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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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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추축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결성된 국가 연합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헝가리의 파시스트 총리 굄뵈시 줄러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1940년 9월 27일 삼국 동맹 조약 체결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추축국은 영토 확장을 목표로 이웃 국가들을 침략하고, 파시즘, 군국주의, 자급자족 등의 이념을 공유했다. 주요 추축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전쟁에 참여했으며,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도 추축국에 가담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의해 패망했으며, 패전 후 국제 연합의 적국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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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
지도 정보
도쿄에서 열린 삼국 동맹 조약 체결 축하 행사
기본 정보
공식 명칭추축국
독일어: Achsenmächte
이탈리아어: Potenze dell'Asse
일본어: 樞軸國
일반 명칭추축국
지위군사 동맹
시대제2차 세계 대전
존속 기간1936년–1945년
시작 사건방공 협정
시작 날짜1936년 11월 25일
주요 사건 1강철 조약
주요 사건 1 날짜1939년 5월 22일
주요 사건 2삼국 동맹 조약
주요 사건 2 날짜1940년 9월 27일
종료 사건패전과 해체
종료 날짜1945년 9월 2일
주요 추축국
주요 국가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참고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일반적으로 추축국 중 "주요" 국가로 묘사됨.
기타 추축국
기타 국가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핀란드
슬로바키아 공화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태국
참고헝가리는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여 일반적으로 추축국으로 간주됨. 1944년 10월 15일 이후 독일의 괴뢰 정권 하에 놓임.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도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여 일반적으로 추축국으로 간주됨.
핀란드는 소련과 영국에 대항하여 추축국의 공동 교전국이었지만 일반적으로 추축국 회원으로 간주됨.
슬로바키아와 크로아티아는 추축국이 세운 괴뢰 국가임.
태국은 1942년 1월 25일 일본과 동맹하여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하며 일반적으로 추축국 회원으로 간주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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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축국의 형성

베를린의 일본 대사관에 게양된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국기 (1940년 9월)


'추축국'이라는 용어는 헝가리의 파시스트 총리인 굄뵈시 줄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을 주장하며 독일과 이탈리아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143] 그러나 1936년 굄뵈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독일이 뮌헨 협정을 체결하면서 그의 후계자인 더라니 칼만은 삼국 동맹 구도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143]

베니토 무솔리니는 1923년 9월에 처음으로 '축(Axis영어)'이라는 용어를 언급했다. 이후 1936년 10월 25일 우정 조약을 체결하면서 '로마-베를린 추축(Rome-Berlin axis영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조약은 원래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에 반대하던 때에 체결되었으나,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독일 덕분에 국제 연맹에서 지원을 받은 이후, 1939년에 두 나라의 관계는 무솔리니에 의해 강철 조약이라는 동맹으로 발전했다.

무솔리니는 1936년 연설에서 "유럽의 국제 관계는 로마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Axis'')'으로 하여 변화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1935년, 이탈리아 왕국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국제사회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을 위해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을 원했던 아돌프 히틀러는 이 기회에 양국 관계 개선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36년 10월, 갈레아초 치아노가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몇 가지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조약이나 협정이 체결된 것은 아니었고, 특별히 중요한 관계가 성립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치아노가 귀국하자 무솔리니는 "로마-베를린 선은 다른 나라를 가르는 벽이 아니다. 협조와 평화의 의지를 가진 모든 유럽 국가들이 그 주위를 돌 수 있는 중심축이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로마-베를린 축"이라는 말은 양국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세계에 퍼져나갔다. 1937년 9월에는 무솔리니가 독일을 방문하면서 양국의 협조 관계가 강화되었고, '축'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었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후 5월에 히틀러는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이미 독일의 우세는 명확했고, 각국 신문의 명칭도 "베를린-로마 축"으로 바뀌었다. 1939년 5월 22일에는 강철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의 협력 관계는 군사 동맹으로 발전했다.

고다마 히데오(児玉秀雄), 일본 제국의 전시 내각 장관


오시마 히로시(大島浩) 중장, 2차 세계 대전 전후 독일 주재 일본 대사


일본의 작가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일본 민족주의의 핵심 인물


일본과 독일 간 동맹 체결에 대한 관심은 1935년 일본 외교관 오시마 히로시(大島浩)가 베를린에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을 의향은 없었지만, 오시마는 리벤트로프에게 소련에 대항하는 독일-일본 동맹 결성에 대한 일본의 관심을 전달했다. 리벤트로프는 코민테른에 반대하는 정치적 협약이라는 맥락에서 동맹을 옹호함으로써 오시마의 제안을 확대했다. 제안된 협약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엇갈렸는데, 정부 내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이 협약을 지지했지만, 일본 해군일본 외무성은 이 협약에 강력히 반대했다. 일본 정부는 독일과의 그러한 협약이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해준 유익한 영일동맹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이 협약에 대한 반응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분열되었는데, 제안된 협약은 나치당 상층부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외무성, 육군, 그리고 일본에 적대적인 중화민국에 재정적 이해관계를 가진 기업계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독일-일본 협상에 대해 알게 된 이탈리아도 일본과의 동맹 체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일본이 영국과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탈리아-일본 동맹을 통해 영국에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에 대해 더 유연한 입장을 취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1936년 여름,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는 주이탈리아 일본 대사 스기무라 요타로에게 "소련에 관한 일본-독일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것을 들었고, 이탈리아와 일본 간에도 유사한 협정이 체결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처음에 일본은 이탈리아의 제안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했는데, 소련에 대항하는 독일-일본 동맹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탈리아-일본 동맹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 일본은 이탈리아-일본 동맹이 에티오피아 침략을 비난한 영국을 자극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7년 국제연맹중일 전쟁에 대해 일본을 비난하고 일본이 국제적 고립에 직면한 반면, 이탈리아는 일본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탈리아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국제적 비난에 대한 이탈리아의 지지로 일본은 이탈리아에 대해 더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탈리아와 불가침 조약 또는 중립 조약을 제안했다.

추축국은 공식적으로 삼국 동맹 조약을 독일의 베를린에서 1940년 9월 27일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서명하며 시작됐다. 이후 이 조약에 헝가리(1940년 11월 20일), 루마니아(1940년 11월 23일), 슬로바키아(1940년 11월 24일), 불가리아(1941년 3월 1일)가 합류했다. 이탈리아어 동맹 이름인 '''로베르토'''('''ROBERTO''')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로마-베를린-도쿄 추축의 영어명인 "'''Ro'''me-'''Ber'''lin-'''To'''kyo"를 딴 것이다.[144] 가장 강력한 군사적 회원국은 독일과 일본이었다. 이 두 나라는 1936년에 방공 협정을 맺었다.

일본은 1936년 11월 일독방공협정을 체결했고, 1937년 11월 일독이방공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일독이 3국의 관계에 대해 로마-베를린-도쿄 축(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132] 만주국 문제, 국제연맹 탈퇴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을 심화시킨 일본에게 독일과 이탈리아는 몇 안 되는 우방국이었다.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가 끝나고 반민주주의·반자유주의적 경향을 강화해가던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체제적으로도 가까운 나라이며, 서로 또는 국제적으로도 그렇게 여겨지게 되었다. 1938년 12월에는 라디오 방송 중의 「대건설의 노래」(시바노 타메이치 작사)에서 "방공은 동서 하나로 축은 이제 엄하도다"라고 불렀으며,[133], 그 의식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1940년 9월의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으로 이어진다.

