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라-샤틸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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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브라-샤틸라 학살은 1982년 9월, 레바논 내전 중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이후,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사브라와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을 침공했고, 바시르 게마예르 대통령 암살 이후 보복을 명분으로 민병대가 캠프에 진입하여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무고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유엔은 이 사건을 집단 학살로 규정했으며, 이스라엘 내에서도 정부의 책임을 묻는 시위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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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이 PLO의 공격 중단 및 친이스라엘 정부 수립을 목표로 레바논 남부를 침공하여 PLO와 교전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베이루트 포위와 PLO 철수로 이어졌지만 시리아 영향력 확대 및 헤즈볼라 부상 등의 결과를 초래하고 사브라-샤틸라 학살로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사브라-샤틸라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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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사브라-샤틸라 학살 |
시기 | 1982년 9월 16일 – 1982년 9월 18일 |
위치 | 베이루트, 레바논 |
대상 | 사브라 지역과 샤틸라 난민 캠프 |
유형 | 대량 학살 |
사망자 | 1,300 ~ 3,500+ 명 |
피해자 | 팔레스타인인 및 레바논 시아파 |
가해자 | 레바논군 남레바논군 (공격) 이스라엘 방위군 (지원) |
사건 배경 | |
관련 분쟁 | 레바논 내전 |
추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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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1975년부터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여 여러 세력이 서로 싸우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레바논에서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을 침공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친이스라엘 국가로 만들고자 했으며, 반시리아 성향으로 이스라엘과 우호적이었던 바시르 게마예르를 레바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82년 9월, 게마예르는 의문의 폭탄 테러로 암살당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PLO 잔당의 소행으로 여겼다. 게마예르의 암살에 분노한 레바논 군단은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보복을 감행했다.[12]
2. 1. 레바논 내전과 이스라엘-PLO 분쟁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여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여러 세력이 서로 싸웠다. 이들 세력 간의 내분과 학살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리아의 지원을 받은 카란티나 학살, PLO가 기독교 마론파를 상대로 자행한 다무르 학살, 팔랑헤와 동맹 세력이 UNRWA가 관리하는 캠프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상대로 자행한 텔 알 자타르 학살 등이 대표적이다.[12] 레바논 내전 전체 기간의 총 사망자 수는 약 15만 명이었다.[12]내전이 전개되면서, 이스라엘과 PLO는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공격을 주고받았다.[13]
1982년 6월 3일, 영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 슐로모 아르고프에 대한 암살 시도가 발생했다. 이 암살 시도는 이라크에 근거지를 둔 아부 니달의 소행으로, 시리아 또는 이라크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데이비드 허스트와 베니 모리스와 같은 역사가와 관찰자들은[14][15] 아부 니달의 단체가 아라파트의 PLO와 앙숙 관계였고 심지어 그 구성원 몇 명을 살해했기 때문에 PLO가 공격에 연루되었거나 심지어 승인했을 리 없다고 언급했다.[16] PLO는 이스라엘 대사 암살 시도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PLO와의 휴전을 깨는 명분으로, 그리고 레바논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17][18]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하여 수도 베이루트를 포위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했다. 도시 포위전이 길게 이어진 후, 1982년 8월 21일 당사자 간에 미국 중재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투가 종식되었고, 이 협정은 서방 국가의 감독하에 팔레스타인 전투원들의 도시로부터의 안전한 철수를 허용하고, 난민과 난민 캠프의 민간 거주자들을 보호할 것을 보장했다.
1982년 8월 23일, 우익 레바논 군대의 지도자인 바시르 게마예르가 국민 의회에 의해 레바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스라엘은 게마예르와 그의 군대를 PLO에 대한 균형추로 의존했으며, 그 결과 레바논 군대의 많은 지지자들이 배출된 마론파 그룹과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1982년 9월 1일 PLO 전투원들은 다국적군의 감독하에 베이루트에서 철수했다. 이 철수는 레바논 주둔 다국적군 (MNF)의 지속적인 주둔을 조건으로 하여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 공동체에 대한 보안을 제공했다. 이틀 후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은 나하리야에서 게마예르를 만나 이스라엘과의 평화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그러나 팔랑헤당은 이스라엘에 군사적으로 적대적인 시리아와의 동맹 관계가 발전하면서 분열되었다. 따라서 게마예르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조약 서명을 거부하고 남아있는 PLO 무장 세력을 근절하기 위한 작전을 승인하지 않았다.
