맹'이라는 지배 정당을 창설했지만, 1928년부터 페세타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경제는 더욱 깊은 불황에 빠져들었다. 결국 군부, 지주, 자본가 등 핵심 지지층마저 등을 돌렸고, 여러 차례 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을 타도하려는 쿠데타 미수도 일어났다. 1929년 바르셀로나 만국 박람회가 간신히 개최되었지만, 정권의 위기는 심화되고 있었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의 영향이 스페인에도 밀려들자, 통화 가치의 붕괴로 인해 리베라의 경제 정책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1930년 1월, 그를 총리로 임명했던 알폰소 13세마저 그에게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프리모 데 리베라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실각했고, 그 몇 달 후 망명지인 파리에서 사망했다.
4. 2. 경제 정책과 사회 기반 시설 확충
리베라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조국을 위해 사회 기반 시설 구축에 힘썼다. 그가 집권했을 때 스페인에는 자동차가 거의 없었으나, 1930년까지 이를 확대하려 노력했다. 여러 해 전에 공사가 시작되었던 바르셀로나 지하철은 1924년에 개통되었다. 그의 경제 관료들은 두에로강과 에브로강을 중심으로 수력 발전을 활용하고 관개 시설을 위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댐을 건설했다. 이를 통해 스페인의 일부 농촌 지역에 처음으로 전기가 공급되기도 했다. 또한 정권은 스페인의 철도를 개량하여 스페인 철강 산업의 번영에 기여했다. 1923년에서 1927년 사이에는 대외 무역이 300% 증가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반적으로 그의 정부는 자국 생산자를 외국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는 경제 민족주의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주로 재무 장관이었던 호세 칼보 소테로의 영향이었다. 스페인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 호황으로 이익을 얻었지만, 그 혜택은 주로 부유층에게 집중되었다.[9]리베라 정권 하의 사회적 안정은 부분적으로 스페인 노동자의 이익을 일부 수용하려는 정책 덕분이기도 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모델로 삼아, 리베라는 27개의 산업별 기업(위원회)을 조직하여 경영진과 노동자 간의 협력을 강제했다. 각 위원회 내에서는 정부 중재자가 임금, 노동 시간, 근로 조건에 대한 분쟁을 조정했다. 이는 스페인 노동자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 때문에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과 노동자총연합(UGT)은 정부와의 협력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 지도자들은 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10] 또한 정권이 대규모 공공 사업을 추진하면서 개별 노동자들도 일자리를 얻는 혜택을 누렸다. 정부는 이러한 프로젝트 자금을 거액의 공공 대출로 충당했는데, 칼보 소테로는 경제 확장으로 세수가 증가하면 이를 상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실업률은 크게 낮아졌다.
그러나 리베라 정권은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독재 체제를 운영했다. 언론은 검열되었고, 정부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활동 공간이었던 엘 아테네오 클럽은 폐쇄되었다. 주로 아나키스트 성향의 전국노동연맹(CNT)은 불법화되었으며, PSOE의 지원 없이 CNT가 조직한 총파업은 군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카탈루냐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억누르기 위해 정권은 카탈루냐 문화를 억압하여, 교회 예배에서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거나 전통 춤인 사르다나를 추는 것을 금지했다.
리베라의 많은 경제 개혁은 실제로는 빈곤층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규모 공공 지출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했고, 이는 부유층이 더 쉽게 감당할 수 있는 반면 빈곤층에게는 부담을 가중시켰다. 결과적으로 당시 스페인에서는 부유층과 노동자 계급 간의 소득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민족주의자로서 국가 강화를 목표로 했던 그는 저금리 정책을 통해 중산층의 생활 수준 향상을 도모하고 공공 공사를 통해 인프라를 정비하려 했으나,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국가 재정은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1928년부터 페세타 가치가 하락하면서 국내 경제는 불황에 빠졌고, 이는 리베라 정권의 지지 기반이었던 군부, 지주, 자본가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스페인에 미치자 통화 가치 붕괴와 함께 리베라의 경제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결국 1930년 1월, 국왕 알폰소 13세는 리베라에게 퇴진을 요구했고, 그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실각했다.