2. 1. 이탈리아-독일 관계의 발전



"추축"이라는 용어는 1923년 9월 이탈리아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가 "지금 유럽 역사의 중심축은 베를린을 지난다"(''non v'ha dubbio che in questo momento l'asse della storia europea passa per Berlino'')라고 쓴 때 처음으로 이탈리아-독일 관계에 적용되었다.[6] 당시 그는 유고슬라비아프랑스에 대항하여 피우메 자유주 분쟁에서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동맹을 추구하고 있었다.[7]

이 용어는 1930년대 초 헝가리가 독일과 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주장할 때 헝가리의 총리 율라 괴멤뵈슈가 사용했다. 괴멤뵈슈의 노력은 이탈리아-헝가리 로마 의정서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가 1936년 뮌헨에서 독일과 협상 중 갑자기 사망하고 후임인 칼만 다라니가 취임하면서 헝가리는 3국 추축 추진에 대한 개입을 중단했다.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와 독일 대사 울리히 폰 하셀 간의 논쟁적인 협상은 1936년 치아노와 그의 독일 동료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가 서명한 9개항 의정서를 초래했다. 무솔리니는 11월 1일 서명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면서 로마-베를린 축의 창설을 선포했다.[7]

무솔리니는 1936년 10월 25일 우정 조약을 체결하면서 로마-베를린 추축(Rome-Berlin axis영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조약은 원래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에 반대하던 때에 체결됐는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독일 덕분에 국제 연맹에서 지원을 받은 이후, 1939년에 두 나라의 관계는 무솔리니에 의해 강철 조약이라는 동맹으로 성장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이끄는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정권 하의 독일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Vittorio Emanuele III) 국왕 치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이끄는 파시즘 체제 하의 이탈리아 왕국은 모두 유사한 권위주의적 체제였으며, 사상적으로도 가까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었고, 1934년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첫 회담이 열렸을 때도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이 회담 직후인 6월 24일, 헝가리 왕국의 수상 괴엠뵈시 율라(Gyula Gömbös)는 "베를린과 로마는 추축의 양 끝을 이루고 있다"고 연설하며, 양국의 관계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유럽의 평화로 이어진다고 말했다.[131] 그러나 같은 해 7월, 오스트리아 나치당 주도의 오스트리아 수상 엥겔베르트 돌푸스(Engelbert Dollfuss)의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1935년, 이탈리아 왕국이 에티오피아를 침공(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하자 국제사회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을 위해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을 원했던 히틀러는 이 기회에 양국 관계 개선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36년 9월, 독일은 무임소 장관 한스 프랑크를 이탈리아에 파견하여 수상 베니토 무솔리니의 방독을 요청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를 방독시키겠다고만 언급했을 뿐, 자신의 방독은 명확히 하지 않았다. 10월에 치아노가 방독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몇 가지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조약이나 협정이 체결된 것은 아니었고, 특별히 중요한 관계가 성립된 것도 아니었다.

치아노가 귀국하자 무솔리니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로마-베를린 축"이라는 말은 양국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세계에 퍼져나갔다. 히틀러는 이 발언을 실체 없는 합의를 과장해서 보여주는 무솔리니의 퍼포먼스로 여겼다. 이듬해 1937년 9월에는 무솔리니의 방독이 이루어졌고, 양국의 협조 관계가 강화됨에 따라 축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합병 후 5월에 히틀러는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이미 독일의 우세는 명확했고, 각국 신문의 명칭도 "베를린-로마 축"으로 바뀌었다. 1939년 5월 22일에는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의 협력 관계는 군사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조약은 통칭 '강철 협약'으로 불린다.

2. 2. 독일-일본-이탈리아 동맹의 발전



'추축국'이라는 용어는 헝가리의 파시스트 총리인 굄뵈시 줄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을 주장하며 독일과 이탈리아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143] 그러나 1936년 굄뵈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독일이 뮌헨 협정을 체결하면서 그의 후계자인 더라니 칼만은 삼국 동맹 구도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143]

베니토 무솔리니는 1923년 9월에 처음으로 '축(Axis영어)'이라는 용어를 언급했다. 이후 1936년 10월 25일 우정 조약을 체결하면서 '로마-베를린 추축(Rome-Berlin axis영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조약은 원래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에 반대하던 때에 체결되었으나,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독일 덕분에 국제 연맹에서 지원을 받은 이후, 1939년에 두 나라의 관계는 무솔리니에 의해 강철 조약이라는 동맹으로 발전했다.

무솔리니는 1936년 연설에서 "유럽의 국제 관계는 로마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Axis'')'으로 하여 변화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1935년, 이탈리아 왕국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국제사회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을 위해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을 원했던 아돌프 히틀러는 이 기회에 양국 관계 개선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36년 10월, 갈레아초 치아노가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몇 가지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조약이나 협정이 체결된 것은 아니었고, 특별히 중요한 관계가 성립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치아노가 귀국하자 무솔리니는 "로마-베를린 선은 다른 나라를 가르는 벽이 아니다. 협조와 평화의 의지를 가진 모든 유럽 국가들이 그 주위를 돌 수 있는 중심축이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로마-베를린 축"이라는 말은 양국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세계에 퍼져나갔다. 1937년 9월에는 무솔리니가 독일을 방문하면서 양국의 협조 관계가 강화되었고, '축'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었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후 5월에 히틀러는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이미 독일의 우세는 명확했고, 각국 신문의 명칭도 "베를린-로마 축"으로 바뀌었다. 1939년 5월 22일에는 강철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의 협력 관계는 군사 동맹으로 발전했다.

일본과 독일 간 동맹 체결에 대한 관심은 1935년 일본 외교관 오시마 히로시(大島浩)가 베를린에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을 의향은 없었지만, 오시마는 리벤트로프에게 소련에 대항하는 독일-일본 동맹 결성에 대한 일본의 관심을 전달했다. 리벤트로프는 코민테른에 반대하는 정치적 협약이라는 맥락에서 동맹을 옹호함으로써 오시마의 제안을 확대했다. 제안된 협약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엇갈렸는데, 정부 내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이 협약을 지지했지만, 일본 해군일본 외무성은 이 협약에 강력히 반대했다. 일본 정부는 독일과의 그러한 협약이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해준 유익한 영일동맹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이 협약에 대한 반응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분열되었는데, 제안된 협약은 나치당 상층부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외무성, 육군, 그리고 일본에 적대적인 중화민국에 재정적 이해관계를 가진 기업계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독일-일본 협상에 대해 알게 된 이탈리아도 일본과의 동맹 체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일본이 영국과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탈리아-일본 동맹을 통해 영국에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에 대해 더 유연한 입장을 취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1936년 여름,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는 주이탈리아 일본 대사 스기무라 요타로에게 "소련에 관한 일본-독일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것을 들었고, 이탈리아와 일본 간에도 유사한 협정이 체결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처음에 일본은 이탈리아의 제안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했는데, 소련에 대항하는 독일-일본 동맹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탈리아-일본 동맹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 일본은 이탈리아-일본 동맹이 에티오피아 침략을 비난한 영국을 자극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7년 국제연맹중일 전쟁에 대해 일본을 비난하고 일본이 국제적 고립에 직면한 반면, 이탈리아는 일본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탈리아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국제적 비난에 대한 이탈리아의 지지로 일본은 이탈리아에 대해 더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탈리아와 불가침 조약 또는 중립 조약을 제안했다.

추축국은 공식적으로 삼국 동맹 조약을 독일의 베를린에서 1940년 9월 27일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서명하며 시작됐다. 이후 이 조약에 헝가리(1940년 11월 20일), 루마니아(1940년 11월 23일), 슬로바키아(1940년 11월 24일), 불가리아(1941년 3월 1일)가 합류했다. 이탈리아어 동맹 이름인 '''로베르토'''('''ROBERTO''')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로마-베를린-도쿄 추축의 영어명인 "'''Ro'''me-'''Ber'''lin-'''To'''kyo"를 딴 것이다.[144] 가장 강력한 군사적 회원국은 독일과 일본이었다. 이 두 나라는 1936년에 방공 협정을 맺었다.

