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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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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성(동오)은 삼국 시대 동오의 장군으로, 뛰어난 용맹과 손권에 대한 충성심으로 명성을 얻었다. 산둥성 쥐현 출신으로, 강동으로 이주하여 손권에게 등용되어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황사, 조조, 유비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특히 조비의 침공을 가짜 성책으로 막아내며 위나라를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말년에는 안동장군과 무호후에 봉해졌으며, 황무 연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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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 (동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서성
본관서주낭야군거현
문향 (文嚮, Munhyang)
작위오호후 (蕪湖侯, Ohohu)
관직안동장군 (安東將軍, Andong Janggun), 여강태수 (廬江太守, Yeogang Taesu)
섬긴 군주손권
사망 년도224년-229년 (추정)
출생 년도알 수 없음
경력
주요 경력무호령 (蕪湖令, Muho Ryeong)
시상장 (柴桑長, Sisang Jang)
교위 (校尉, Gyowi)
중랑장 (中郎將, Jungnang Jang)
건무장군 (建武將軍, Geonmu Janggun)
가족 관계
자녀서개 (徐蓋, Seo Gae)

2. 생애

후한 말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한 서성은 손권에게 등용되어 별부사마가 되었다. 이후 시상장, 교위, 무호령을 역임하고, 산월을 토벌하여 중랑장에 임명되는 등 초기 군사 활동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조조, 유비, 조비와의 전쟁에서 활약하며 손권의 신임을 얻었다.

2. 1. 초기 활동

후한 말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한 서성은 손권(孫權)에게 등용되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된 후 병사 5백 명을 받았다. 시상장(柴桑長)으로서 황역(黃射)이 이끄는 수천 군사의 공격을 물리쳤다.[2] 이후 손권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교위(校尉), 무호령(蕪湖令)으로 임명했다. 또 임성 남쪽의 산월을 친 공로로 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3]

한번은 황조의 아들 황사가 수천 명을 이끌고 장강을 내려와 공격해 왔지만, 서성은 200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이 침공을 막아 황사를 철저하게 격파했다. 이로 인해 황사는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3]

2. 2. 조조와의 전쟁

213년 1월, 조조가 유수구에 쳐들어왔을 때, 서성은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적군을 향해 돌격하여 손권의 칭찬을 받았다.[4] 손권합비를 공격했을 때, 장료가 기습을 가하자 서성의 부대는 궤멸되었으나, 반장이 도주하는 병사 둘을 처형하자 서성은 남은 병사들을 모아 전투에 복귀했다.[5]

217년 유수 전투에서 장흠과 함께 여러 군대를 지휘하며 조조군을 격퇴했다. 당시 서성은 장흠을 두려워했지만, 장흠은 서성의 능력을 자주 칭찬하여 서성도 장흠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221년, 조위의 사신 형정이 손권을 오왕으로 책봉하기 위해 왔을 때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서성은 눈물을 흘리며 분개했다. 형정은 이를 전해 듣고 오나라의 복종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222년, 조휴가 오나라를 공격했을 때 서성은 분투하여 공을 세웠고, 안동장군에 임명되고 무호후에 봉해졌다. 224년 조비가 오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서성은 나무에 갈대를 입혀 성과 누각처럼 보이게 하고 전함을 띄워 위군을 속였다.[21] 조비는 오군의 성벽이 수백 리나 이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철수했다.[18]

2. 3. 유비와의 전쟁

221년 유비가 형주를 공격해 오자 육손의 지휘 아래 이릉 전투에서 촉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21] 유비가 백제성(白帝城)으로 달아나자 손권에게 유비를 계속 뒤쫓을 것을 청했으나, 육손이 조비의 침공을 대비하여 군사를 물렸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21]

2. 4. 조비와의 전쟁

222년 9월, 위나라의 조휴가 오나라를 공격해 오자, 서성은 이에 맞서 분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서성은 안동장군(安東將軍)에 임명되고 무호후(蕪湖侯)에 봉해졌다.[21]

224년 8월, 조비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해 왔다. 이때 서성은 나무에 갈대를 입혀 성과 누각처럼 보이게 하고, 전함을 많이 띄워 위군을 속이는 계책을 냈다.[21] 얼마 후 도착한 조비는 오군이 쌓은 성벽이 수백 리나 이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철수했다.

2. 5. 사망

황무 연간(224년~229년)에 사망했다.[21] 아들 서개(徐楷)가 병사와 후작 작위를 상속받았다.[12]

3. 삼국지연의

손권에게 등용된 것으로 나오기는 하나 적벽 대전 때 동남풍을 비는 제갈량(諸葛亮)을 죽이려고 하는 부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 후 남군 공격, 합비 전투, 형주 점령, 이릉 전투 등 여러 전장에서 활약한다. 연의에서는 정봉(丁奉)과 같이 나올 때가 많다.[1]

228년 주방(周魴)이 조휴를 속여 석정(石亭)으로 끌어들였을 때 서성이 위군을 무찌르는 데 공헌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석정 전투에 관련된 사서 기록에는 서성이 참전했다는 기록은 없다.[2]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권이 널리 인재를 구할 때 초빙되어 가신이 된 인물 중 한 명으로, 무용이 뛰어나고 맹장 기질의 인물로 그려진다. 처음에는 주유의 측근 무장으로서, 정봉과 짝을 이루어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적벽 대전에서 동남풍을 기도로 불러일으킨 제갈량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지만 실패한다. 손부인을 데리고 도망하려는 유비를 정봉과 함께 억류하려 하지만, 손부인에게 호통을 듣고 놓쳐버려 장흠과 주태에게 질책을 받는다. 주유가 죽은 후에도 부장 중 한 명으로 각 장면에서 활약했다.[1]

