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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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비 전투는 조조와 손권 세력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통칭하며, 특히 215년에 벌어진 소요진 전투가 유명하다. 조조는 양주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합비성을 건설하고 유복을 자사로 임명했다. 215년, 손권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했으나, 장료, 악진, 이전 등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에 의해 격퇴당했다. 이 전투에서 장료는 적은 병력으로 손권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합비 전투는 위나라의 남방 방어를 강화하고, 오나라의 북진을 좌절시켜 삼국 정립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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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후한 말기의 전쟁 |
시기 | 214년–215년 |
장소 | 합비 동쪽, 안후이 성, 중국 |
결과 | 조조군 승리, 손권군 퇴각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조 |
교전국 2 | 손권 |
지휘관 및 지도자 | |
조조군 | 장료, 이전, 악진 |
손권군 | 손권, 감녕, 능통, 여몽, 진무, 장흠, 서성, 반장, 송겸 |
병력 규모 | |
조조군 | 합비 요새 내 7,000명 |
손권군 | 약 100,000명, 손권 휘하의 1,000명의 호위병, 능통 휘하의 300명 |
피해 규모 | |
조조군 | 700명 이상 |
손권군 | 1,300명 이상 |
2. 배경
215년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여 익주의 유비가 위험해지자, 제갈량은 형주 동쪽 3군을 손권에게 내주고 손권과 조조를 싸우게 하는 계책을 폈다.
손권은 조조가 여강 태수 주광을 시켜 합비로 가는 보급로인 환성에 주둔하자, 10만 대군을 이끌고 여몽과 감녕을 선봉으로, 장흠과 반장을 후군으로 삼았다. 자신은 주태, 진무, 동습, 서성 등을 거느리고 중군을 이끌었다.
손권은 장강을 건너 화주를 점령한 후, 여몽과 감녕을 시켜 환성을 함락시키고 주광을 죽였다. 손쉽게 환성에 입성한 손권은 능통과 합류하였다.
이 소식은 합비를 수비하던 장료에게 전해졌고, 장료는 악진, 이전과 함께 환성을 되찾을 작전을 세웠다. 악진이 오군 선봉을 막는 동안 장료와 이전이 손권의 중군을 기습하여 승리하였다. 장료는 더 많은 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설제를 보내 조조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조는 유엽의 의견에 따라 한중을 하후연과 장합에게 맡기고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로 향했다. 이에 감녕은 기병 100기로 조조의 영채를 기습했고, 다음날 능통은 악진과 맞서 싸우다 조휴의 활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감녕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조조는 전투가 장기화되자 모든 군대를 이끌고 대공세를 펼쳤다. 조조는 중로군을 거느리고, 좌익 1로는 장료, 2로는 이전, 우익 1로는 서황, 2로는 방덕이 맡아 각기 1만 명의 군사를 주고 5로로 나누어 유수를 공격했다.
전쟁은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한다. 병사 고용, 무기 및 방어구 제작, 말과 군량, 군복 등 많은 비용이 소모되며, 보급 부대 유지에도 큰 비용이 발생한다. 이러한 재정적 부담은 백성들에게 전가되므로, 조조는 전쟁을 빨리 끝내려 했다.
유수를 공격당한 손권의 부하 서성과 동습이 작은 배에 군사를 태우고 싸웠으나, 동습은 배가 뒤집혀 사망하고 진무는 방덕과 싸우다 전사했다. 서황의 협공으로 위험에 처한 손권은 주태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했다.
조조군은 손권군을 포위 공격했지만, 육손이 이끄는 군대가 합류하면서 크게 패했다. 이후 손권은 유수에서 1달 이상 조조군과 대치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결국 장소와 고옹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즐을 보내 조조에게 화평을 청했다.
손권과 조조는 군대를 철수시켜 사실상 무승부로 끝났다. 손권은 장흠과 주태에게 유수구를 지키게 하고 건업으로 돌아갔으며, 조조도 조인과 장료를 합비에 남겨 지키게 하고 허창으로 돌아갔다.