일본은 1936년 11월 일독방공협정을 체결했고, 1937년 11월 일독이방공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일독이 3국의 관계에 대해 로마-베를린-도쿄 축(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132] 만주국 문제, 국제연맹 탈퇴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을 심화시킨 일본에게 독일과 이탈리아는 몇 안 되는 우방국이었다.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가 끝나고 반민주주의·반자유주의적 경향을 강화해가던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체제적으로도 가까운 나라이며, 서로 또는 국제적으로도 그렇게 여겨지게 되었다. 1938년 12월에는 라디오 방송 중의 「대건설의 노래」(시바노 타메이치 작사)에서 "방공은 동서 하나로 축은 이제 엄하도다"라고 불렀으며[133], 그 의식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1940년 9월의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으로 이어진다.

3. 추축국의 이념과 목표

아돌프 히틀러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1920년대부터 독일과 이탈리아 간의 동맹을 주장해 왔다.[10] 독일 총리로 임명된 직후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개인적인 메시지를 보내 "찬사와 경의"를 표하고 독일-이탈리아 우정 및 동맹의 전망에 대한 기대를 선언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남티롤에 대한 잠재적인 독일 영토 주장에 대해 우려하고 있음을 알고, 남티롤에 관심이 없다고 무솔리니에게 확신시켰다.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이탈리아 동맹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고려할 때 남티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히틀러 집권 후, 이탈리아의 4개국 이사회 제안은 영국에서 관심을 끌었지만, 히틀러는 이에 헌신하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이사회에 가입하여 즉각적인 무력 충돌을 피함으로써 독일이 고립에서 벗어나는 외교적 이점을 고려하라고 촉구했다. 4개국 이사회 제안은 독일이 더 이상 제한된 무장을 할 필요가 없으며 단계적으로 외국 감독하에 재무장할 권리가 부여될 것이라고 명시했다. 히틀러는 외국 감독하에 통제된 재무장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거부했다.

무솔리니는 앙슐루스에 대한 히틀러의 의도나 남티롤에 대한 영토 주장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반마르크스 정부인 엔젤베르트 돌푸스의 존재에 만족한다고 히틀러에게 알리고, 앙슐루스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경고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돌푸스를 바다에 던져 버릴 것"이라고 비웃으며 응답했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1933년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을 무솔리니에게 보내 오스트리아 문제를 둘러싼 이탈리아와의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 했다. 괴링은 무솔리니가 오스트리아에 오스트리아 나치즘을 정부에 임명하도록 압력을 가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며, 나치의 오스트리아 지배가 불가피하며 이탈리아도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솔리니에게 히틀러가 "남티롤 국경 문제는 평화 조약에 의해 최종적으로 청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약속을 반복했다. 무솔리니와 괴링의 만남에 대한 대응으로 돌푸스는 즉시 독일의 외교적 진전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돌푸스는 자신의 정부가 오스트리아에서 적극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도전하고 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패배하면 오스트리아 나치에 대한 지지가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엔젤베르트 돌푸스


1934년 6월,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베네치아에서 처음 만났으나, 회의는 우호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돌푸스에게 오스트리아 나치를 내각에 임명하도록 압력을 가함으로써 오스트리아 문제에 타협할 것을 요구했고, 무솔리니는 이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당분간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수용할 것이라고 약속하며, 독일 내부의 긴장(곧 긴 칼의 밤에 히틀러가 죽일 나치 돌격대 일부를 언급) 때문에 독일이 이탈리아를 자극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갈레아초 치아노는 두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에 간섭하지 않기로 "신사 협정"을 맺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11]

베네치아 회담 몇 주 후인 1934년 7월 25일, 오스트리아 나치들은 돌푸스를 암살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암살의 직접적인 책임자로 여겨 격분했다. 무솔리니는 브레너 고개에 여러 개의 군 사단과 공군 중대를 신속하게 배치했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면 독일과 이탈리아 간의 전쟁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12] 히틀러는 나치의 암살 책임을 부인하고 독일 나치당과 오스트리아 지부 간의 모든 유대를 해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독일은 이것이 정치적 위기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13]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이탈리아 협정을 체결하여 독일의 완고함에 맞서 싸우면서 독일과의 외교 관계를 사실상 단절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감히 공격할 경우 전쟁을 포함한 군사 협력 가능성에 대해 프랑스와 이탈리아 군 참모들이 논의했다.

1935년 히틀러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지지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3. 1. 공통 이념

추축국은 이웃 국가를 희생시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15] 이념적으로 추축국은 금권 서구 열강의 패권을 깨고 공산주의로부터 문명을 수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묘사했다. 추축국은 여러 형태의 파시즘, 군국주의, 보수주의, 자급자족을 지지했다.[16] 영토적으로 인접한 자급자족 제국을 건설하는 것은 주요 추축국들의 공통된 목표였다.[17]

1936년 11월, 일본은 일독방공협정을 체결했고, 1937년 11월에는 일독이방공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 독일, 이탈리아 3국의 관계에 대해 로마-베를린-도쿄 추축(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132] 만주국 문제, 국제연맹 탈퇴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을 심화시킨 일본에게 독일과 이탈리아는 몇 안 되는 우방국이었다. 또한, 국제 정치적으로 현상 유지를 지향하는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가진 자 없는 나라"로서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을 추구하는 경향과 더불어, 국내 정치적으로는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가 끝나고 반민주주의·반자유주의적 경향을 강화해가던 일본은 독일 및 이탈리아와 체제적으로도 가까운 나라이며, 서로 또는 국제적으로도 그렇게 여겨지게 되었다. 1938년 12월에는 라디오 방송 중의 「대건설의 노래」(시바노 타메이치 작사)에서 "방공은 동서 하나로 축은 이제 굳건하도다"라고 불렀으며[133], 그 의식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1940년 9월의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으로 이어진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이끄는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정권 하의 독일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Vittorio Emanuele III) 국왕 치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이끄는 파시즘 체제 하의 이탈리아 왕국은 모두 유사한 권위주의적 체제였으며, 사상적으로도 가까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었고, 1934년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첫 회담이 열렸을 때도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이 회담 직후인 6월 24일, 헝가리 왕국의 수상 괴엠뵈시 율라(Gyula Gömbös)는 "베를린과 로마는 추축의 양 끝을 이루고 있다"고 연설하며, 양국의 관계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유럽의 평화로 이어진다고 말했다.[131] 그러나 같은 해 7월, 오스트리아 나치당 주도의 오스트리아 수상 엥겔베르트 돌푸스(Engelbert Dollfuss)의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3. 2. 각국의 목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일본 제국은 이웃 국가를 희생시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15] 이들은 이념적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금권 서구 열강의 패권을 깨고 공산주의로부터 문명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지노 보카실레(Gino Boccasile)가 그린 이탈리아 선전 포스터. 삼국 동맹의 힘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일본 사무라이가 영국과 미국의 배를 격침시키고 그 뒤로 세 나라의 해군기를 꽂고 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하여 일본의 지도 아래 동아시아를 통합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자국의 행동을 정당화했다.[44] 범아시아주의를 내세우며 아시아인들은 서구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45] 중일전쟁에 반대한 미국은 장제스의 중국 국민정부를 중국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미일 간 무역에 대한 금수 조치를 통해 일본의 전쟁을 중단시키려 했다. 일본은 석유의 80%를 미국에 의존했기에, 금수 조치는 일본에게 경제적, 군사적 위기를 초래했다.[46]

일본은 석유 무역 감소 상황에서 군사 작전 유지를 위해 동남아시아에서 대체 석유 공급원을 확보하려 했다.[47]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은 미국의 전면 금수 조치가 일본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공격을 앞당길 것을 우려했다.[48] 일본은 진주만 해군기지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의 반응을 억제하고 시간을 벌어 미국이 일본의 획득을 받아들이도록 했다.[47] 같은 날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 정권 독일베니토 무솔리니파시즘 체제 이탈리아 왕국권위주의적 체제로 사상적으로 가까웠다. 1934년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첫 회담은 성과가 없었다. 직후 헝가리 왕국 수상 괴엠뵈시 율라는 "베를린과 로마는 추축의 양 끝"이라 연설했다.[131] 그러나 오스트리아 나치당 주도의 엥겔베르트 돌푸스 오스트리아 수상 암살 사건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긴장했다.

