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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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은 1715년 베르사이유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귀족이자 군인이다. 7년 전쟁 중 로스바흐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이후 군 경력을 이어갔다. 그는 처세술에 능하여 군인으로서 출세했으며,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지지를 받았다. 파리 조약 이후에는 궁정 생활을 했으며, 동족인 로앙 추기경이 목걸이 사건에 연루되어 대신직에서 물러났다. 요리에 사용되는 수비즈 소스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178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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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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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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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샤를 드 로앙 |
칭호 | 로앙-로앙 공작 방타두르 공작 제4대 수비즈 공작 에피노이 공작 루베 후작 생폴 백작 |
출생일 | 1715년 7월 16일 |
출생지 |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왕국 |
사망일 | 1787년 7월 1일 |
사망지 | 수비즈 저택, 파리, 프랑스 왕국 |
소속 가문 | 로앙 가문 |
아버지 | 쥘, 수비즈 공작 |
어머니 | 안 줄리 드 믈룅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안 마리 루이즈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734년 결혼, 1739년 사망) 안 테레즈 드 사부아 공주 (1741년 결혼, 1745년 사망) 헤센-로텐부르크 방백부인 빅토리아 (1745년 결혼) |
자녀 | 샤를로트, 콩데 공비 빅투아르 드 로앙, 게메네 공비 |
군사 경력 | |
소속 | 프랑스 왕국 |
군종 | 프랑스 왕립 육군 |
복무 기간 | 1732년–1762년 |
최종 계급 | 프랑스 원수 |
주요 참전 | 7년 전쟁 |
주요 전투 | 로스바흐 전투 존더스하우젠 전투 뤼첼부르크 전투 |
관직 | |
관직명 | 플랑드르 및 에노 총독 |
임기 시작 | 1751년 9월 26일 |
임기 종료 | 1787년 7월 1일 |
이전 | 샤를 조제프 마리 드 부플레르 |
군주 | 루이 16세 |
계승자 | 샤를 외젠 가브리엘 드 라 크루아 |
2. 생애
샤를 드 로앙은 1715년 7월 16일 베르사이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비즈 공 쥘 프랑수아 루이 드 로앙(왕립경호대의 헌병대 대령)이었고, 어머니는 안 쥘리 아델라이드 드 멜룅이었다. 1724년 양친이 모두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누이인 마르상 부인(어릴 적 루이 16세 등 형제의 교육을 담당)과 함께 고아가 되었다. 그는 조부 에르퀼 메리아덱 드 로앙에게 맡겨졌고, 같은 해 루이 15세의 놀이동무로서 궁정에서 생활했다.
그는 루이 15세를 수행하여 1744년부터 1748년까지 원정에 참가했다. 그는 군사적 재능보다는 처세술에 능했기에 군인으로서 빠른 출세를 할 수 있었다. 7년 전쟁이 발발하자, 왕의 애첩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영향력을 통해 그는 24,000명의 병력을 이끌었으나, 1757년 11월 로스바흐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다.
하노버 침공 (1757) 이후 프랑스의 운명이 극적으로 반전되었으나, 그는 이후의 군 경력에서 더 운이 좋았고, 1763년 파리 조약때까지 군사업무를 계속했다. 그 후 보통의 궁정인, 또는 파리의 유행을 이끄는 인물로서 살아갔다.
"수비즈"는 요리에 사용되는 쌀과 양파 퓨레로 만든 소스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이 이 소스를 칭찬하며 명명한 것에서 유래한다. 수비즈 소스.
그에게는 두명의 딸이 있었다.
- 샤를로트 엘리자베트 고드프리드 드 로앙(Charlotte Élisabeth Godefride de Rohan) 1737-1760, 콩데 공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과 결혼.
- 빅트와르 아르망드 조제페(Victoire Armande Josèphe) 1743-1807, 같은가문의 게메네 공(Prince de Guéménée) 앙리 루이 마리에 드 로앙과 결혼.
유명한 목걸이 사건에 동족인 로앙 추기경이 연루된 것으로 인해, 대신직을 사임하고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1787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샤를 드 로앙은 1715년 7월 16일 베르사이유에서 수비즈 공 쥘 프랑수아 루이 드 로앙(왕립경호대의 헌병대 대령)과 안 쥘리 아델라이드 드 멜룅의 아들로 태어났다.[1] 1724년 양친이 모두 천연두로 사망하여, 누이 마르상 부인(어릴적 루이 16세등 형제의 교육계였다)과 함께 고아가 되었다.[1] 그는 조부 에르퀼 메리아덱 드 로앙에게 맡겨졌고, 같은해 루이 15세의 놀이동무로서 궁정에서 생활했다.[1]그는 루이 15세를 수행하여 1744년부터 1748년까지 원정에 참가했다.[1] 그는 군사적 재능보다는 처세술에 능했기에 군인으로서 빠른 출세를 할 수 있었다.[1] 7년 전쟁이 발발하자, 왕의 애첩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영향력을 통해 그는 24,000명의 병력을 이끌었으나, 1757년 11월 로스바흐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다.[1]
하노버 침공 (1757) 이후 프랑스의 운명이 극적으로 반전되었으나, 그는 이후의 군 경력에서 더 운이 좋았고, 1763년 파리 조약때까지 군사업무를 계속했다.[1] 그 후 보통의 궁정인, 또는 파리의 유행을 이끄는 인물로서 살아갔다.[1]
"수비즈"는 요리의 음식과 함께 등장하는 쌀과 양파 퓨레로 만든 소스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이 이 소스를 칭찬하며 명명한 것에서 유래한다.
