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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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 키비는 영국에서 태어나 호주로 이주한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2/48 보병대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을 발휘하여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42년 10월 31일 전투 중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엘 알라메인 전쟁 묘지에 안치되었으며, 호주 전쟁 기념관에 훈장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딴 기념물과 시설들이 호주 여러 지역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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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키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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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윌리엄 "빌" 키비 |
출생 | 1903년 4월 15일 |
출생지 | 위닐턴, 더럼 카운티, 잉글랜드 |
사망 | 1942년 10월 31일 |
사망지 | 엘 알라메인, 이집트 |
안장지 | 엘 알라메인 전쟁 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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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빌 |
복무 | |
소속 | 오스트레일리아 |
군대 |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
복무 기간 | 1936년 – 1942년 |
계급 | 상사 |
부대 | 2/48th 보병 대대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서부 사막 전역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
훈장 | 빅토리아 십자훈장 |
2. 초기 생애
윌리엄 헨리 키비는 1903년 4월 15일 영국 더럼주 윈라턴에서 태어났다. 세 자녀 중 둘째였으며, 부모는 드레이퍼 조수였던 존 로버트 키비와 메리 이사벨라 키비(결혼 전 성은 버니)였다. 그는 누나가 두 명 있었다. 1914년 초, 키비 가족은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로 이민을 갔다. 빌은 미첨 공립학교에 다녔으며, 에드워드스타운의 퍼펙션 섬유 석고 공장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그곳에서 그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며 석고 장식을 디자인하고 설치했다. 1926년 메이블 사라 비드미드 모건과 결혼하여 헬름스데일(현재는 글레넬그 이스트)에 살았으며, 클라리스와 재클린 두 딸을 두었다.
1940년 6월 29일, 키비는 제2호주제국군에 입대하여 제2/48 보병대대에 배치되었다. 이 부대는 제26여단 소속으로, 처음에는 제7사단에 배속되었다. 그해 9월 14일, 키비는 임시 병장으로 진급했으며, 한 달 후 임시 상사로 진급했다. 제2/48 대대는 11월 17일 HMT ''Stratheden''에 탑승하여 중동으로 향했고, 12월 17일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 새해 전날, 키비는 참호에 빠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는 몇 달 동안 요양 생활을 했으며, 회복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시골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담은 40여 점의 수채화와 연필 드로잉을 제작했다. 이후 1941년 8월 여단 훈련 대대에 합류하여 무기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보병 학교에도 다녔다. 1942년 2월, 키비는 1년 전 제9사단으로 이전된 제26여단 소속 제2/48 대대에 다시 합류했다. 당시 대대는 토브룩 공방전에 참여한 후 시리아 북부에서 주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키비는 키가 168cm에 불과했지만, 강인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야외 활동을 즐겼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스카우트(Scouts Australia)에 가입하여 제2 글레넬그 해상 스카우트의 부수석 스카우트마스터로 활동하며 그들의 구명정에서 선원으로 일했다. 가족과 함께 산책과 소풍을 즐겼고, 다양한 공공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열렬한 골퍼였다. 또한 그는 재능 있는 예술가였으며, 석고 디자인 작업 외에도 그림을 그리고, 잠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 광산 및 산업 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는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하는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1936년에는 민병대에 입대하여 제48야전 포병대, 호주 왕립 포병대에 배치되었다. 민병대 복무와 함께, 그는 군사 타투에 참여하는 것을 즐겼다.
3. 제2차 세계 대전
3. 1.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
1942년 초, 추축국 군대는 이집트 북서부를 꾸준히 진격해왔다. 영국 제8군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엘 알라메인의 철도 부근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이곳은 지중해와 사람이 살기 힘든 카타라 저지대 사이의 해안 평원이 좁아지는 곳이었다. 1942년 6월 26일, 빌 키비가 속한 제9사단은 시리아 북부에서 엘 알라메인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1일, 에르빈 롬멜의 군대는 동맹군을 그 지역에서 몰아내고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여 카이로와 수에즈 운하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발생했다.