일본은 1936년 11월 일독방공협정을 체결하고, 1937년 11월 일독이방공협정을 체결하여, 일독이 3국 관계에 로마-베를린-도쿄 축(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만주국 문제, 국제연맹 탈퇴로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우방국으로 여겼다.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가 끝나고 반민주주의·반자유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던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체제적으로 가까웠다. 1937년 일독이방공협정 체결 당시 도쿄시에서 등불 행렬이 있었다.[132] 1938년 12월 라디오 방송 중 "방공은 동서 하나로 축은 이제 엄하도다"라고 불렀다.[133] 이는 1940년 9월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으로 이어졌다.

4. 주요 추축국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군기


전쟁 기간 중 일본 제국의 최대 영토


전쟁 기간 동안 각국의 전쟁 부담 비율은 국민총생산(GNP) 대비 군비 지출 비율로 나타났다.[145] 1939년 독일은 GNP의 4분의 1을 전쟁에 투입했고, 1944년에는 4분의 3까지 증가했으나 경제 붕괴로 유명무실해졌다.[145] 일본은 1939년 GNP의 22%를 중일 전쟁에 사용했고, 1944년에는 4분의 3으로 늘었다.[145] 반면 이탈리아는 경제 동원에 실패하여 전쟁 전 수준을 유지했다.[145]

추축국의 국내총생산(GDP) 총합은 연합국보다 낮았다.[146] 이탈리아와 일본은 산업 능력이 부족하여 상호 경제에 의존했고, 국제 무역은 연료와 자원 확보에 중요했지만 외부 상황에 따라 변동이 컸다.[145] 1943년 이탈리아와 일본의 동원도는 낮아졌다.[145]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제외한 다른 추축국들의 군사 동원도는 매우 낮았고, 일본의 소득 수준은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 비해 낮았다.[147]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은 연합국과 교전했지만, 통합된 전쟁 지휘는 없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이나 일본의 미국 공격은 사전 통보(선전포고) 없이 이루어졌고, 교전 상대도 통일되지 않아 추축국 간의 협력은 부족했다.

4. 1. 나치 독일

1942년 나치 독일의 영토


나치 독일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당수인 아돌프 히틀러가 통치하고 있었다.

독일 시민들은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독일의 영토와 인구, 식민지를 전부 상실하게 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매우 모욕받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1920년의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독일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배상금으로 인해 부담이 커졌다. 1923년, 프랑스가 루르 지역을 점령하여 독일인의 프랑스인에 대한 불만의 감정을 갖고 배상금 지불이 늦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1920년대 중반, 독일은 경제가 개선되기 시작했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더욱 경제적 어려움과 독일의 불황에 독일 내에서는 급진적인 해결책을 주장하는 정치가가 증가했다. 아돌프 히틀러 아래 나치는 등 뒤의 칼 찌르기 이야기를 주장하며 독일인은 유대인과 공산당에게 배반당하고, 남은 주요 전력으로 다시 독일을 재건하고 나치 독일에 포함되는 알자스로렌, 오스트리아, 수데텐란트 등 유럽의 다른 독일인 거주 지역을 요구했다. 이 외에도, 나치가 추구한 나치 정책의 일환으로 독일의 식민지로 비독일 폴란드 영토, 발트 지역, 그리고 소련을 정복할 목적으로 동부 유럽의 광역적인 레벤스라움(생활권)을 주장했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오른쪽)과 이탈리아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왼쪽).


1936년 3월에는 재군비 선언과 라인란트 재무장을 함으로써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포기했다. 독일은 이미 징병을 재개하고 1935년에 독일 공군의 존재를 공개했다. 또,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뮌헨 협정)와 리투아니아의 메멜을 1939년에 얻었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든 체코 지역을 1939년에 점령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여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은 독일에 합병하고, 슬로바키아 공화국을 만들었다.

1939년 8월 23일에는, 독일과 소련이 독소 불가침 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서명하면서 동유럽의 영향권을 나누는 비밀 조약도 같이 있었다.[203] 8일 후, 독일은 조약에 따라 폴란드를 침공하고,[148]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41년 말까지, 독일은 유럽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독일군은 소련과 전쟁할 경우 모스크바를 점령 가능할 정도(A-A 선으로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진격선)로 커져 있었다. 그러나 독소전쟁 시작 후, 독일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 대부분의 군사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서방 연합군은 프랑스 상륙과 이탈리아 상륙을 전개했으며, 군사력이 고갈된 독일군은 3면 전쟁을 하면서 1945년에 무조건 항복했다.

1939년 10월, 폴란드 점령(폴란드 침공) 후 바르샤바에서 열린 승전 퍼레이드에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 발터 폰 브라우히츠 장군


영국 전투 당시 독일의 하인켈 He 111 폭격기


북아프리카 전역의 엘 알라메인 제2차 전투 중 진격하는 독일군 차량


동부 전선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독일군 병사들


1943년 6월 공중 공격을 받고 있는 독일 잠수함 ''U-118''호


1941년 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독일의 폴란드와의 전쟁에 대한 서방 열강의 개입 때문이라고 묘사하며, 이를 "유럽과 미국의 호전적인 자들"의 결과라고 설명했다.[18] 히틀러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세계 수도"(Welthauptstadt)인 게르마니아(게르마니아)로 개명하는 등 독일을 세계의 지배적이고 선도적인 국가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19] 독일 정부는 또한 히틀러가 "우리는 인구 과잉 상태이며 우리 자신의 자원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라고 묘사한 인구 과잉(인구 과잉) 위기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필연적으로 영토 확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국 행동을 정당화했다.[20] 따라서 확장은 독일 국민을 위한 생활 공간을 제공하고 기존의 좁은 영토 내에서 국가의 인구 과잉을 종식시키며 국민의 복지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기 위한 불가피한 필요성으로 정당화되었다.[20] 1920년대부터 나치당은 소련이 점령한 영토로의 독일 확장을 공개적으로 홍보했다.[21]

독일은 폴란드 내 독일 소수 민족(폴란드 내 독일 소수 민족) 문제와 독일계가 다수인 단치히 자유시의 독일 편입에 대한 폴란드의 반대를 근거로 폴란드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집권하기 전에 폴란드를 파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했고 폴란드인들에게 적대적이었지만, 집권 후 1939년 2월까지 히틀러는 폴란드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감추려고 노력했고, 1934년 10년간의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여 자신의 계획을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만 공개했다.[22] 193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변화했는데, 독일은 폴란드가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폴란드와의 화해를 추구했고, 폴란드 내 반소 감정에 호소했다.[23] 히틀러는 심지어 폴란드가 반 코민테른 조약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소련은 이때 폴란드에서 독일과 영향력 경쟁을 벌였다.[23] 동시에 독일은 폴란드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폴란드 내 독일 소수 민족을 비밀리에 전쟁 준비를 시키고 있었다.[24]

단치히 자유시가 독일로 합병되도록 요구한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외교적 위기가 발생했다. 단치히는 독일 합병을 추구하는 나치 정부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독일은 1939년 폴란드에 대한 개입과 단치히 자유시(독일 편입을 추구하는 현지 나치 정부가 통치)의 합병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적 선례를 사용했다.[25] 폴란드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했고, 독일은 1939년 8월 30일 아침 전면 동원을 준비했다.[26]

독일은 1940년 5월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저지대 국가 침공을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공업 지역인 루르 지역 침공을 위해 저지대 국가들을 이용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정당화했다.[27] 1939년 5월 독일 대 영국 및 프랑스 간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히틀러는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점령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며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공군 기지는 점령되어야 한다... 중립 선언은 무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27] 1939년 11월 23일 독일 군 지휘관들과의 회의에서 히틀러는 "우리는 아킬레스건, 루르 지역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통해 루르 지역으로 진격한다면 우리는 최대의 위험에 처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중립 주장과 관계없이 독일이 영국-프랑스의 루르 지역 공세로부터 독일을 보호하기 위해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7]

