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27년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난 프랑스 군인이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서 복무했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 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다. 1876년부터 1881년까지 세네갈 총독을 역임하며 프랑스의 세네갈 정복을 강화했고, 니제르 강 중류 지역으로의 확장을 추진했다. 1884년 통킹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청불 전쟁과 랑선 원정을 지휘했으나, 랑선 철수와 관련된 '랑선 전보'로 인해 정치적, 군사적 명성에 타격을 입었다. 이후 해군 보병 참모감찰관을 지냈으며, 1896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청불 전쟁 참전 군인 - 조제프 조프르
    조제프 조프르는 프랑스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초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서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는 데 기여했으며, 에콜 폴리테크니크 졸업 후 공병 장교로 식민지에서 경력을 쌓고 프랑스 육군 최고 사령관까지 역임하며 플랑 17을 도입했다.
  • 프랑스의 청불 전쟁 참전 군인 - 자크 뒤센
    자크 뒤센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청불전쟁, 그리고 제2차 프랑코-호바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한 프랑스 군인이다.
  • 통킹 원정 관련자 - 쥘 페리
    쥘 페리는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에 교육 개혁과 식민지 확장을 추진했으며, 교육부 장관과 총리를 역임하고 쥘 페리 법을 통과시켰다.
  • 통킹 원정 관련자 - 당경숭
    청나라 관료 당경숭은 진사 급제 후 청불 전쟁에 공을 세웠으나,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대만 민주국을 세우고 초대 총통이 되었지만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배하여 망명하였다.
  • 프랑스의 장군 - 샤를 드골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장군이자 정치가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유 프랑스 운동을 이끌고 전후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프랑스 해방과 재건에 기여했으나, 독단적인 성격과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 프랑스의 장군 - 아당 필리프 드 퀴스틴 백작
    아당 필리프 드 퀴스틴 백작은 프랑스의 귀족 장군이자 정치인으로,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에서 활약하고 프랑스 혁명 기간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하는 등 활약했으나, 반역죄로 기소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며, 그의 군사적 재능과 인간적인 면모, 허영심과 독선적인 태도, 혁명 정부와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니더빌러 파이앙스 공장 투자는 그의 삶의 특징을 보여준다.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 레지옹 도뇌르 훈장 패용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 레지옹 도뇌르 훈장 패용
출생일1827년 6월 24일
사망일1896년 6월 19일
출생지마르티니크
사망지프랑스 생루–타베르니
별칭해당사항 없음
군사 경력
소속프랑스
군종해병대
복무 기간1847년–1893년
계급사단장
지휘제1 해병 보병 연대
통킹 원정군
참전 전투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청불 전쟁
훈장육군 훈령 (1861년)
레지옹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
기타 활동
이후 활동세네갈 총독

2. 어린 시절과 군 경력 초기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27년 6월 4일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나 1847년 생시르를 졸업하고 해병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852년 중위, 1856년 대위로 진급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 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다. 1861년 2월 사이공 근처 끼호아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육군 명령'으로 표창을 받았다.[1]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대령으로 진급하여 바제유 전투에서 제1해병 보병 연대를 지휘했으며,[2] 세당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2. 1. 출생과 가문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27년 6월 4일 카리브해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 1847년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해병대 소위가 되었으며,[1] 1852년에는 중위, 1856년에는 대위로 승진했다.

2. 2. 생시르 사관학교 졸업 및 초기 군 복무

1847년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1852년 중위, 1856년 대위로 진급했다.[1]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 전쟁에서 '해병 연대 부관'(adjudant major du régiment de marine, 1859–1860)으로 복무했으며, 1861년 2월 사이공 바로 서쪽에서 벌어진 끼호아 전투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 명령'(ordre de l'armée)으로 표창을 받았다.[1]

2. 3. 인도차이나 식민 전쟁 참전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 전쟁에 참전하여 '해병 연대 부관'(adjudant major du régiment de marine, 1859–1860)으로 복무했다. 1861년부터 1866년까지 코친차이나에 주둔하면서, 1861년 2월 사이공 서쪽에서 벌어진 끼호아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육군 명령'(ordre de l'armée)으로 표창을 받았다.[1]

1862년에는 '사단장'(Chef d'escadron)으로 진급했고, 1863년에는 떠이닌에서 '원주민 업무 감사관'(inspecteur des affaires indigènes)으로 임명되었다.

