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6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샤를 6세는 1380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프랑스 국왕으로, 1368년 출생하여 1422년 사망했다.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섭정 정치로 인해 삼촌들에게 권력이 분산되었다. 20대 중반부터 정신병 발작을 겪으며 '미친 왕'으로 불렸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다. 잉글랜드와의 백년 전쟁 중, 1420년 트루아 조약을 통해 헨리 5세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다. 샤를 6세의 사후, 헨리 5세의 아들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지만,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되찾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22년 사망 - 헨리 5세
헨리 5세는 1413년부터 1422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랭커스터 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왕권 강화, 프랑스와의 아쟁쿠르 전투 승리, 트루아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 확보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셰익스피어 희곡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 1422년 사망 - 윤곤
윤곤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건국 후 완산부윤, 대장군 등을 지냈고,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공신이 되었으며, 명나라 사신, 의정부 참찬, 이조판서를 역임한 문신, 무신, 정치인, 외교관이다. - 1368년 출생 - 피카르다 부에리
피카르다 부에리는 피렌체 귀족 가문 출신으로 은행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와 결혼하여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코시모 데 메디치를 포함한 네 명의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 코시모는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 가문으로 만들었다. - 1368년 출생 - 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
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는 이탈리아의 콘도티에로이자 리미니의 영주로서, 교황령의 곤팔로니에레와 밀라노 총독을 역임하며 곤자가 가문과의 동맹 강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의 그레고리오 12세 사임 서한 낭독 등 정치·군사적으로 활동했다. - 도팽 드 비에누아 - 루이 14세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국왕인 루이 14세는 72년간 재위하며 절대 왕정을 강화하고 프랑스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했으나 잦은 전쟁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켜 절대 왕정의 전성기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 도팽 드 비에누아 - 샤를 8세
샤를 8세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왕으로, 브르타뉴 여공작과의 결혼으로 브르타뉴를 프랑스에 통합하고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큰 성과 없이 사망하여 발루아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었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프랑스에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샤를 6세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샤를 6세 |
별칭 | 친애왕 광인왕 |
로마자 표기 | Charles VI |
프랑스어 표기 | le Bien-Aimé le Fol 또는 le Fou |
통치 | |
직위 | 프랑스 왕 |
재위 기간 | 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
대관식 | 1380년 11월 4일 |
선임자 | 샤를 5세 |
후임자 | 샤를 7세 헨리 2세(논쟁) |
섭정 | 필리프 2세, 부르고뉴 공작 장, 베리 공작 루이 1세, 앙주 공작 루이 2세, 부르봉 공작 루이 1세, 오를레앙 공작 장, 부르고뉴 공작 헨리 5세, 잉글랜드 왕 이자보, 프랑스 왕비 |
생애 | |
출생일 | 1368년 12월 3일 |
출생지 | 프랑스, 파리 |
사망일 | 1422년 10월 21일 (53세)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매장일 | 1422년 11월 11일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가문 | |
왕가 | 발루아 |
아버지 | 샤를 5세 |
어머니 | 잔 드 부르봉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이자보 드 바이에른 (1385년 결혼) |
자녀 | 이사벨, 잉글랜드 왕비 잔, 브르타뉴 공작 부인 마리, 푸아시 수도원장 미셸, 부르고뉴 공작 부인 루이, 프랑스 왕세자 장, 프랑스 왕세자 카트린, 잉글랜드 왕비 샤를 7세, 프랑스 왕 마르그리트, 벨빌 여공 (사생아) |
기타 | |
![]() |
2. 초년
샤를 6세는 1368년 12월 3일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와 부르봉의 잔 사이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도팽 작위를 받은 최초의 프랑스 왕자였다. 메지에르의 필리프에게 교육을 받았고, 1380년 12살의 나이로 프랑스 국왕이 되었으나 왕으로서의 권한은 숙부인 앙주 공작 루이, 베리 공작 장,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외삼촌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등에게 할당되었다. 샤를 5세의 칙령으로 앙주 공작 루이가 섭정을 맡았고, 샤를 6세의 보호와 파리와 노르망디 관리는 부르고뉴 공작과 부르봉 공작이 맡았다. 베리 공작은 랑그도크와 기옌을 차지했다. 앙주 공작의 섭정은 오래가지 못했고, 샤를 5세의 영지를 갖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앙주 공작은 1382년 이탈리아 나폴리 공격에 일조하기 위해 떠났다.