1941년 소련 침공에는 생활 공간, 반공주의, 그리고 소련의 외교 정책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 나치 정권의 독립적이고 영토적으로 축소된 러시아에 대한 입장은 1942년부터 독일군의 압력으로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이끄는 "러시아 해방군"을 지지하도록 히틀러에게 영향을 미쳤다.[28] 처음에 반공 러시아 군대를 지원하자는 제안은 히틀러의 전면적인 거부에 직면했지만, 1944년 독일이 동부 전선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블라소프의 군대가 특히 독일의 동맹국으로 인정받았다.[29]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일본과 미국의 전쟁 발발 후, 독일은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본을 지지했다. 전쟁 중 독일은 미국이 연합국에 대한 지원을 위해 동맹에 가입하기 전에 채택한 대서양 헌장과 렌드리스법을 대륙 아메리카 외부 국가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제국주의로 비난했다.[30] 히틀러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프랭클린 D. 루즈벨트)이 전쟁에서 미국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자유"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비난하고, 미국의 "자유"의 의미는 민주주의가 세계를 착취할 자유와 그러한 민주주의 내의 재벌들이 대중을 착취할 자유라고 비난했다.[30]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 국민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국가가 굴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조약에는 전쟁 책임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고,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과거 독일 제국이 지배했던 영토와 모든 식민지를 넘겨야 했다. 배상금으로 인한 독일 경제의 압박은 1920년대 초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1923년 독일이 배상금 지불을 연체하자 프랑스는 루르 지역을 점령했다. 1920년대 중반 독일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이 더욱 심화되었고, 독일의 문제에 대한 급진적인 해결책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이 증가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을 배신했다는 내용의 국수주의적 등 뒤에서 찌르기 신화를 선전했다. 나치는 독일을 다시 강대국으로 만들고 대독일을 건설하여 엘자스-로렌, 오스트리아, 수데텐 지역, 그리고 유럽의 다른 독일계 인구 지역을 포함시킬 것을 약속했다. 나치는 또한 중앙 및 동유럽에서 'Lebensraum'(생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나치 정책의 일환으로 폴란드, 발트 국가, 소련의 비독일 영토를 점령하고 식민지화할 목표를 세웠다.

독일은 1936년 3월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라인란트를 재무장했다. 독일은 이미 1935년에 징병을 재개하고 독일 공군인 루프트바페와 해군인 크리그스마리네의 존재를 발표했다. 독일은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했고, 193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과 리투아니아의 메멜을 합병했다. 이후 독일은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을 침공하여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과 슬로바키아를 건설했다.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동유럽을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비밀 의정서가 포함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서명했다. 8일 후 독일이 조약에 따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1941년 말까지 독일은 유럽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고, 군대는 소련과 싸우며 모스크바를 거의 점령할 뻔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패배로 독일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와 더불어 서방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 작전과 시칠리아 연합군 침공으로 인해 3전선 전쟁이 벌어져 독일군의 전력이 고갈되었고, 1945년 독일의 패배로 이어졌다.

4. 2. 이탈리아 왕국



1942년 이탈리아 왕국의 최대 영토


이탈리아 왕국파시즘 독재와 두체베니토 무솔리니의 지도하에 있었다.

19세기 후반, 통일 후 민족주의 운동이 성장하며 이탈리아 실질회복운동으로 이탈리아어 사용 지역의 통합을 주장했다. 이탈리아 관리가 통치하는 베네치아가 통합되고, 달마티아 지역을 통치하려는 욕망을 가졌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는 새로운 로마를 주장하며 지중해 지배를 목표로 하였다. 1935년부터 1936년까지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합병하고, 파시스트 정부는 이탈리아 제국을 선포했다.[149] 국제 연맹은 영국이 주도해 항의하여 이탈리아는 외교 고립에 직면했지만 특별한 조치는 없었다. 1937년 이탈리아는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같은 해 방공 협정에 일본, 독일과 함께 서명했다. 1939년 3-4월 이탈리아 군대는 알바니아를 침공, 합병하였다. 독일-이탈리아 간 강철 조약은 5월 22일에 서명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0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1941년 이탈리아 군대는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에서 패배하며 큰 피해를 입었다.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침공그리스 공방전 등 독일의 개입을 통해 군사적 붕괴와 도시 함락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1943년 이탈리아인들은 무솔리니에 대한 신뢰를 잃고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모든 식민지를 잃었고, 연합국은 5월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7월 시칠리아를 침공했다.

1943년 7월 25일, 이탈리아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무솔리니를 실각, 체포하고 연합국과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1943년 9월 8일 공동 참전국으로 서방 연합국에 가입하고, 연합국과 휴전하며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4. 3. 일본 제국

일본 제국아시아태평양에서 추축국의 주요 국가였다. 일본 제국 헌법에 따르면, 천황은 국가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괄하고 육해공군을 통수했다. 대본영과 내각은 황실 기관의 두 참모였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만주, 내몽골, 중화민국, 말레이시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필리핀, 미얀마, 인도 일부, 특히 중앙 태평양 제도들을 요구했다.[44] 일본은 범아시아주의를 내세우며 아시아인들은 서구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45]

1920년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침체와 내부 불화가 커지자, 일본은 군국주의 확장 발전론을 펼쳤다. 일본은 자원이 부족하여 아시아 패권을 확립하고 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1930년대 중반 국제 연맹에서 소외된 독일, 이탈리아와 유사했다. 독일과 일본은 방공 협정을 맺어 소련의 공격에 함께 대응하기로 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의 협력을 추진하여 1938년에 만들어진 일본의 선전 포스터.


중일 전쟁은 1937년에 발발했다. 일본의 침략과 삼광 작전은 난징 대학살 같은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초래했다. 일본 육군할힌골 전투에서 소련, 몽골과 교전하며 만주 방어선을 강화했다. 일본은 1941년 소비에트 연방-일본 중립 조약을 체결하여 소련과의 잠재적 전쟁을 피하려 했다.

유럽 전쟁에 초점이 맞춰지는 동안, 일본은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비시 프랑스 정권에서 독일은 인도차이나 인수를 승인했다. 연합군은 일본과 전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중일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1941년 일본에 대한 수출 금지령을 선포했다. 이는 산업, 무역, 전쟁에 필요한 강철과 석유 수입을 제한하는 것이었다.[46]

필리핀의 미군 세력을 분리하고 미군 해군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본영은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지시했다. 일본 군대는 말레이시아홍콩을 즉시 침략했다. 일본은 처음에는 연합군에게 피해를 입혔으나, 1943년부터 미국의 생산력이 증가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로 끝났다. 소련은 1945년 8월 전쟁을 선포하고 만주 전략공세작전으로 만주, 중국 북동부, 사할린, 한반도 북부를 공격했고, 1945년 9월 2일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

미국은 중일전쟁에 반대하며 장제스의 중국 국민정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미국은 일본과의 무역 금수 조치로 일본의 전쟁 노력을 중단시키려 했다. 일본은 석유의 80%를 미국에 의존했기에, 금수 조치는 일본에 경제적, 군사적 위기를 초래했다.[46]

미국과의 석유 무역 감소 상황에서,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대체 석유 공급원을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47]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은 미국의 전면 금수 조치가 일본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공격을 앞당길 것을 우려했다.[48]

일본은 진주만 해군기지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동남아시아 침공 계획의 주요 위협으로 인식했다.[47]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의 반응을 억제하고, 미국과의 총력전을 벌일 시간을 벌고,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려 했다.[47] 같은 날,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은 1936년 11월 일독방공협정을 체결했고, 1937년 11월 일독이방공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독이 3국의 관계에 대해 로마-베를린-도쿄 축(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132] 만주국 문제, 국제연맹 탈퇴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일본에게 독일과 이탈리아는 몇 안 되는 우방국이었다.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가 끝나고 반민주주의·반자유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던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체제적으로도 가까웠다. 1938년 12월 라디오 방송에서 "방공은 동서 하나로 축은 이제 엄하도다"라고 불렀으며[133], 그 의식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1940년 9월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으로 이어졌다.

