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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의 자크, 로몽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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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보이의 자크, 로몽 백작은 사보이 공작 루이와 키프로스의 앤의 아들로, 1460년 아버지로부터 보 지역을 받아 로몽 백작 칭호를 받았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군사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형의 섭정인 발루아의 욜랑드와의 갈등을 통해 봉토를 공국으로 격상시키려 했으나,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책략으로 보 지역을 상실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국의 마리 궁정에 합류하여 황금 양모 훈장을 받았고, 기네가트 전투에 참여했다. 1484년 마리 드 룩셈부르크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으며, 프랑스 왕 샤를 8세로부터 생폴 백국을 받고 1486년 함 성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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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의 자크, 로몽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 접미사로몽 백작
자크 드 사부아의 초상
한스 멤링의 초상, 1470년대
출생일1450년 11월 12일
출생지제네바, 사보이 공국
사망일1486년 1월 30일
사망지샤토 드 함, 함, 부르고뉴 저지대
배우자마리 1세, 생폴 및 수아송 여백작
귀족 가문사보이 가

2. 초기 생애

자크는 사보이 공작 루이와 키프로스의 앤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다.[1] 1460년, 아버지로부터 봉토로 지역을 받고 로몽 백작 칭호를 받았다.[1]

1468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궁정에 머물며 부르고뉴 군대의 주요 군사 지휘관이 되었다.[1] 형인 사보이 공작 아메데오 9세가 간질병으로 고통받자, 아내 발루아의 욜랑드와 사보이 백작 필리포 2세가 섭정을 맡았다. 1471년, 자크는 사보이 공작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봉토를 총독이 다스리는 준 공국으로 격상시켰다.[1] 또한 욜랑드와의 갈등을 이용해 아메데오 9세의 요새들을 차지했고, 베른프리부르의 중재로 요새들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루이 11세의 정치적 책략으로 결국 보 지역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2. 1. 가문 배경

사보이 공작 루이와 키프로스의 앤의 일곱 번째 아들로, 1460년 아버지로부터 봉토로 지역을 받고 로몽 백작 칭호를 받았다.[1]

사보이 가문은 12세기부터 체링겐 가문의 지배권을 빼앗아 보 지역의 영주가 되었다. 사보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여 베른시를 지원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했다. 라우펜 전투 이후 사보이와 베른은 동맹을 맺었지만, 베른의 세력이 커지면서 부르고뉴 전쟁 초기에는 적이 되었다.

1465년 아메데우스 9세가 사보이 가문의 당주가 되었을 때, 그는 형제 자크에게 보의 영주 로몽 백작과 무르텐, 아방슈, 파예른, 로몽, 무동, 이베르동 등의 마을을 소유주로 주었다.

아마데우스는 간질로 고통받았고, 그의 아내인 발루아의 욜랑드와 그의 형제인 브레스 백작이 그를 대신해 통치하게 했다. 그는 1472년에 사망하고 겨우 6세였던 그의 아들 필리베르트가 계승했다. 젊은 공작의 어머니인 욜란데가 그의 섭정이자 가정교사가 되었다.

가문 내에서 여러 동맹이 형성되었다. 제네바의 대주교이자 아마데우스의 형제인 베드로는 욜란데의 궁정에서 고문이 되었다. 브레스 백작은 프랑스의 루이 11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사보이의 자크는 강력한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의 군대에 합류했다. 자크는 아메데우스 9세가 유지하고 있던 여러 요새화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 그의 시누이 욜란데와 충돌할 기회를 얻었고, 1471년 베른프리부르의 중재로 그에게 이를 수여했다. 그러나 루이 11세의 이러한 다양한 동맹과 영리한 정치적 술수는 결국 보의 로몽 백작에게 속한 모든 영토를 상실하게 했다.

2. 2. 로몽 백작 지위 획득

사보이 공작 루이와 키프로스의 앤의 일곱 번째 아들인 자크는 1460년 아버지로부터 봉토로 지역을 받고 로몽 백작 칭호를 받았다.[1] 사보이 가문은 12세기부터 체링겐 가문의 지배권을 빼앗아 보 지역을 소유했다. 사보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여 베른 시를 지원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했고, 라우펜 전투 이후 베른과 동맹을 맺었다.

1465년 아마데우스 9세가 사보이 가문의 당주가 되었을 때, 그는 형제 자크에게 보의 영주 로몽 백작 지위와 무르텐, 아방슈, 파예른, 로몽, 무동, , 이베르동 등의 마을을 소유지로 주었다.

