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테오도르 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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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테오도르 밀로는 1884년 2월부터 9월까지 프랑스의 통킹 원정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원정대를 두 개의 여단으로 조직하여 박닌 전투와 흥화 점령, 타이응우옌과 뚜옌꽝 점령을 위한 원정을 지휘했다. 박닌 전투에서 승리하고 흥화를 점령하는 등 성공적인 지휘를 보였지만, 부하들로부터 지나치게 소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건강 악화와 프랑스 정부의 박러 매복 사건을 전쟁의 구실로 삼으려는 것에 실망하여 1884년 9월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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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테오도르 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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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샤를 테오도르 밀로 |
원어 이름 | Charles-Théodore Millo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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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29년 6월 28일 |
출생지 | 몽티니쉬르오브 |
사망일 | 1889년 5월 17일 |
사망지 | 앙굴렘 |
별명 | 또이또이 (멈춰!) |
경력 | |
소속 | 프랑스 육군 |
복무 기간 | 1847년-1884년 |
계급 | 사단장 |
참전 | 통킹 원정군 (1884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통킹 원정 |
2. 통킹 원정대 사령관
1884년 초, 프랑스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상당한 규모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통킹 원정대의 규모는 1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새로운 사령관인 사단장 샤를 테오도르 밀로는 이 병력을 두 개의 여단으로 편성했다. 제1여단은 세네갈 총독으로 명성을 얻은 여단장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이 지휘했고, 제2여단은 최근 알제리에서 아랍 반란을 진압한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가 지휘했다.
2. 1. 밀로의 주요 군사 작전
1884년 2월부터 9월까지 8개월 동안 밀로는 원정군을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은 주요 작전을 수행했다.- 박닌 전투 (1884년 3월): 쉬옌쉬(Xu Yanxu)가 이끄는 광서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 흥화 점령 (1884년 4월): 류융푸(유영복)가 이끄는 부대를 큰 피해 없이 격퇴했다.
- 타이응우옌과 뚜옌꽝 점령 (1884년 5월과 6월)
- 박레 매복 (1884년 6월): 프랑스군이 청나라군에게 매복 공격을 당한 사건이다. 밀로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에서 무사히 벗어났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청나라와의 전쟁 명분으로 이용했다.[1]
밀로는 원정군 사령관 중 가장 성공적인 인물 중 하나였지만,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아 부하들로부터 인기가 없었다. 특히 박닌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군을 추격하려던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의 추격을 중단시킨 결정은 군사적으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더욱 악화시켰다.[1]
2. 2. 밀로에 대한 평가
밀로는 원정군 사령관 중 가장 성공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지만,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박닌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군에 대한 추격을 중단시킨 결정은 타당한 군사적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들 사이에서 불만을 샀다.[1] 부대원들은 밀로를 '또이또이'(멈춰!)라는 베트남어 별명으로 불렀다. 참고로, 부대원들은 존경받는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에게는 '마오렌'(Maolen, 빨리!),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에게는 '만만'(Mann Mann, 천천히!)이라는 별명을 붙였다.[1]2. 3. 밀로의 사임
밀로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프랑스 정부가 박레 매복 사건을 청나라와의 전쟁 구실로 삼는 것에 실망하여 1884년 9월 사임했다. 그는 마지막 통지문에서 자신을 '병들고 실망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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