3. 세네갈 총독 시절 (1876-1881)

브리에르 드 리즐의 재임 기간이 끝날 무렵인 1881년의 세네감비아. 분홍색 지역은 프랑스 제국에 병합되었으며, 주변 영토의 대부분은 프랑스 "보호령"이다.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76년부터 1881년까지 세네갈 총독을 역임하면서 프랑스의 세네갈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루이 페데르브 총독(1854-1865) 시절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을 추진한 인물이다.

칸야-포스트너는 브리에르 드 리즐을 "권위주의적인 통치자"라고 평가했는데,[3] 이는 그의 통치 방식이 프랑스 상업 이익에 반하고 식민지를 군사 독재 체제로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브리에르 드 리즐은 세네갈 식민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수입 직물에 대한 세금을 인상했는데, 이는 생루이다카르 지역 상인들의 반발을 샀지만 프랑스 대규모 상업 회사들은 만족했다.

군사적으로 브리에르 드 리즐은 왈로프 제국의 봉기와 내륙 국가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해군 장관은 새로운 영토 병합을 금지했지만, 그는 보호령 확장과 군사 통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확장은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공식화될 서아프리카 프랑스 영토 정복의 시작이었으며, "아프리카 분할"을 촉발했다.[4]

3. 1. 세네갈 총독 임명 배경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76년부터 1881년까지 세네갈 총독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의 세네갈 정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

칸야-포스트너는 브리에르 드 리즐을 "권위주의적인 통치자로, 프랑스 상업 이익을 화나게 하고 식민지를 준 군사 독재로 만들었다"라고 묘사했다.[3] 당시 세네갈 식민지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는데, 브리에르 드 리즐은 다른 국가에서 수입되는 직물에 대한 세금을 인상했다. 이는 생루이다카르 지역 상인들의 반발을 샀지만, 대규모 프랑스 상업 회사들을 달래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한편, 세네갈 식민지는 세네갈 해안 중심부를 이루는 왈로프 제국의 봉기와 내륙 국가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해군 장관은 브리에르 드 리즐에게 새로운 영토를 병합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루이 페데르브 (1854–1865) 총독 시절 이후 최대 규모의 보호령 확장과 군사적 통제를 강행했다.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공식화될 서아프리카 프랑스 영토 정복을 주도하며, 이른바 "아프리카 분할"을 시작했다.[4]

3. 2. 프랑스의 세네갈 정복 강화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76년부터 1881년까지 세네갈 총독을 역임하면서 프랑스의 세네갈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칸야-포스트너는 브리에르 드 리즐을 "권위주의적인 통치자로, 프랑스 상업 이익을 화나게 하고 식민지를 준 군사 독재로 만들었다"라고 묘사했다.[3] 브리에르 드 리즐은 식민지의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국가에서 수입되는 직물에 대한 세금을 인상했다. 이는 생루이와 다카르의 지역 이익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대규모 프랑스 상업 회사들을 달래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다.

당시 세네갈 식민지는 세네갈 해안 중심부를 이루는 왈로프 제국에서의 봉기와 내륙의 강력한 국가들로 인해 군사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해군 장관은 브리에르 드 리즐에게 새로운 영토를 병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루이 페데르브 총독 시절(1854–1865) 이후 전례 없던 보호령과 직접적인 군사 통제를 통해 확장을 시작했다.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공식화될 서아프리카 프랑스 영토의 정복을 감독하여 이른바 "아프리카 분할"을 시작했다.[4]