3. 부르고뉴 공국과의 관계

사보이의 자크는 용담공 샤를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1473년에는 부르고뉴의 총독, 대원수 및 부르고뉴 군대 3분의 1을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자크는 베른 시를 자신의 부재 기간 동안 보 지역 영토 보호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베른은 원래 8개 주 연방에 가입, 티롤의 지기스문트, 바젤 시, 스트라스부르, 콜마르, 셀레스타 등 알자스 도시들과 콘스탄츠 동맹을 맺고 루이 11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 조약은 외부 공격에 대한 상호 지원을 규정했으며, 부르고뉴 공작을 겨냥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는 상 알자스를 부르고뉴에 분봉령으로 주었다. 이 지역은 페터 폰 하겐바흐에 반란을 일으켰고, 콘스탄츠 동맹은 용담공 샤를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에리쿠르를 포위하여 부르고뉴 전쟁을 시작했다. 1474년 11월, 자크는 군대를 이끌었으나 전투에서 부르고뉴 군대는 참패했다.

3. 1. 샤를 1세와의 동맹

사보이의 자크는 샤를 1세의 절친한 친구였다. 1473년에 그는 부르고뉴 총독이자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부르고뉴 군대의 3분의 1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자크는 베른시를 (당시 사보이 왕가와 우호적인 관계로) 자신이 없는 동안 보에 있는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베른은 원래 8개 주의 동맹에 합류하여 티롤의 지기스문트, 바젤, 알자스스트라스부르, 콜마르, 셀레스타트가 포함된 콘스탄스 동맹을 통해 루이 11세의 동맹이 되었다. 이 조약은 외부 공격의 경우 상호 지원을 규정하고 부르고뉴 공작에 대한 것이었다.[1]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지기스문트는 상 알자스를 부르고뉴에 분봉령으로 주었다. 이 지역은 부르고뉴의 지방 장관인 페터 폰 하겐바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콘스탄스 동맹은 샤를 1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에리쿠르를 포위했다. 1474년 11월 사보이의 자크는 포위를 해제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에리쿠르는 이미 항복했고 이어지는 에리쿠르 전투에서 부르고뉴 군대는 참패를 당했다.[1]

3. 2. 부르고뉴 전쟁 참전

사보이의 자크는 샤를 1세의 절친한 친구였다. 1473년에 그는 부르고뉴 총독, 대원수 및 부르고뉴 군대의 3분의 1을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자크는 당시 사보이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베른 시를 자신의 부재 기간 동안 보 지역의 영토 보호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베른은 원래 8개 주 연방에 가입하여 티롤의 지기스문트, 바젤 시, 스트라스부르, 콜마르, 셀레스타알자스의 도시들로 구성된 ''콘스탄츠 동맹''을 통해 루이 11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 조약은 외부의 공격에 대한 상호 지원을 규정했으며 부르고뉴 공작을 겨냥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는 상 알자스를 부르고뉴에 분봉령으로 넘겨주었다. 이 지역은 부르고뉴의 지방 장관인 페터 폰 하겐바흐에 반란을 일으켰고, 콘스탄츠 동맹은 용담공 샤를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에리쿠르를 포위하여 부르고뉴 전쟁을 시작했다. 1474년 11월, 자크 드 사부아는 포위를 풀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에리쿠르는 이미 항복했고, 이어진 전투에서 부르고뉴 군대는 참패했다.[1]

4. 스위스 연방과의 갈등



겨울이 오면서 오트-알자스에서의 군사 작전은 종료되었지만, 1475년 4월 구스위스 연방은 베른을 중심으로 보에 대항하여 민병대를 일으켰다. 보는 알프스 접근과 지중해 및 이탈리아로의 통행을 제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베른은 또한 보를 이용하여 샤를 용담공의 군대에 합류하는 이탈리아 용병의 유입을 막고 싶어 했다.

이후 스위스 연방의 침략과 약탈, 그랑송 전투와 무르텐 전투에서의 스위스의 승리, 그리고 프리부르 조약 체결과 그 결과로 사보이의 자크가 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상실하는 과정은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루어진다.

