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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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량은 400년, 북량의 진창 태수 당요가 이고를 추대하며 건국된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의 국가이다. 이고는 농경과 양잠을 장려하고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켰으며, 유교를 진흥하여 한족 문화를 보호하려 노력했다. 이고 사후, 그의 아들 이흠이 무능함으로 인해 북량에 멸망당했으나, 이흠의 동생 이순에 의해 잠시 부활했지만 이내 멸망했다. 서량 멸망 후 이고의 후손들은 당나라에서 그 후손임을 주장했으며, 당나라 시인 이백과 이상은 또한 이고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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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량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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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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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원어 명칭 | 涼 |
일반적인 명칭 | 서량 |
존속 기간 | 400년 ~ 421년 |
수도 | 둔황 (400년–405년, 420년–421년) 주취안 (405년–420년)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통치자 칭호 | 양공 |
주요 인물 | 이고 (초대 군주) 이흠 (2대 군주) 이순 (3대 군주) |
군주 | 이고 (400년–417년) 이흠 (417년–420년) 이순 (420년–421년) |
역사 | |
주요 사건 | 건국 (400년 11월) 주취안 함락 (420년) 멸망 (북량에 의해, 421년 3월) |
선행 국가 | 북량 |
후행 국가 | 북량 |
언어 및 종교 | |
공용어 | 중국어 |
종교 | 불교 도교 |
경제 | |
통화 | 알 수 없음 |
기타 | |
현재 국가 |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
2. 역사
397년 후량에서 북량이 자립한 후, 400년 북량의 진창(감숙성 주천시 일부 지역) 태수 당요(唐瑤)가 한족 호족의 지지를 받던 이고를 대장군·양공 등으로 추대하면서 서량이 건국되었다.
이고는 북량의 저거몽손의 침공을 막아내는 한편, 농경과 양잠, 서역과의 교역을 장려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 또한 학교를 세우고 유교를 진흥시키는 등 한족 문화 보호에 힘썼다.
417년 이고가 병사하고 아들 이흠이 뒤를 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와 달리 능력이 부족하고 신하들에게 가혹하게 대해 인망을 얻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20년 7월, 이흠은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북량 원정에 나섰다가 저거몽손에게 크게 패하고 사로잡혀 처형당했으며, 이로 인해 서량은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흠의 동생인 이순이 돈황으로 도망쳐 양주 자사를 자칭하며 서량 부활을 시도했으나, 421년 저거몽손이 이끄는 북량군에 의해 돈황이 함락되면서 서량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2. 1. 건국 배경
397년, 후량의 건강(감숙성 주천시 일부 지역) 태수 단업이 저거몽손의 도움을 받아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북량을 건국했다. 398년 단업이 돈황을 장악하자, 후량의 돈황 태수였던 맹민(孟敏)을 사주(감숙성 돈황시 일대) 자사로 삼아 그대로 주둔시키는 한편, 한족 호족 사이에서 지지가 두터웠던 이고를 효곡(감숙성 주천시 과주현 남서쪽) 현령으로 임명했다. 얼마 후 맹민이 병사하자, 한족 호족들은 이고를 돈황 태수로 추대하였고 단업 역시 이를 승인했다.400년 11월, 북량의 진창(감숙성 주천시 일부 지역) 태수 당요(唐瑤)가 단업에게 반기를 들고 이고를 대장군·양공·진·량2주목(秦凉二州牧), 호강교위(護羌校尉)로 추대하면서 서량이 건국되었다. 이고는 경자를 연호로 삼았다.
서량의 창시자 이고는 롱시 이씨 출신으로, 노자, 이신, 이광 등의 후손임을 내세운 명망 있는 한족 가문이었다. 그의 가문은 서진과 전량 시기에 하서 회랑 지역의 관리로 활동한 이력이 있어, 현지 한족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는 데 유리했다. 건국 후 이고는 북량의 저거몽손의 침공을 막아내는 한편, 농경과 양잠을 장려하고 서역과의 교역을 활성화하여 국가의 안정을 꾀했다. 또한 학교를 설립하고 유교를 진흥시키는 등 한족 문화의 보존과 발전에 힘썼다.
2. 2. 이고의 치세 (400년-417년)
397년, 후량의 건강(감숙성 주천시 일부) 태수 단업이 자립하여 북량을 건국했다. 398년, 단업은 돈황을 장악하고, 돈황 태수 맹민(孟敏)을 사주(감숙성 돈황시 일대) 자사로 임명하는 동시에, 한인 호족의 지지가 두터운 이고를 효곡(감숙성 주천시 과주현 남서쪽) 현령으로 삼았다. 얼마 후 맹민이 병사하자, 한인 호족들은 이고를 돈황 태수로 추대했다.400년, 북량의 진창(감숙성 주천시 일부) 태수 당요(唐瑤)가 모반하여 이고를 대장군·양공·진·량2주목(秦凉二州牧), 호강교위(護羌校尉)로 추대하면서 서량이 건국되었다. 이고는 이를 수락하고 대사면령을 선포했으며, 자신의 영토 내에서 연호를 개원했다. 역사가들은 당시 다른 경쟁 양(涼)나라들과 구별하기 위해 그의 국가를 서량(西涼)이라고 지칭한다. 서량은 현지 한족 지주 가문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옥문군 서쪽의 모든 도시가 그에게 복속되었다.