2. 1. 합비의 지정학적 중요성
손권이 중국 남동부에 대한 지배력을 굳히기 훨씬 전, 조조는 유복을 양주의 자사로 임명하고 포위 공격에 대비한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유복은 합비성(合肥城|합비성중국어) 건설을 감독했으며, 큰 돌, 통나무, 어유 비축량을 갖추게 했다.208년 말, 적벽 전투 이후 손권은 군대를 이끌고 합비를 침공했지만, 수개월에 걸친 진격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다음 해, 유복의 사망 이후, 현지 세력과 원술과 유복의 옛 부하인 진란(陳蘭|진란중국어)과 매성(梅成|매성중국어)이 육강(盧江|노강중국어)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조조의 장군 장료와 장패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후 조조는 장료, 악진, 이전에게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합비 요새로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진란의 동맹인 뇌박은 다른 군벌 유비에게 항복했다.
213년, 조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손권의 7만 군대를 여수구(濡須口|유수구중국어)에서 공격했지만, 한 달 이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다. 남부 세력에 대한 거듭된 실패 이후, 조조는 양자강 유역의 여러 현들이 손권에게 점령될 것을 우려하여 파비안 전략을 채택하고, 군사 공동체, 즉 요새화된 마을에 집중된 군인 가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양자강 지역은 거주민이 이주하면서 인구가 감소했지만, 합비 남쪽에 위치한 완현(皖縣; 현재의 전산현, 안후이성)은 예외였다. 조조는 주광(朱光|주광중국어)을 육강의 태수로 임명하고 완현에 주둔시켜 농업을 장려하고, 파양의 부유한 지역민들을 매수하여 손권의 군대를 염탐하고 적의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합비성은 차오후 북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조조군에게는 장강 유역의 전선 거점이었다. 손권군에게는 장강 유역의 완전 장악과 외정(外征) 모두에 필요한 거점이었다. 합비성은 장료, 악진, 만총 등이 방어에 나섰다. 손권군은 차오후 남안의 유수구에 요새를 정비하는 등 이에 대항했다. 유수구 또한 손권군에게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조조군과 손권군이 충돌을 반복했다 (유수구 전투).
2. 2. 유복의 합비성 정비
조조는 유복을 양주 자사로 임명하고 포위 공격에 대비한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유복은 합비성(合肥城|합비성중국어) 건설을 감독했으며, 큰 돌, 통나무, 어유 비축량을 갖추게 했다.[22]200년 손책이 죽자, 손책이 노강 태수로 임명한 이술은 손권을 거스르고 양주 자사 엄상을 살해했다. 이에 편승하여 노강의 뇌서, 진란, 매성 등이 수만 명을 모아 봉기하는 등 장강, 회하 일대는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였다. 이때 원소와 싸우고 있던 조조는 이 방면을 진무하기에 유복이 적임자라고 판단, 상소를 올려 유복을 양주 자사로 임명했다.[20]
유복은 당시 텅 비어 있던 합비성에 단기로 입성하여 행정 기관을 정비하고 뇌서 등을 귀순시켰으며, 둔전, 관개 시설 정비, 교육 기관 정비 등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비축 물자를 늘렸다.[21] 유복은 국가에게 합비성이 요충지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합비성의 성벽, 토루를 강화하고, 성벽에 접근한 병사를 격퇴하기 위한 나무, 돌, 어유 등을 비축하는 등 전쟁 준비도 했다.[22] 이러한 정비는 후에 손권 군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게 된다.
3. 전투 경과
215년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여 익주의 유비가 위험해지자, 제갈량은 형주 동쪽 3군을 손권에게 내주고 손권과 조조를 싸우게 하는 계책을 폈다.[26]
손권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여몽과 감녕을 선봉으로, 장흠과 반장을 후군으로 삼았다. 주태, 진무, 동습, 서성 등을 거느리고 중군을 이끌고 합비로 진격하여 환성을 함락시키고 여강 태수 주광을 죽였다.[26]
합비를 수비하던 장료는 악진, 이전과 함께 반격 작전을 세웠다. 악진이 오군 선봉을 막는 동안 장료와 이전이 손권의 중군을 기습하여 승리했다. 장료는 더 많은 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설제를 보내 조조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조는 유엽의 조언에 따라 한중을 하후연과 장합에게 맡기고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로 향했다. 이에 감녕은 기병 100기를 이끌고 조조의 영채를 기습했다. 능통은 악진과 싸우다 조휴의 활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감녕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조조는 5로로 나누어 유수를 공격했다.
