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사가와 잇세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가와 잇세이는 1981년 프랑스 유학 중이던 일본인 여성 유학생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 섭취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심신상실 판정을 받아 처벌받지 않았다. 그는 이후 일본으로 추방되어 작가, 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며 논란을 일으켰고, 2022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가와 잇세이 사건은 법적, 윤리적 문제와 대중 매체의 선정성, 문화 예술계에 미친 영향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81년 살인 사건 - 안와르 사다트
    안와르 사다트는 1970년 이집트의 대통령이 되어 나세르주의자 숙청, 소련과의 관계 단절 등 정치·경제 노선을 전환하고, 욤 키푸르 전쟁 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을 추진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나, 1981년 암살당했다.
  • 1981년 살인 사건 - 노먼 스트런지
    노먼 스트런지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참전한 군인이자 북아일랜드의 정치인으로, 북아일랜드 의회 의원, 하원 의장 등을 역임했으나 1981년 IRA에 의해 암살당했다.
  • 와코 대학 동문 - 다카쿠라 아사코
    다카쿠라 아사코는 일본 여자 축구 리그 MVP를 2회 수상한 뛰어난 선수이자 일본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최초의 여성 감독으로서, AFC 여자 아시안컵 우승을 이끈 축구 지도자이다.
  • 와코 대학 동문 - 우로부치 겐
    우로부치 겐은 니트로 플러스 부사장으로 비주얼 노벨 시나리오를 쓰고, 어둡고 비극적인 분위기와 사회 비판적 메시지가 담긴 애니메이션 각본을 맡아 유명해진 일본의 각본가이자 소설가, 애니메이션 제작자이다.
  • 식인자 - 제프리 다머
    제프리 다머는 1978년부터 1991년까지 17명의 남성을 살해하고 엽기적인 행각을 벌인 미국의 연쇄 살인범이자 성범죄자로, 유죄 판결 후 수감 중 살해당했다.
  • 식인자 - 안드레이 치카틸로
    안드레이 치카틸로는 1978년부터 1990년까지 구 소련에서 53명 이상의 아동과 여성을 살해한 연쇄 살인범으로, '로스토프의 도살자'라는 악명과 함께 소련 붕괴 직전 사회주의 체제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1994년 사형 집행되었다.
사가와 잇세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사가와 잇세이
원어 이름佐川 一政
로마자 표기Sagawa Issei
출생지일본 효고현 고베시
사망지일본 도쿄도
직업작가
학력국립 동양 언어 문화 대학교
와코 대학
파리 대학
범죄 혐의살인, 식인 (공식적으로는 강간 미수로 확인됨)
범죄 상태사망
작가 정보
필명(정보 없음)
본명(정보 없음)
출생지효고현고베시
사망지도쿄도
안장 장소(정보 없음)
직업작가
언어(정보 없음)
교육석사
모교파리 제3대학대학원 비교문학전공 석사 과정 수료
활동 기간(정보 없음)
장르(정보 없음)
주제카니발리즘
사조(정보 없음)
종교(정보 없음)
대표작(정보 없음)
배우자(정보 없음)
파트너(정보 없음)
자녀(정보 없음)
친척아버지: 사가와 아키라(구리타 공업 사장)
동생: 사가와 준 (유채 화가)
외삼촌: 사가와 미츠오(가수)
외할아버지: 사가와 요이치 (무역상)
영향(정보 없음)
영향을 받은 인물(정보 없음)
수상(정보 없음)
데뷔작『안개 속』(1984년)
서명(정보 없음)
웹사이트(정보 없음)

2. 사건 배경

2. 1. 사가와 잇세이의 성장 과정

사가와 잇세이는 1949년 4월 26일 효고현 고베시에서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6] 아버지는 쿠리타 수처리(Kurita Water Industries)의 사장을 지낸 사가와 아키라였으며, 할아버지는 아사히 신문의 편집자였다.[6] 그는 미숙아로 태어나, 아버지의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소장 질환인 장염을 앓았으나, 여러 차례의 생리 식염수에 칼륨칼슘 주사를 맞은 후 회복했다.[6]

사가와는 허약한 건강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문학에 강한 관심을 가졌으며, 초등학교 1학년 때 남성의 허벅지를 본 후 처음으로 인육 섭취에 대한 욕구를 느꼈다.[3] 어린 시절 숙부로부터 어린아이를 유괴하여 냄비에 넣고 삶아 먹는 마법사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탓에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미 인육을 먹는 것에 흥미를 품었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스스로 정신과 의사에게 자주 상담했지만 상대받지 못했다.