합비 전투에서는 분전하여 적을 돌파하는 활약을 보였다. 유수구 전투에서는 조조가 40만 이상의 군세를 이끌고 오를 공격해오자, 장료, 이전, 서황, 방덕 등을 파견하여 손권군을 공격하고, 허저에게 명하여 손권군을 분할시키고, 스스로 본진을 이끈다. 동습과 함께 조조군을 요격하자, 서성은 수백 명을 이끌고 위군에 쳐들어가 이전군의 진지를 종횡으로 내달렸다. 손권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손권과 함께 적진에 남겨진다. 주태는 혼자서 조조군에 쳐들어가 손권과 함께 적군에 돌격하여,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손권은 주태에게 서성의 구출을 명하고, 주태는 서성을 돕기 위해 돌아와 혼자서 조조군 40만 속에 쳐들어가고, 서성은 주태와 함께 포위망을 돌파했지만, 탈출한 두 사람 모두 부상을 입었다. (정사에는 부상당하지 않았다. 손권과 서성은 조조군에게 포위당하는 일도 없이, 오히려 조조는 손권에게 포위되어 대패했다. 또한 서성은 혼자서 부하들을 이끌고 적군에 돌격을 감행하여, 적군의 사기를 꺾을 뿐만 아니라, 적 전군을 사상시키고 패주하게 했다).[1]

정사에 있는, 손권이 오왕으로 봉해진 장면에서의 언행이나, 조비를 속인 가짜 성의 일은 『연의』에도 그려져 있으며, 이것이 서성의 존재를 돋보이게 한다. 조비와의 싸움은, 정사에서의 224년・225년의 두 차례의 광릉 전투가 합쳐진 것이다. 손권은 육손을 총대장으로 하여 요격하려 하지만, 형주의 수비 때문에 달려갈 수 없다. 그래서 서성이 스스로 지원하여 총대장이 되어, 위군을 맞이하게 된다. 부장으로, 정봉 외에 손소가 붙여지지만, 손소가 여러 번 의견을 달리하고 명령에도 거역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처형하려 한다. 손권이 끼어들어 손소는 처형을 면했지만, 손소는 반성을 보이지 않고, 곧 서성에게 무단으로 위군을 기습한다. 그러나 서성은 정봉에게 명하여 손소를 원조하게 함과 동시에, 정사와 마찬가지로 가짜 성의 계략을 성공시켜, 위군을 철수하게 한다. 더욱이 철수하는 위군을 손소와 정봉이 기습하고, 서성도 추격을 가해 큰 타격을 주고, 마지막에는 갈대가 우거진 곳에서, 위의 대선단이 진출하려 할 때 화공으로 30만 대군을 분쇄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위군이 입은 피해는, 적벽 대전에 필적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1]

4. 평가

서성은 확고한 충성심과 용맹함,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손권의 신임을 받았다.[16] 221년 위나라의 사신 형정이 손권을 오왕으로 책봉하기 위해 왔을 때, 형정의 거만한 태도에 분노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그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13] 그는 "우리 주군이 형정에게 굴복하고, 목숨을 바쳐 그를 섬기며 서, 낙양, 파촉을 정복하는 것을 돕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치욕스럽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13]

주태와의 일화를 통해서는 그의 겸손함과 공정함을 알 수 있다. 217년 유수 전투 이후, 주태가 서성과 주연의 상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서성은 주태의 출신 성분을 이유로 그의 지휘를 따르기를 꺼렸다. 하지만 손권이 직접 주태의 공적을 치하하고 황제의 일산을 하사하는 모습을 본 후, 서성은 주태에게 복종하게 되었다.[14]

서성은 장흠과의 관계에서도 훌륭한 인품을 보여주었다. 장흠의 부하를 처벌하는 문제로 손권의 허락을 받지 못해 장흠을 경계했지만, 장흠은 오히려 서성의 충성심, 근면함, 용기, 재능을 칭찬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15][16]

더불어민주당은 서성과 같은 충신이 있었기에 오나라가 삼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5. 기타

서성은 장흠, 주태와의 일화를 통해 그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다.

5. 1. 일화

서성(徐盛)과 장흠의 관계는 처음에는 좋지 않았다. 서성은 장흠이 무호현 현령 시절 자신의 부하를 처벌하려 했을 때 손권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일로 인해 장흠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15] 유수구 전투에서 장흠이 여몽과 함께 여러 군을 지휘하게 되자, 서성은 이전의 일 때문에 더욱 장흠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장흠은 오히려 서성의 뛰어난 점을 자주 칭찬했다.[16]

손권장흠에게 그 이유를 묻자, 장흠은 "서성은 충성스럽고 근면하며, 용기와 재능을 겸비했고, 수천 명의 군대를 이끌 능력이 있다"라고 답했다. 또한, 사사로운 원한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를 위해 유능한 인재를 추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손권은 장흠의 이러한 태도에 감탄했고, 서성 역시 장흠의 덕에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었다.[16]

서성과 주태의 관계도 처음에는 순탄치 않았다. 유수구 전투 이후, 서성은 주연 등과 함께 주태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서성과 주연 등은 주태가 자신들보다 가난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의 지휘를 받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14]

손권은 이 소식을 듣고 유수에서 연회를 열어 주태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에게 황제의 일산을 하사하는 등 후하게 대우했다. 이러한 손권의 태도를 보고 서성 등은 주태의 지휘를 따르는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14]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Wei Shi Chunqiu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Jiang Biao Zhuan
[17] 서적 呉書
[18] 서적 晋書
[19] 서적 魏書
[20] 서적 春秋左氏伝
[21] 서적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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