유수 공격에서 손권군은 고전했다. 동습은 배가 뒤집혀 사망했고, 진무는 방덕과 싸우다 전사했다. 서황의 협공으로 위험에 빠진 손권은 주태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육손이 이끄는 군대가 합류하면서 손권군은 반격에 성공했지만, 결국 장소와 고옹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즐을 보내 조조에게 화평을 청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고 무승부로 전투가 끝났다. 손권은 장흠과 주태에게 유수구를 지키게 하고 건업으로 돌아갔고, 조조도 조인과 장료를 합비에 남겨두고 허창으로 돌아갔다.
조조가 장로 공격 전, 설제(薛悌중국어)에게 "적이 도착하면 열어라"라고 적힌 편지를 남겼다.[1] 손권군이 합비로 진격하자, 수비 장수들은 편지를 열었다. 편지에는 "손권이 도착하면, 장(료)과 이(전) 장군이 그를 상대할 것이며, 악(진) 장군은 방어를 위해 남아서 전투에 참여하지 마라."라고 적혀 있었다.[2] 장료는 "지금 공격하여 사기를 꺾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3] 이전은 "개인적인 일로 공무를 우선시하지 않겠다"라며 동의했다.[4] 장료는 800명의 결사대를 선발해 연회를 열었다.
다음 날 아침, 장료는 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기습, 수십 명의 적군과 두 명의 장교를 죽였다. 진무가 죽고, 서성과 송겸은 도주, 반장은 도망치는 병사 두 명을 죽여 재결집시켰다.[5] 하제는 서성의 창을 되찾았다.
장료가 손권의 기치에 이르자, 손권은 고지대로 후퇴, 장료는 손권에게 내려와 싸우라고 외쳤지만 손권은 움직이지 못했다. 손권은 장료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포위 명령, 장료는 포위망을 뚫고, 갇힌 병사들이 "우리를 버렸는가?"라고 외치자,[6] 다시 적진을 헤치고 들어가 병사들을 구출했다.
전투 후, 반장은 부장군으로 승진, 손권 군대는 사기가 꺾였다. 장료는 성으로 돌아와 방어 태세를 강화, 그의 승리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손권의 군대가 성을 공격했지만, 유복이 준비한 방어는 쉽게 돌파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역병이 퍼지자 손권은 철수를 결정했다.
손권은 1,000명 정도의 후군을 지휘, 장료는 이때 공격을 감행했다. 손권의 후군은 소요진에서 고립되었다.[7]
손권은 퇴각하는 부대를 불렀지만, 제때 돌아올 수 없었다. 능통과 300명의 호위병이 손권을 위해 길을 뚫었다.[8] 감녕은 북을 쳐 전투 참여를 알리고, 직접 적에게 화살을 쏘았다.[9]
손권은 소요진 둔치에 도달했지만, 다리가 파괴되어 10m 길이의 틈이 있었다. 고리는 말의 옆구리를 채찍질, 말은 남쪽으로 도약했다.[10] 능통은 적을 막기 위해 돌아섰다.
능통은 300명의 병사가 모두 죽을 때까지 싸웠고, 중상을 입었다. 갑옷을 입고 물을 헤엄쳐 건넜다.[11]
손권은 하제가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도착하여 안전하게 보호받았다. 능통을 다시 만나 기뻐했지만 능통은 측근들의 죽음에 슬퍼했다. 손권은 "네가 살아있는 한, 부하가 없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위로했다.[12] 손권은 능통에게 이전 병력의 두 배를 지휘하게 했고, 하제는 손권을 꾸짖었다.