1982년 9월 11일, 팔레스타인 난민의 안전을 보장하던 국제군이 베이루트를 떠났다. 그 후 9월 14일, 게마예르는 그의 본부를 파괴한 대규모 폭발로 암살되었다. 결국 범인인 레바논 기독교인 하비브 타니우스 샤르투니는 범행을 자백했다. 그는 시리아 사회 민족주의 정당의 회원이었으며 시리아 정보 기관의 요원이었다. 팔레스타인 및 레바논 무슬림 지도자들은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은 PLO를 철수시킨다는 명목으로 레바논을 침공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친(親) 이스라엘 국가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고, 반시리아 성향으로 이스라엘과 친밀했던 Bachir Gemayel|바시르 게마예르영어를 레바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82년 9월 게마예르는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폭탄으로 암살당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PLO 잔당의 소행으로 간주했다.
2. 2. 전후 평가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레바논 국경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벌인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다고 주장했다.[19] 그러나 PLO는 당시 이스라엘과 맺은 휴전 협정을 준수하고 있었으며, 10년 이상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의 국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0] 8개월 동안 지속된 휴전 기간 동안, UNIFIL은 PLO가 이스라엘에 대한 어떠한 도발 행위도 시작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20]이스라엘 정부는 휴전을 파기하고 PLO를 공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명분을 제시했지만, 이스라엘 야당은 정부의 "선동"이 이스라엘을 전쟁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고 비난했다.[20] 이스라엘의 동맹국인 미국조차도 이스라엘이 제시한 명분들이 PLO에 대한 전쟁을 시작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일축했다.[20]
3. 학살의 전개
1982년 9월 16일 오후 6시, 이스라엘 방위군은 레바논 군단의 요청에 따라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 조명탄을 발사했다.[67] 이를 신호로 레바논 군단 민병대가 캠프에 진입하여 학살을 시작했다.[68] 학살은 이틀 동안 계속되었으며, 희생자 수는 762명에서 3,500명 사이로 추정된다.[69]
학살은 엘리 호베이카의 지휘 아래 1,500명의 민병대가 베이루트 국제공항에 집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제공한 지프를 타고 이스라엘의 안내에 따라 캠프로 이동했다.[34] 이스라엘군은 밤에 조명탄을 발사하여 팔랑헤 민병대의 학살을 도왔으며,[27] 한 네덜란드 간호사는 캠프가 "축구 경기 중의 스포츠 경기장"처럼 밝았다고 증언했다.[36]
당시 베이루트에서 취재 중이던 일본인 저널리스트 히로카와 류이치는 이스라엘군이 베이루트를 완전히 제압했다고 발표한 다음 날, 팔레스타인 캠프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예감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캠프 입구에서 이스라엘군에게 제지당했지만, 총성이 계속 들리는 것을 듣고 불안감을 느꼈다. 캠프 안에서는 살육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3. 1. 사전 준비
1982년 9월 14일/15일 밤, IDF 참모총장 라파엘 에이탄은 베이루트로 가서 팔랑헤당 지도부에 병력 동원을 명령하고 서베이루트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에 참여할 준비를 지시했다. 그는 IDF는 난민 캠프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팔랑헤 군대가 이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27] 민병대 지도자들은 동원을 조직하는데 24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답했다.9월 15일 아침, 베이루트로 이동했던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 아리엘 샤론은 샤틸라 캠프에서 남서쪽으로 떨어진 5층 건물 옥상에 있는 IDF 전방 지휘소에서 에이탄과 회의를 가졌다. 아비 두다이, 군사 정보국 국장 예호슈아 사구이, 모사드 고위 장교, 아미르 드로리 장군, 아모스 야론 장군, 정보 장교, GSS 국장 아브라함 샬롬, 참모 차장 모셰 레비 장군 및 기타 고위 장교들도 참석했다. 팔랑헤가 캠프로 들어가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바시르 게마옐 레바논 기독교 대통령의 암살 이후, 팔랑헤는 복수를 원했다. 9월 15일 정오까지, 사브라와 샤틸라는 IDF에 의해 포위되었다.[27] 몇 시간 후, IDF 탱크는 사브라와 샤틸라를 포격하기 시작했다.[27]
9월 16일, 서베이루트 공격과 관련된 여섯 번째 IDF 명령은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난민 캠프는 진입해서는 안 된다. 캠프 수색 및 정리 작업은 팔랑헤/레바논군이 수행할 것이다."