2. 2. 군 경력
샤를 드 로앙은 1715년 베르사이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쥘 프랑수아 루이 드 로앙은 왕립경호대의 헌병대 대령이었다.[1] 1724년 양친이 모두 천연두로 사망하여 마르상 부인과 함께 고아가 되었고, 조부 에르퀼 메리아데크에게 맡겨져 루이 15세의 놀이동무로서 궁정에서 생활했다.[1]그는 루이 15세를 수행하여 1744년부터 1748년까지 원정에 참가했으며, 군사적 재능보다는 처세술로 빠른 출세를 했다.[1] 7년 전쟁 발발 후,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영향으로 24,000명의 병력을 이끌었으나, 1757년 11월 로스바흐 전투에서 대패했다.[1] 이는 하노버 침공 (1757) 이후 하노버 선제후국 유지 실패와 더불어 프랑스의 운명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사건이었다.
이후 군 경력에서 그는 더 운이 좋았고, 1763년 파리 조약때까지 군사업무를 계속했다.[1]
2. 3. 결혼과 자녀
샤를 드 로앙은 세 번 결혼했다. 1734년, 엠마뉘엘 테오도즈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딸이자 마리 안 망치니의 손녀인 안 마리 루이즈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722–1739)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는 1739년 아들을 낳다가 사망했는데, 이 아들은 1742년에 죽었다. 이들 사이에는 딸 샤를로트 엘리자베트 고데프리드 드 로앙(1737–1760)이 있었는데, 방돔 공작이자 루이 14세와 몽테스판 부인의 후손인 콩데 공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과 결혼했다. 샤를로트는 살해된 앙기앵 공작 루이 앙투안의 아버지 쪽 할머니였다.1741년, 샤를은 카리냐노 공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와 사보이아의 마리아 비토리아 프란체스카 (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사생아 딸)의 딸인 사보이 공주 안나 테레사(1717–1745)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들 사이에는 빅투아르 아르망드 조제프 드 로앙(1743–1807)이 태어났으며, 그녀는 사촌인 앙리 루이 마리 드 로앙, 귀메네 공자와 결혼했다. 빅투아르는 훗날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사보이 공주 안나 테레사가 1745년에 사망한 후, 샤를은 같은 해에 헤센-로텐부르크의 안나 빅토리아(1728–1792)와 세 번째 결혼을 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샤를은 마들렌 기마르 및 안 빅투아르 데르비외와도 관계를 가졌다. 그는 로앙 가문 분파의 마지막 남자였으며, 1804년에 처형된 앙기앵 공작루이 앙투안은 그의 증손자였다.
2. 4. 말년
샤를 드 로앙은 1763년 파리 조약 체결 이후 군에서 물러나 궁정 생활과 파리의 유행을 따르는 삶을 살았다.[1] 그는 군인으로서 7년 전쟁에 참전하여 로스바흐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군무를 계속 수행했다.[1] 말년에는 목걸이 사건에 친족인 로앙 추기경이 연루되면서 대신직을 사임하고 은퇴해야 했다. 1787년, 샤를은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유산
수비즈 소스는 양파와 베샤멜 소스를 기본으로 하며,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4. 가계도
1.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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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쥘 드 로앙, 수비즈 공작 |
3. 안 쥘리 드 멜룅 |
4. 에르퀼 메리아데크 드 로앙, 로앙-로앙 공작 |
5. 안 즈느비에브 드 레비 |
6. 루이 드 멜룅, 에피노이 공 |
7. 엘리자베트 테레즈 드 로렌 |
8. 프랑수아 드 로앙, 수비즈 공 |
9. 안 드 로앙-샤보, 수비즈 공작 부인 |
10. 루이 샤를 드 레비, 벙두르 공작 |
11. 샤를로트 드 라 모트 우당쿠르 |
12. 알렉상드르 기욤 드 멜룅, 에피노이 공 |
13. 잔 펠라지 드 로앙-샤보 |
14. 프랑수아 마리 드 로렌, 릴본 공 |
15. 안 드 로렌 |
참조
[1]
서적
Soubise, Benjamin de Rohan, Duc de
[2]
웹사이트
DERVIEUX Anne Victoire (1752-1829)
https://web.archive.[...]
2011-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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