4. 1. 보 지역 약탈

약탈당한 보


1475년 4월, 구스위스 연방은 베른을 중심으로 보에 대항하여 민병대를 일으켰다. 보는 알프스 접근과 지중해 및 이탈리아로의 통행을 제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베른은 보를 이용하여 샤를 1세의 군대에 합류하는 이탈리아 용병의 유입을 막고자 했다. 무장 단체들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살해하고, 강간하고, 약탈하고, 몸값을 요구했다. 사보이의 자크가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스위스 무리"는 곧 그랑송, 오르브, 몽타니와 에샬랑을 점령했다. 무르텐은 침략자들의 편을 들었다. 니옹, 클레와 주뉴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라 사라와 코소네가 점령되었다. 주교 도시인 제네바로잔은 막대한 몸값을 지불했다. 동쪽에서는 베른의 군대가 아글과 샤블레의 일부를 점령했다. 결국 16개 마을과 43개 성의 생존자들은 새로운 스위스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475년 10월 14일, 베른은 스스로 공포에 질린 주민들의 적대감을 구실로 사보이의 자크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베른의 군대는 다시 보를 침략하여 저항하는 수비대를 학살했다.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기에, 다른 보 마을들은 공격을 받기 전에 항복했다. 그러나 샤를 1세가 유럽 전장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사보이의 자크는 마침내 보에 있는 자신의 영토에 집중할 수 있었다. 1476년 초, 스위스인들이 샤를 1세의 강력한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모든 곳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4. 2. 영지 상실

그랑송 전투와 무르텐 전투에서 스위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보(Vaud)는 다시 스위스에 정복당했고 사보이의 자크에게서 빼앗겼다. 베른은 보를 요구하며 제네바와 사보이를 위협했다. 한편, 요랑드 공작 부인은 용담공 샤를의 손에 넘어갔다. 루이 11세는 누이를 옹호하며 스위스에게 휴전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1476년 4월 14일, 스위스 연방과 사보이는 프랑스 국왕의 후원하에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프리부르 조약은 스위스가 사보이의 영토를 반환하는 대가로 보상을 받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사보이 가문은 몸값을 마련할 수 없었고, 따라서 영토는 베른의 손에 남았다. 이 조약은 또한 "보 남작령"이 봉토로서 사보이에서 분리되는 것을 막았고, 로몽 백작을 보의 영주에서 영원히 제외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보이의 자크는 자신의 봉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잃었다.

4. 3. 프리부르 조약

그랑송 전투와 무르텐 전투에서 스위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보(Vaud)는 다시 스위스에 정복당했고 사보이의 자크에게서 빼앗겼다. 베른은 보를 요구하며 제네바와 사보이를 위협했다. 한편, 욜란데 공작 부인은 샤를 1세의 손에 넘어갔다. 루이 11세는 누이를 위해 개입하여 스위스에게 휴전 협정을 수락하도록 강요했다. 1476년 4월 14일, 스위스 연방과 사보이는 프랑스 왕의 후원 하에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

프리부르 조약은 스위스가 사보이의 영토를 반환하는 대가로 보상을 받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사보이 가문은 몸값을 마련할 수 없었고, 따라서 영토는 베른의 손에 남았다. 이 조약은 또한 "보 남작령"이 사보이에서 분리되는 것을 막았고, 로몽 백작을 보의 영주에서 영원히 제외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보이의 자크는 자신의 영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잃었다.[1]

5. 보 지역 상실 이후의 삶

보에서 재산을 잃고 낭시 성벽 앞에서 샤를 1세가 사망한 후, 사보이의 자크는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이자 샤를의 딸이자 상속녀인 마리 드 부르고뉴의 궁정에 합류했다. 1478년 금양모 기사단 훈장을 받았으며,[4] 1479년 기네가트 전투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프랑스루이 11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마리가 플랑드르 백작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1484년 사보이의 자크는 생폴 백작인 룩셈부르크 생폴의 루이의 손녀 마리 드 룩셈부르크 (1462–1546)와 결혼하여 사보이의 프랑수아즈 루이즈(1485-1511)를 낳았다. 프랑수아즈 루이즈는 나사우-브레다의 헨리 3세와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자크는 프랑스 왕 샤를 8세로부터 생폴과 플랑드르, 브라반트 공국의 다른 영지를 상속받았다.[5]

사보이의 자크는 1486년 6월 30일, 생폴 백작의 오랜 소유지였던 함 성에서 사망했다.[1]