예루살렘 기금의 린다 말론에 따르면, 아리엘 샤론과 참모총장 라파엘 에이탄[30]은 팔랑헤 민병대와 만나 게마옐의 암살에 PLO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사브라와 샤틸라에 진입하도록 초청했다.[31] 회의는 9월 16일 15:00에 종료되었다.[27]
이스라엘은 2,000명에서 3,000명의 테러리스트가 캠프에 남아 있다고 주장했지만, 레바논 군대가 "그들을 제거"하는 것을 거부한 후 더 많은 자국 군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캠프로 투입된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고, 최소한의 사상자만 발생했다.[27] 학살 이후 조사에서 캠프에서 무기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27][32]
엘리 호베이카의 지휘 하에 1,500명의 민병대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베이루트 국제공항에 집결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제공한 지프를 타고 해당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일부 지프에는 이스라엘이 제공한 무기가 실려 있었고, 이스라엘의 안내에 따라 진입했다.[34] 그 부대는 대부분 팔랑헤였지만, 사아드 하닷의 "자유 레바논군"에서 온 병사들도 있었다.[27] 아리엘 샤론과 엘리 호베이카의 경호원에 따르면, 팔랑헤는 민간인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엄중하고 명확한" 경고를 받았다.[28][35] 그러나 팔랑헤가 팔레스타인인에게 특별한 안보 위험을 제기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IDF 신문인 ''바마하네'' 9월 1일자에는 팔랑헤가 한 이스라엘 관리에게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강간으로 시작할지, 아니면 살인으로 시작할지?"라고 말했다고 게재되었다.
3. 2. 학살 진행
1982년 9월 16일 해질녘,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는 팔랑헤 민병대 150명이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에 진입했다. 이들은 총기 외에도 칼과 도끼로 무장하고 있었다.[27] 민병대는 집집마다 들어가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목을 베고, 도끼로 치고, 총을 쏘는 등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으며, 강간도 자행했다. 주민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 처형하기도 했다.[27] 저항은 거의 없었고, 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날 밤, 이스라엘군은 난민촌 상공에 조명탄을 발사하여 팔랑헤 민병대의 학살을 도왔다.[27] 한 네덜란드 간호사는 캠프가 "축구 경기 중의 스포츠 경기장"처럼 밝았다고 증언했다.[36]
9월 16일 저녁, 이스라엘 정보 장교는 팔랑헤 연락 장교가 캠프 내 작전 요원에게 붙잡은 45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신의 뜻대로 하라"고 답하는 것을 들었다. 비슷한 시각, 엘룰 중위는 엘리 호베이카에게 포로로 잡은 여성과 아이 50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무선 통신을 엿들었다. 호베이카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라고 답했다.[28]
9월 17일 새벽, 학살 소식에 우려한 이스라엘군은 팔랑헤 민병대에게 작전 중단을 명령했다.[28] 학살은 이틀 동안 계속되었으며, 762명에서 3,500명 사이의 사람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69]
당시 베이루트에서 취재 중이던 일본인 저널리스트 히로카와 류이치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3. 3. 목격자 증언
1982년 9월 17일, 사브라와 샤틸라가 봉쇄된 상황에서 노르웨이 언론인 겸 외교관 군나르 플라크스타드는 샤틸라 난민 캠프에서 파괴된 집에서 시신을 치우는 팔랑헤 당원들을 목격했다.[38] 발견된 시신 중 다수는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는데, 젊은 남자들은 거세되었고, 일부는 두피가 벗겨졌으며, 어떤 이들은 몸에 기독교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39]미국 언론인 자넷 리 스티븐스는 "나는 집에서 치마가 허리까지 올라가고 다리가 벌어진 채 죽어있는 여자들을 보았고, 골목 벽에 세워진 채 총에 맞아 죽은 수십 명의 젊은 남자들을 보았고, 목이 그어진 아이들, 배가 갈라진 임산부, 여전히 눈이 크게 뜨인 채 공포에 질린 검은 얼굴, 그리고 칼에 찔리거나 찢겨져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수많은 아기들과 유아들을 보았다."고 기록했다.[40]