샤를 6세는 1368년 12월 3일, 발루아 왕가의 샤를 5세 국왕과 부르봉의 조안나 사이에서 파리의 왕궁인 생폴 호텔에서 태어났다.Hôtel Saint-Pol|오텔 생폴프랑스어[1] 샤를은 프랑스 왕위 계승자였으며 프랑스의 도팽 칭호를 받았다.[1]
3. 즉위
샤를 6세는 1368년 12월 3일 파리의 왕궁인 생폴 관(Hôtel Saint-Pol)에서 샤를 5세와 부르봉의 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도팽 작위를 받았으며, 유아기에 이 작위를 얻은 최초의 프랑스 왕자가 되었다. 샤를 6세는 메지에르의 필리프에게 교육을 받았다.
1380년 9월 16일 아버지 샤를 5세가 사망하자, 샤를 6세는 11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1380년 11월 4일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6세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21]
3. 1. 섭정 정치
샤를 6세는 1380년 12살의 나이로 프랑스 국왕이 되었으나, 왕으로서의 권한은 숙부인 앙주 공작 루이, 베리 공작 장,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외삼촌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등에게 할당되었다. 샤를 5세의 칙령으로 앙주 공작 루이가 섭정을 맡았고, 샤를 6세의 보호와 파리와 노르망디 관리는 부르고뉴 공작과 부르봉 공작이 맡았다. 베리 공작은 랑그도크와 기옌을 차지했다. 앙주 공작은 1382년 나폴리 공격을 위해 떠났다.
샤를 5세 사망 당시 남부 프랑스에는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있었는데, 앙주 공작이 샤를 5세가 면제해 주었던 세금을 다시 거두려 하자 퓌와 몽필리에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파리, 루앙, 플랑드르, 아미앵, 오를레앙, 랭스 등에서도 반란이 발생하였다. 샤를 6세는 1382년 11월 27일 루스비크 전투에서 반란군 지도자 필립 반 아르테벨데를 격파하였다. 잉글랜드가 플랑드르 도시들에 원조를 보내자 샤를 6세는 잉글랜드 원정을 결정하였으나, 1385년 장 드 비엔의 스코틀랜드 상륙 실패와 슬루이스 함대 파괴로 출정이 지연되었다.
샤를 6세는 11세에 왕위를 계승했고, 21세에 섭정을 끝내고 친정을 시작했다. 왕족은 14세에 성인으로 여겨졌지만, 샤를 6세가 그 나이에 이른 후에도 섭정 통치가 1388년까지 이어졌다.[22] 샤를의 미성년기에 부르고뉴 공 필리프, 앙주 공 루이, 베리 공 장, 부르봉 공 루이가 섭정으로 프랑스를 지배했다.
앙주 공 루이는 1382년부터 나폴리 왕국 왕위 다툼에 참전하여 1384년에 사망했다. 베리 공 장은 랑그도크 지배에 전념했고,[23]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부르봉 공 루이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프랑스 국왕의 자식이 아니었기에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부르고뉴 공 필리프가 섭정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다.
샤를 6세는 1388년에 친정을 시작하여 섭정 통치를 끝냈다. 샤를은 아버지 샤를 5세의 유능한 고문단이었던 마르무제를 기용했다.[24] 마르무제의 보좌 아래, 샤를 6세의 통치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샤를은 "친애하는 왕"으로 불렸다.
3. 2. 친정과 플랑드르 원정
샤를 6세는 1368년 12월 3일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와 부르봉의 잔 사이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도팽의 작위를 받았으며, 유아기에 도팽 작위를 얻은 최초의 프랑스 왕자가 되었다. 메지에르의 필리프에게 교육을 받았고, 1380년 12살의 나이로 프랑스 국왕이 되었으나, 왕으로서의 권한은 숙부인 앙주 공작 루이, 베리 공작 장,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외삼촌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등에게 할당되었다. 샤를 5세의 칙령으로 앙주 공작 루이가 샤를 6세의 섭정을 맡았고, 샤를 6세의 보호와 파리, 노르망디 관리는 부르고뉴 공작과 부르봉 공작이 맡았다. 베리 공작은 랑그도크와 기옌을 차지했다. 앙주 공작의 섭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그는 샤를 5세의 영지를 가지는 것에서 만족해야 했다. 앙주 공작은 1382년 이탈리아 나폴리 공격을 돕기 위해 떠났다.
샤를 5세가 사망할 당시 남부 프랑스 지역에는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있었는데, 앙주 공작이 샤를 5세가 면제해 준 세금을 다시 거두려 하자 퓌와 몽필리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파리, 루앙, 플랑드르, 아미앵, 오를레앙, 랭스 등에서도 반란이 발생하였다. 샤를 6세는 플랑드르 백작을 돕기 위해 출정하여, 1382년 11월 27일 루스비크 전투에서 반란군 지도자 필립 반 아르테벨데를 격파하고 다음 해 1월 파리로 돌아왔다. 잉글랜드가 플랑드르 도시에 원조를 보내자 샤를 6세는 잉글랜드 원정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385년 장 드 비엔은 스코틀랜드에 원활하게 상륙하지 못했고, 원정을 위한 슬루이스 함대 역시 잉글랜드 군에 의해 파괴되어 출정이 지연되었다.