3. 3. 니제르 강 중류 지역으로의 확장

1873년 4월, 브리에르 드 리즐은 폴 솔레이예를 세구(현재 말리 중부)로 보내 통치자 아마두 탈과 협상을 시작하게 했고, 이를 통해 프랑스는 중부 니제르 강 계곡으로의 확장을 시작했다.[5] 1880년 3월, 그는 다시 사절단을 세구로 보냈는데, 이번에는 미래의 총독 조제프 갈리에니가 이끌면서 정기적인 무역 관계를 구축했다.[5] 그 과정에서 갈리에니는 바풀라베에 프랑스 요새를 건설했다. 솔레이예는 보고서를 통해 다카르-니제르 철도 건설을 옹호했는데, 이 철도는 세구에서 세네갈과 중부 니제르를 연결하는 노선이었다. 브리에르 드 리즐은 곧 설득되었고, 1879년 2월 임명된 새로운 해군 장관 (식민지 관료들이 보고하는) 장 베르나르 조레기베리 제독에게서 동맹을 찾았다.[6] 조레기베리는 충분한 정부 자금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고, 갈리에니가 바풀라베로 가는 도로를 건설하는 데 실패하면서 정부의 결의가 흔들렸지만, 직접적인 영토 지배를 동쪽으로 확장하는 과정은 시작되었다. 샤를 드 프레시네 공공사업부 장관은 제안된 철도를 지지했고, 1880년 조레기베리는 철도 건설의 모든 작업은 해군 부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6]

브리에르 드 리즐은 프랑스의 중부 니제르 강 계곡 지배 확장에 전념했지만, 그의 전임자들과 달리 1870년대 후반의 프랑스 정부는 영토의 직접적인 정복을 더 기꺼이 승인(또는 수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루이에 기반을 둔 상인들은 이 시기에 여전히 후방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꺼렸고, 자체적인 무역 네트워크와 일련의 프랑스 군사 무역 기지를 통해 활동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런 면에서 브리에르 드 리즐은 프랑스 식민주의의 다음 단계를 대표했다.[7]

브리에르 드 리즐은 조제프 갈리에니, 루이 아르샤나르가 니제르 중부 지역 정복을 이끌게 되었지만, 먼저 진격을 시작하여 1880년 2월 27일 "상부 세네갈" (Haut-Sénégal) 군사 지역을 창설하는 것을 감독했다. 이는 브리에르 드 리즐이 정부의 제약을 무시하면서 무술 문화를 조성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장의 장교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을 만들었다.[12] 군 사령관에게 독자적으로 (불법적으로라도) 행동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제공하면서, 이 지역은 동쪽으로 정복을 통해 빠르게 확장되었고, 1890년에 프랑스령 수단으로 개명되었다.

3. 4. 세네갈 내륙 지역 안정화



전쟁 이후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76년부터 1881년까지 세네갈 총독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의 세네갈 정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

1876년과 1877년, 브리에르 드 리즐은 프랑스에 위협이 될 수 있었던 마지막 남은 월로프 지도자 라 디오르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막고, 세네갈 북서부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8] 1879년 라 디오르와 그의 카요르 왕국이 다시 봉기했을 때, 프랑스는 그들을 최종적으로 진압했다. 이를 통해 브리에르 드 리즐 정부는 루이 페데르브의 대규모 프로젝트였던 다카르-생루이 철도 건설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 철도는 세네갈 중부의 비옥한 땅콩 재배 지역을 관통하며, 프랑스 상인 항구를 통해 운송, 안보, 풍부한 수출 작물에 대한 접근을 제공했다.[9]

1877년 10월, 브리에르 드 리즐은 세네갈 강을 따라 북쪽의 푸타 잘론 고원에 있는 압둘 부바카르의 국가를 목표로 동쪽과 남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파리로부터의 직접적인 명령을 무시하고, 그는 부바카르를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파견하여 토로, 라오, 이르라베 지방에 대한 프랑스 보호령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3. 5. 프랑스령 기니 지역 확장

프랑스 해군 장관은 브리에르 드 리즐 총독에게 새로운 영토를 병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는 이를 무시하고 1879년 리비에르 뒤 쉬드에서 일련의 공세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벤티 근처의 지역을 점령하고 카쿠틀레이와 마타콩 섬을 점령했다. 이는 푸타잘론 확장을 거쳐 1882년 '리비에르 뒤 쉬드' 식민지 공식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4]

3. 6. 투쿨레르 제국과의 갈등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76년부터 1881년까지 세네갈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프랑스의 세네갈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투쿨레르 제국을 정복하고 프랑스 식민지를 확장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4]