401년 9월에는 북량 영토였던 주천과 양녕군(현재의 옥문시, 간쑤성 북서쪽)이 서량에 귀속되어 주천군 서쪽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고는 북량의 저거몽손의 침공을 막는 한편 농경, 양잠 및 서역과의 교역을 장려하여 서량을 안정된 국가로 성장시켰다. 또한 한족 사회의 전통에 충실하여 학교를 짓고 유교를 진흥시켜, 한족 문화의 보호에 노력하였다.
405년에는 스스로 대장군·대도독·진량 이주 목을 자칭했다. 또한 동쪽으로의 세력 확대를 목표로 한 이고는 서쪽의 위협이 적다는 점을 이용하여, 같은 해 9월에 수도를 주천으로 옮겼고, 406년 9월에는 남량과 연합하여 북량과 대립했다. 외교적으로는 형식상 후진에 복속하고 북위에 조공을 보냈다. 이전의 전량과 마찬가지로 이고는 자신을 남쪽의 동진에 속한 제후로 여기고 사신을 보내 그들에게 칭호를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두 국가 사이의 거리 때문에, 서량을 정식으로 제후국으로 인정한 것은 유송을 건국하는 유유가 두 번째 북벌을 단행했을 때였다. 서량은 또한 유목 민족인 유연과 토욕혼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이고는 이처럼 내치와 외교, 군사적인 노력을 통해 서량을 안정적으로 발전시켰으나, 41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 3. 쇠퇴와 멸망 (417년-421년)
412년, 북량이 남량으로부터 빼앗은 고장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남량의 세력이 약화되자 서량은 북량의 직접적인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더불어 유연과 토욕혼의 공격까지 겹치면서 서량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417년 2월에 이고가 병사하자, 그의 아들인 이흠이 뒤를 이었다. 이흠은 418년 10월에 동진으로부터 도독칠군제군사(都督七郡諸軍事),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주천공(酒泉公) 등의 지위를 받기도 했으나, 아버지 이고와는 달리 능력이 부족하고 성격이 가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불필요하게 형벌을 무겁게 하고 신하들에게 냉혹하게 대하는 일이 잦아 인망을 잃었다. 또한, 건설 사업에 몰두하여 국가 재정을 낭비하기도 했다.
이고가 사망하자 이를 기회로 본 북량은 417년 4월부터 서량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서량도 한때 장액까지 진격하기도 했으나, 420년 7월, 이흠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량 원정에 나섰다. 이는 북량의 통치자 저거몽손이 서쪽 국경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키는 등 서량을 유인하려는 책략에 넘어간 결과였다. 결국 이흠은 북량군에게 크게 패배하여 사로잡혔고 처형당했으며, 서량의 수도 주천마저 함락되어 서량은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420년 10월, 이흠의 동생이자 이고의 다섯째 아들인 관군후(冠軍侯) 이순은 돈황으로 도망쳐 관군장군(冠軍將軍) 및 양주 자사를 자칭하며 서량 부활을 시도하고 항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421년 3월, 북량의 저거몽손이 이끄는 군대가 돈황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이순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로써 서량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2. 4. 멸망 이후
서량은 421년에 멸망했지만, 이고의 후손들은 살아남아 명맥을 이었다. 특히, 당나라 황실인 이씨(李氏)는 자신들이 이고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이신의 아들인 이중이(李重耳)가 유송으로 망명했다가 이후 북위로 귀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나라에서는 이고를 추존하여 흥성황제(興聖皇帝)로 칭했으며, 당나라에서 편찬된 『진서』에서는 휘를 피하기 위해 이고의 자인 현성(玄盛)을 사용하여 '이현성(李玄盛)'으로 기록했다.이고의 또 다른 손자인 이보(이번의 아들)는 북량에 포로로 잡혔으나, 삼촌 당계(唐契)와 함께 이우현으로 탈출하여 유연에 복속했다. 이후 444년에 북위에 귀순하여 복무했으며, 그의 아들인 이충은 북위에서 율령 제정과 예제(禮制) 완성에 큰 역할을 하는 등 저명한 대신이 되었다.
또한, 『신당서』에 따르면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이백은 이고의 9대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상은 역시 이고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서량 이씨는 북위의 특별한 배려와 보호 속에서 가문을 이어갔다고도 한다.