5. 1. 부르고뉴의 마리아 궁정

황금 양모 훈장


보(Vaud)에서 소유지를 잃고, 낭시 성벽 앞에서 샤를 1세가 사망한 후, 사보이의 자크는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이자 샤를의 딸이자 상속녀인 마리 드 부르고뉴의 궁정에 합류했다. 1478년 금양모 기사단 훈장을 받았다.[4] 1479년 기네가트 전투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프랑스루이 11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마리가 플랑드르 백작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1484년 사보이의 자크는 생폴 백작인 룩셈부르크 생폴의 루이의 손녀 마리 드 룩셈부르크 (1462–1546)와 결혼하여 사보이의 프랑수아즈 루이즈(1485-1511)를 낳았다. 프랑수아즈 루이즈는 나사우-브레다의 헨리 3세와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5. 2. 프랑스에서의 활동



보에서 재산을 잃고 낭시 성벽 앞에서 샤를 1세가 죽은 후, 사보이의 자크는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이자 샤를의 딸이며 상속녀인 마리 드 부르고뉴의 궁정에 합류했다. 1478년에 그는 금양모 기사단 훈장을 받았다.[4] 1479년 기니게이트 전투에 용감하게 참가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플랑드르 백작령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

1484년, 사보이의 자크는 생폴 백작 루이 드 룩셈부르의 손녀인 마리 드 룩셈부르크 (1462–1546)와 결혼했다. 그들은 사보이의 프랑수아즈 루이즈(1485–1511)라는 딸을 두었으며, 그녀는 나사우-브레다의 헨리 3세와 결혼했지만 후손 없이 사망했다.

자크는 프랑스 왕 샤를 8세로부터 생폴과 플랑드르, 브라반트 공국의 다른 영지를 상속받았다.[5]

사보이의 자크는 1486년 6월 30일, 생폴 백작의 오랜 소유지였던 함 성에서 사망했다.

5. 3. 죽음

샤를 1세이 낭시 성벽 앞에서 사망하고, 보(Vaud)에서 소유지를 잃은 후, 사보이의 자크는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이자 샤를의 딸이며 상속녀인 마리 드 부르고뉴의 궁정에 합류했다. 1478년, 금양모 기사단에 서임되었다.[2] 1479년 기네가트 전투에 용감하게 참가하여 부상을 입었지만,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군대를 격퇴하고 플랑드르 백국을 마리를 위해 지키는 데 기여했다.

1484년, 사보이의 자크는 생 폴 백작 루이 드 룩셈부르의 손녀인 마리 드 룩셈부르크 (1462–1546)와 결혼했다. 그들은 프랑수아즈 루이즈 드 사부아(1485–1511)라는 자녀를 두었다. 프랑수아즈 루이즈 드 사부아는 나사우-브레다의 헨리 3세와 결혼했지만 후손 없이 사망했다.

자크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로부터 룩셈부르크의 루이의 상속 재산에서 생 폴과 플랑드르, 브라반트 공국의 다른 봉토를 받았다.[3]

사보이의 자크는 1486년 6월 30일, 생 폴 백작의 옛 소유지인 함 성에서 사망했다.[1]

6. 가계도

Jacques de Savoie, comte de Romont프랑스어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1세대2세대3세대4세대
1. 사보이의 자크, 로몽 백작 | rowspan="4" | 2. 루이, 사보이 공작 | 4. 아메데오 8세, 사보이 공작
8. 아메데오 7세, 사보이 백작
9. 베리의 본
3. 키프로스의 앤 | 5. 부르고뉴의 마리
10. 용담공 필리프
11. 플랑드르 백작부인 마르그리트 3세
6. 키프로스의 야누스 | 12. 키프로스의 제임스 1세
13.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의 헬비스
| rowspan="2" | 7. 부르봉-라 마르슈의 샬롯 | 14. 라 마르슈 백작 장 1세
| | 15. 방돔의 카트린


참조

[1] HDS Jacques of Savoy
[2] 서적 Statuts, Ordonnances et Armorial de l'Ordre de la Toison d'Or Koninklijke Bibliotheek, The Hague, NL 1473–1491
[3] 간행물 Centre historique des archives nationales, Série J, Trésor des chartes, Supplément. Mouvance féodale du comte de Saint-Pol Pièces J1047 du 7–10 décembre 1482. Inventory by Henri de Curzon, 1914–1915
[4] 서적 Statuts, Ordonnances et Armorial de l'Ordre de la Toison d'Or Koninklijke Bibliotheek, The Hague, NL 1473–1491
[5] 간행물 Centre historique des archives nationales, Série J, Trésor des chartes, Supplément. Mouvance féodale du comte de Saint-Pol Pièces J1047 du 7–10 décembre 1482. Inventory by Henri de Curzon, 1914–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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