1878년, 브리에르 드 리즐은 세네갈 강 북쪽 기슭에 위치한 카르타 (투쿨레르 제국의 속국)에 프랑스군을 파견했다. 프랑스 식민부 장관은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브리에르 드 리즐은 카르타가 푸타 토로 (당시 프랑스 보호령)의 세네갈 왕국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며 군사 행동을 강행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1878년 7월 7일 사부시레의 토코로 요새를 파괴하고 지도자 알마니 니아모디를 살해했다. 이후 카르타의 이 지역은 카소의 월로프 보호령 왕국에 통합되었다.[10]

이는 프랑스의 투쿨레르 제국 정복의 시작이었다. 1857년 메디나 요새 포위전 이후 프랑스는 투쿨레르 제국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지만, 브리에르 드 리즐은 이를 기회로 삼아 세네갈에서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적 확장은 파리의 정치적 상황 변화로 인해 브리에르 드 리즐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1881년 조르주 샤를 클루에 제독이 해군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니제르 강까지의 철도 노선 확장은 민간 이익에 의해 추진되어야 하며 해군의 참여는 우선순위가 낮다는 경고를 받았다. 클루에는 브리에르 드 리즐에게 키타 동쪽으로의 군사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브리에르 드 리즐은 이에 반발하여 군사적 후계자인 귀스타브 보르니 데스보르데 중령에게 징벌 원정을 니제르로 보내 바마코를 점령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81년 3월 11일에 소환되었고, 세네갈은 첫 번째 민간 총독인 마리 오귀스트 드빌 드 페리에르를 맞이했다.[11]

3. 7. 세네갈 총독직 해임과 그 배경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76년부터 1881년까지 세네갈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프랑스의 세네갈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3] 칸야-포스트너는 그를 "권위주의적인 통치자로, 프랑스 상업 이익을 화나게 하고 식민지를 준 군사 독재로 만들었다"라고 묘사했다.[3]

브리에르 드 리즐은 식민지의 심각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국가에서 수입되는 직물에 대한 세금을 인상했다. 이는 생루이다카르의 지역 이익을 소외시키는 대신 대규모 프랑스 상업 회사들을 달래는 데 기여했다. 당시 세네갈 식민지는 왈로프 제국에서의 봉기와 내륙의 강력한 국가들로 인해 군사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해군 장관은 브리에르 드 리즐에게 새로운 영토를 병합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루이 페데르브 (1854–1865) 총독 시절 이후 전례 없는 보호령과 직접적인 군사 통제를 통해 확장을 추진했다. 이러한 확장은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공식화될 서아프리카 프랑스 영토 정복의 시작이었으며, 소위 "아프리카 분할"을 촉발했다.[4]

4. 통킹 원정 (1884-1885)

랑선 원정 직전의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과 참모진.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가슴에 손을 얹고 있음)과 폴-구스타브 에르빙거 중령(두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있음)이 앞줄에 있다.


브리에르 드 리즐은 통킹 원정(1884-1885)과 청불 전쟁(1884-1885)에서 통킹 원정군 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박닌 원정, 훙호아 전투, 껩 원정, 랑선 원정, 투옌꽝 포위전, 호아목 전투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1885년 3월 말, 방보 전투에서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가 패배한 후, 에르빙거 중령의 명령으로 랑선 철수가 이루어졌다. 브리에르 드 리즐은 에르빙거의 과장된 전보를 받고 프랑스 정부에 비관적인 전보('랑선 전보')를 보냈고, 이는 쥘 페리 정부를 무너뜨리는 등 프랑스 정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통킹 사건 참조).[15]

이후 1885년 5월 통킹 원정군 규모가 확장되자 앙리 루셀 드 쿠르시 장군에게 통킹 원정군 사령관 자리를 넘겨주고 제1 사단장으로 복무했으나, 드 쿠르시의 전략과 콜레라 대처에 반대하여 1885년 10월 통킹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16]