5. 기타 추축국 및 협력국

1943년 4월 5일, 독일, 이탈리아, 일본, 헝가리, 루마니아 군사 대표단의 우투아 전선 지역 방문 사진


히틀러와 만네르헤임 장군


탈리-이한탈라 전투에서 파괴된 소련 T-34 탱크 잔해를 지나가는 핀란드군


핀란드는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 공식적으로 추축국은 아니었다.[151] 그러나 1941년 11월에 방공 협정에 서명했다.

1939년 8월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 후, 독일과 소련은 비밀 협정을 통해 동유럽과 핀란드의 영향권을 나누었다.[203][152] 1939년 11월, 소련은 핀란드에 영토 양보를 요구했으나 실패하자, 핀란드 공산주의 꼭두각시 정부를 세우기 위해 겨울 전쟁을 일으켜 핀란드를 침공했다.[153][154] 이 전쟁은 독일의 철광석 공급을 위협하고 연합군의 개입 가능성을 높였다.[155] 핀란드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940년 3월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카렐리야 지협과 핀란드 제2의 도시 비보르크를 포함한 주요 지역과 방어선인 만네르하임 선을 소련에 넘겨주었다. 전쟁 후, 핀란드는 영국[156][157]과 중립국 스웨덴[158]에 보호와 지원을 요청했으나 소련의 저지로 실패했다. 그 결과 핀란드는 잃어버린 영토 회복, 소련의 지속적인 압박 완화, 독일의 지원을 받기 위해 독일과 가까워졌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에, 핀란드는 독일 비행기가 핀란드 내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고, 독일 폭격기들은 크론시타트네바강에서 연료를 보급하기 위해 동프로이센 기지로 돌아가기 전 핀란드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은 1941년 6월 25일 핀란드에 선전포고를 하고 핀란드 비행장과 주요 도시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소련과 핀란드의 전투는 보통 계속 전쟁으로 불린다.

핀란드의 주요 목표는 겨울 전쟁 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1년 7월 1일, 핀란드 원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은 오늘의 명령을 통해 핀란드가 관심을 가진 러시아 카리알라 지역에 대한 국제적 이해를 얻지 못했다.

영국과 핀란드 사이의 외교 관계는 영국의 독일과 핀란드 페쳉그스키 군 도시 폭격 후 1941년 8월 1일에 단절되었다. 영국은 소련을 상대로 한 핀란드의 군사 공세를 중단시키기 위해 1941년 12월 6일 핀란드에 선전포고했다. 리시-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인해 핀란드와 미국의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선전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독일과 핀란드는 공동 공격 중 긴밀하게 협력했지만, 은여우 작전에서 핀란드는 군사 명령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군사 목표를 추구했다. 핀란드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유대인 병사들은 군대에 계속 복무했으며 유대인 망명을 받아들였다.

핀란드와 독일의 관계는 리시-리벤트로프 조약으로 더욱 가까워졌고, 독일은 군수 및 항공 지원 조건을 제시하며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에서 핀란드와 협력했다. 대통령 리스토 류티가 평화협정을 추진했지만, 별도의 평화를 추구하지 않은 핀란드 의회는 비준하지 않았다.

소련이 전투 준비를 마치자, 류티의 후임자인 만네르헤임은 9월 4일 계약을 기각하고 1944년 9월 19일 소련과 비밀 협상을 열어 모스크바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휴전 조건에 따라 핀란드는 자국 내 독일 군대를 추방해야 했고, 이는 라플란드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7년, 핀란드는 연합국과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

이라크 왕국의 영토


이라크는 1941년 5월 앵글로-이라크 전쟁으로 영국과 전쟁을 벌였다. 1941년 이라크에는 반영국 정서가 널리 퍼져 있었다. 1941년 4월 1일, 이라크 전역을 점령한 민족주의 정부의 국무총리 라시드 알리는 1930년대 맺어진 앵글로-이라크 조약을 거부하고 영국이 군사 기지를 포기하고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알리는 이라크에서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1941년 5월 9일, 무함마드 아민 알후세이니는 예루살렘무프티 알리와 연관되어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고,[159] 이에 대한 영국의 아랍 전역 지배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1941년 5월 25일, 독일군이 공격 작전을 강화했다. 히틀러는 총통 지령 30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라크와 영국 간의 전투는 1941년 5월 2일 하바니야의 RAF 공군 기지에서 시작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시리아-레바논 전역을 통해 시리아의 비시 프랑스 기지를 이용하여 이라크에 항공기와 대공 무기를 지원했다.

독일은 영국령 이집트를 통해 팔레스타인과 이라크로 독일-이탈리아 공세를 전환할 계획이었다. 이라크군은 저항했지만 1941년 5월 31일에 끝났다. 라시드 알리와 무프티는 이란으로 도주한 후 터키, 이탈리아를 거쳐 베를린으로 망명했고, 알리는 이라크의 원수로 히틀러에게 환영받았다. 베를린에서 무프티는 선전 방송을 통해 독일과 이탈리아를 지원하고 영국에 저항하는 아랍인들을 격려했다. 그는 또한 발칸 반도의 무슬림 무장 친위대 지원자 채용을 도왔다.

산마리노는 1923년부터 산마리노 파시스트당(PFS)에 의해 이탈리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통치되었다. 1940년 9월 17일, 산마리노가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자 다른 연합국도 참전했다.[160] 산마리노는 파리 조약에 참석하지 않아 독일과의 관계도 회복했다. 이는 산마리노가 1936년에 터키 학생을 받지 않은 외국인 적 사건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161]

무솔리니 실각 3일 후, PFS는 무너지고 새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다. 파시스트는 1944년 4월 1일 회복되었지만 중립은 유지되었다. 6월 26일, 영국 공군은 실수로 산마리노를 폭격하여 63명이 사망했다. 파시스트와 추축국은 이 비극을 연합국의 중립국 폭격으로 선전했다.

산마리노의 추축국 세력은 9월 17일 퇴각하여 점령되었지만, 3일도 지나지 않아 다시 연합국에 넘겨졌다. 연합국 점령 후 산마리노는 9월 21일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산마리노의 파시스트는 축출되었다.[162] 새로 선출된 정부는 11월 16일 파시스트를 금지했다.

1936년 유고슬라비아의 영토


1941년 3월 25일, 유고슬라비아의 침공을 우려한 파울 왕자는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다른 추축국과는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군사 지원 의무가 없었고, 전쟁 중 추축국 병력 이동만 허용되었다.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원했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의 추축국 가입을 공개적으로 환영하지 않았고, 유고슬라비아와 추축국 동맹을 맺는 것을 싫어했다.[163] 반면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통해 군대를 이동시켜 마리타 작전으로 그리스를 점령하고자 했다.[163]

1941년 동맹 체결 이틀 후, 거리 시위 이후 쿠데타로 파울 왕자는 축출되었다. 17세였던 페타르 2세는 국왕으로 선언되었고, 세르비아 정교회로부터 대관식과 기름부음을 받았다. 새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추축국의 침략을 우려하여 삼국 동맹 조약에 남아 있음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영국 왕자가 페타르의 쿠데타 배후에 있다고 의심하고 침공을 결정했다.

