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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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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하 전투는 1858년 태평천국 운동 시기, 안후이성에서 벌어진 전투로, 태평천국군이 청나라 군대를 격파한 사건이다. 태평천국군은 루저우를 점령한 후 톈징으로 가는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삼하진을 공략했고, 이에 청나라 군대가 반격에 나섰다. 전투 결과, 태평천국군의 증원과 청나라 군대의 야습 실패로 이속빈이 이끄는 청군이 전멸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태평천국군은 세력을 확장하고, 청나라는 안칭 포위전을 풀고 손실을 회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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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태평천국의 난
날짜1858년 11월 7일 ~ 1858년 11월 18일
장소안휘성 페이시현(肥西縣) 산허진(三河鎭)
결과태평천국군의 승리, 녹영군의 지연으로 인한 결과
교전 세력
교전국 1청나라 (상군)
교전국 2태평천국
지휘관 및 지도자
청나라이속빈(Li Xubin) (전사), 증국화(Zeng Guohua) (전사)
태평천국진옥성(Chen Yucheng), 이수성(Li Xiucheng), 장락행(Zhang Lexing), 오정규(吴定规), 진곤서(Chen Kunshu)
병력 규모
청나라6,000명
태평천국100,000명 이상 (염군 40,000명 포함)
사상자 및 피해
청나라6,000명 (상군)
태평천국수천 명
관련 이미지
안휘성, 합비의 삼하고진
안휘성, 합비의 삼하고진

2. 전초전

1858년 8월, 태평천국진옥성 군대가 여주(현재의 합비시)를 점령한 후, 안휘성 북부로 진격하여 천경으로 향하는 보급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9월에는 포구양주까지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1]

이에 청나라 조정은 후광총독 관문에게 반격을 지시했고, 관문은 상군의 명장 이속빈과 도싱가 장군에게 정예 병력을 주어 안휘성으로 파견했다.[1] 이속빈과 도싱아는 빠르게 진격하여 태호, 잠산, 동성, 서성 등지를 연이어 함락시켰다.[1] 이 과정에서 이속빈은 점령지 수비를 위해 병력 일부를 남기고, 도싱가는 안경 방면으로 이동했다.[1]

11월 3일, 이속빈은 남은 6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성 남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삼하진 외곽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1] 삼하진은 차오호 서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주 방어의 핵심이자 천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보급로였다.[1] 원래 성벽이 없던 이곳에 태평군은 새로 성벽과 9개의 보루를 쌓아 오정규에게 방어를 맡기고 있었다.[1] 삼하진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옥성은 즉시 구원군을 이끌고 이동했으며, 홍수전에게 이수성의 지원을 요청했다.[1] 이로써 삼하진을 둘러싼 대규모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2. 1. 태평천국의 안휘성 진출

1858년 8월, 여주庐州중국어를 점령한 진옥성陈玉成중국어 등 태평천국군은 안휘성 동성의 총양진에서 회의를 열고, 강북대영을 공략하여 천경天京중국어으로 향하는 군량미 수송로를 확보하기로 결정했다.[1] 9월, 진옥성은 포구를 공격하여 청나라 더싱아 군을 격파하고 포구와 양주를 점령했다.[1]

이에 호북호남 지역을 총괄하던 후광총독 관문官文중국어[1] 이속빈이 이끄는 상군 정예 8천 명과 형주(징저우) 장군 도싱가都兴阿중국어[1]를 안휘성으로 급파했다. 이속빈과 도싱아는 태호太湖중국어, 잠산, 동성, 서성을 차례로 함락시키는 공세를 펼쳤다.[1] 이 과정에서 이속빈은 점령지 수비를 위해 2천 명의 병력을 남겼고,[1] 도싱가는 안경 공략을 위해 이동했다.[1]