3. 1. 제1차 합비 전투 (208년)
208년 적벽 대전에서 손권·유비 연합군은 오림에서 조조군을 격파했다. 조조는 강릉과 형주의 수비를 부장들에게 맡기고 허창으로 철수했다. 주유 등 손권군과 유비군은 그대로 강릉 방면으로 진군하여 형주 제압을 시작했지만, 이때 시상에 주둔하고 있던 손권은 여세를 몰아 직접 군을 지휘하여 강수를 내려 합비성으로 침공을 시작했다.[1]조조는 장희와 장제에게 1,000명의 군사를 주어 즉시 구원병으로 파견했고, 여남군을 통과할 때 여남의 병사들을 지휘하게 했다. 장희와 장제의 군대는 원래 병력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역병으로 인해 병력이 감소했지만, 장제는 꾀를 내어 보병과 기병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고 있으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내용의 가짜 서신을 양주자사에게 전달했다. 손권은 이 서신을 전달한 사자를 붙잡고 4만 명의 군세가 구원하러 접근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군대와 함께 철수했다.[1]
3. 2. 제2차 합비 전투 (215년)
215년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여 익주의 유비가 위험해지자, 제갈량은 형주 동쪽 3군을 손권에게 내주고 손권과 조조를 싸우게 하는 계책을 폈다.[26]손권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여몽과 감녕을 선봉으로, 장흠과 반장을 후군으로 삼았다. 주태, 진무, 동습, 서성 등을 거느리고 중군을 이끌고 합비로 진격하여 환성을 함락시키고 여강 태수 주광을 죽였다.[26]
합비를 수비하던 장료는 악진, 이전과 함께 반격 작전을 세웠다. 악진이 오군 선봉을 막는 동안 장료와 이전이 손권의 중군을 기습하여 승리했다. 장료는 더 많은 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설제를 보내 조조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조는 유엽의 조언에 따라 한중을 하후연과 장합에게 맡기고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로 향했다. 이에 감녕은 기병 100기를 이끌고 조조의 영채를 기습했다. 능통은 악진과 싸우다 조휴의 활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감녕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조조는 5로로 나누어 유수를 공격했다.
유수 공격에서 손권군은 고전했다. 동습은 배가 뒤집혀 사망했고, 진무는 방덕과 싸우다 전사했다. 서황의 협공으로 위험에 빠진 손권은 주태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육손이 이끄는 군대가 합류하면서 손권군은 반격에 성공했지만, 결국 장소와 고옹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즐을 보내 조조에게 화평을 청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고 무승부로 전투가 끝났다. 손권은 장흠과 주태에게 유수구를 지키게 하고 건업으로 돌아갔고, 조조도 조인과 장료를 합비에 남겨두고 허창으로 돌아갔다.
조조가 장로 공격 전, 설제(薛悌중국어)에게 "적이 도착하면 열어라"라고 적힌 편지를 남겼다.[1] 손권군이 합비로 진격하자, 수비 장수들은 편지를 열었다. 편지에는 "손권이 도착하면, 장(료)과 이(전) 장군이 그를 상대할 것이며, 악(진) 장군은 방어를 위해 남아서 전투에 참여하지 마라."라고 적혀 있었다.[2] 장료는 "지금 공격하여 사기를 꺾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3] 이전은 "개인적인 일로 공무를 우선시하지 않겠다"라며 동의했다.[4] 장료는 800명의 결사대를 선발해 연회를 열었다.
다음 날 아침, 장료는 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기습, 수십 명의 적군과 두 명의 장교를 죽였다. 진무가 죽고, 서성과 송겸은 도주, 반장은 도망치는 병사 두 명을 죽여 재결집시켰다.[5] 하제는 서성의 창을 되찾았다.
장료가 손권의 기치에 이르자, 손권은 고지대로 후퇴, 장료는 손권에게 내려와 싸우라고 외쳤지만 손권은 움직이지 못했다. 손권은 장료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포위 명령, 장료는 포위망을 뚫고, 갇힌 병사들이 "우리를 버렸는가?"라고 외치자,[6] 다시 적진을 헤치고 들어가 병사들을 구출했다.
전투 후, 반장은 부장군으로 승진, 손권 군대는 사기가 꺾였다. 장료는 성으로 돌아와 방어 태세를 강화, 그의 승리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손권의 군대가 성을 공격했지만, 유복이 준비한 방어는 쉽게 돌파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역병이 퍼지자 손권은 철수를 결정했다.