4. 정신병 발병과 경과
1385년 샤를 6세는 슈테판 3세의 딸 바이에른의 이자보와 결혼하였다. 1388년 투렌 공작 루이 도를레앙의 도움으로 샤를 6세는 삼촌들로부터 벗어나 친정에 나섰고, 샤를 5세의 신하들을 등용하였다. 1390년 베리 공작으로부터 랑그도크 지역을 몰수하기도 했다. 몇 년간 국정을 잘 이끌었으나, 1392년 브르타뉴로 가는 중 르망에서 정신병이 발병하여 국정을 직접 이끌기 어렵게 되었다. 샤를 6세의 정신병으로 샤를 5세의 신하들은 밀려나고, 왕족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왕을 대신하여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이에 반대하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드 발루아를 중심으로 두 파로 나뉘었다.
1396년 잉글랜드의 국왕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의 딸 발루아의 이자벨의 결혼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평화가 찾아오는 듯 보였다. 그러나 1399년 리처드 2세가 헨리 볼링브룩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면서 이 연합은 효력을 잃었다.
1398년 파리에서 열린 성직자 회의에서 프랑스 교회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계승한 베네딕토 13세를 인정하지 않았다. 베네딕트 13세는 오를레앙 공작의 지지를 받았지만, 부르고뉴 공작과 파리 대학교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1403년 베네딕토 13세는 권한을 되찾았지만, 1408년 샤를 6세가 스스로 프랑스 교회의 보호자로 선포하면서 프랑스 교회에 대한 권한을 잃었다.
샤를 6세의 비서 피에르 살몽은 샤를이 간헐적으로 정신병을 앓는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살몽은 샤를의 병을 치료하고 격동적인 정치 상황을 안정시키며 자신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훌륭한 군주에 대한 지침서인 「대화」 두 가지 버전을 아름다운 삽화와 함께 제작하도록 감독했다.[9]
1394년 9월 17일, 샤를 6세는 갑작스러운 칙령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저지른 과도한 행위와 비행으로 인한 많은 불만들을 주목해왔고, 검찰관들이 여러 차례 조사를 실시하여 유대인들이 왕과의 협약을 여러 차례 위반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왕은 취소할 수 없는 법률 및 조례로서, 자신의 영토 내에 어떤 유대인도 거주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생드니 수도원의 수도사 미셸 팡투앵에 따르면, 왕은 이사보의 압력으로 이 칙령에 서명했다고 한다.[14] 칙령은 즉시 시행되지 않았고, 유대인들에게 재산을 매각하고 빚을 갚을 유예 기간이 주어졌다. 유대인들에게 빚진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채무를 변제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담보로 잡고 있던 물건을 팔도록 했다. 수도대장은 유대인들을 왕국의 국경까지 호송해야 했고, 이후 왕은 기독교인들의 빚을 탕감했다.
4. 1. 발병 초기 증상
샤를 6세는 초기에는 마르무제트들을 측근으로 삼아 성공을 거두었으나, 20대 중반부터 정신병 발작을 겪기 시작하면서 그 성공은 곧 사라졌다. 그의 어머니인 장 드 부르봉을 통해 수 세대에 걸쳐 정신 질환이 유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5] 신하들에게는 여전히 "샤를 자애왕"으로 불렸지만, "미친 샤를"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샤를 6세의 첫 번째 발병은 1392년 그의 친구이자 조언자인 올리비에 드 클리송이 암살 시도를 당했을 때 발생했다. 클리송은 살아남았지만, 샤를은 브르타뉴 공국에 피신한 암살범 피에르 드 크라옹을 처벌하려 했다. 장 4세가 그를 넘겨주려 하지 않자, 샤를은 군사 원정을 준비했다.
