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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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포 개항은 1510년(중종 5년)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으킨 왜란을 의미한다. 왜인들은 삼포 관리들의 부당한 요구를 명분으로 부산포, 제포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조선 조정은 경상좌우도방어사를 임명하여 군사를 보내 토벌했고, 대마도주의 강화 요청에도 불구하고 제포에서 왜인들을 물리쳤다. 2004년에는 울산 북구 동축산 정상에 염포 개항 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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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개항 | |
---|---|
개요 | |
사건 | 삼포 개항 |
시기 | 1426년 (세종 8년) |
위치 | 웅천 내이포, 부산 부산포, 울산 염포 |
관련 조약 | 계해약조 |
배경 | |
조선의 회유 정책 | 조선은 이징석의 쓰시마 섬 정벌 이후, 강경책과 함께 회유 정책을 병행하였다. |
쓰시마의 경제적 어려움 | 쓰시마는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조선과의 교역에 의존적이었다. |
경과 | |
1426년 | 내이포, 부산포 외에 염포를 추가로 개항하여 왜인의 거주 및 교역을 허용하였다. |
1510년 | 삼포왜란으로 인해 삼포가 폐쇄되었다. |
이후 | 임신약조를 통해 일부 재개되었다. |
주요 인물 | |
조선 | 세종, 이징석 |
일본 | 종정성(소 사다모리) |
영향 | |
조선 | 쓰시마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 강화 |
일본 | 쓰시마의 경제적 안정 및 조선과의 관계 유지 |
2. 삼포 왜란
1510년(중종 5년) 4월 4일 삼포에서 일본인들이 난을 일으켰다(삼포 왜란). 이로 인해 부산포, 제포, 웅천, 영등포가 함락되고, 부산포 첨사 이우증이 살해당했다. 조선 군사와 백성 272명이 죽고, 동평현, 동래현, 민가 796호가 불탔다.[4]
1510년 4월 13일, 대마도주 종성친은 확전을 우려하여 강화를 요청하는 서계를 보냈다.[5] 그러나 조선 조정은 황형(黃衡), 유담년(柳聃年)을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군사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1510년 4월 19일, 제포에 집결한 왜인들을 세 갈래로 포위하여 8시간 동안 협공하여 물리쳤다.[6]
2. 1. 발단
1510년 중종 5년 4월 4일 제포(내이포)에 거주하고 있던 항거왜추(恒居倭酋), 대조마도(大趙馬道), 노고수장(奴古守長) 등은 병선 100척[2]과 무장한 왜인 4~5천 명을 거느리고 성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삼포의 각 관리들이 부당한 요구를 한다고 주장했는데, 부산포 첨사는 소금과 기와를 굽는데 사용하는 땔감을 과하게 요구하였고, 웅천 현감은 왜인들의 상업 활동을 금지하면서 급료를 제대로 주지 않았으며, 제포의 첨사는 고기잡이를 할 때 허락을 해주지 않으면서 왜인 4명을 살해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3] 이들은 부산포, 제포를 함락시키고, 영등포를 불사르고, 웅천진 등을 공격하였다.[3]2. 2. 경과
1510년 (중종 5년) 4월 4일 제포(내이포)에 거주하고 있던 항거왜추(恒居倭酋), 대조마도(大趙馬道), 노고수장(奴古守長) 등이 병선 100척[2]과 무장한 왜인 4~5천 명을 거느리고 성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삼포의 각 관리들의 부당한 요구를 토로하며, 부산포 첨사는 소금과 기와를 굽는데 사용하는 땔감을 과하게 요구하였고, 웅천 현감은 왜인들의 상업 활동을 금하면서 급료를 제대로 주지 않고, 제포의 첨사는 고기잡이를 할 때 허락을 해주지 않으면서, 왜인을 4명 살해했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이들은 부산포, 제포를 함락시키고, 영등포를 불사르고, 웅천진 등을 공격하였다.[3]이 변란으로 인해 부산포, 제포, 웅천, 영등포가 함락되고, 부산포 첨사 이우증이 살해당하였다. 군사와 백성 272명이 죽고, 동평현, 동래현, 민가 796호가 전소되었다.[4]
1510년 4월 13일 확전을 염려한 대마도주 종성친은 서계를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다.[5]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황형(黃衡), 유담년(柳聃年)을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군사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1510년 4월 19일 제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세 갈래로 포위하여 8시간의 협공 끝에 적을 물리쳤다.[6]
2. 3. 진압
1510년 4월 13일 대마도주 종성친이 확전을 염려하여 서계를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다.[5]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황형(黃衡), 유담년(柳聃年)을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군사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1510년 4월 19일 제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세 갈래로 포위하여 8시간 동안 협공하여 적을 물리쳤다.[6]
3. 관련 건축물
2004년 12월 7일 울산시 북구 동축산 정상(해발 305m)에 염포 개항 기념공원이 준공되었다.[7] 이곳에는 옛 염포를 조망할 수 있는 팔각정과 기념비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염포 개항 기념공원 참고)
3. 1. 염포 개항 기념공원
2004년 12월 7일 울산시 북구 동축산 정상(해발 305m)에 염포 개항 기념공원이 준공되었다.[7] 이곳에는 옛 염포를 조망할 수 있는 팔각정과 기념비가 있다.참조
[1]
웹인용
내이포와 부산포 이외에 울산의 염포에서도 무역을 허가하기로 하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426-01-18
[2]
웹인용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http://sillok.histor[...]
2010-05-16
[3]
웹인용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김석철이 부산포·제포가 왜구에게 함락되었음을 아뢰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510-04-08
[4]
웹인용
경상도 왜변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진휼책과 복호 등을 정하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510-05-16
[5]
웹인용
대마도의 종성친이 강화를 요청하는 서계를 동래현으로 보내오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510-04-13
[6]
웹인용
안윤덕이 최임을 보내어 승전을 아뢰니 최임에게 싸운 절차를 묻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510-04-22
[7]
웹인용
염포개항 기념 공원 완성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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