손권은 1,000명 정도의 후군을 지휘, 장료는 이때 공격을 감행했다. 손권의 후군은 소요진에서 고립되었다.[7]
손권은 퇴각하는 부대를 불렀지만, 제때 돌아올 수 없었다. 능통과 300명의 호위병이 손권을 위해 길을 뚫었다.[8] 감녕은 북을 쳐 전투 참여를 알리고, 직접 적에게 화살을 쏘았다.[9]
손권은 소요진 둔치에 도달했지만, 다리가 파괴되어 10미터 길이의 틈이 있었다. 고리는 말의 옆구리를 채찍질, 말은 남쪽으로 도약했다.[10] 능통은 적을 막기 위해 돌아섰다.
능통은 300명의 병사가 모두 죽을 때까지 싸웠고, 중상을 입었다. 갑옷을 입고 물을 헤엄쳐 건넜다.[11]
손권은 하제가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도착하여 안전하게 보호받았다. 능통을 다시 만나 기뻐했지만 능통은 측근들의 죽음에 슬퍼했다. 손권은 "네가 살아있는 한, 부하가 없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위로했다.[12] 손권은 능통에게 이전 병력의 두 배를 지휘하게 했고, 하제는 손권을 꾸짖었다.
214년 여몽의 진언에 따라 완성을 빼앗고, 유비와의 형주 분쟁도 일단락되면서, 손권은 10만 대군을 지휘하여 합비성을 공격했다[26]。
조조는 합비성에 장료, 악진, 이전과 설제를 배치, 병력은 7,000명 남짓, 세 장군 사이는 좋지 않았다. 손권군이 닥치자 설제가 조조의 명령서를 개봉, "손권이 온다면 장료와 이전은 출격, 악진은 설제를 지키고, 싸워서는 안 된다"라고 적혀 있었다. 장료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요격하여 맹렬한 세력을 꺾고 인심을 안정시킨 후 방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27]。이전은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도의를 잊지 않겠다"라며 출격에 찬성했다[28]。
장료는 800명을 선별, 장병들에게 쇠고기를 대접하고 새벽에 출격하겠다고 알렸다[29]。
새벽, 장료는 갑옷을 입고 극을 들고 선봉, 손권 본진을 쳐들어가 수십 명의 병사와 두 명의 장교를 베어 손권 눈앞까지 육박했다. 서성이 부상을 입고 아기를 빼앗겨 도주, 하제가 아기를 탈환, 반장이 도망병을 베어 사기 붕괴를 막았다. 손권은 긴 극을 휘두르며 몸을 지키면서 높은 언덕 위로 도주, 장료의 군대가 적은 병력임을 간파하고 포위했다[30]。
장료는 포위 중앙을 급습, 수십 명의 병사밖에 탈출할 수 없었고, 나머지 병사들은 포위 속에 갇혔다. "장군은 우리를 버리시는 겁니까"라는 소리를 듣자 장료는 다시 포위로 돌격, 남겨진 병사들을 구출했다. 손권군은 장료의 공격에 의기소침, 장료를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장료는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싸웠고, 손권군은 전투 의지를 상실, 성까지 후퇴하여 방비를 굳혔다[31]。
손권은 합비성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역병 발생으로 10일 만에 퇴각, 최후미에서 무장들과 함께 퇴각을 지휘했다. 북쪽에는 근위병 1,000명 남짓과 여몽, 장흠, 능통, 감녕만이 남아 식사하고 있었다. 장료는 악진 등 7,000명과 함께 습격, 손권군을 포위했다[32]。손권은 활을 쏘아 응했다. 능통이 300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손권은 다리까지 왔지만, 다리는 1장(3m) 여가 철거되어 있었다. 곡리가 손권의 말에 채찍질을 하여 말에 기세를 더했고, 손권이 탄 말은 다리를 뛰어넘었다[33]。하제는 3,000명을 이끌고 손권을 맞이했다. 손권은 배로 돌아가 여러 장수들과 식사를 계속, 하제는 손권의 안위를 걱정하여 자리를 떠나 눈물을 흘렸다. 손권은 하제를 위로하며 다시는 위험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34]。
능통은 손권이 다리를 건넌 후 다시 돌아와 분전, 부하들은 모두 죽고, 자신도 온몸에 상처를 입으면서 수십 명을 베었다. 손권이 무사히 퇴각할 때를 틈타 퇴각, 다리는 부서져 있었기 때문에 가죽 갑옷을 입은 채 강에 뛰어들었다. 손권은 능통이 무사히 귀환하자 기뻐했다[35]。