세인트 미카엘 학원에서 가마쿠라 시립 오나리 초등학교를 거쳐 가마쿠라 시립 오나리 중학교를 졸업하고[23], 가나가와현립 가마쿠라 고등학교를 거쳐 와코 대학 인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했다. 간사이 가쿠인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영문학 전공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파리 제3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학 전공 석사 과정을 수료한 후 다시 파리로 유학했다.[24][25]

24세 때 도쿄에 있는 와코 대학에 다니던 사가와는 키가 큰 독일인 여성 집에 인육 섭취 목적으로 무단 침입해 체포되었으나, 아버지가 지불한 합의금으로 고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2]

1977년 28세의 사가와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프랑스로 이주했다.[6] 1976년(쇼와 51년), 간세이 가쿠인 대학 대학원 문학 연구과 영문학 전공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2. 2. 파리 유학 생활

와코 대학 인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하고 간사이 가쿠인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영문학 전공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24][25] 1977년 프랑스로 유학, 1980년 파리 제3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학 전공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24][25] 이후 파리 제3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재적했다.[24][25] 파리 유학 중, 사카와는 시체 성애와 식인에 대한 비정상적인 성적 욕구와 환상에 시달렸다.

3. 파리 인육 사건

1981년 6월 11일 밤(파리 현지시각), 사가와 잇세이파리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일본인 유학생으로, 학급 동료였던 네덜란드 여성 유학생 르네 하르테벨트(Renée Hartevelt, 1956년생)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48] 그 후, 그는 그녀를 소총으로 살해한 후 옷을 벗겨 사체와 성관계를 가졌으며, 그녀의 사지를 토막낸 후 사진을 촬영하고 사체의 일부를 후라이팬으로 요리하여 먹었다.[48]

1981년 6월 13일, 남은 사체를 여행 가방에 담아 불로뉴의 숲의 연못에 유기하려다 목격자에게 발각되자 도주하였다. 사체를 발견한 목격자에 의해 수사가 진행되자, 다급해진 그는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고 일본으로 도주를 시도하였지만, 이틀 후인 6월 15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범행을 자백하였고, 정신감정을 위해 병원으로 보내졌지만, 의사가 그가 1살 때 앓은 장염을 뇌염으로 오인해[49] 심신상실이라는 판정을 내려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게 되었다. 심신상실로 그는 무죄가 선고되고, 교도소가 아닌 앙리 코란 정신 병원에 무기한 입원 조치 되었으며, 14개월 후인 1982년 10월에 국외추방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도쿄 도립 마츠자와 병원에 입원하였지만, 1년후인 1985년 8월에 퇴원하였다.

일본 경찰은 귀국한 그를 체포해 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할 방침이었지만, 프랑스 경찰측은 불기소처분된 사람의 수사자료는 제공할 수 없다며 수사자료의 인도를 거부하여 결국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는 범행 이전부터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성적 도착증을 종종 드러내곤 하였으며, 고교시절에는 정신과 의사에게 인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자주 의논했지만 의사는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와코 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인근에 사는 중년의 독일인 여성을 먹을 목적으로 자택에 침입하여 체포되었으며, 당시 구리타 공업의 사장이였던 그의 아버지 사가와 아키라의 합의금에 고소가 취하되었다.