7월 10일 새벽, 롬멜이 전장의 남쪽 측면에 집중하는 동안, 제9사단은 적 진지의 북쪽 측면을 공격하여 텔 엘 에이사 주변의 전략적 고지를 점령했다. 며칠 후, 롬멜은 일련의 치열한 반격으로 자신의 군대를 그들에게 다시 보냈지만, 호주군을 몰아낼 수 없었다. 7월 22일, 제24 및 제26여단은 텔 엘 에이사 남쪽 능선에 있는 독일군 진지를 공격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냈지만, 마크 카드 능선과 텔 엘 에이사 자체를 점령했다.
3. 2.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1942년 10월 23일부터 31일까지 벌어진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키비는 뛰어난 용맹을 보여주었다. 10월 23일, 미테리야 능선 공격에서 소대장이 전사하자 키비가 소대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톰슨 기관단총을 쏘며 기관총 진지를 돌격하여 적군 3명을 사살하고 12명을 포로로 잡았다. 중대장은 이 공로로 키비에게 뛰어난 공로 훈장을 추천하려 했으나 전사했다.
키비는 이후 며칠 동안 부하들을 격려하고 사격을 지시했으며, 격렬한 포화 속에서도 여러 차례 전화선을 수리하여 대대 박격포와의 통신을 복구하고 적에게 포격을 가하도록 했다. 10월 30~31일, 소대는 강력한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을 받아 대부분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10월 31일 자정 직전, 키비는 중대 목표 달성을 위해 적진에 단독으로 돌격하여 수류탄을 투척하던 중 전사했다.
다음 날 아침, 제2/48 대대는 부상 없는 병사가 5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날 밤 제2/48 대대가 점령한 초소는 적에게 빼앗겼고, 적은 키비를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공동 묘지에 매장했다. 나중에 호주군이 그 지역을 탈환했을 때, 그의 부대원들은 열흘 동안 수색하여 묘지를 찾아 개인적으로 그들을 다시 매장했다.
3. 2. 1. 빅토리아 십자 훈장 추서
키비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과 함께 1939–1945 성장 메달, 제8군 버클이 있는 아프리카 성장 메달, 국방 훈장, 1939–1945 전쟁 메달, 1939–1945 호주 서비스 메달을 받았다. 그의 아내 메이블은 훈장 세트를 호주 전쟁 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에 기증했으며, 이 훈장들은 용기의 전당에 전시되어 있다.
4. 유산
1944년 1월, 키비의 유해는 영연방 전쟁 묘지 위원회가 관리하는 엘 알라메인 전쟁 묘지에 재안치되었다. 같은 해에 기념 신탁이 설립되어 1001AUD를 모금했으며, 이는 헬름스데일 제3번가에 있는 메이블과 딸들을 위한 집을 구매하는 데 사용되었다. 키비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과 함께 1939–1945 성장 메달, 제8군 버클이 있는 아프리카 성장 메달, 국방 훈장, 1939–1945 전쟁 메달 및 1939–1945 호주 서비스 메달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이후 메이블은 그의 훈장 세트를 호주 전쟁 기념관에 기증했으며, 용기의 전당에 전시되어 있다. 1947년, 키비의 아버지 존은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에서 연합군을 지휘했던 원수 버나드 몽고메리를 애들레이드 방문 시 만났다. 1956년, 애들레이드 힐스의 우드사이드 병영에 있는 병사들의 식당이 키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96년, 뉴사우스웨일스주 야라 근처의 연방 고속도로에 있는 휴게소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주 글레넬그 노스 지역에는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십자 훈장 및 조지 십자 훈장 수훈자들을 위한 키비 애비뉴와 키비 보호 구역이 있다. 참전 용사 쉼터와 락스턴의 거리가 또한 키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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