장료는 손권의 용모를 몰랐다. 전투 후, 장료는 손권군의 항복병에게 "용맹함과 기사(騎射)를 갖춘 자자(紫髯)의 장군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자신이 목격한 장군이 손권 본인임을 알고, "저것이 손권인 줄 알았더라면 추격하여 잡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하며 잡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36]。
3. 3. 제3차 합비 전투 (233년)
233년,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지만, 합비신성이 기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상륙하려 하지 않았다. 만총은 손권이 위나라가 약해졌다고 판단하여 반드시 습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복병으로 보병과 기병 6천 명을 준비했다. 예상대로 손권이 상륙하여 공격해 왔고, 복병들은 수백 명의 목을 베었다.[38]3. 4. 제4차 합비 전투 (234년)
234년, 손권은 촉의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여, 10만 명의 군세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소호의 입구로부터 합비신성으로 진격했다. 동시에 육손, 제갈근 등에게는 1만 명 남짓의 군세로 면수(한수)에서 양양으로 향하게 했고, 손소, 장승에게는 회수에서 광릉, 회음으로 향하게 하여 위나라 영토 내로의 다방면 동시 침공을 감행했다.[1]6월, 합비신성은 손권군에 포위되었고, 만총은 일단 합비신성을 포기하고 북쪽의 수춘까지 손권군을 유인하여, 그곳에서 다시 적을 맞이하여 격퇴하고자 조예에게 건의하여 허가를 요청했다. 조예는 "위, 오, 촉 삼국에게 합비, 양양, 기산의 3성은 병법에서 말하는 '병가지상사'의 최중요 방어 거점이며, 위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이곳을 사수함으로써 오나라와 촉나라의 침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 설령 손권이 합비신성을 공격하더라도 결코 함락시킬 수 없으니, 여러 장수들은 이 성들을 굳건히 지켜내라. 만약 나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선다면, 적은 두려움을 느껴 도망칠 것이다."라고 말하며 만총의 주장을 기각했다. 만총은 합비신성으로 구원에 나서 수십 명의 의용병을 모집하여 소나무와 삼의 기름을 사용하여 바람 방향에서 불을 질러 오군의 공성 병기를 불태웠고, 손권의 조카 손태를 사살했다.[1]
7월, 조예는 어룡주를 타고 동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손권군은 여러 차례 합비신성을 공격했지만, 위나라의 장영 등이 힘껏 싸워 합비신성을 지켜냈기 때문에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손권은 조예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예의 군대가 아직 수백 리에 이르기 전에 철수했다. 육손, 제갈근, 손소 등도 마찬가지로 군대를 철수시켰고, 원정은 오군의 전면적인 패배로 끝났다. 촉의 제갈량도 전과 없이 사망했고, 남겨진 장병들은 철수했다(오장원 전투).[1]
3. 5. 제5차 합비 전투 (253년)
252년 손권이 붕어하자, 위(魏)의 호준, 제갈탄 등은 오(吳) 영토인 동흥 등을 공격했다. 오의 제갈각은 정봉, 주이 등을 지휘하여 맞서 싸웠고, 위군은 한종, 환가가 전사하여 패주했다(동흥 전투[41]).253년, 기세가 오른 제갈각은 위를 침공하여 합비신성(合肥新城)을 포위했다. 위의 여러 장수들은 당황했지만, 사마사는 관구검, 문흠, 장특에게 지구전을 명했다. 그들은 2개월 동안 성을 방어했지만, 성 안에서는 병사의 절반이 전사하거나 병에 걸렸다. 합비신성은 오군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장특은 이 상황에서 제대로 싸워도 승산이 없다고 보고, 제갈각에게 "위의 법에는, 성을 100일 동안 지키면 그 장병은 적에게 항복해도 죄가 되지 않으며, 가족이 처형되는 일도 없다. 며칠 있으면 100일이 되니, 그때 항복하겠다"라고 말했다. 제갈각은 이 말을 믿고, 성에 대한 공격을 중지했다. 장특은 몰래 성벽을 수복하고, 오군에 대해 철저한 항전을 시작했다. 제갈각은 이에 격분하여 성을 공격했다.