4. 1. 통킹 원정군 지휘관 임명

1881년 준장으로 진급한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84년 2월 프랑스의 통킹(현재의 베트남 북부) 원정 중 통킹 원정군 제1 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884년 3월, 중선 고지에서 중국군을 몰아냈고, 박닌 원정에서 광서군 우익을 격파했다. 박닌에서의 공로로 4월 레지옹 도뇌르 훈장(Legion of Honor)의 그랑 오피시에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브리에르 드 리즐은 제1 여단을 이끌고 훙호아 방어선을 우회했고,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의 제2 여단은 정면을 공격하여 류영복이 병력이 고립되기 전에 흑기군을 철수하도록 했다. 브리에르 드 리즐의 훙호아 측면 행군은 프랑스가 통킹에서 가장 요새화된 흑기군의 거점을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점령할 수 있게 했다.[13]

1884년 9월, 청불 전쟁(1884년 8월~1885년 4월) 발발 직후, 샤를-테오도르 밀로 장군을 대신하여 통킹 원정군 사령관이 되었다. 1884년 10월에는 껩 원정에서 통킹 삼각주에 대한 중국의 대규모 침략을 격퇴했다. 1885년 1월에는 사단장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2월, 랑선 원정에서 통킹 원정군의 양 여단을 지휘하여 중국의 광서군을 격파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 도시인 랑선을 점령했다. 수개월 간의 끈기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이 원정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이었을 것이다. 랑선 점령 직후, 투옌꽝 포위전을 구원하기 위해 로랑 지오바니넬리 중령의 제1 여단과 함께 하노이로 돌아갔고,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의 제2 여단은 랑선에 남겨두었다. 호아목 전투에서 류영복의 흑기군을 격파한 후(1885년 3월 2일), 브리에르 드 리즐은 3월 3일 승리의 기세로 포위된 프랑스 전초 기지에 입성했다. 이러한 전장의 성공은 프랑스와 중국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동시 외교적 시도의 실패를 강조했고, 프랑스 총리 쥘 페리로부터 "중국이 존경할 유일한 협상자는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인 것 같다"는 진심 어린 찬사를 받았다.[14]

4. 2. 박닌 원정과 훙호아 전투

1881년 준장으로 진급한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84년 2월 프랑스의 통킹(현재 베트남 북부) 원정 중 통킹 원정군 제1 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884년 3월, 중선 고지에서 중국군을 몰아냈고, 박닌 원정에서 광서군 우익을 격파했다. 박닌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4월 레지옹 도뇌르 훈장(Legion of Honor)의 그랑 오피시에로 임명되었다.[13]

1884년 4월, 브리에르 드 리즐은 제1 여단을 이끌고 훙호아 방어선을 우회했고,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의 제2 여단은 정면을 공격하여 류영복이 병력이 고립되기 전에 흑기군을 철수하도록 했다. 브리에르 드 리즐의 훙호아 측면 행군은 프랑스가 통킹에서 가장 요새화된 흑기군의 거점을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점령할 수 있게 했다.[13]

4. 3. 청불 전쟁과 랑선 원정

1881년 준장으로 진급한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84년 2월 프랑스의 통킹(현재 베트남 북부) 원정 중 통킹 원정군 제1 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884년 3월, 박닌 원정에서 광서군 우익을 격파하는 등의 공을 세워 4월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그랑 오피시에로 임명되었다.[13]

1884년 9월, 청불 전쟁 발발 직후, 샤를-테오도르 밀로 장군을 대신하여 통킹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1884년 10월에는 껩 원정을 이끌었고, 1885년 1월에는 사단장으로 진급했다. 1885년 2월에는 랑선 원정에서 통킹 원정군의 양 여단을 지휘하여 랑선을 점령했다. 이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14] 랑선 점령 직후, 투옌꽝 포위전을 구원하기 위해 제1 여단과 함께 하노이로 돌아갔고,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의 제2 여단은 랑선에 남겨두었다. 호아목 전투에서 흑기군을 격파한 후(1885년 3월 2일), 3월 3일 포위된 프랑스 전초 기지에 입성했다.