3. 1. 사건 발생

1981년 6월 11일 밤(파리 현지시각), 사가와 잇세이는 파리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일본인 유학생으로, 학급 동료였던 네덜란드 여성 유학생 르네 하르테벨트(Renée Hartevelt, 1956년생)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48] 사가와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하르테벨트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살해하고 먹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당시 32세였던 사가와는 학교 과제 때문에 시 번역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하르테벨트를 파리 16구 에를랑제 거리 10번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했다. 하르트벨트는 당시 25세였고, 키는 178cm였다. 하르트벨트가 도착한 후 사가와에게 등을 돌린 채 책상에 앉아 시를 읽기 시작했을 때, 사가와는 소총으로 그녀의 목을 쐈다. 사가와는 시체성애를 저질렀지만, 이빨이 날카롭지 않아 그녀의 살갗을 물 수 없었고, 아파트를 나와 정육점 칼을 구입했다. 사가와는 하르트벨트의 몸 여러 부위를 섭취했는데, 그녀의 가슴, 얼굴, 엉덩이, 발, 허벅지, 목 등을 날것 또는 익혀서 먹었고, 다른 부위는 냉장고에 보관했다. 사가와는 또한 각 섭취 단계별로 하르트벨트의 시신 사진을 찍었다.[48] 이 사건은 파리 인육 사건으로 불린다.

3. 2. 체포 및 수사

1981년 6월 13일, 사가와 잇세이는 남은 시신을 여행 가방에 담아 불로뉴의 숲의 연못에 유기하려다 목격자에게 발각되어 도주하였다.[48] 다급해진 그는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고 일본으로 도주를 시도하였지만, 6월 15일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다.[48]

그는 범행을 자백하였고, 정신감정을 위해 병원으로 보내졌다. 프랑스 재판관 장루이 브뤼기에르는 정신이상 항변으로 그를 법적으로 정신 이상자로 판명하고 재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그 결과, 정신병원에 무기한 수감되었다.[49]

4. 사건 이후

그는 범행을 자백하였고, 정신감정을 위해 병원으로 보내졌지만, 의사가 그가 1살 때 앓은 장염을 뇌염으로 오인해[49] 심신상실이라는 판정을 내려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게 되었다. 심신상실로 그는 무죄가 선고되고, 교도소가 아닌 앙리 코란 정신 병원에 무기한 입원 조치 되었으며, 14개월 후인 1982년 10월에 국외추방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도쿄 도립 마츠자와 병원에 입원하였지만, 1년후인 1985년 8월에 퇴원하였다.

일본 경찰은 귀국한 그를 체포해 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할 방침이었지만, 프랑스 경찰측은 불기소처분된 사람의 수사자료는 제공할 수 없다며 수사자료의 인도를 거부하여 결국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는 범행 이전부터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성적 도착증을 종종 드러내곤 하였으며, 고교시절에는 정신과 의사에게 인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자주 의논했지만 의사는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와코 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인근에 사는 중년의 독일인 여성을 먹을 목적으로 자택에 침입하여 체포되었으며, 당시 구리타 공업의 사장이였던 그의 아버지 사가와 아키라의 합의금에 고소가 취하되었다.

1984년, 프랑스 당국은 사가와 잇세이를 일본으로 추방했다.[48][49] 그는 도쿄 도립 마쓰자와 병원에 입원했으나, 1985년 8월에 퇴원했다.[36] 일본 경찰은 사가와를 재판에 회부하려 했으나, 프랑스 경찰 측이 불기소 처분된 사람의 수사 자료는 제공할 수 없다고 하여 무산되었다.[36][37]

사가와 잇세이의 석방은 일본 사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37] 그는 유명인으로 취급받아 소설가가 되었고, 매스 미디어에 출연하여 많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38] 그러나 2001년경부터 일이 끊기고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2005년에는 부모의 사망 이후 빚을 갚고 공단 주택으로 이사했다.[39] 2013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는 친동생의 간호를 받으며 연금과 생활 보호로 생활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40]

1982년 10월, 14개월 후 프랑스에서 국외 추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48]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도쿄 도립 마츠자와 병원에 입원하였지만, 1년 후인 1985년 8월에 퇴원하였다.[48] 마쓰자와 병원의 부원장 가네코 시로는 사가와가 정신병이 아닌 인격 장애이며, 형사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6] 일본 경찰 역시 같은 입장이었으나, 프랑스 경찰 측이 불기소 처분된 사람의 수사자료는 제공할 수 없다며 수사자료 인도를 거부하여 결국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다.[36]