독일의 침공은 1941년 4월 6일에 시작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베르사유 조약 이후 다민족 국가로, 많은 동방 정교회 신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또한 나치 독일 점령 시 주요 저항 단체까지 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 정체성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크로아티아인들이 발칸 반도에서 공격적으로 형성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저항은 2주 동안만 지속되었으며 베오그라드에서 4월 17일에 무조건 항복이 체결되었다. 페타르 2세 국왕과 많은 유고슬라비아 우익들은 추축국에 협조하고 싶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더 이상 추축국의 구성원이 될 수 없었으며, 나라가 해산된 후 여러 추축국 꼭두각시 정부가 세워졌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등 여러 지방 왕국이 세워졌다. 유고슬라비아의 나머지 지역은 추축국이 분할 점령했다. 독일은 드라바 베노비아를 합병했다. 이탈리아는 남서부 드라바 베노비아, 크로아티아 일부 (달마티아와 섬), 코소보알바니아(1939년부터 점령)를 점령했다. 헝가리는 보이보디나와 바라냐를 포함한 국경 지역을 점령했다.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일부 지역을 합병했다.

자유 인도 임시 정부는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이끄는 인도 망명정부로, 마하트마 간디가 주장한 비폭력 방법을 거부하고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는 인도 독립 운동 중 인도 국민 회의였고, 보스는 2차 대전 초기에 영국에 체포되었다. 1941년 1월 그는 가택 연금에서 탈출 후, 1942년 싱가포르를 통해 독일 도착 이후, 주로 인도인 포로로 구성된 인도 국민군을 창설했다.

보스와 A. M. 샤리 등 지도자들은 도야마 미쓰루와 겐요샤 육군 고문의 지원을 받았다.[164] 인도의 사상가 아시트 크리슈나 무케르지, 보스의 친구와 그의 아내 사비트리 데비 무케르지 등은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 추축국을 지지했다.[165] 보스는 라시 비하리 보스와 함께 일본 인도 독립 연맹의 설립자가 되었다. 보스는 1943년 10월 21일 인도의 독립을 선언했다. 인도 국민군에 할당된 일본 육군 중에는 이와쿠로 히데오와 이소다 사부로가 있었다.

임시 정부는 공식적으로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를 점령했다. 이 제도는 일본의 점령 후 1943년 11월에 일본 소속으로 넘어갔다. 정부는 자신의 통화와 우표, 국가를 제정한 적이 없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해체된 것은 2년 후인 1945년 8월 18일이었다. 이 정부는 8개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만주국, 난징 국민정부, 크로아티아, 바 우 민족주의 체제의 버마, 사실상 호르티 체제의 필리핀)

시기별 추축국 국가 현황. 연합국은 녹색 계열, 추축국은 붉은색 계열과 노란색, 소련은 연보라색과 파란색, 중립국은 회색이다.


일본 제국의 종속국은 1932년 만주국으로 시작하여, 그곳에서 정부를 자처하는 이들이 점령했다. 이 종속국들은 국제 인식의 변화 정도를 나타낸다.

만주국의 영토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 정권으로 1930년부터 만주와 중국 동부 일부를 점령했다. 이 나라는 명목상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집권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관동군에 의해 통치되었다. 만주국은 표면상 만주족이 지배했지만, 이 지역은 한족이 다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이 독립하고 푸이가 황제에 올랐다. 푸이는 1932년 2월 18일 국가 원수로 추대되었으며, 만주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80개국 중 23개국이 만주국을 인정했지만, 국제연맹은 1934년 만주가 합법적으로 중국의 일부로 남았다고 선언했다. 국제연맹에서 분열을 촉진했다고 생각한 일본은 탈퇴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소련은 만주국을 인정한 주요국이었다. 그 외 만주국을 인정한 국가는 헝가리, 도미니카 공화국,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바티칸 시국이었다. 만주국은 몽강연합자치정부, 바 마우, 왕징웨이 정권, 자유 인도 임시 정부, 버마국 등 다른 일본 종속국도 인정했다. 만주국은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으로 인해 멸망했다.

몽강연합자치정부는 내몽골의 일본 괴뢰 정부이다. 이 나라는 명목상 왕자 데므치그돈로브가 통치하고 몽골의 칭기즈칸 후손임을 내세웠지만, 사실 일본 육군에 의해 제어되었다. 몽강국의 독립은 일본이 이 지역을 점령한 후인 1936년 2월 18일에 선포되었다.

내몽골은 거대한 평원과 사막 지역으로, 이 지역은 난징 중앙 정부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내몽골의 젊은 왕자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선동했고, 일본의 판몽골주의를 악용하여 결국 소련이 외몽골을 통제하는 것을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일본을 끌어들였다.

일본은 이론적으로 내몽골의 몽골 민족과 중앙 정부 간의 긴장을 이용해 몽강국을 세웠다. 일본은 아시아의 몽골 동맹을 만들고 결국 소련에서 몽골을 모두 정복하는 판몽골주의를 사용하려 했다.

중국은 다양한 꼭두각시 정부가 1940년 3월에 왕징웨이 정권으로 통합될 때, 몽강국은 자율적인 연방으로서 별도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 지역은 일본 제국 군대의 확고한 통제하에 있었지만, 왕자 데므치그돈로브는 자신의 군대를 세우고 독립했다.

몽강국은 1945년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패배 후, 소련과 적몽골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거대한 소련군이 내몽골로 접근하자, 그들은 몽골 기병의 약한 저항을 받았지만 곧 물리치고 완전히 점령했다.

왕징웨이 정권은 1940년 3월 29일 왕징웨이의 지원으로 세워진 국가로, 수도는 난징이었다.

중일 전쟁 동안 일본은 동양의 중원 대부분을 점령했다. 여러 일본의 꼭두각시 정부 설립 후, 일본 군대 점령 지역에서 1937년 베이징에 중화민국 임시 정부가, 1938년에는 난징에 중화민국 유신정부가 세워졌다. 이 정부들은 1940년 난징에서 왕징웨이 정권으로 통합되었다. 정부(왕징웨이 정권이라고도 함)는 국제 정권과 채택한 상징을 따라가게 했다.

난징 정부는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었고, 주요 역할은 일본 정부의 선전 역할이었다. 난징 정부는 중국의 일본 점령을 승인하고 일본 보호하의 만주국 독립을 인정하며 만주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난징 정부는 1941년 방공 조약에 가입하고, 1943년 1월 9일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정부는 처음부터 일본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정권을 중국의 진정한 민주 정부로 만들고 국민당의 상징을 복사하려 했으나, 일본은 정권의 국기 문제로 가장 자주 충돌했다. 국기에는 중화민국의 상징이 있었다.

1943년 이후 일본의 상황이 악화되자, 난징 육군은 최초로 일본이 구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역할을 맡았다. 신사군 군대는 거의 지속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채용했다.

왕징웨이는 1944년 11월 10일 나고야에서 사망하고, 그의 대리인 천궁보가 물려받았다. 천궁보는 영향력이 적었고, 실제로는 상하이 시장 저우포하이가 권력을 쥐고 있었다. 왕징웨이의 사망은 정권이 가진 작은 정당성을 없앴다. 이 국가는 또 다른 해 동안 파시스트 정권을 표방하며 유지되었다.

1945년 9월 9일 일본 패배 후, 장군 허잉친이 항복을 받고 장제스가 점령했다. 난징 육군 장군들은 신속하게 동맹을 선언하고, 이후 일본 항복 후 좌측을 진공하려는 공산당의 시도에 저항하는 명령을 받았다. 천궁보는 1946년에 수감되고 처형되었다.

바탄 반도의 필리핀-미군이 항복한 후, 일본은 1942년 괴뢰 상태로 필리핀을 독립시켰다. 1943년, 필리핀 국회는 필리핀 독립 공화국을 선포하고 필리핀 제2공화국대통령으로 호세 라우렐이 당선되었다. 국가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반일본 정서는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 필리핀 제2공화국은 일본의 항복과 함께 끝났다. 라우렐은 체포되고 미국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기소되었지만, 대통령 마누엘 로하스에 의해 사면받았다. 그는 후에 정치에 남아 필리핀 상원 선거에서 승리했다.

베트남 제국은 1945년 3월 11일부터 8월 23일까지 존속한 일본의 괴뢰 정부이다.