당시 사람들은 샤를이 원정을 시작하기 위해 "열병"에 걸린 것처럼 보였고 말이 어눌했다고 전했다. 1392년 7월 1일, 샤를은 군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군대의 진군은 느렸고, 샤를은 조급해하며 광분했다. 8월 어느 더운 아침, 샤를과 그의 호위대가 르망 근처 숲을 지나가고 있을 때, 누더기를 걸친 맨발의 미치광이가 왕의 말로 달려들어 고삐를 잡고 "더 이상 가지 마십시오, 폐하! 돌아가십시오! 배신당했습니다!"라고 외쳤다. 왕의 호위병들은 그를 때려 물리쳤지만 체포하지는 않았고, 그는 30분 동안 행렬을 따라다니며 소리쳤다.[4]
정오에 일행이 숲에서 나오자, 태양에 졸았던 한 소년 시종이 왕의 창을 떨어뜨렸고, 그것은 다른 시종이 들고 있던 강철 투구에 크게 부딪혔다. 샤를은 몸을 떨며 칼을 뽑아들고 "반역자들을 향해 나아가라! 그들은 나를 적에게 넘기려 한다!"라고 외쳤다. 그러고는 칼을 뽑아들고 말에 박차를 가해 자신의 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궁내관과 병사들이 그를 말에서 끌어내 땅에 눕히기 전까지 그랬다. 그는 가만히 누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임시방편으로 그는 크레유 성으로 옮겨졌고, 좋은 공기와 쾌적한 환경이 그를 정신 차리게 해주기를 바랐다. 왕은 공격 중에 "폴리냐크의 서자"로 알려진 기사 한 명과 다른 여러 명을 죽였다.[27]
샤를 6세는 평생 동안 정신 질환을 반복했다. 1393년 발병 당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이 왕인지도 몰랐다. 아내가 찾아왔을 때 그는 하인들에게 그 여자가 누구인지 물었고 그를 내버려 두도록 도와달라고 명령했다.[5] 1395년~1396년 발병 당시 왕은 자신이 성 게오르기우스이고 자신의 문장은 칼이 꽂힌 사자라고 주장했다.[6] 이때 그는 가족의 모든 관리들을 알아보았지만, 아내나 자녀는 알아보지 못했다. 때때로 왕은 오텔 생폴의 복도를 격렬하게 뛰어다녔고, 그를 안에 가두기 위해 입구를 벽으로 막았다. 1405년에는 5개월 동안 목욕을 하거나 옷을 갈아입기를 거부했다.[7]
샤를 6세의 후기 정신병 발작은 그의 행동과 망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샤를 6세 재위 시대에 태어난 비오 2세는 그의 「회고록」에서 샤를이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고, 그래서 깨지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다고 적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접촉했을 때 산산이 부서지지 않도록 옷에 철 막대를 꿰매어 넣었다고 전해진다.[8] 이러한 증상은 유리 인격 장애로 알려지게 되었다.
4. 2. 경과 및 추가 증상
샤를 6세는 초기에는 마르무제트들을 측근으로 삼아 성공을 거두었으나, 20대 중반부터 정신병 발작을 겪기 시작하면서 그 성공은 곧 사라졌다. 그의 어머니인 부르봉의 조안나를 통해 수 세대에 걸쳐 정신 질환이 유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5] 신하들에게는 여전히 "샤를 자애왕"으로 불렸지만, "미친 샤를"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샤를의 첫 번째 발병은 1392년 그의 친구이자 조언자인 올리비에 드 클리송이 암살 시도를 당했을 때 발생했다. 클리송은 살아남았지만, 샤를은 브르타뉴 공국에 피신한 암살범 피에르 드 크라옹을 처벌하려 했다.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그를 넘겨주려 하지 않았고, 샤를은 군사 원정을 준비했다.