퇴원 후, 사가와 잇세이는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작가, 평론가 등으로 활동했다. 1986년부터 1997년까지 사가와는 자주 강연자 및 해설자로 초청받았다.[9] 그는 자신의 범행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저서를 출간했는데, 주요 저서로는 『안개 속』, 『상테』, 『카니발리즘 환상』, 『신기루』, 『소년 A』 등이 있다. 1989년 미야자키 쓰토무 체포 당시에는 엽기 범죄의 이해자로서 매스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38] 또한, 1992년에는 사토 히사야스의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 ''Uwakizuma: Chijokuzeme (불륜 아내: 수치스러운 고문)''에 가학적인 관음증 환자로 출연했고,[10] 일본 잡지 ''Spa''에 레스토랑 리뷰를 기고하기도 했다.[12][13] 성인 비디오에 출연한 적도 있다.[38]

2005년, 사가와 잇세이의 부모가 사망했다.[14] 그는 부모의 유산으로 빚을 갚고 공공 주택으로 이사했다.[14] 한동안 복지 혜택을 받기도 했으며,[14] 2011년 ''Vice''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살인자이자 식인종으로 알려진 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끔찍한 처벌이라고 말했다.[3]

2013년, 사가와 잇세이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건강이 악화되었다.[15] 이후 그는 혼자 살면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15] 2019년에는 파리 인육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카니발 파리 인육 사건 38년째의 진실'이 공개되어 제74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오리존티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가와 잇세이는 2022년 11월 24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6][42][43] 2013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보행 곤란을 겪었고, 2018년에는 흡인성 폐렴으로 입원하기도 했다.[40][41] 사망 전까지 그는 동생의 간호를 받으며 연금과 생활 보호로 생활하고 있었다.[40]

4. 1. 프랑스에서의 수감 생활

사가와 잇세이는 심신상실로 무죄 선고를 받고 앙리 코란 정신병원에 무기한 수용되었다.[48] 의사가 그가 1살 때 앓은 장염을 뇌염으로 오인해[49] 심신상실이라는 판정을 내려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수감 중 작가 요모타 이누히코와의 만남을 계기로 사건 수기 『안개 속에서』를 출판했다.

4. 2. 일본으로의 추방 및 사회적 논란

1984년, 프랑스 당국은 사가와 잇세이를 일본으로 추방했다.[48][49] 그는 도쿄 도립 마쓰자와 병원에 입원했으나, 1985년 8월에 퇴원했다.[36] 일본 경찰은 사가와를 재판에 회부하려 했으나, 프랑스 경찰 측이 불기소 처분된 사람의 수사 자료는 제공할 수 없다고 하여 무산되었다.[36][37]

사가와 잇세이의 석방은 일본 사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37] 그는 유명인으로 취급받아 소설가가 되었고, 매스 미디어에 출연하여 많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38] 그러나 2001년경부터 일이 끊기고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2005년에는 부모의 사망 이후 빚을 갚고 공단 주택으로 이사했다.[39] 2013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는 친동생의 간호를 받으며 연금과 생활 보호로 생활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40] 2022년 11월 24일, 폐렴으로 사망했다.[42][43]

4. 3. 일본에서의 생활

사가와 잇세이는 1982년 10월, 14개월 후 프랑스에서 국외 추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48]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도쿄 도립 마츠자와 병원에 입원하였지만, 1년 후인 1985년 8월에 퇴원하였다.[48] 마쓰자와 병원의 부원장 가네코 시로는 사가와가 정신병이 아닌 인격 장애이며, 형사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6] 일본 경찰 역시 같은 입장이었으나, 프랑스 경찰 측이 불기소 처분된 사람의 수사자료는 제공할 수 없다며 수사자료 인도를 거부하여 결국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다.[36]