1858년 11월 3일, 이속빈은 남은 6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성의 남동쪽 약 25km 지점에 위치한 삼하진三河镇중국어 외곽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1] 삼하진은 소호 서쪽 연안에 자리 잡아 여주 방어의 핵심 거점이자, 여주와 천경을 잇는 중요한 수송로였다.[1] 본래 성벽이 없던 곳이었으나, 태평천국군은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새로 성벽을 쌓고 성 외곽에 9개의 보루를 추가로 건설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며, 오정규吴定规중국어에게 방어를 맡겼다.[1] 삼하진이 청군에게 포위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진옥성은 즉시 포구에서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며, 홍수전洪秀全중국어에게 이수성李秀成중국어의 지원군 파견을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다.[1]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인근의 녠군도 4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태평천국군을 지원했다고 한다.)

2. 2. 청군의 반격과 삼하진 포위

1858년 8월, 태평천국군이 여주( 庐州zho, 현재의 허페이시)를 점령하자, 청나라 조정은 반격에 나섰다. 호광총독 관문( 官文zho)은 상군의 명장 이속빈후베이성 주둔군을 이끄는 도싱가( 都兴阿zho)에게 안휘성 탈환을 명령했다. 이속빈은 상군 정예 8천 명을 포함하여 도싱가와 함께 총 1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안휘성으로 진격했다.[1]

청군은 초반에 기세를 올렸다. 9월 22일 타이후( 太湖zho)를 시작으로, 9월 27일 첸산, 10월 13일 퉁청, 10월 24일 수청을 차례로 점령하며 북진했다. 이 과정에서 이속빈은 점령지의 안정을 위해 2천 명의 병력을 남겨두었고, 도싱가는 안경 공략을 위해 별도로 이동했다. 이로 인해 이속빈이 직접 지휘하는 병력은 6천 명으로 줄어들었다.[1]

11월 3일, 이속빈은 남은 6천 병력을 이끌고 수청 남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삼하진( 三河鎮zho) 외곽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1] 삼하진은 차오호 서안에 위치하여 여주 방어의 핵심 거점이자, 여주와 천경을 잇는 중요한 보급로였다. 태평군은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존에 없던 성벽을 새로 쌓고, 성벽 외곽에 9개의 견고한 요새를 추가로 건설하여 오정규( 吴定规zho)에게 방어를 맡기고 있었다.[1]

한편, 10월 24일 류허( 六合zho)를 점령했던 태평천국의 진옥성은 삼하진이 청군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구원에 나섰다. 그는 삼하진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직접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동하는 한편, 홍수전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이수성의 병력까지 합류시키도록 했다. 또한, 인근의 념군 지도자 장락행 역시 약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태평군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1]

11월 7일, 청군은 삼하진 외곽의 요새 3곳을 공격하여 점령했지만, 태평군은 격렬한 저항 끝에 나머지 요새들을 포기하고 성 안으로 철수했다. 같은 날 진옥성의 군대가 삼하진에 도착했고, 약 일주일 뒤에는 이수성과 념군까지 합류했다. 이로써 전세는 역전되어, 6천 명에 불과한 이속빈의 청나라 군대는 10만 명이 넘는 태평천국-념군 연합군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상황에 놓였다.[1]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이속빈의 막료들은 후방의 퉁청으로 후퇴할 것을 건의했으나, 연이은 승리에 도취된 이속빈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점령했던 태평군의 옛 요새에 병력을 분산시켜 방어 태세를 고수하는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1]

3. 전투 과정

11월 7일, 청나라 군대는 삼하진에 위치한 태평천국의 요새들을 공격했다. 격전 끝에 태평천국군은 점령했던 요새들을 포기하고 성 안으로 후퇴했다. 같은 날 진옥성의 지원군이 도착했고, 곧이어 이수성과 염군의 장락행 부대까지 합류하여 10만 명이 넘는 태평천국군이 청군을 포위했다.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던 6천 명의 청군 지휘관 이속빈은 참모들의 후퇴 건의를 거부하고 점령한 요새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속빈은 11월 15일 밤,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선제 야습을 감행했으나, 이미 대비하고 있던 태평천국군의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고 포위되었다. 이속빈이 직접 구원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수성과 성 안의 오정규( 吴定规|우딩구이중국어 ) 부대까지 합세하여 총공세를 펼치자, 지원을 받지 못한 이속빈의 청군은 점령했던 요새들을 차례로 빼앗겼다. 결국 탈출을 시도하던 이속빈과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화( 曾國華|쩡궈화중국어 )는 격전 중 전사했다. 11월 18일경, 청나라 군대는 전멸했고 전투는 태평천국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3. 1. 청군의 초기 공세와 태평천국군의 방어