학살 전에 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베이루트의 민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에서 국제군을 복귀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탈리아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진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지만, 군대를 베이루트로 돌려보내기 위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41] ''뉴욕 타임스''는 1982년 9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오늘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이스라엘로부터 베이루트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다시 베이루트로 파견할 것을 요구했다... 아파라트는 기자 회견에서 "세 군대의 존엄성과 그들의 국가의 명예가 걸려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에 묻습니다. 베이루트 주민들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된 겁니까?"
2005년 영화감독 록만 슬림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 전사들은 학살 전에 이스라엘 국방군이 그들을 이스라엘의 훈련 캠프로 데려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었다고 증언했다.[42] 이스라엘인들은 레바논 전사들에게 그들이 팔레스타인인에 맞서 행동하지 않으면 레바논의 소수 민족으로서 그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42]
당시 베이루트에서 취재 중이던 일본인 저널리스트 히로카와 류이치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이스라엘이 베이루트를 완전히 제압했다고 발표한 것은 82년 9월 16일 오후였다고 생각한다. 다음 날인 17일, 나는 이스라엘 적신월사에서 일하던 독일인 의사의 탈출을 도왔다. 그 사람을 나의 조수라고 칭하고, 함께 베이루트를 나왔다. 포위망은 이스라엘군과 레바논 우파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고, 수십 개의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지막 검문소에서 되돌아가려 할 때, 나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히브리어로 협상하여 통과에 성공했다. 의사를 베카 고원의 병원에 내려준 후, 바로 베이루트로 돌아갔다. 그날이 이스라엘의 신년이었고, 그 때문에 이스라엘군의 모든 검문소가 폐쇄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날, 나는 팔레스타인 캠프에 들어갔다. 이른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침대에 몸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이스라엘군이 베이루트에 침공한 후, 바로 팔레스타인 캠프는 봉쇄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저널리스트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캠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팔레스타인인 사냥으로 시가지에서 끌려간 팔레스타인인들의 소식도 알 수 없었다.
북쪽의 사브라 캠프 입구는 이스라엘군의 전차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들어가게 해달라고 외치며, 프레스 카드를 보여주었지만, 전차 위의 이스라엘 병사는 총을 겨누고, 손짓으로 나에게 물러가라는 제스처를 했다. 그때 총성이 연이어 들렸지만, 교전 시의 소리가 아닌, 한쪽에서만 나는 소리였던 것이 불안을 더했다.
시커멓게 타버린 소나무 숲 옆을 지나, 샤틸라 캠프의 남쪽에 도착했다. 인적은 거의 없었고, 포격 직후처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캠프에 발을 들여놓았다. 조용했다. 너무나 섬뜩해서, 나가려고 할 때 입구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며, 안에서 살육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4. 희생자 수
팔레스타인 적신월사는 2,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학살 당시 가족이 실종되었다고 주장하는 세 명의 증인을 제시하는 사람에게는 1,200건의 사망 증명서가 발급되었다.[44]
바얀 누와이헤드 알-후트는 저서 《사브라와 샤틸라: 1982년 9월》에서 17개의 희생자 명단을 상세히 비교하고 다른 증거를 바탕으로 최소 1,300명 이상의 희생자 이름을 제시했으며, 총 희생자 수는 3,500명으로 더 높게 추산했다.