합비신성은 100일이 지나도 함락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위의 태위인 사마부가 동정하여 합비신성의 구원에 나서자, 오군 내부에서 역병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있어, 제갈각의 군은 철수하여 8월에 오로 귀환했다[42]。
관구검은 "건국 이래, 이처럼 어려운 싸움은 없었다"라고 상소를 올렸고, 전사한 장병의 공적을 칭찬하고, 유족을 위해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3. 6. 제6차 합비 전투 (268년)
268년 가을 9월, 오나라는 형주와 양주에서 동시에 군사 행동을 일으켰다. 정봉과 제갈정은 작피에 진을 쳐 합비를 공격했고, 손호도 직접 동관까지 군사를 진격시켰다.정봉은 진나라 측 지휘관 석포가 중앙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듣고, 있지도 않은 편지를 보내 이간계를 썼다. 이 계략은 성공하여 사마염이 군사를 파견해 석포를 붙잡으려 하는 등 큰 사태로 발전할 뻔했으나, 손삭의 조언에 따라 무장이 해제되고 석포가 스스로 수춘을 나와 죄를 뒤집어쓰면서 수습되었다. 사마준이 대신하여 정봉과 대치했다. 그 무렵 형주에서는 양양을 공격하던 만욱이 호열에게 패배했고, 강하를 공격하던 주적도 철수했기 때문에, 형주 지휘관 사마망은 합비 방면으로 군사를 돌렸다. 정봉은 2개월 동안 진나라 군대와 대치했지만 전황은 불리했고, 사마망의 구원군까지 도착했기 때문에 겨울 11월에 철수했다.[43] 이것이 삼국 시대 전체를 통틀어 합비 방면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합비 전투는 위나라와 오나라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위나라는 합비를 지켜내며 남쪽 방어를 강화했고, 오나라는 북진이 좌절되었다.
전투 후 손권이 연회에서 하제는 눈물을 흘리며 신중함을 강조했고, 손권은 그의 충고를 평생 기억하겠다고 약속했다.[19]
장료는 포로로 잡힌 병사에게서 손권의 외모와 활 솜씨를 듣고 악진에게 그를 놓친 것을 후회했다.
4. 1. 위나라의 남방 방어 강화
조조는 부하들이 이룬 업적을 믿기 어려워하여 나중에 소요진으로 가서 전장을 면밀히 조사했다.[13] 장료는 정동장군으로 승진했다.[14] 이전은 100가구가 더해져 총 300가구가 주어졌다.[15] 악진은 과세 대상 500가구가 더해져 총 1,200가구가 주어졌다. 악진의 아들도 전투에 참여했기에 500가구가 배정되었고, 아들은 제후의 작위를 받았으며, 아버지는 우장군으로 승진했다.[16]4. 2. 오나라의 북진 좌절
215년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고 익주의 유비가 위험해지자 제갈량은 형주 동쪽 3군을 손권에게 주는 조건으로 손권과 조조를 싸우게 하는 계책을 낸다.손권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여몽과 감녕을 선봉으로, 장흠과 반장을 후군으로 삼았다. 주태, 진무, 동습, 서성 등과 함께 중군을 이끌고 환성을 함락, 여강 태수 주광을 죽였다.
합비를 지키던 장료는 악진, 이전과 함께 환성을 되찾으려 했다. 악진이 오군 선봉을 막는 동안 장료와 이전이 손권의 중군을 기습하여 승리했다. 장료는 조조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조조는 유엽의 조언대로 한중을 하후연과 장합에게 맡기고 40만 본대를 이끌고 합비로 향했다.
조조의 대군에 맞서 감녕은 기병 100기로 조조군 영채를 기습했고, 능통은 악진과 싸우다 조휴의 활에 맞을 뻔했으나 감녕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조조는 유수를 공격하며, 중로군을 직접 지휘하고 좌익은 장료와 이전, 우익은 서황과 방덕에게 맡겨 5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이러한 대규모 군사 작전에는 병사 고용, 무기 및 방어구 유지, 군량, 수송 등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고, 이는 백성들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조조는 전쟁을 빨리 끝내려 했다.