11월 7일, 청군은 3개 방면에서 태평천국군 요새를 공격했다. 구체적인 공격 편성은 다음과 같았다.

공격 부대공격 목표 지역비고
6개 대대허난 대로(河南大街|허난다제중국어) 및 쥐 덫(老鼠夹|라오수자중국어) 지역
3개 대대수안(水庵|수이안중국어) 및 수정암(水晶庵|수이징안중국어) 지역
2개 대대저가월(储家越|추자웨중국어) 지역
2개 대대예비대이속빈 직접 지휘



격전 끝에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태평천국군은 9개 요새를 모두 포기하고 삼하진 성 안으로 철수했다. 같은 날 진옥성의 부대가 삼하진에 도착하여 남쪽 금우(金牛|진뉴중국어) 읍에 진을 쳤다. 일주일 후에는 이수성의 부대와 염군의 장락행 부대까지 합류하여 백석산(白石山|바이시산중국어) 지역에 주둔하며 청군을 포위했다. 이로써 삼하진 일대의 태평천국군은 1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루게 되었다.

반면 청군은 6천 명에 불과했기에, 이속빈의 참모들은 수적 열세를 고려하여 임시로 동성으로 철수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속빈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점령한 9개 요새에 모든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압도적인 적의 수적 우세 속에서 장기전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이속빈은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5일 밤, 청군은 7개 대대를 동원하여 금우 읍에 주둔한 진옥성 부대에 대한 야습을 시도했다. 하지만 태평천국군은 이미 청군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복병을 배치해 둔 상태였다.

11월 16일 새벽, 야습에 나선 청군은 진옥성 부대의 선봉대와 마주쳤고, 이내 태평천국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이 전투에서 청군 야습 부대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위되었다. 이속빈은 포위된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4개 대대의 구원군을 보냈고 직접 수십 차례 돌격을 감행했으나, 태평천국군의 방어에 막혀 막대한 피해만 입고 실패했다.

이수성 부대 역시 진옥성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공격에 가담했으며, 성 안에 있던 오정규( 吴定规|우딩구이중국어)의 부대도 출격하여 청군을 협공했다. 결국 이속빈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요새로 후퇴하여 지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녹영 소속 지원군 15,000명은 도착이 늦어져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지원 없이 고립된 청군은 급격히 무너졌고, 9개 요새 중 7개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이속빈의 사령부가 위치한 요새마저 포위되자, 이속빈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격전 중 전사했다(일부 기록에는 그가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고도 전해진다).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화( 曾國華|쩡궈화중국어) 역시 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이속빈과 증국화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11월 18일경, 이속빈이 이끌던 청나라 군대가 전멸하면서 전투는 태평천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3. 2. 태평천국 증원군의 도착과 반격