그러나 1885년 3월 말, 방보 전투에서 네그리에 장군이 패배한 후, 제2 여단의 임시 사령관 폴 구스타브 에르빙거 중령의 명령에 따라 랑선 철수가 이루어졌다. 당시 하노이에 있던 브리에르 드 리즐은 에르빙거의 과장된 전보 내용에 오해하여 프랑스 정부에 통킹 원정군이 즉시 증원되지 않으면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보를 보냈다. 이 전보는 '랑선 전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쥘 페리 정부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통킹 사건 참조).[15]

4. 4. 투옌꽝 포위전 구원

1885년 2월, 랑선 원정에서 랑선을 점령한 직후, 브리에르 드 리즐은 투옌꽝 포위전을 구원하기 위해 로랑 지오바니넬리 중령의 제1 여단과 함께 하노이로 돌아갔다.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의 제2 여단은 랑선에 남겨두었다. 호아목 전투에서 류영복의 흑기군을 격파한 후(1885년 3월 2일), 브리에르 드 리즐은 3월 3일 승리의 기세로 포위된 프랑스 전초 기지에 입성했다.[14] 이러한 전장의 성공은 프랑스와 중국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외교적 시도가 실패했음을 보여주었고, 프랑스 총리 쥘 페리는 "중국이 존경할 유일한 협상자는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인 것 같다"라며 찬사를 보냈다.[14]

4. 5. 랑선 철수 논란과 그 영향

1885년 3월 말, 브리에르 드 리즐은 랑선 철수라는 논란의 결정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랑선 원정(1885년 2월)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방보 전투(1885년 3월 24일)에서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이 패배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제2여단 임시 사령관 폴 구스타브 에르빙거 중령의 명령으로 철수가 결정되었다.[15]

당시 브리에르 드 리즐은 하노이에 있었고, 투옌꽝 주변의 운남군에 대한 공세를 지휘하기 위해 본부를 훙호아로 옮길 계획이었다. 에르빙거가 랑선에서 보낸 과장된 전보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지만, 브리에르 드 리즐은 이를 검토할 시간도 없이 3월 28일 저녁 프랑스 정부에 통킹 원정군이 즉시 증원되지 않으면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보를 보냈다.[15]

'랑선 전보'라고 불린 이 전보는 1885년 3월 30일 쥘 페리 정부를 무너뜨리고 페리의 정치 경력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프랑스 식민지 확장에 대한 국내 지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으며(통킹 사건 참조), 브리에르 드 리즐의 군사적 명성에도 오점을 남겼다.[15] 그는 퇴임 전에 더 많은 승진을 했지만, 랑선을 점령하고 투옌꽝을 구원한 프랑스 사령관이 아니라, 쥘 페리 행정부를 무너뜨린 전보를 보낸 사람으로 기억될 것을 알고 있었다.[15]

4. 6. 통킹 원정 이후의 행보

1884년 9월, 청불 전쟁 발발 직후(1884년 8월~1885년 4월), 브리에르 드 리즐은 샤를-테오도르 밀로 장군을 대신하여 통킹 원정군 사령관이 되었다. 1884년 10월에는 껩 원정에서 통킹 삼각주에 대한 중국의 대규모 침략을 격퇴했고, 1885년 1월에는 사단장(''général de division'')으로 진급했다. 1885년 2월에는 랑선 원정에서 통킹 원정군의 양 여단을 지휘하여 중국 광서군을 격파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 도시인 랑선을 점령했다. 수개월 간의 끈기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이 원정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이었을 것이다.[14]

랑선 점령 직후, 투옌꽝 포위전을 구원하기 위해 로랑 지오바니넬리 중령의 제1 여단과 함께 하노이로 돌아갔고,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의 제2 여단은 랑선에 남겨두었다. 호아목 전투에서 류영복의 흑기군을 격파한 후(1885년 3월 2일), 3월 3일 승리의 기세로 포위된 프랑스 전초 기지에 입성했다. 이러한 전장의 성공은 프랑스와 중국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외교적 시도의 실패를 강조했고, 프랑스 총리 쥘 페리는 "중국이 존경할 유일한 협상자는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인 것 같다"는 찬사를 보냈다.[14]

