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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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원은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그리고 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명칭이다. 중국에서는 수재라고도 불렸으며, 학생 신분으로 9품 관료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동시, 향시 등의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으며, 관직 진출에는 제한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생원은 소과 생원시에 합격한 자를 의미하며, 고려 시대 공민왕 때 목민관 및 향교 교장 선발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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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 및 청 시대의 생원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의 '''생원(生員)'''은 '''수재(秀才)'''라고도 불렸다.[1]
2. 1. 생원의 정의와 특권
'생(生)'은 문자 그대로 학생을 의미하고, '원(員)'은 본래 명나라 초기 문관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학생인 생원에게 '원'을 붙여 관료에 준하는 대우를 한 것이다. 실제로 생원은 9품 관료직에 준하는 복장, 요역 면제의 특권, 사법적 면책 특권, 신분의 종신 보장과 같은 특권을 누렸다.[1]2. 2. 생원이 되는 과정
부학, 주학, 현학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을 동시(童試)라 했고, 동시의 수험생을 동생(童生)이라 했다.[1] 동시는 현시, 부시, 원시라는 3단계 시험으로 거행되었다.[1] 이 3단계 시험을 통과해야만 생원이 될 수 있었다.[1]2. 3. 생원의 종류와 역할
생원의 종류로는 늠선생(늠생), 증광생(증생), 부학생(부생) 등이 있었다. 이들은 국자감 설립과 동시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생원은 제1차 과거 시험인 향시(성시)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졌으나, 향시에 응시하기 직전의 시험인 과고(科考)를 통과해야 했다.[1]생원은 기본적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관직에 진출하려면 감생이 되거나, 공생(사실상 감생의 일종이지만 청나라 시대에는 감생의 신분 하락으로 별개의 신분이 됨)이 되거나,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거나, 황제가 거행하는 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야 했다. 생원 중에서 국자감에 입학한 학생을 공감생이라 했으며, 공감생을 공생이라고도 했다. 청나라 시대에는 감생의 지위 하락으로 인해 공생(공감생)은 감생보다 더 높은 신분으로 인식되었다.[1]
2. 4. 공생과 감생
국자감 입학생을 공감생(공생)이라 했고, 중앙 국립학교 학생을 "감생"이라 했다.[1]명나라 말기부터 기부 입학인 연납감생이 늘고, 국자감에서 공부하지 않는 감생도 늘면서 감생의 지위가 하락했다. 청나라 시대에는 공생이 감생보다 더 높은 신분으로 인식되었다. 청나라 시대에 감생은 기부 입학생인 연납감생이나 국자감에 진학하여 공부하지 않은 감생이 주류를 이루게 됨으로써, 감생의 한 종류였던 공생은 감생과는 다른 신분으로 인식되어 갔고 그 지위도 감생보다 높게 인식되어 갔다.[1]
3. 조선 시대의 생원
고려 공민왕 말기 목민관 및 향교 교장 선발을 위한 생원시 시행이 조선 시대 생원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생원은 소과 과거 시험의 생원시 합격자를 의미했다.[2]
3. 1. 생원의 정의와 역할
조선 시대 생원은 1단계 과거 시험인 소과의 생원시 합격자를 의미한다.[2] 원래 고려 공민왕 말기 목민관 및 향교 교장 등의 생원시 시행으로부터 처음 유래되었다. 시대에 따라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더라도, 오랫동안 학업에 정진한 사람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3. 2. 조선 시대 생원 제도의 특징 (별도 하위 목차 필요)
조선 시대 생원시는 소과(小科)의 한 종류로, 합격자에게는 '생원'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2] 생원시는 고려 공민왕 때 목민관 및 향교 교장 등을 선발하기 위해 처음 시행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다.[2]생원시는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시는 각 도의 인구 비례에 따라 합격자 수를 정했는데, 한성부에서는 200명, 경기도에서는 90명,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는 각각 100명, 황해도, 강원도에서는 각각 50명, 평안도에서는 45명, 함경도에서는 35명을 선발하였다. 복시는 초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성균관에서 시행되었으며, 최종적으로 100명을 선발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졌다. 또한, 하급 관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생원은 사회적으로 양반 계층에 속했으며,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재로 존경받았다.
비록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더라도, 오랫동안 학문에 정진한 사람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생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학문을 중시하는 조선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는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양반 중심의 사회 구조를 고착화하고, 실질적인 능력보다는 가문의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한계도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3. 조선시대 주요 생원 (별도 하위 목차 필요)
조선 시대 생원시 합격자는 소과(小科)의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의미한다.[2] 이들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시행된 목민관 및 향교 교장 선발을 위한 생원시 제도의 영향을 받았다. 시대에 따라 과거 시험 합격 여부와 관계없이, 오랫동안 학문에 정진한 사람을 예우하는 호칭으로도 사용되었다.참조
[1]
서적
中國紳士
上海社科
2001
[2]
문서
소과 합격자 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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