11월 7일, 청나라 군대는 삼하진 외곽의 태평천국 요새 세 곳을 공격했다. 청군은 허난 대로(河南大街|허난다제중국어), 라오수자(老鼠夹|라오수자중국어), 수이안(水庵|수이안중국어)과 수이징안(水晶庵|수이징안중국어), 추가월(储家越|추자웨중국어) 지역의 요새들을 공격했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격전 끝에 태평천국군은 점령당한 9개의 요새를 모두 포기하고 삼하진 성 안으로 철수했다. 같은 날, 진옥성이 이끄는 태평천국 지원군이 삼하진 남쪽의 진뉴(金牛|진뉴중국어) 읍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일주일 후, 이수성의 부대와 념군의 장락행 부대까지 합류하여 백석산(白石山|바이시산중국어) 지역에 진을 치면서 삼하진의 태평천국군은 1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루었다. 반면 이속빈이 지휘하는 청군은 6천 명에 불과하여 수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에 놓였다. 이속빈의 참모들은 일시적으로 동성(桐城)으로 후퇴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속빈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점령한 9개의 요새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속빈은 11월 15일 밤,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청군 7개 대대가 어둠을 틈타 진옥성 군대가 주둔한 진뉴 읍을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태평천국군은 이미 청군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매복하고 있었다. 11월 16일 새벽, 청나라 야습 부대는 진옥성 군의 선봉대와 부딪히며 매복에 걸려들었고, 절반 이상의 병력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포위되었다.

이속빈은 포위된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직접 4개 대대를 이끌고 수십 차례 돌격을 감행했지만, 태평천국군의 견고한 방어에 막혀 막대한 피해만 입고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수성의 부대가 진옥성 군을 지원하기 위해 나섰고, 성 안에 있던 오정규( 吴定规|우딩구이중국어 )의 태평천국군도 성문을 열고 나와 청군을 공격했다. 완전히 포위된 이속빈의 잔존 부대는 점령했던 요새로 후퇴하여 지원군을 기다렸지만, 녹영 소속 지원군 15,000명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청군이 점령했던 9개의 요새 중 7개가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이속빈의 사령부가 있던 요새마저 포위되었다. 이속빈은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했다(일부 기록에는 그가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화( 曾國華|쩡궈화중국어 ) 역시 전사했으며, 이속빈과 증국화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11월 18일, 청나라 군대가 전멸하면서 전투는 태평천국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3. 3. 청군 섬멸

11월 7일, 청나라 군대는 삼하진에 위치한 태평천국군 요새 세 곳을 목표로 공격을 시작했다.[1] 당시 청군의 공격 부대 편성은 다음과 같았다.

부대 규모공격 목표 지역
6개 대대허난 대로(河南大街|허난다제중국어), 쥐 덫(老鼠夹|라오수자중국어) 지역 요새
3개 대대수안(水庵|수이안중국어), 수정암(水晶庵|수이징안중국어) 지역 요새
2개 대대저가월(储家越|추자웨중국어) 지역 요새
2개 대대이속빈 직속 예비대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은 격전 끝에, 태평천국군은 점령하고 있던 9개의 요새를 모두 포기하고 삼하진 성 안으로 철수했다.[1] 같은 날, 진옥성이 이끄는 태평천국군 부대가 삼하진에 도착하여 성 남쪽의 금우(金牛|진뉴중국어) 읍에 진영을 구축했다.[1] 일주일 뒤에는 이수성의 부대와 념군의 장락행 부대까지 합류하여 백석산(白石山|바이시산중국어) 지역에 주둔하면서 청군을 포위했다.[1] 이로써 태평천국군의 병력은 10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고, 반면 청군은 6천 명에 불과한 수적 열세에 놓였다.[1]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속빈의 참모들은 안후이성 동성으로 잠시 후퇴할 것을 건의했지만, 이속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점령한 요새에 모든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 결정을 내렸다.[1]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장기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속빈은 11월 15일 밤, 진옥성의 부대를 상대로 선제 야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1] 청군 7개 대대가 어둠을 틈타 금우 읍의 태평천국군 진영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태평천국군은 이미 청군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매복 작전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1]

11월 16일 새벽, 야습에 나선 청군은 진옥성 군의 선봉 부대와 정면으로 부딪혔고, 곧바로 태평천국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이 기습으로 청군 야습 부대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남은 병력은 포위되었다.[1] 이속빈은 포위된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예비대였던 4개 대대를 추가로 투입하고 직접 수십 차례 돌격을 감행했지만, 태평천국군의 견고한 방어에 막혀 막대한 피해만 입고 실패했다.