당시 사람들은 샤를이 원정을 시작하기 위해 "열병"에 걸린 것처럼 보였고 말이 어눌했다고 전했다. 그는 1392년 7월 1일에 군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군대의 진군은 느렸고, 샤를은 조급해하며 광분했다. 8월 어느 더운 아침, 샤를과 그의 호위대가 르망 근처 숲을 지나가고 있을 때, 누더기를 걸친 맨발의 문둥이가 왕의 말로 달려들어 고삐를 잡았다. "더 이상 가지 마십시오, 폐하! 돌아가십시오! 배신당했습니다!" 그는 소리쳤다. 왕의 호위병들은 그를 때려 물리쳤지만 체포하지는 않았고, 그는 30분 동안 행렬을 따라다니며 소리쳤다.[4]
정오에 일행이 숲에서 나오자, 태양에 졸았던 한 시종이 왕의 창을 떨어뜨렸고, 그것은 다른 시종이 들고 있던 강철 투구에 크게 부딪혔다. 샤를은 몸을 떨며 칼을 뽑아들고 "반역자들을 향해 나아가라! 그들은 나를 적에게 넘기려 한다!"라고 외쳤다. 그러고는 칼을 뽑아들고 말에 박차를 가해 자신의 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궁내관과 병사들이 그를 말에서 끌어내 땅에 눕히기 전까지 그랬다. 그는 가만히 누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임시방편으로 그는 크레유 성으로 옮겨졌다. 왕은 공격 중에 "폴리냐크의 서자"로 알려진 기사 한 명과 다른 여러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27]
정신 질환은 샤를의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1393년 한 발병 당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이 왕인지도 몰랐다. 아내 바이에른의 이자보가 찾아왔을 때 그는 하인들에게 그 여자가 누구인지 물었고 그를 내버려 두도록 도와달라고 명령했다.[5] 1395~96년 또 다른 발병 당시 왕은 자신이 성 게오르기우스이고 자신의 문장이 칼이 꽂힌 사자라고 주장했다.[6] 이때 그는 가족의 모든 관리들을 알아보았지만, 아내나 자녀는 알아보지 못했다. 때때로 왕은 오텔 생폴의 복도를 격렬하게 뛰어다녔고, 그를 안에 가두기 위해 입구를 벽으로 막았다. 1405년에는 5개월 동안 목욕을 하거나 옷을 갈아입기를 거부했다.[7]
샤를의 후기 정신병 발작은 그의 행동과 망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비오 2세는 샤를이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고, 그래서 깨지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다고 적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접촉했을 때 산산이 부서지지 않도록 옷에 철 막대를 꿰매어 넣었다고 전해진다.[8] 이러한 증상은 유리 망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393년 1월 28일, 왕비 이자보는 한 여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생폴 궁전에서 가면무도회를 열었다. 귀족 위그 드 기즈의 제안으로 샤를 6세는 다른 네 명의 귀족들[32]과 함께 "숲의 야만인"으로 변장하여 춤을 추게 되었다. 야만인 의상은 아마를 붙인 송진을 적신 리넨으로 만들어져 샤를을 비롯한 춤추는 사람들의 온몸이 털로 뒤덮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33]
춤추는 사람 중 한 명인 이방 드 푸아의 권유로, 왕은 미리 횃불을 든 사람들에게 "야만인의 춤"에 접근하지 말고 방 구석에 서 있도록 명령했지만, 늦게 도착한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 루이가 이를 어기고 횃불을 춤추는 사람 중 한 명에게 가까이 가져가 의상에 불을 붙여 버렸다. 불은 순식간에 번져 회장은 혼란에 빠졌지만, 베리 공작 부인 잔느 2세는 재빨리 자신의 가운 술을 샤를에게 덮어 불똥으로부터 왕을 보호했다.[34] 여러 기사들이 불을 끄려다가 심한 화상을 입었다. 야만인으로 변장한 사람들 중 에메리 드 푸아티에, 위그 드 기즈, 이방 드 푸아, 조와니 백작 등 네 명이 화상으로 사망했다. 낭튀유 백작의 아들 장은 물통에 뛰어들어 목숨을 건졌다.[35]
5. 권력 다툼
샤를 6세의 병세가 깊어지면서 궁정 내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장 1세와 오를레앙 공작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왕비 이자보는 부르고뉴파를 지지했으나, 왕과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오를레앙 공작과의 불륜설까지 제기되었다.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이 파리에서 암살당하면서 갈등은 극에 달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 샤를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와 연합하여 부르고뉴 공작에게 대항했고, 이들은 아르마냐크파로 불리게 되었다. 1411년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의 헨리 4세와 동맹을 맺었고, 1412년 아르마냐크파도 아키텐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았다.
1413년 부르고뉴파 시몽 카보슈의 소요로 샤를 6세는 행정 개혁 칙령을 발표했으나, 곧 철회하고 가담자들을 추방했다. 1414년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침공,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샤를 6세의 아들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퐁티외 공작 샤를이 상속자가 되었다.
1418년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함락하고, 헨리 5세는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1419년 장 1세가 샤를의 눈앞에서 살해당하자, 샤를은 필리프 3세, 이자보, 헨리 5세와 트루아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북부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넘어갔다.
5. 1.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의 대립
1404년 궁정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사망하자 권력을 두고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샤를 6세의 병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기 때문이다. 새롭게 공작이 된 장 1세는 오를레앙 공작의 세력 확장으로 그의 아버지의 권력을 그대로 계승받지 못하였다. 왕비 이자보는 원래 부르고뉴 공작파를 지지하였으나, 샤를 6세의 병이 깊어지자 사실상 왕과는 단절되어있는 상태였다. 이자보의 위치는 부르고뉴파의 오데트 드 샴디브르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자보는 오를레앙 공작과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 고발당했다.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의 다툼은 점점 커졌고, 결국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이 파리의 거리에서 살해당했다. 새롭게 오를레앙 공작이 된 샤를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베리, 부르봉, 브르고뉴 공작 등과 함께 부르고뉴 공작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아르마냐크 파로 불리었다. 1411년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4세와 동맹을 채결하였다. 그러나 1412년 아르마냐크 파 역시 아키텐을 잉글랜드에 넘겨줄 것을 약속하고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413년 4월 부르고뉴파인 시몽 카보슈가 군중들을 이끌고 도팽의 궁전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자 1413년 5월 27일 샤를 6세는 행정 개혁을 위한 칙령을 발표하였고 그 결과 왕의 고문 중 일부가 권한을 잃었다. 그러나 이 소요가 계속되자 오를레앙 공작은 사태를 진압할 명분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샤를 6세는 칙령을 다시 거두어들이고 가담자들을 추방하였다.