로버트 피스크는 "3일간의 강간, 전투, 잔혹한 처형 이후, 민병대는 마침내 1,700명의 사망자를 남기고 캠프를 떠났다"고 썼다.[44]
이스라엘 언론인 암논 카펠리우크는 학살 직후 출판된 그의 저서에서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와 적십자사 자료를 바탕으로 학살 이후 처리된 시신이 약 2,000구에 달하며, 팔랑헤당이 자체적으로 처리한 다른 희생자는 "대략" 1,000~1,500명으로 추정하여 총 3,000~3,500명으로 추산했다.[45]
레바논 군대의 수석 검사인 아사드 게르마노스는 살인 사건을 조사했지만, 상부의 명령에 따라 레바논 증인을 소환하지 않았다. 또한 캠프에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 생존자들은 증언을 두려워했으며, 팔랑헤 전투원들은 증언하는 것이 명시적으로 금지되었다. 게르마노스의 보고서는 460명이 사망했다고 결론지었다(여성 15명, 어린이 20명 포함).
이스라엘 정보부는 700~800명의 사망자를 추정했다.
5. 관련 당사자들의 역할
사브라-샤틸라 학살의 책임은 여러 당사자에게 걸쳐 있다.
- 학살의 주범: 엘리 호베이카는 학살의 주범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경호원이었던 로버트 마룬 하템은 호베이카가 이스라엘의 지시를 어기고 민간인 학살을 명령했다고 증언했다.[35] 호베이카는 2002년 차량 폭탄 테러로 암살되었는데, 레바논과 아랍 평론가들은 이스라엘이 그를 살해했다고 비난했다. 이는 호베이카가 벨기에 법정에서 아리엘 샤론의 학살 가담에 대해 증언할 예정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46]
- 레바논 군대: 알랭 메나르그에 따르면, 9월 15일 이스라엘 특수부대 사예레트 마트칼이 캠프에 진입했다가 떠난 후, 사아드 하닷의 남 레바논 군과 엘리 호베이카의 레바논 군대가 캠프에 진입했다.[47]
- 이스라엘의 책임: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군대의 캠프 진입을 통제하고, 조명탄을 쏘아 학살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는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있었고, 아리엘 샤론 당시 국방장관은 특별 조사 위원회에 의해 "개인적 책임"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져 사임했다.[71] 유엔 총회는 이 사건을 "집단 학살"로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일본은 찬성, 미국, 이스라엘, 캐나다, 영국은 기권했다.[70]
- 미국의 책임: 미국은 필립 하비브 외교관의 중재로 PLO의 베이루트 철수를 감독하고, 비전투 팔레스타인 생존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다국적군의 조기 철수를 결정하여 비판을 받았다.[49] 조지 슐츠는 회고록에서 미국의 부분적 책임을 인정했다.[49]
5. 1. 엘리 호베이카와 레바논 군대
엘리 호베이카의 지휘 아래, 1,500명의 민병대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베이루트 국제공항에 집결했다. 이들은 대부분 팔랑헤였지만, 사아드 하닷의 "자유 레바논군"에서 온 병사들도 있었다.[27] 이들은 이스라엘이 제공한 지프를 타고 이동했으며, 일부 지프에는 이스라엘이 제공한 무기가 실려 있었다. 이스라엘은 팔랑헤에게 민간인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엄중하고 명확한" 경고를 내렸지만,[28][35] 팔랑헤가 팔레스타인인에게 특별한 안보 위험을 제기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9월 16일 목요일 해질녘, 150명의 팔랑헤 부대가 사브라와 샤틸라에 진입하여 학살을 시작했다.[27] 이스라엘군은 밤 동안 캠프 상공에 조명탄을 발사하여 학살을 도왔다.[36]
19시경, 엘룰 중위는 캠프의 민병대원 중 한 명이 호베이카 사령관에게 포로로 잡은 여성과 아이 50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무선 통신을 엿들었다. 호베이카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라고 답했다.[28]