하지만 브리에르 드 리즐의 군사적 업적은 1885년 3월 말, 논란이 된 랑선 철수로 인해 훼손되었다. 2월 랑선 원정의 성과를 잃게 한 이 철수는 제2 여단의 임시 사령관 폴 구스타브 에르빙거 중령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방보 전투에서 네그리에 장군이 패배한 지(1885년 3월 24일)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발생했다. 당시 브리에르 드 리즐은 하노이에 있었고, 투옌꽝 주변 운남군에 대한 공세를 지휘하기 위해 본부를 훙호아로 옮길 계획이었다. 에르빙거의 과장된 전보를 검토할 시간도 없이, 브리에르 드 리즐은 3월 28일 저녁 프랑스 정부에 통킹 원정군이 즉시 증원되지 않으면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비관적인 전보를 보냈다. 이 전보는 '랑선 전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1885년 3월 30일 쥘 페리 정부를 무너뜨리고 페리의 정치 경력을 망쳤으며, 프랑스 식민지 확장에 대한 국내 지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통킹 사건 참조).[15]

1885년 5월, 통킹 원정군이 2개 사단 규모로 확장되면서 브리에르 드 리즐은 앙리 루셀 드 쿠르시 장군에게 통킹 원정군 사령관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확장된 원정군의 제1 사단장 자리를 제안받았고,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이 제2 사단장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육군성은 이 요청을 승인했고, 브리에르 드 리즐은 드 쿠르시의 지휘 아래 몇 달 동안 복무했다. 드 쿠르시는 오만하고 경험이 적은 부하들의 조언을 무시하는 지휘관이었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브리에르 드 리즐은 통킹에서의 드 쿠르시의 소극적인 평정 전략과 1885년 8월 콜레라 발병에 대처하기 위한 효과적인 검역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에 반대했다. 1885년 10월, 안남과 통킹이 프랑스 통치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통킹 원정군이 콜레라로 인해 궤멸되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결정하고 통킹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16]

5. 말년과 사망

브리에르 드 리즐은 1888년부터 1891년까지 해군 보병 참모감찰관을, 1892년부터 1893년까지는 감찰관을 역임했다. 그는 1896년 6월 19일 프랑스 생 르–타베르니, 센에트와즈(현재의 발두아즈주)에서 사망했다.

6. 유산과 평가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은 프랑스 식민지 확장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현지 주민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현대에는 그의 행적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균형 있게 평가해야 한다.

6. 1. 기념물 및 지명


  • 프랑스 남부의 주요 해군 기지인 툴롱에는 '브리에르 드 리즐 거리'(Rue Brière de l'Isle)가 있다.
  • 다카르 시내에도 '브리에르 드 리즐 거리'가 남아있지만, 세네갈 생루이의 '브리에르 드 리즐 거리'는 '압둘라예 세크 거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 독립 이전, '브리에르 드 리즐 대로'(Avenue Brière de l'Isle)는 베트남 하노이 중심부에 있는 식민지 총독 관저 옆을 지나갔다.
  • 지부티에 있는 해외 군사 연합 제5연대 병영은 '브리에르 드 리즐 병영'(Quartier Brière de l'Isle)으로 명명되었다.
  • 식민지 인도차이나 하노이에 있는 주요 프랑스 기지는 '브리에르 드 리즐 요새'(fort Brière-de-l'Isle)로 불렸다. 1945년 3월 9일, 일본군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프랑스-베트남 식민지 군대로부터 이 요새를 빼앗았다.[17]

참조

[1] 간행물 1861 French Conquest of Saigon: Battle of the Ky Hoa Forts http://www.historyne[...] Vietnam Magazine 2006-06
[2] 서적 Francis & allemands: histoire anecdotique de la guerre de 1870-1871 https://books.google[...] Garnier frères 1888
[3] 문서
[4] 문서
[5] 문서 1981
[6] 문서
[7] 문서 1998
[8] 문서 1990
[9] 문서 1981
[10] 문서 1969
[11] 문서 1969
[12] 문서 1998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웹사이트 servicehistorique.sga.defense.gouv.fr, archive of Colonial police forces of Indochina. http://www.servicehi[...] 2007-06-2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