일본이 통제, 장악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명목상 비시 프랑스 하에 있었다. 1945년 3월 9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정부 통제 판결을 내렸다. 곧이어 천황 바오다이는 1884년 조약을 폐기하고 쩐쫑낌이 총리가 되었다.

이 나라는 짧은 존재 기간 동안 기근(1945년 베트남 기근)으로 고통받았고, 공용어를 프랑스어에서 베트남어로 바꾸고 학교도 베트남어를 가르쳤다.

캄보디아 왕국은 1945년 3월 9일부터 4월 15일까지 존재한 일본의 괴뢰 상태 왕국이다.

1941년 중반, 일본은 캄보디아 점령 후에도 명목상 비시 프랑스 하에 있었다. 대동아공영권의 일본 명목으로 식민지를 유지하는 도쿄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많은 크메르 민족주의자들을 설득했다.

이 정책은 전쟁 마지막 몇 달 동안 변경되었다. 일본은 지역 지원을 얻기 위해 프랑스 식민지를 해산하고 대동아공영권 내에서 독립을 선언하도록 점령했다. 나흘 후,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캄보디아 독립을 선언했다. 앙코르와트 신문 공동 편집자 송 응옥 타인은 5월에 도쿄에서 외무 장관이 되었다.

일본 항복 날짜에 새 정부 총리로 송 응옥 타인의 아들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10월에 연합군이 프놈펜을 점령하자, 아들 응옥 타인은 일본과의 협력 혐의로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그의 지지자 중 일부는 프랑스-태국 전쟁에서 크메르 이사라크 운동의 한 파벌로 1940년 북서 캄보디아가 태국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태국 민족 통일주의자 쁘라윳 짠오차 왕자는 1941년 1월에 처음으로 라오스 민족 단체를 세우고 국가 혁신 운동을 주도하여 하노이에서 비시 당국의 지원을 받았다. 이 그룹은 라오스의 국가라오스의 국기를 제정하면서 역설적으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이 나라는 1945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1944년 샤를 드 골이 해방될 때까지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일본과 비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동맹 관계의 끝을 의미했다. 일본은 드골주의를 대체할 의도가 없었으나, 1944년 말에 그들은 하노이 군사 쿠데타를 모의했다. 1945년 3월과 4월에 프랑스 군인 몇몇은 산으로 도망치고, 일본은 루앙프라방비엔티안을 점령했다. 국왕 시사방 봉은 일본에 의해 억류되었지만, 그의 아들 황태자 사방 밧타나는 라오스 인민으로 프랑스 지원을 추구하고 라오스인들은 일본과 전투를 벌여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왕자 펫사랏 랏타나봉사는 그러나 이것에 반대하고, 라오스 독립은 일본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국가는 혼란에 있었으나, 랏타나봉사 정부는 실질적인 권위가 없었다. 다른 라오스 단체는 라오스 세리(자유 라오스)로, 이산 지역에서 자유 태국 운동 단체의 지원을 받았다.

일본 제국 육군과 미얀마 민족 지도자 아웅 산은 1942년 영국령 버마를 지배했다. 버마주는 미얀마 민족 지도자 바 마우를 통해 8월 1일 설립되었다. 바 마우 체제는 아웅 산이 지휘하는 버마 국방군(후에 버마 국민군)을 설립했다.

유럽의 독일 점령 국가 행정부는 비교적 자유로웠고, 그들은 모든 면에서 주권 국가로 인식되었다. 점령된 폴란드의 총독부로 알려진 중앙 폴란드는 블루 경찰이 지배했지만, 합법적인 폴란드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독일이 행정권을 가졌다. 점령된 노르웨이의 크비슬링 정권비드쿤 크비슬링이 지배했지만, 실은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노르웨이가 지배했다. 그들은 무장 군사를 허용하지 않아 군사 동맹으로 인정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네덜란드의 "네덜란드 대통령" 안톤 뮈세르트는 상징적인 직함으로 민족사회주의 정부가 있었지만, 독일이 행정 내각을 세웠고, 그것은 진정한 네덜란드 정부로 인정되지 않았다.

1941년 슬로바키아의 영토


슬로바키아 공화국은 요제프 티소 아래 1940년 11월 24일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했다.

슬로바키아는 1939년 3월 14일 독일과 밀접하게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독립했다. 슬로바키아는 1939년 3월 23일 독일과 보호 조약을 체결했다.

슬로바키아 군대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참여하여 스피시와 오라바 지역을 점령했다. 이 두 지역(치에신 실레지아 포함)은 1918년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사이 국경 분쟁 이후, 폴란드가 뮌헨 협정 이후 합병할 때까지 나뉘었다. 9월 전투 후, 슬로바키아는 그 지역을 점령했다.

슬로바키아는 전쟁 동안 5만 명의 병력을 지원하며 독일군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다.

슬로바키아는 1941년 소련에 선전포고하고 방공 협정을 맺었다. 슬로바키아는 동부 전선에서 8만 명 이상의 병력과 2개 사단을 지원했다. 슬로바키아는 1942년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슬로바키아는 독일 군사 점령에 반대하여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를 일으켰고, 이 반란은 1944년 8월 29일에 시작되어 무장 친위대와 슬로바키아 치안대는 즉시 요제프 티소에게 충성하지 않고 슬로바키아 천주교 사제는 독재자로 규정했다.

전쟁 후 티소는 처형되었으며 슬로바키아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병합되었다. 폴란드와의 국경은 전쟁 이전으로 돌아갔다. 슬로바키아와 체코는 1993년에 분리되었다.

뵈멘-메렌 보호령은 1939년 3월 14일 슬로바키아 공화국 독립 선포 후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3월 16일 프라하에서 생성을 선포했다. 이 보호령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배 후 해체되었다.

1941년 4월,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 점령 후 4월 30일에 친독 성향의 밀란 아치몰비치가 세르비아 행정부를 장악하고 세르비아가 형성되었다.[166]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를 상대로

6. 추축국의 패망과 그 이후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다. 삼국 동맹 조약에 따라 나치 독일은 공격받을 때만 동맹국을 방어할 의무가 있었다. 일본의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에 선전포고할 의무가 없었지만, 12월 11일 히틀러는 독일 의회에서 이탈리아와 함께 미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220] 히틀러는 1941년 12월 11일, 일본 제국에 불명예 연설을 발표했다.[221][222]

미국에 대한 전쟁 선언은 추축국의 가장 큰 실수로 여겨진다. 이 선언으로 미국은 제한 없이 독일과 전쟁 중인 소련 및 영국과 동맹을 맺게 되었고,[223][224] 서유럽에서 독일 지배를 끝내기 위한 전략 폭격과 양면 침공에 참여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쟁 전부터 미국의 중립성에 의문을 가졌고, 레인보우 5 계획을 알고 있었으며, 미국의 군사력이 상승할 것을 예상했다. 그럼에도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과의 대립을 피하려 했으나, 고립주의자들의 영향력과 미국의 전쟁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 히틀러는 소련을 먼저 정복한 후 미국에 맞서 유럽을 지배하려 했으나, 미국의 참전으로 계획은 좌절되었다.

남작 오시마 히로시.


히틀러는 진주만 공격 후 나치 독일의 일본 대사 오시마 히로시에게 1급 독일 독수리 훈장을 수여했다.[226][227]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은 연합국교전했지만, 추축국 전체를 통합한 전쟁 지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의 소련 침공이나 일본의 미국 공격은 사전 통보(선전포고) 없이 이루어졌고, 교전 상대도 통일되지 않는 등 추축국의 발맞춤은 전혀 없었다.

연합군에 점령된 추축국들은 연합국으로부터 내정 지도를 받았다. 주요 추축국들은 전후 국제연합의 적국 조항에서 "구 적국"으로 부당하게 지정되어 국제연합 창립 회원국이 될 수 없었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135] 태국은 자유 태국 항일 운동 등의 활동으로 적국이 되지 않았고, 연합국의 식민지나 추축국의 점령지에 성립된 국가는 현존 국가로 간주되지 않아 적국 취급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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