141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부르고뉴파와 연합을 계속할 것을 결정하고 다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헨리 5세는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샤를 6세의 아들인 기옌 공작 루이가 사망하였고 1417년 다른 아들인 투렌 공작 장이 사망함에 따라 퐁티외 공작 샤를이 그의 상속자가 되었다. 파리는 아르마냐크 백작에 의해서 통치받고 있었고 왕비 이자보는 투르에 갇혀 있다가 부르고뉴로 탈출하였다. 1418년 5월 29일 부르고뉴파에 의해서 파리가 함락당하였고 장 2세와 왕비 이자보가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동안 헨리 5세는 노르망디 정벌을 완료하였다.
1419년 장 1세가 도팽 샤를의 눈앞에서 아르마냐크 파에 의해서 살해당하였다. 샤를은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필리프 3세, 왕비 이사보, 그리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 함께 트루아 조약에 서명하였다. 그 결과 헨리 5세는 샤를 대신 프랑스의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북부 프랑스가 잉글랜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5. 2. 내전과 잉글랜드의 개입
1404년 궁중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사망하자 권력을 두고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공작이 된 장 1세는 오를레앙 공작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아버지의 권력을 그대로 계승받지 못하였다. 왕비 이자보는 원래 부르고뉴 공작파를 지지하였으나, 샤를 6세의 병이 깊어지자 사실상 왕과는 단절되어 있었다. 이자보는 오를레앙 공작과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당했다.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의 다툼은 점점 커졌고, 결국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이 파리의 거리에서 살해당했다. 새롭게 오를레앙 공작이 된 샤를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베리, 부르봉, 브르고뉴 공작 등과 함께 부르고뉴 공작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아르마냐크파로 불리었다. 1411년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4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1412년 아르마냐크파 역시 아키텐을 잉글랜드에 넘겨줄 것을 약속하고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았다.
1413년 4월 부르고뉴파인 시몽 카보슈가 군중들을 이끌고 도팽의 궁전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자, 1413년 5월 27일 샤를 6세는 행정 개혁을 위한 칙령을 발표하였고 그 결과 왕의 고문 중 일부가 권한을 잃었다. 그러나 이 소요가 계속되자 오를레앙 공작은 사태를 진압할 명분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샤를 6세는 칙령을 다시 거두어들이고 가담자들을 추방하였다.
141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부르고뉴파와 연합을 계속할 것을 결정하고 다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헨리 5세는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같은 해 샤를 6세의 아들인 기옌 공작 루이가 사망하였고, 1417년 다른 아들인 투렌 공작 장이 사망함에 따라 퐁티외 공작 샤를이 상속자가 되었다. 파리는 아르마냐크 백작에 의해 통치받고 있었고, 왕비 이자보는 투르에 갇혀 있다가 부르고뉴로 탈출하였다. 1418년 5월 29일 부르고뉴파에 의해 파리가 함락당하였고, 장 2세와 왕비 이자보가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동안 헨리 5세는 노르망디 정벌을 완료하였다.
1419년 장 1세가 도팽 샤를의 눈앞에서 아르마냐크파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샤를은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필리프 3세, 왕비 이자보, 그리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 함께 트루아 조약에 서명하였다. 그 결과 헨리 5세는 샤를 대신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북부 프랑스가 잉글랜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6. 잉글랜드와의 관계 및 트루아 조약
1419년 장 1세가 도팽 샤를의 눈앞에서 아르마냐크 파에 의해 살해당했다.[16] 이후 샤를 6세는 필리프 3세, 왕비 이자보, 헨리 5세와 함께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후계자가 되었고, 북부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넘어갔다.