유수 공격에 손권 측 서성과 동습이 작은 배로 맞섰으나, 동습은 배가 뒤집혀 사망하고 진무도 방덕과 싸우다 전사했다. 서황 군대의 협공으로 위험에 처한 손권은 주태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했다.
조조군은 손권군을 포위 공격했으나, 손책의 사위 육손의 군대가 합류하며 전세가 바뀌었다. 손권은 유수에서 1달 이상 대치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장소와 고옹의 의견에 따라 보즐을 보내 조조에게 화평을 청했다.
결국 양측 모두 군대를 철수시켜 무승부로 끝났다. 손권은 장흠과 주태에게 유수구를 지키게 하고 건업으로 돌아갔고, 조조도 조인과 장료를 합비에 남기고 허창으로 돌아갔다.
전투 후 손권의 연회에서 하제는 눈물로 손권에게 신중함을 강조했고, 손권은 그의 충고를 평생 기억하겠다고 약속했다.
포로로 잡힌 병사에게서 손권의 외모와 활 솜씨를 들은 장료는 악진에게 그를 놓친 것을 후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부하들의 공적을 치하하며 소요진 전장을 직접 조사했다. 장료는 "정동장군"으로 승진했고, 이전과 악진은 각각 300가구와 1,200가구를 더 받았다. 악진의 아들도 작위를 받았다.
손권 측에서는 능통과 반장이 "편장군"으로 승진했고, 장흠은 "토로장군"에 임명되었다. 손권은 진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의 애첩에게 순장을 명했다.[19]
4. 3. 삼국 정립의 고착화
215년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여 익주의 유비가 위험해지자, 제갈량은 형주 동쪽 3군을 손권에게 내주고 손권과 조조를 싸우게 하는 계책을 폈다.손권은 조조가 환성에 주둔하자 10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함락시켰다. 합비를 수비하던 장료는 악진, 이전과 함께 환성을 되찾을 작전을 세웠다. 악진이 오군을 막는 동안 장료와 이전이 손권의 중군을 기습 공격해 승리했다. 조조는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로 향했고, 유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손권군은 서성과 동습이 작은 배로 싸웠으나 동습은 전사하고, 진무도 전사했다. 손권은 주태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육손이 이끄는 군대가 합류하면서 조조군을 격퇴했지만, 손권은 1달 이상 대치하다 보즐을 보내 조조에게 화평을 청했다.
결국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하여 무승부로 끝났다. 이후 손권은 건업으로, 조조는 허창으로 돌아갔다. 전투 후, 장료는 "정동장군"으로 승진했고,[14] 이전과 악진도 가구와 작위를 받았다.[15][16] 손권 측에서는 능통과 반장이 "편장군"으로 승진했고,[8][17] 장흠은 "토로장군"에 임명되었다.[18]
5. 대중문화 속 합비 전투
합비 전투는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 진·삼국무쌍에서 플레이 가능한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이 게임에서 "합비 전투"와 "합비의 전투"로 불리며(각 작품에 따라 다름), 합비 전투 (234)와는 다른 스테이지(합비성 전투)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5. 1. 게임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 ''진·삼국무쌍''에서 플레이 가능한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이 게임에서 전투는 "합비 전투"와 "합비의 전투"로 불리며(각 작품에 따라 다름), 합비 전투 (234)를 의미하는 다른 스테이지(합비성 전투)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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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Records of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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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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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47#孫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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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26#滿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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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26#滿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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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26#滿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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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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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48#孫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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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04#齊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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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呉志・三嗣主伝、呉志・丁奉伝 晋書・武帝紀、晋書・安平献王孚伝及び資治通鑑より。武帝紀では司馬望と司馬駿が共同して丁奉を打ち破ったと書かれているが、安平献王孚伝では司馬望が到着する前に丁奉は撤退したと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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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현재 대한민국 표준국어대사전은 안후이성 허페이를 '합비'로 읽는 관용을 인정치 아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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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인구 10명 당 병사 1명이 농경국가에서 동원가능한 병력의 최대치라 전제할 때, 인구가 50만도 되지 않는 동오에서 5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벽대전 당시 동오의 병력이 3만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합비전투의 손권군 실제 병력은 약 2~3만 명으로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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