이때 이수성이 이끄는 태평천국군 본대와 성 안에 있던 오정규( 吴定规|우딩구이중국어 )의 부대까지 가세하여 청군을 협공했다.[1] 결국 이속빈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점령했던 요새로 후퇴하여 증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1] 하지만 청나라 녹영 소속 증원군 15,000명은 제때 도착하지 못해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심각하게 약화된 청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점령했던 9개 요새 중 7개가 순식간에 태평천국군에게 다시 함락되었다. 이속빈의 사령부가 위치한 마지막 요새마저 포위되자, 이속빈은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치열한 전투 중에 전사했다.[1] (일부 기록에는 이속빈이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화( 曾國華|쩡궈화중국어 ) 역시 전사했으며, 이속빈과 증국화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1] 11월 18일경, 이속빈이 이끌던 청나라 군대는 완전히 섬멸되었고, 전투는 태평천국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1]

4. 전투 결과

삼하 전투는 태평천국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의 패배로 청나라 군대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점령지를 내주며 후퇴해야 했으며, 안칭(安慶)에 대한 포위 공격도 중단되었다. 반면, 승리한 태평천국군은 진옥성이수성의 지휘 아래 퉁청(桐城), 수청(舒城) 등지를 함락시키며 기세를 이어갔다. 청나라는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 특히 정예 병력의 손실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는 향후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4. 1. 태평천국의 승리와 영향

삼하 전투에서 승리한 태평천국군은 기세를 몰아 퉁청(桐城)과 수청(舒城)을 함락시켰다. 진옥성이수성은 남쪽으로 계속 공격했고, 청군은 수청을 포기하고 퉁청으로 물러나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군은 장시성 징더전에서도 승리했다. 11월 24일, 이수성과 진옥성의 태평군이 퉁청을 점령했다.

이에 안칭(安慶)을 포위하고 있던 두싱아(都興阿) 휘하의 청군은 후방이 차단될 위험에 처하자 포위를 풀고 패주했다. 11월 27일, 청군은 石牌|스파이중국어를 거쳐 宿松|슈송중국어으로 물러나면서 안칭 포위 작전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이후 태평군은 첸산(潜山)과 太湖|타이후중국어를 다시 점령했다.

삼하 전투에서의 청나라 군대의 패배는 매우 심각한 타격이었다. 점령했던 지역들을 다시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거점이었던 안칭에 대한 포위 작전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태평군은 이 승리를 발판 삼아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잃은 6,000여 명의 청군은 정예 부대였기에, 이 손실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이는 향후 태평천국과의 전쟁 수행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듬해, 삼하 전투의 승리를 이끈 진옥성은 영왕(英王)으로, 이수성은 충왕(忠王)으로 각각 봉해졌다.

4. 2. 전략적 의의

삼하 전투에서의 청나라 군대의 패배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이 전투로 인해 청나라는 새로 점령했던 마을들을 다시 태평천국에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안칭(安慶)에 대한 포위마저 풀어야 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잃은 6,000여 명의 병력은 청나라의 정예 부대였기에 손실이 더욱 컸다. 이 병력을 복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이는 이후 태평천국을 진압하려는 청나라의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반면 승리한 태평천국군은 기세를 몰아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진옥성(陳玉成)은 퉁청(桐城)과 수청(舒城)을 함락시켰고, 첸산(潜山)과 타이후(太湖)까지 다시 점령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 진옥성은 영왕(英王)에, 이수성(李秀成)은 충왕(忠王)에 각각 봉해졌다.

5. 추가 설명

삼하 전투는 태평천국 운동 중반기, 안후이성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삼하진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태평천국의 수도인 천경(현재의 난징)으로 향하는 길목을 확보하려는 청나라 상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태평천국군 사이의 격돌이었다.