퇴원 후, 사가와 잇세이는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작가, 평론가 등으로 활동했다. 1986년부터 1997년까지 사가와는 자주 강연자 및 해설자로 초청받았다.[9] 그는 자신의 범행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저서를 출간했는데, 주요 저서로는 『안개 속』, 『상테』, 『카니발리즘 환상』, 『신기루』, 『소년 A』 등이 있다. 1989년 미야자키 쓰토무 체포 당시에는 엽기 범죄의 이해자로서 매스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38] 또한, 1992년에는 사토 히사야스의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 ''Uwakizuma: Chijokuzeme (불륜 아내: 수치스러운 고문)''에 가학적인 관음증 환자로 출연했고,[10] 일본 잡지 ''Spa''에 레스토랑 리뷰를 기고하기도 했다.[12][13] 성인 비디오에 출연한 적도 있다.[38]

2005년, 사가와 잇세이의 부모가 사망했다.[14] 그는 부모의 유산으로 빚을 갚고 공공 주택으로 이사했다.[14] 한동안 복지 혜택을 받기도 했으며,[14] 2011년 ''Vice''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살인자이자 식인종으로 알려진 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끔찍한 처벌이라고 말했다.[3]

2013년, 사가와 잇세이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건강이 악화되었다.[15] 이후 그는 혼자 살면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15] 2019년에는 파리 인육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카니발 파리 인육 사건 38년째의 진실'이 공개되어 제74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오리존티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22년 11월 24일, 사가와 잇세이는 폐렴 합병증으로 도쿄의 한 병원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6][42][43]

4. 4. 사망

사가와 잇세이는 2022년 11월 24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6][42][43] 2013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보행 곤란을 겪었고, 2018년에는 흡인성 폐렴으로 입원하기도 했다.[40][41] 사망 전까지 그는 동생의 간호를 받으며 연금과 생활 보호로 생활하고 있었다.[40]

5. 사건의 사회적 영향

사가와 잇세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 법적, 윤리적 문제 제기

사가와 잇세이 사건은 심신상실 범죄자의 처벌 및 관리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시켰다.[48] 그는 1981년 파리에서 네덜란드 여성 유학생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 유기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심신상실 판정을 받고 프랑스에서 불기소 처분되었다.[48][49] 일본으로 추방된 후에도 프랑스 경찰의 수사 자료 제공 거부로 인해 처벌받지 않았다.[48] 이 사건은 피해자 중심의 사법 정의 실현과 가해자의 인권 보호 사이의 균형 문제를 제기했다.

; 대중 매체의 선정성 문제

사가와 잇세이 사건은 대중 매체의 선정적인 보도 행태와 그 사회적 영향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48] 엽기적인 사건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태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었다.[48][49]

; 문화 예술계에 미친 영향

사가와 잇세이 사건은 여러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48] 롤링 스톤스1983년 앨범 ''Undercover''에 수록된 "투 머치 블러드"에서 사가와와 미디어의 폭력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22] 더 롤링 스톤스는 사가와의 파리 사건을 노래로 만들었는데, 1983년의 12인치 싱글 「Too Much Blood」가 그것이다(12인치 싱글로는 일본 미발매). 사건 발각 당시 믹 재거는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뉴스의 전모를 알고 충격을 받아 이 곡을 썼다고 한다. 재킷은 재거의 경악한 표정으로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끔찍한 영상이다. 일반 버전은 같은 해 발매된 LP 『언더커버』 B면 1번째 곡에도 수록되어 있다. The Stranglers의 1981년 노래 "La Folie"는 사가와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21] 그노우 데어 통스(Gnaw Their Tongues)의 2007년 EP ''잇세이 사가와(Issei Sagawa)''도 사가와 사건을 다루고 있다.

2011년에는 ''식인종과의 인터뷰''(Vice)라는 제목의 34분짜리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고,[17] 2017년에는 베레나 파라벨과 루시앙 카스테잉-테일러가 ''카니바(Caniba)''라는 97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19] 올리비에 스몰더스가 제작한 1986년 단편 영화 ''애도''는 사가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20] 1992년에는 사토 히사야스의 핑크 영화 ''침실''에 사가와가 타카노 씨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18]

특수 만화가 네모토 케이는 결혼 후 도쿄권 서부의 신흥 주택지의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바로 근처에 사가와가 살고 있어 이후 친교를 맺었다.