사브라-샤틸라 학살의 주요 책임은 일반적으로 엘리 호베이카에게 있다. 호베이카의 경호원 로버트 마룬 하템은 호베이카가 이스라엘의 지시를 어기고 민간인 학살을 명령했다고 주장했다.[35]
호베이카는 2002년 1월 24일 베이루트에서 차량 폭탄 테러로 암살당했다. 레바논 및 아랍 평론가들은 이스라엘이 호베이카를 살해했다고 비난했는데, 이는 호베이카가 벨기에 법정에서 아리엘 샤론의 학살 가담에 대해 증언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46] 암살 전, 호베이카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벨기에 재판을 원한다고 밝혔다.[4]
알랭 메나르그에 따르면, 9월 15일 이스라엘 특수 작전 부대인 사예레트 마트칼이 팔레스타인 간부들을 제거하기 위해 캠프에 진입했다가 떠났고, 다음 날 사에드 하다드의 남 레바논 군 소속 "살인자"들과 엘리 호베이카의 레바논 군대가 캠프에 진입했다.[47]
5. 2. 이스라엘
이스라엘군은 난민촌을 포위하고 레바논군(LF)의 진입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71] 이스라엘군은 레바논군이 난민촌에 진입하는 것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조명탄을 쏘아 올려 밤에도 학살이 계속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71]학살 이후, 이스라엘 내에서도 이스라엘 공산당, 피스 나우 등 좌파 세력을 중심으로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71] 아리엘 샤론 당시 국방장관은 "이스라엘의 손은 더럽혀지지 않았다"라고 주장했지만, 이스라엘 특별 조사 위원회(카한 위원회)는 샤론에게 "개인적 책임이 있다"라고 결론 내렸고, 결국 샤론은 국방장관직에서 사임했다.[71]
1982년 12월 16일, 유엔 총회는 이 사건을 "집단 학살"로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이스라엘, 캐나다, 영국 등은 기권했다. 일본은 찬성했다.[70]
5. 3. 미국
미국은 사브라-샤틸라 학살에 상당한 책임이 있었다.[48] 아랍 국가와 PLO는 미국을 비난했다.[48] 필립 하비브 미국 외교관의 중재로 이루어진 협상은 PLO의 베이루트 철수를 감독했으며, 비전투 팔레스타인 생존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책임을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에게 부여했다. 미국 행정부는 다국적군의 조기 철수에 대해 비판을 받았으며, 이는 나중에 조지 슐츠가 인정했다.[49] 슐츠는 회고록에서 "잔혹한 사실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라고 말했다.[49] 9월 20일 다국적군은 베이루트에 재배치되었다.[49]6. 국제사회의 반응
사건이 드러나자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그리고 국제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82년 12월 16일, 유엔 총회는 이 사건을 집단 학살로 규탄하는 결의안을 반대 없이 123개국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미국, 이스라엘, 캐나다, 영국 등은 기권했고, 일본은 찬성했다.[70]
이스라엘 국내에서도 이스라엘 공산당이나 피스 나우 등 좌파 세력으로부터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의 손은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학살을 조사한 이스라엘 특별 위원회는 샤론에게 "개인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고, 샤론은 국방장관직에서 사임했다.[71]
한편, 숀 맥브라이드가 이끄는 독립 위원회는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 혐의에 대해 조사하였다.