당시 상군은 증국번의 지휘 아래 연승을 거두며 기세가 높았고, 특히 이속빈이 이끄는 부대는 상군의 정예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삼하진 점령 이후, 이속빈은 압도적인 수의 태평천국군에게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모들의 후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등 상황 판단에 실책을 보였다. 이는 이전의 승리에 대한 과신과 태평천국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 진옥성이수성이 이끄는 태평천국군은 신속하게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효과적인 협동 작전을 펼쳐 상군을 포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태평천국 운동 후반기를 이끌 두 젊은 지도자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의 패배는 상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정예 병력과 유능한 지휘관인 이속빈, 그리고 증국번의 동생 증국화까지 잃으면서 상군의 북진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또한, 안경에 대한 포위가 풀리는 등 청나라의 군사적 압박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태평천국 측에서는 이 승리로 군대의 사기가 크게 올랐으며, 안후이성 중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확보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투의 공로로 진옥성과 이수성은 각각 영왕과 충왕에 봉해지며 태평천국 내에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삼하 전투는 상군의 무패 신화를 깨뜨리고 태평천국 운동의 명맥을 이어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5. 1. 이속빈과 증국화

11월 7일, 청군은 허난 대로(河南大街), 쥐 덫(老鼠夹), 수안(水庵), 수정암(水晶庵), 저가월(储家越) 등지에 있는 태평천국군 요새 아홉 곳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태평천국군은 성 안으로 후퇴했으나, 같은 날 진옥성의 부대가 삼하진 남쪽 금우(金牛)에 도착했고, 일주일 뒤에는 이수성의 부대까지 백석산(白石山) 지역에 도착하여 청군을 포위했다. 태평천국군은 100,000명이 넘는 대군이었던 반면, 청군은 6,000명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놓이자 이속빈의 참모들은 일시적으로 동성(桐城)으로 후퇴할 것을 건의했지만, 이속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점령한 요새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속빈은 진옥성 군대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5일 밤, 청군은 야습을 시도했으나, 태평천국군은 이미 이를 예측하고 복병을 배치해 둔 상태였다. 11월 16일 새벽, 청군 야습 부대는 진옥성 군의 복병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위되었다. 이속빈이 다급히 구원군을 보냈지만, 이들마저 태평천국군에게 격파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수성 군이 진옥성 군을 지원하고, 성 안에 있던 오정규吴定规zho의 군대까지 가세하여 청군을 공격했다. 남은 청군은 요새에 고립되어 지원군을 기다렸으나, 태평천국군의 공세 앞에 요새는 차례로 함락되었다. 궁지에 몰린 이속빈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11월 18일경 격렬한 전투 끝에 전사했다(일부 자료는 그가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고도 전한다). 이 전투에서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화曾國華zho 역시 목숨을 잃었다. 이속빈과 증국화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으며, 이속빈이 이끌던 청군은 전멸했다.

5. 2. 진옥성과 이수성

11월 7일, 진옥성의 부대는 삼하(三河)에 도착하여 삼하 남쪽의 금우(金牛) 읍에 진영을 세웠다. 일주일 후 이수성의 부대도 도착하여 백석산(白石山) 지역에 진영을 쳤다. 이로써 삼하 지역의 태평천국군은 1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루었다. 반면 청나라 상군의 이수빈(李續賓중국어) 휘하 병력은 6,000명에 불과하여, 참모들은 일시적으로 동성(桐城)으로 후퇴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수빈은 이를 거절하고 점령한 요새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수적 열세를 인지한 이수빈은 오래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진옥성 부대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5일 밤, 청나라군 7개 대대가 어둠을 틈타 금우 읍의 태평천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태평천국군은 이미 매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11월 16일 새벽, 청나라군은 진옥성 부대의 선봉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매복에 걸려들었고, 7개 대대 중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위되었다. 이수빈은 포위된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직접 4개 대대를 이끌고 수십 차례 돌격을 감행했지만, 태평천국군의 견고한 방어에 막혀 막대한 사상자만 냈다.