4. 3. 노동 운동과 지역 자치 운동 탄압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1923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의회를 해산하고 1876년 헌법을 정지시키는 등 독재 체제를 강화하며 언론을 통제했다. 이 과정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8]주요 탄압 대상 중 하나는 노동 운동이었다. 특히 아나키스트 성향의 전국노동연맹 (CNT)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으며, CNT가 조직한 총파업은 군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정부를 비판하는 지식인들 역시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 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는 아프리카의 푸에르테벤투라 섬으로 유배되었고(후에 탈출 성공),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와 같은 다른 지식인들도 망명을 선택해야 했다. 또한, 스페인의 유서 깊은 정치 및 문학 클럽인 엘 아테네오가 폐쇄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노동 세력이 정권과 대립한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 사회노동자당 (PSOE)과 노동자총연합 (UGT)은 정부가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모방하여 만든 산업별 위원회에 참여하며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정부는 이 위원회를 통해 임금, 노동 시간, 근로 조건 등에 대한 분쟁을 중재했으며, 이는 노동자들이 이전 정권에 비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10] 하지만 이러한 협력은 어디까지나 독재 정권의 통제 하에서 이루어진 제한적인 것이었다.
지역 자치 운동 역시 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의 주요 탄압 대상이었다. 특히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에서 일어나는 분리주의 및 자치 요구 움직임을 억누르기 위해 강경책을 사용했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 카탈루냐 고유의 문화를 억압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예를 들어 공공장소나 교회 예배에서 카탈루냐어 사용을 금지하고, 카탈루냐의 전통 춤인 사르다나를 추는 것조차 불법으로 간주했다.
4. 4. 모로코 문제 해결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 경력은 모로코, 쿠바, 필리핀 등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전쟁에서 소위로 복무하며 시작되었다. 특히 모로코 북부 리프 지역의 베르베르족과의 전투에서 용기와 진취성을 보여 꾸준히 진급하고 훈장을 받았다.그러나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스페인이 스페인령 서아프리카 식민지, 특히 스페인령 모로코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수년간 스페인 정부는 막대한 인명과 비용을 쏟아부었음에도 베르베르족 반군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쿠바와 필리핀에서의 경험(필리핀 혁명 당시 에밀리오 아기날도에 대항하여 부관으로 활동하고, 비악나바토 조약 이후 필리핀 망명객들과 함께 인질이 된 경험 포함)과 미국-스페인 전쟁에서의 패배를 지켜보며, 스페인이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능력이 없다면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스페인 내에서 논란을 일으켰으며, 그는 무능한 정치인들과 의회 제도가 제국의 영광을 지키지 못하고 국내 문제 해결에도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09년 이후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 경력은 계속 발전했지만, 조국의 상황에 대한 실망감은 커져갔다. 그는 1911년 10월 케르트 전역에서 대령으로 보병 연대를 이끌다 전투 중 부상을 입기도 했다.[7] 이후 스페인령 모로코로 복귀하여 1911년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준장 계급에 올랐다. 그러나 모로코 문제는 스페인 국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09년 바르셀로나에서는 제2차 리프 전쟁을 위한 징집에 반발하여 비극의 주간이라 불리는 격렬한 사회적 소요가 발생했다. 카탈루냐의 급진 공화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자 폭력 사태로 번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의 경제적 어려움은 사회 불안을 더욱 고조시켰다. 입헌 군주제 하의 코르테스 헤네랄레스(스페인 의회)는 실업, 노동 파업, 빈곤 문제에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1920년부터 스페인령 모로코에서는 베르베르인 리프족의 반란으로 제3차 리프 전쟁이 시작되었고, 1921년에는 스페인군이 안누알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군의 북아프리카 정책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이 패배는 군 내부의 부패 의혹과 함께 알폰소 13세 국왕과 군 수뇌부에 대한 정치적 책임론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 상황 속에서 1923년 9월 12일, 당시 바르셀로나 총독이었던 프리모 데 리베라는 군부, 교회, 대지주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감행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알폰소 13세 국왕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그는 스페인 총리로 임명되어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1923~1930년). 이는 모로코 문제를 포함한 국가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스페인의 의회 민주주의를 중단시키고 권위주의 통치 시대를 열게 되었다.