6. 1. 유엔의 규탄
1982년 12월 16일, 유엔 총회는 이 학살을 규탄하고 집단 학살 행위라고 선언했다.[50] 결의안 37/123 D항에 대한 투표 기록은 찬성 123표, 반대 0표, 기권 22표, 불참 12표였다.[51][52]캐나다 대표는 "우리는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를 이 특정 비인도적인 행위에 적용할 수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찬성' 투표를 한 싱가포르 대표는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는 국민, 민족, 인종 또는 종교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하려는 의도로 저질러진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캐나다와 싱가포르는 이러한 사건이 집단 학살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총회에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반면, 소련은 "이스라엘이 레바논 땅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은 집단 학살이다. 그 목적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국가로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니카라과 대표는 "20세기 중반에 나치의 대량 학살 정책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던 민족이 다른 민족을 상대로 동일한 파시스트적, 집단 학살적 주장과 방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학살의 범죄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이 비극을 1948년 협약에 정의된 집단 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언어를 심각하고 무모하게 오용한 것이다."라고 논평했다.
아일랜드 국립대학교의 아일랜드 인권 센터 소장인 윌리엄 샤바스는[53]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의 범위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으며, 이는 법적 정확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스라엘을 당황하게 하려는 의도로 선택된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같은날 유엔 총회는 이 사건을 "집단 학살"로 규탄하는 결의안을 반대 없이 123개국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미국, 이스라엘, 캐나다, 영국 등은 기권. 일본은 찬성[70]).
6. 2. 맥브라이드 위원회
숀 맥브라이드가 이끄는 독립 위원회는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 혐의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학살 배후 세력의 의도가 "팔레스타인 민족의 국가적, 문화적 권리와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이 사건에 집단 학살 개념이 적용된다고 결론 내렸다.[1] 전 세계의 유대인 개인들 또한 이 학살을 집단 학살로 규탄했다.[2]맥브라이드 위원회의 보고서 ''레바논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당국 또는 군대가 1982년 9월 16일부터 18일 사이에 베이루트 지역의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레바논 민병대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고된 학살 및 기타 살인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3] 이스라엘 위원회와는 달리, 맥브라이드 위원회는 직접적 책임과 간접적 책임과 같이 책임의 정도를 구분하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7. 이스라엘 국내의 반응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그리고 국제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이스라엘 국내에서는 이스라엘 공산당이나 피스 나우 등 좌파 세력으로부터 비판이 거셌다. 아리엘 샤론 당시 국방장관은 "이스라엘의 손은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했다.[71]
그러나 이스라엘 특별 위원회는 학살 조사 결과 샤론에게 "개인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고, 결국 샤론은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다.[71]
7. 1. 카한 위원회
카한 위원회는 이스라엘의 연루에 대해 "간접적인" 책임만 있다고 결론 내렸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허스트는 이스라엘이 관여와 책임을 축소하기 위해 간접 책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는 위원회의 판결에 대해, 학살에 대한 분석의 오류와 누락을 통해서만 위원회가 간접 책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53]카한 위원회는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이 "피의 보복의 위험을 무시"하고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위원회는 베이루트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있어 샤론의 과실은 국방부 장관에게 부여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것이라 판단했고, 샤론을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할 것을 권고했다.[54]
처음에 샤론은 사임을 거부했고, 베긴은 그를 해임하는 것을 거부했다. 평화 지금 시위 행렬의 해산하는 군중에 수류탄을 던져 에밀 그린츠바이크가 사망하고 다른 10명이 부상을 입은 후에야 타협이 이루어졌다. 샤론은 국방부 장관에서 사임하고, 무임소 장관으로 내각에 남게 되었다. 카한 보고서의 실망스러운 결론에도 불구하고 샤론은 나중에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다.[54][55]