이때 이수성 부대가 진옥성을 지원하기 위해 합류했고, 성벽 뒤에 있던 오정규(吳定規중국어)의 태평천국군 부대도 출격하여 청나라군을 공격했다. 삼면으로 공격받게 된 이수빈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요새로 후퇴하여 증원군을 기다렸으나, 녹영 소속 15,000명의 증원군은 지연되어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심각하게 약화된 청나라군은 9개의 요새 중 7개를 순식간에 빼앗겼고, 이수빈의 사령부가 있던 요새마저 포위되었다. 이수빈은 돌파를 시도하던 중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했으며(일부 기록에는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고도 전해진다),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화(曾國華중국어) 역시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수빈과 증국화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11월 18일, 전투는 태평천국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진옥성은 승세를 몰아 동성(桐城)과 서성(舒城)을 함락시켰고, 도싱가(多隆阿중국어)가 이끌던 청나라 군대는 안경(安慶)의 포위를 풀고 패주했다. 태평천국군은 이어서 잠산(潛山)과 태호(太湖)도 다시 점령했다. 이듬해, 이 전투의 공로로 진옥성은 영왕(英王), 이수성은 충왕(忠王)에 봉해졌다. 청나라는 삼하 전투에서의 참패로 인한 손실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5. 3. 삼하진(三河鎭)

11월 7일, 이수빈이 이끄는 황제군은 3개 방면에서 삼하진의 태평군 요새를 공격했다.[1]

  • 6개 대대가 허난 대로(河南大街|허난다제중국어)와 쥐 덫(老鼠夹|라오수자중국어) 지역의 요새를 공격했다.
  • 3개 대대가 수안(水庵|수이안중국어)과 수정암(水晶庵|수이징안중국어) 지역의 요새를 공격했다.
  • 2개 대대가 저가월(储家越|추자웨중국어) 지역의 요새를 공격했다.
  • 이수빈이 직접 지휘하는 2개 대대는 예비대로 남았다.


격렬한 전투 끝에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태평군은 9개의 요새를 모두 포기하고 성벽 안으로 후퇴했다.[1] 같은 날, 진옥성의 부대가 삼하진에 도착하여 남쪽의 금우(金牛|진뉴중국어) 읍에 진을 쳤다. 일주일 뒤에는 이수성의 부대도 도착하여 백석산(白石山|바이시산중국어) 지역에 주둔했다. 이로써 삼하진 일대의 태평군 병력은 10만 명을 넘어섰다.[1] 반면 황제군은 6,000명에 불과하여, 이수빈의 참모들은 수적 열세를 고려해 임시로 통성(桐城)으로 철수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수빈은 이를 거부하고 새로 점령한 요새에서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1]

압도적인 적의 병력 앞에 장기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수빈은 진옥성 부대에 대한 선제공격을 결정했다. 11월 15일 밤, 황제군 7개 대대가 어둠을 틈타 금우 읍의 태평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다.[1] 그러나 태평군은 이미 황제군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매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11월 16일 새벽, 황제군 선봉대는 진옥성 부대와 정면으로 부딪혔고, 이는 황제군 7개 대대를 태평군의 매복 지점으로 유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매복에 걸린 황제군은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위되었다.[1] 이수빈은 포위된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남은 4개 대대를 투입하고 직접 수십 차례 돌격을 감행했으나, 태평군의 견고한 방어에 막혀 막대한 사상자만 낸 채 실패했다.[1]

이수성이 이끄는 태평군 부대와 성 안에 있던 오정규(吳定規)의 부대까지 합세하여 황제군을 공격했다.[1] 결국 이수빈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요새로 후퇴하여 증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의 녹영 군 15,000명은 도착이 늦어져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1] 심각하게 약화된 황제군은 짧은 시간 안에 9개 요새 중 7개를 빼앗겼고, 이수빈의 사령부가 있던 요새마저 포위되었다. 이수빈은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했으나 치열한 전투 중에 전사했다. (일부 기록에는 이수빈이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고도 전해진다.)[1]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화(曾國華) 역시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이수빈과 증국화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1] 11월 18일, 전투는 태평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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