샤를 6세는 상리스에서 머물다 1422년 9월 파리로 돌아왔고, 같은 해 10월 21일 사망하였다.[17]
6. 1. 프랑스의 혼란과 잉글랜드의 침공
1404년 궁중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사망하자 권력을 두고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공작이 된 장 1세는 오를레앙 공작의 세력 확장으로 그의 아버지의 권력을 그대로 계승받지 못하였다. 왕비 이자보는 원래 부르고뉴 공작파를 지지하였으나, 샤를 6세의 병이 깊어지자 사실상 왕과는 단절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자보는 오를레앙 공작과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 고발당했다.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의 다툼은 점점 커졌고, 결국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이 파리의 거리에서 살해당했다. 새롭게 오를레앙 공작이 된 샤를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베리, 부르봉, 부르고뉴 공작 등과 함께 부르고뉴 공작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아르마냐크 파로 불리었다. 1411년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4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1412년 아르마냐크 파 역시 아키텐을 잉글랜드에 넘겨줄 것을 약속하고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413년 4월 부르고뉴파인 시몽 카보슈가 군중들을 이끌고 도팽의 궁전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자 1413년 5월 27일 샤를 6세는 행정 개혁을 위한 칙령을 발표하였고 그 결과 왕의 고문 중 일부가 권한을 잃었다. 그러나 이 소요가 계속되자 오를레앙 공작은 사태를 진압할 명분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샤를 6세는 칙령을 다시 거두어들이고 가담자들을 추방하였다.
141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부르고뉴파와 연합을 계속할 것을 결정하고 다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헨리 5세는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16] 같은 해 샤를 6세의 아들인 기옌 공작 루이가 사망하였고 1417년 다른 아들인 투렌 공작 장이 사망함에 따라 퐁티외 공작 샤를이 그의 상속자가 되었다. 파리는 아르마냐크 백작에 의해서 통치받고 있었고 왕비 이자보는 투르에 갇혀 있다가 부르고뉴로 탈출하였다. 1418년 5월 29일 부르고뉴파에 의해서 파리가 함락당하였고 장 2세와 왕비 이자보가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동안 헨리 5세는 노르망디의 정벌을 완료하였다.
1419년 장 1세가 도팽 샤를의 눈앞에서 아르마냐크 파에 의해서 살해당하였다. 샤를은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필리프 3세, 왕비 이자보, 그리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 함께 트루아 조약에 서명하였다.[16] 그 결과 헨리 5세는 샤를 대신 프랑스의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북부 프랑스가 잉글랜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6. 2. 트루아 조약 체결
1419년 장 1세가 도팽 샤를의 눈앞에서 아르마냐크 파에 의해서 살해당했다.[16] 샤를은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필리프 3세, 왕비 이사보, 그리고 헨리 5세와 함께 트루아 조약에 서명하였다. 그 결과 헨리 5세는 샤를 대신 프랑스의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북부 프랑스가 잉글랜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16]7. 죽음
샤를 6세는 1422년 10월 21일 파리의 오텔 생폴(Hôtel Saint-Pol)에서 사망했다.[17] 그는 생드니 바실리크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내 이사보(Isabeau)는 1435년 9월 사망 후 그곳에 합장되었다.
트루아 조약에 따라 샤를 6세가 사망하면서 헨리 6세는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은 1418년부터 잉글랜드가 점령했던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1431년 12월 26일에 거행되었다.
샤를 6세에 의해 상속권에서 배제된 아들인 도팽 샤를은 자신의 왕국을 되찾기 위한 싸움을 계속했다. 1429년, 잔 다르크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승리했고, 1429년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로 즉위했다. 그는 "승리의 샤를"로 알려지게 되었고, 1450년 잉글랜드를 물리쳐 프랑스 왕위에 프랑스 왕가를 복위시켰다.[18]
8. 결혼과 자녀
샤를 6세는 1385년 7월 17일 이자보와 결혼하였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샤를 (도팽) | 1386년 9월 25일 | 1386년 12월 28일 | 요절. 첫째 도팽. |
잔느 | 1388년 6월 14일 | 1390년 | 요절. |
이사벨라 | 1389년 11월 9일 | 1409년 9월 13일 | 1396년 리처드 2세와 결혼. 자녀 없음.[19] 1406년 샤를와 재혼. 자녀 있음. |
잔느 | 1391년 1월 24일 | 1433년 9월 27일 | 1396년 장 5세와 결혼. 자녀 있음. |
샤를 (도팽) | 1392년 2월 6일 | 1401년 1월 13일 | 요절. 둘째 도팽. 출생 후 마르그리트와 약혼. |
마리 | 1393년 8월 22일 | 1438년 8월 19일 | 미혼 – 수녀원장이 됨. 자녀 없음. 흑사병으로 사망. |
미셸 | 1395년 1월 11일 | 1422년 7월 8일 | 1409년 필리프 2세와 결혼.[20] 생존한 자녀 없음. |
루이 (도팽) | 1397년 1월 22일 | 1415년 12월 18일 | 마르그리트와 결혼. 자녀 없음. 셋째 도팽. |
장 (도팽) | 1398년 8월 31일 | 1417년 4월 5일 | 1415년 에노 백작 자클린과 결혼. 자녀 없음. 넷째 도팽. |
카트린 | 1401년 10월 27일 | 1437년 1월 3일 | 1420년 헨리 5세와 결혼. 자녀 있음. 오언 튜더와 재혼. 자녀 있음. |
샤를 7세 | 1403년 2월 22일 | 1461년 7월 21일 | 다섯째 도팽이었던 그는 아버지 사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됨. 1422년 앙주 백작부인 마리와 결혼. 자녀 있음. |
필립 | 1407년 11월 10일 | 1407년 11월 | 요절. |
샤를 6세는 정부 오뎃 드 샹디베르를 두었다. 그 사이에서 딸 마르그리트(1458년경 사망)를 두었다.