3. 역대 군주
사당명 | 시호 | 개인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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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 무조 | 이고 | 400년–417년 | 경자(庚子) 400년–405년 건초(建初) 406년–417년 |
– | – | 이신 | 417년–420년 | 가흥(嘉興) 417년–420년 |
– | – | 이순 | 420년–421년 | 영건(永建) 420년–421년 |
- 역대 군주는 모두 량공(涼公)을 칭했다.
4. 국가 체제
서량은 이고(李暠)가 400년 현지 한족(漢族) 지주 가문들의 추대를 받아 건국한 국가이다.[1] 건국 초기부터 남쪽의 동진을 정통으로 여기고 스스로 제후국임을 표방하며 관계 수립을 시도했으며,[1] 중원의 한족 문화를 바탕으로 한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1]
내부적으로는 농업 장려와 서역과의 교역 등을 통해 경제 안정을 꾀하고, 유교 교육을 장려하여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다.[1] 대외적으로는 북량, 남량 등 주변 국가들과 경쟁 및 협력 관계를 맺는 한편,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에도 맞서야 했다.[1] 서량은 인접한 다른 양(涼)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했으나, 건국자 이고는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 다방면으로 힘썼다.[1]
4. 1. 외교
서량은 건국 초기부터 주변 국가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건국 직후 옥문군(玉門郡) 서쪽의 도시들이 서량에 복속했으며, 401년에는 북량의 영토였던 주천(酒泉)과 양녕군(隴西郡, 현재 옥문시, 간쑤성 북서쪽)까지 귀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북량을 견제하기 위해 405년에는 수도를 동쪽의 주천(酒泉)으로 옮기고, 남량과 동맹을 맺었다. 406년에는 남량과 연합하여 북량과 직접적으로 대립했다. 또한, 후진에는 형식적으로 복속하는 한편, 북위에는 조공을 보내는 등 강대국과의 관계 유지에도 힘썼다.
경제적으로는 서역과의 무역을 장려하여 국가의 안정을 꾀했다.
서량은 이전의 전량과 마찬가지로 한족 왕조인 남쪽의 동진을 정통으로 여기고 스스로 제후국임을 표방했다. 405년과 407년 두 차례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을 요청했으나, 두 국가 사이의 지리적 거리와 여러 세력의 존재로 인해 즉각적인 관계 수립은 어려웠다. 서량이 동진으로부터 정식 제후국으로 인정받은 것은 서량 말기, 유송의 유유가 북벌을 통해 화북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 이후였다.
이외에도 북방의 유목 민족인 유연과 토욕혼(吐谷渾)의 침입에 맞서 국가를 방어해야 했다.
4. 2. 정치
400년, 금창(金昌)의 행정관 당요(唐瑤)가 반란을 일으켜 이고(李暠)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그에게 양공(涼公) 칭호를 제안했다. 이고는 이를 받아들이고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자신의 영토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이 나라를 당시 다른 양(涼)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서량(西涼)이라고 부른다.이고가 세운 서량은 현지 한족(漢族) 지주 가문들의 지지를 받았다. 건국 초기 옥문군(玉門郡) 서쪽의 모든 도시가 이고에게 복속했으며, 401년에는 주천(酒泉)과 양녕군(隴西郡, 현재 옥문시, 간쑤성 북서쪽)도 북량(北涼)으로부터 서량에 귀순했다. 이고는 북량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기 위해 405년 수도를 동쪽의 주천으로 옮겼고, 남량과 동맹을 맺었다. 또한 형식적으로는 후진(後秦)에 복속하고 북위(北魏)에도 조공을 보냈다.
서량은 양주(涼州)와 진주(秦州) 지역을 장악하려 했으나, 북량이나 남량과 비교하면 인구가 적고 군사력과 경제력도 열세인 소국이었다. 그럼에도 이고는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대규모 둔전과 개간 사업, 수리 시설 정비를 추진했으며, 양잠업을 장려하고 서역(西域)과의 교역을 활발히 하여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다. 또한 새로운 학교를 세워 유교 교육을 장려하고,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관리 등용에는 한대(漢代)의 선거 제도를 활용하여, 량주 지역에서 중원의 한족 문화를 바탕으로 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힘썼다.
대외적으로 이고는 자신을 남쪽 동진의 제후로 여겨 사신을 보내 관계를 맺으려 했다. 비록 두 나라 사이의 거리 때문에 즉각적인 인정은 어려웠으나, 훗날 유유(劉裕)가 북벌을 단행했을 때 동진으로부터 정식 제후국으로 인정받았다. 한편, 서량은 북방의 유목 민족인 유연과 서쪽의 토욕혼(吐谷渾)의 위협에도 맞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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