카한 위원회는 또한 군사 정보국장 예호슈아 사기의 해임을 권고했다.[56] 그리고 사단장 아모스 야론 준장의 사실상 3년 이상 승진 동결을 권고했다.[56]
1982년 9월 25일, 4년 전에 설립된 평화 지금은 텔아비브에서 시위를 조직하여 이스라엘 인구의 약 10%인 약 40만 명의 참가자를 거리로 불러 모았다.[57] 그들은 분노를 표출하고 이스라엘의 학살에 대한 역할과 책임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57] 이 시위는 2023년 이스라엘 사법 개혁 시위[58]와 인질 석방을 위한 2024년 9월 7일 집회 전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거리 시위로 남아있었다.[59]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 국민의 51.7%가 위원회의 조사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으며, 2.17%만이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했다.[53]
학살을 조사한 이스라엘 특별 위원회는 샤론에게 "개인적 책임이 있다"고 하였고, 샤론은 사임했다.[71]
7. 2. 이스라엘 내 시위
카한 위원회의 조사 결과 발표 이후, 학살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과 역할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스라엘 내에서 발생했다. 1982년 9월 25일, 평화 지금은 텔아비브에서 시위를 조직하여 이스라엘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40만 명의 참가자를 거리로 불러 모았다.[57] 이들은 이스라엘의 학살 개입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책임 조사를 요구했다.[57] 이 시위는 2023년 이스라엘 사법 개혁 시위[58]와 인질 석방을 위한 2024년 9월 7일 집회 전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록되었다.[59]이 과정에서 평화 지금 시위 행렬이 해산하는 군중에 수류탄이 투척되어 에밀 그린츠바이크가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54][55]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 국민의 51.7%가 위원회의 조사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으며, 2.17%만이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학살 사건은 이스라엘 국내 좌파 세력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으며, 당시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의 손은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이스라엘 특별 위원회는 샤론에게 "개인적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고, 결국 샤론은 사임했다.[71]
8. 전후 증언과 법적 소송
학살은 사브라-샤틸라 학살에 참여한 레바논 군대(LF) 병사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영화는 병사들이 민병대에 들어가 훈련을 받고, 바시르 게마옐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난민촌에 투입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학살의 동기는 개인적인 경험, 전쟁의 잔혹함, 지도자에 대한 복종, 난민촌 주민들에 대한 그릇된 믿음 등 다양했다.[60]
아리엘 샤론은 타임 지의 기사 때문에 미국과 이스라엘 법원에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다.[61] 배심원단은 기사가 허위이며 명예를 훼손한다고 판결했지만, 악의를 입증하지 못해 타임 지는 미국 법원에서 승소했다.[62]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샤론이 이스라엘 총리로 선출된 후 소송을 제기했으나,[63] 벨기에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64]
8. 1. 레바논 군대 관계자들의 증언
로크만 슬림과 모니카 보그만의 영화 《학살》은 사브라-샤틸라 학살에 참여한 레바논 군대(LF) 병사들과의 90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병사들이 어떻게 민병대에 들어가 훈련을 받고 바시르 게마옐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난민촌에 투입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학살의 동기는 다양했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맞았던 기억, 전쟁의 잔혹성, 지도자에 대한 복종, 난민촌 여성들이 미래의 테러리스트를 낳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주민의 4분의 3이 테러리스트라는 생각 등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뉘우침 없이 자신들의 폭력 행위를 이야기했다.[60]8. 2. 샤론에 대한 소송
아리엘 샤론은 1983년 2월 21일자 타임 지에 실린 기사에서, 샤론이 바시르 제마옐의 암살에 대한 복수를 팔랑헤에게 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고 암시한 내용 때문에 미국과 이스라엘 법원에 5천만 달러 규모의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다.[61] 배심원단은 이 기사가 허위이며 명예를 훼손한다고 판결했지만, 샤론 측 변호인단이 미국 명예훼손법에서 요구하는 '악의'를 가지고 잡지 편집자와 작가가 행동했음을 입증하지 못해, 타임 지는 미국 법원에서 승소했다.[62]2001년 샤론이 이스라엘 총리로 선출된 후,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소송을 제기했다.[63] 2003년 9월 24일, 벨기에 대법원은 원고 중 벨기에 국적자가 소송 시작 시점에 아무도 없다는 이유로 아리엘 샤론에 대한 전쟁 범죄 소송을 기각했다.[64]
9. 보복 공격
로버트 피스크에 따르면, 오사마 빈 라덴은 알카에다가 199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국 공군 주거 단지를 공격한 코바르 타워 폭탄 테러의 동기 중 하나로 사브라-샤틸라 학살을 언급했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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