9. 샤를 6세의 타로
1392년,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샤를 6세를 위로하기 위해 "샤를 6세의 타로"(Tarot de Charles VI)라 불리는 카드덱이 제작되었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회계 장부에는 1392년 화가 자크망 그랭고뇌르(Jacquemin Gringonneur)에게 "금색과 다양한 색으로 그려진 56장의 놀이 카드" 3개 덱 제작 비용으로 6枚의 페르시아 동전을 지불했다는 기록이 있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된 타로 카드가 "샤를 6세의 타로"로 여겨지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타로 카드로 간주되었으나, 현재는 이 타로 카드가 1469년에서 1471년경 에스테 가의 보르소 데스테(Borso d'Este) 공작을 위해 제작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36]
참조
[1]
서적
Saint-Denis et la royauté: études offertes à Bernard Guenée
https://books.google[...]
Publications de la Sorbonne
1999
[2]
간행물
Vaughan
[3]
간행물
Vaughn
[4]
서적
A History of Franc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Fall of the Second Empire in 1870
John Murray
1884
[5]
서적
Royal Intrigue: Crisis at the Court of Charles VI, 1392–1420
New York
1986
[6]
서적
Royal Intrigue: Crisis at the Court of Charles VI, 1392–1420
New York
1986
[7]
서적
Royal Intrigue: Crisis at the Court of Charles VI, 1392–1420
New York
1986
[8]
서적
I Commentarii
Milano
1984
[9]
웹사이트
Pierre Salmon's Dialogues – Wikicommons
https://commons.wiki[...]
[10]
서적
Froissart's Chronicles
1855
[11]
서적
A Distant Mirror
Alfred A Knopf
1978
[12]
서적
Froissart's Chronicles
1855
[13]
서적
Froissart's Chronicles
1855
[14]
서적
Chronique de Religieux de Saint-Denys, contenant le regne de Charles VI de 1380 a 1422
[15]
웹사이트
23 novembre 1407: Assassinat dans la rue Vieille du Temple
http://www.herodote.[...]
2006-12-11
[16]
서적
Royal Intrigue: Crisis at the Court of Charles VI, 1392–1420
New York
1986
[17]
서적
Medieval France: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18]
서적
Chronique de Charles VII, Roi de France
Paris
1858
[19]
서적
The Plantagenets: History of a Dynasty
Continuum
2010
[20]
서적
Cursed Kings: The Hundred Years War IV
Faber and Faber Ltd.
2015
[21]
서적
The Hundred Years War: Divided House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9
[22]
서적
The Hundred Years War: Divided Houses
[23]
간행물
Vaughan
[24]
간행물
Vaughn
[25]
서적
The Politics of Madness: Government in the Reigns of Charles VI and Henry V
http://eprints.utas.[...]
[26]
서적
A History of Franc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Fall of the Second Empire in 1870
John Murray
1884
[27]
서적
The History of Franc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Year 1789
P.F. Collier & son
1902
[28]
서적
Royal Intrigue: Crisis at the Court of Charles VI, 1392–1420
New York
1986
[29]
서적
Royal Intrigue: Crisis at the Court of Charles VI, 1392–1420
New York
1986
[30]
서적
Royal Intrigue: Crisis at the Court of Charles VI, 1392–1420
New York
1986
[31]
서적
I Commentarii
Milano
1984
[32]
서적
Froissart's Chronicles
1855
[33]
서적
A Distant Mirror
Alfred A Knopf Ltd.
1978
[34]
서적
Froissart's Chronicles
1855
[35]
서적
Froissart's Chronicles
1855
[36]
웹사이트
シャルル6世のタロット一覧
http://expositions.b[...]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