5. 1. 법적, 윤리적 문제 제기

사가와 잇세이 사건은 심신상실 범죄자의 처벌 및 관리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시켰다.[48] 그는 1981년 파리에서 네덜란드 여성 유학생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 유기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심신상실 판정을 받고 프랑스에서 불기소 처분되었다.[48][49] 일본으로 추방된 후에도 프랑스 경찰의 수사 자료 제공 거부로 인해 처벌받지 않았다.[48] 이 사건은 피해자 중심의 사법 정의 실현과 가해자의 인권 보호 사이의 균형 문제를 제기했다.

5. 2. 대중 매체의 선정성 문제

사가와 잇세이 사건은 대중 매체의 선정적인 보도 행태와 그 사회적 영향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48] 엽기적인 사건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태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었다.[48][49]

5. 3. 문화 예술계에 미친 영향

사가와 잇세이 사건은 여러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48] 롤링 스톤스는 1983년 앨범 ''Undercover''에 수록된 "투 머치 블러드"에서 사가와와 미디어의 폭력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22] 더 롤링 스톤스는 사가와의 파리 사건을 노래로 만들었는데, 1983년(쇼와 58년)의 12인치 싱글 「Too Much Blood」가 그것이다(12인치 싱글로는 일본 미발매). 사건 발각 당시 믹 재거는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뉴스의 전모를 알고 충격을 받아 이 곡을 썼다고 한다. 재킷은 재거의 경악한 표정으로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끔찍한 영상이다. 일반 버전은 같은 해 발매된 LP 『언더커버』 B면 1번째 곡에도 수록되어 있다. The Stranglers의 1981년 노래 "La Folie"는 사가와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21] 그노우 데어 통스(Gnaw Their Tongues)의 2007년 EP ''잇세이 사가와(Issei Sagawa)''도 사가와 사건을 다루고 있다.

2011년에는 ''식인종과의 인터뷰''(Vice)라는 제목의 34분짜리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고,[17] 2017년에는 베레나 파라벨과 루시앙 카스테잉-테일러가 ''카니바(Caniba)''라는 97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19] 올리비에 스몰더스가 제작한 1986년 단편 영화 ''애도''는 사가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20] 1992년에는 사토 히사야스의 핑크 영화 ''침실''에 사가와가 타카노 씨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18]

특수 만화가 네모토 케이는 결혼 후 도쿄권 서부의 신흥 주택지의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바로 근처에 사가와가 살고 있어 이후 친교를 맺었다.

6. 한국의 관점

사가와 잇세이 사건은 1981년 6월 11일 발생하여 한국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으며, 엽기적인 범죄와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48] 이 사건은 한국의 형사 사법 시스템에서 심신미약 범죄자의 처벌 및 관리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일련의 강력 범죄 사건들과 관련하여, 사가와 잇세이 사건은 심신미약 감형의 적절성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사가와 잇세이 사건을 통해 정신질환 범죄자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 강화와 예방 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보수 진영의 엄벌주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반면,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통해 흉악범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사회적 격리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심신미약 감형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환기시키는 사례로 활용한다.