5. 독재 정권의 몰락
경제 호황이 끝나고 페세타화 가치가 하락하는 등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독재 정권에 대한 스페인 국민들의 불만은 점차 커져갔다.[1][2] 1929년의 흉작과 대공황의 여파는 스페인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에 대한 비판도 높아졌다.[1][2]
이러한 경제 위기 속에서 프리모 데 리베라는 핵심 지지 기반이었던 군부와 국왕의 신뢰마저 잃게 되었다. 군부 내에서는 그의 정치적 개입에 대한 반발이 커졌고[1], 국왕 알폰소 13세 역시 정권의 불안정성과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확산에 실망하여 점차 거리를 두었다.[1] 과거 지지층이었던 지주와 자본가들마저 등을 돌리면서 정권은 고립되었고, 여러 차례 쿠데타 미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2]
결국 군부와 국왕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한 프리모 데 리베라는 1930년 1월, 알폰소 13세의 퇴진 요구를 받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1][2] 그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임한 뒤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930년 3월 16일 지병으로 사망했다.[1][2]
5. 1. 경제 위기와 지지 기반 약화
경제 호황이 끝나가면서 스페인 국민들은 점차 독재 정권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페세타화의 가치는 외화 대비 하락했으며, 1929년에는 흉작으로 스페인의 수입이 수출 가치를 훨씬 초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일부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정부의 과도한 공공 사업 지출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고 지적했다. 당시에는 명확히 인식되지 않았지만, 그해 말부터는 세계 경제를 강타할 대공황의 초기 침체가 시작되고 있었다.[1]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의 방만한 재정 운용은 국가 재정을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갔다. 1928년부터 페세타 가치의 하락이 심화되면서 국내 경제는 불황에 빠졌다.[2]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권의 지지 기반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군부 내에서는 프리모 데 리베라가 포병 장교의 승진에 정치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자 불만과 반대가 커졌다. 비록 군부가 그의 집권을 만장일치로 지지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개입은 기존의 암묵적 용인마저 흔들었다.[1] 또한, 그가 추진했던 귀족 특권 제한이나 군 개혁 등도 기존 지지층의 이반을 초래했다.[2]
정권의 정당성 확보 실패와 경제난 해결 능력 부재에 불안감을 느낀 국왕 알폰소 13세 역시 점차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특히 자신이 후원했던 마드리드의 대학교 도시 학생들이 독재 정권과 이를 지지하는 국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모습은 국왕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비밀리에 유포된 풍자 전단에는 알폰소 13세가 프리모 데 리베라의 꼭두각시처럼 묘사되기도 했다.[1]
경제 불황이 심화되고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자, 여러 차례 정권 전복을 노린 쿠데타 미수 사건도 발생했다.[2] 1929년 바르셀로나 만국 박람회가 간신히 개최되었지만[2], 대공황의 여파가 스페인 경제를 덮치면서 통화 가치 붕괴로 리베라의 경제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2]
결국 1930년 1월 26일, 프리모 데 리베라는 군 지도자들에게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으나, 돌아온 것은 미온적인 반응뿐이었다. 국왕마저 더 이상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이틀 뒤 사임을 결심했다.[1] 알폰소 13세 역시 이 시점에 리베라에게 퇴진을 요구했고, 공식적으로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실각했다.[2] 프리모 데 리베라는 은퇴 후 파리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열병과 당뇨병 합병증으로 1930년 3월 16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2]

5. 2. 군부와 국왕의 이탈
경제 호황이 끝나가면서 스페인 국민들은 점차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정권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페세타화 가치는 외화 대비 하락했고, 1929년에는 흉작이 들었으며, 스페인의 수입은 수출 규모를 훨씬 초과했다.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정부의 과도한 공공 사업 지출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고 지적했다. 당시에는 명확히 인식되지 않았지만, 그해 말부터 세계 경제는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는 국왕과 군대의 지지를 잃으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스페인 군부는 처음부터 그의 권력 장악을 만장일치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통치를 용인해왔다. 그러나 프리모 데 리베라가 포병 장교의 승진 문제에 정치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군부 내에서 적대감과 반대가 커졌다. 정권이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국가가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낀 국왕 알폰소 13세 역시 점차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자신이 후원하여 설립한 마드리드 대학교 도시의 학생들이 독재 정권과 이를 지지하는 국왕에 반대하며 거리 시위에 나서는 모습은 알폰소 13세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당시 비밀리에 유포되던 팸플릿에는 알폰소 13세가 프리모 데 리베라의 꼭두각시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국왕은 프리모 데 리베라를 직접 해임할 만한 결단력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1930년 1월 26일, 프리모 데 리베라는 군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지지 여부를 직접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미온적인 반응이었고, 국왕 역시 더 이상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이틀 뒤인 1월 28일 사임을 결정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파리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지병인 당뇨병과 열병이 악화되어 1930년 3월 16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3. 사임과 망명
경제 호황이 끝나가면서 스페인 국민들은 점차 독재 정권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페세타화의 가치는 외화 대비 하락했으며, 1928년부터 경제 불황이 시작되었고 1929년에는 흉작까지 겹쳤다. 스페인의 수입은 수출 가치를 훨씬 초과했으며,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정부의 과도한 공공 사업 지출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1929년 말 시작된 대공황의 영향이 스페인 경제를 더욱 강타하면서, 프리모 데 리베라의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이미 파탄 직전에 이른 국가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프리모 데 리베라가 국왕과 군대의 지지를 잃으면서 그의 독재 정권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군부 내 포병 장교 승진 문제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면서 군부의 반감을 샀고, 마드리드 대학교 도시 설립을 후원했던 알폰소 13세 국왕 역시 독재 정권과 자신에 대한 학생들의 거센 항의 시위를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과거 정권의 지지 기반이었던 군, 지주, 자본가들마저 등을 돌렸고, 여러 차례 정권 타도를 목표로 한 쿠데타 미수 사건도 일어났다.