참조

[1] 웹사이트 Issei Sagawa: Cannibal Killer https://www.learning[...] 2018-09-30
[2] 뉴스 Interview with a Cannibal https://www.youtube.[...]
[3] 뉴스 Who's Hungry? https://www.vice.com[...] 2009-01-01
[4] 웹인용 The Cannibal Celebrity: Issei Sagawa http://www.crimelibr[...] TruTV
[5] 웹사이트 The Sweetest Taboo: An Anthropology of Anthropophagy http://www.gremolata[...] Gremolata
[6] 간행물 Issei Sagawa: Celebrity Cannibal http://www.newcrimin[...] 2007-09-20
[7] 뉴스 Incendie, suicide, cannibalism: la maudite rue Erlanger https://www.lexpress[...] 2019-02-06
[8] 웹사이트 Murderer, cannibal, celebrity: Inside the mind of Issei Sagawa http://www.cnn.com/2[...] CNN 2017-11-16
[9] 문서 "Cannibalizing Japanese Media: The Case of Issei Sagawa" 1997
[10] 웹사이트 Issei Sagawa https://www.imdb.com[...] 2009-09-26
[11] 서적 Shōnen A https://www.worldcat[...] Poketto Bukkusha 1997
[12] 서적 Dimensions of Japanese society: gender, margins and mainstream Palgrave Macmillan 1999
[13] 웹사이트 Japan's only convicted cannibal, who lives at large and now describes himself as a food critic, has written more than 20 books https://www.redcircl[...] 2021-05-12
[14] 문서 『週刊新潮』2006年2月23日号
[15] 웹사이트 'Paris Cannibal' Sagawa reminisces over his grisly crime https://japantoday.c[...] 2020-12-21
[16] 웹사이트 「パリ人肉事件」の作家・佐川一政さんが死去…73歳 https://www.yomiuri.[...] 2022-12-02
[17] 웹사이트 Opinion: VICE's chilling 'Interview with a Cannibal' leaves viewers cautious, angry https://highschool.l[...] 2022-12-04
[18] 웹사이트 Unfaithful Wife: Shameful Torture (1992) https://www.imdb.com[...] 2023-11-18
[19] 뉴스 Review: In 'Caniba', a Killer Tries to Make His Case https://www.nytimes.[...] 2022-12-04
[20] 웹사이트 Bard of Brooklyn http://metrotimes.co[...] 2009-09-26
[21] 웹사이트 'We were called heretics and ostracised': the Stranglers on fights, drugs and finally growing up http://www.theguardi[...] 2022-12-04
[22] 웹사이트 The Cannibal That Inspired The Rolling Stones To Write 'Too Much Blood' https://culturacolec[...] 2022-12-04
[23] 문서 『カニバの弟』佐川純、東京キララ社、2019、p38、61
[24] 웹사이트 キャスト http://caniba-movie.[...]
[25] 문서 『カニバの弟』p49
[26] 문서 作品社編集部『犯罪の昭和史』第3巻300頁では身長150cmとされている
[27] 문서 『少年A』佐川一政、ポケットブック社、1997、p36
[28] 문서 『少年A』p120
[29] 웹사이트 人事興信録. 第25版 上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2-07-05
[30] 웹사이트 大衆人事録. 近畿篇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2-07-05
[31] 뉴스 "バラバラ殺人犯の知られざる素顔 叔父の佐川満男も『あのおとなしい男が…』と絶句" 集英社 1981-07-09
[32] 서적 素敵な教祖たち サブカルチャー列伝 業界カリスマ17人の真実 コスモの本 1996
[33] 웹사이트 パリ人肉事件・佐川一政を介護する弟が実名告白「バカな奴だけど、絶縁できなかった」 https://dot.asahi.co[...] 2019-05-23
[34] 웹사이트 佐川一政『生きていてすみません』(水栄社) http://chemlyn.xxxxx[...]
[35] 서적 続・夕刻のコペルニクス 扶桑社 1998
[36] 간행물 『Tokyo Journal』 1992-09
[37] 서적 『週刊マーダーケースブック』2号 데아고스티니 1995
[38] 뉴스 『週刊新潮』 2006-02-23
[39] Youtube VICE Japan 佐川一政 人を食った男 2/2 TWPyr3hpxZs
[40] 간행물 『宝島』 2015-08
[41] 뉴스 映画『カニバ』を機に知ったパリ人肉事件・佐川一政さんの近況 https://news.yahoo.c[...]
[42] 보도자료 佐川一政氏永眠のお知らせ https://www.tokyokir[...] 東京キララ社 2022-12-01
[43] 뉴스 「パリ人肉事件」佐川一政氏が死去 73歳 肺炎のため 弟・佐川純氏らが報告 https://www.sponichi[...] 2022-12-1
[44] 간행물 「コラムニスト」第3号 東京三世社 1992-01-15
[45] 문서
[46] 기타 note:演技の事、佐川一政さんの事。 https://note.com/zho[...] 2022-12-02
[47] 웹사이트 네이버 책 :: 책 읽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http://book.naver.co[...]
[48] 뉴스 Q채널 ‘스타가 된 식인 살인마’ https://news.naver.c[...] 뉴시스 2009-01-26
[49] 서적 続・夕刻のコペルニクス 扶桑社 199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