결국 1930년 1월, 알폰소 13세는 프리모 데 리베라에게 퇴진을 요구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1월 26일 군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지지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미온적인 반응과 함께 국왕마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그는 이틀 뒤인 1월 28일, "건강 악화"를 공식적인 이유로 내세우며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사임 후 프리모 데 리베라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열과 당뇨병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은 1930년 3월 16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유산과 평가
프리모 데 리베라의 아들인 제3대 에스테리야 후작 호세 안토니오는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를 창당했다. 이후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군은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시기의 사회 구조를 재건한 권위주의적, 반동적 정권을 수립했다.[14][15]
6. 1. 국민의힘 및 보수 진영에 대한 비판적 관점
1930년대 초 대공황의 여파로 스페인은 경제적,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알폰소 13세는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이후 다마소 베렝게르 장군을 통해 통치하려 했으나, 헌정 질서 복귀는 실패했다. 독재를 지지함으로써 스스로의 정당성을 훼손한 군주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왕정의 정당성은 크게 약화되었다.[13]1931년 4월 지방 선거에서 왕당파 정당들이 전체 투표에서는 승리했지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주요 도시에서는 공화파 후보들이 압승하며 도시 중심지의 민심이 왕정에서 이탈했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호세 산후르호 장군으로부터 군대의 지지를 더 이상 확보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알폰소 13세는 1931년 4월 14일 망명길에 올랐고, 이는 제2 공화국의 시작을 알렸다.[13]
프리모 데 리베라의 정치적 영향은 그의 아들에게 직접적으로 이어졌다. 그의 장남인 제3대 에스테리야 후작 호세 안토니오는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를 창당했다. 호세 안토니오와 그의 동생 페르난도는 1936년 3월 공화국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같은 해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군에 의해 알리칸테 감옥에서 처형되었다.[14][15]
내전에서 승리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군은 권위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정권을 수립했는데, 이는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시절의 사회 구조를 상당 부분 복원한 것이었다.[14][15] 이는 프리모 데 리베라의 통치가 이후 스페인 파시즘과 프랑코 독재 체제의 기반 형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참조
[1]
서적
King Alfonso XIII and His Age
https://books.google[...]
Chapman & Hall
[2]
서적
Miguel Primo de Rivera: Dictadura, populismo y nación
https://books.google[...]
Editorial Crítica
[3]
서적
Miguel Primo de Rivera y Orbaneja
Ediciones B
[4]
기타
Television documentary from CC&C Ideacom Production,"Apocalypse Never-Ending War 1918–1926", part 2, aired on [[DR K]] on 22 October 2018
[5]
웹사이트
Primo de Rivera, 'el inventor del populismo de derechas'
https://elpais.com/b[...]
2023-01-27
[6]
문서
The Spanish Civil War
[7]
웹사이트
1911 Dura acción de castigo en el Rif
https://www.diariode[...]
2011-10-10
[8]
서적
The Origins of Franco’s Spain – The Right, the Republic and Revolution, 1931–1936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9]
서적
Historic World Leaders: Europe (L-Z)
Gale Research Incorporated
1994
[10]
서적
The Spanish Anarchists: The Heroic Years, 1868–1936
AK Press
[11]
뉴스
SPANISH PLEBISCITE DRAWS RECORD VOTE; De Rivera at End Estimates Total Is Four Times That of Any General Election. ABSTENTIONISTS ARRESTED Barcelona Police Hold Those Who Agitated Against Signing Endorsement of Government.
https://www.nytimes.[...]
2022-01-20
[12]
뉴스
SPANISH FARCE. Three Days' Plebiscite.
http://nla.gov.au/nl[...]
2022-01-20
[13]
간행물
Tres días de abril que revolucionaron España
2006
[14]
서적
Spain 1908–1975
Oxford University Press, USA
1983
[15]
서적
The Coming of the Spanish Civil War
Palgrave Macmillan UK
197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