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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료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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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이료덴은 일본의 궁궐 건축물로, 천황이 거주하며 의식을 치르던 장소이다. 구조는 9간 4면 규모로, 동쪽에 정원이 있으며, 천황의 침소, 식사 준비 공간, 시중 공간 등이 위치한다. 특히 남서쪽 귀문에는 귀신을 쫓는 백택왕 그림이 그려진 귀의 방이 있었다. 세이료덴 내부에는 미쵸다이, 아라우미 쇼지, 콘메이이케 쇼지, 토키노후다 등 다양한 시설과 장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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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료덴
개요
종류건축물, 전각
위치일본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교토고쇼 내
좌표35°01′24.9″N 135°45′35.1″E
상세 정보
건축 양식침전조
면적정면 17.9m, 측면 10.8m
별칭요루노 고텐 (夜の御殿, 밤의 어전)
주요 용도천황의 침실, 정무 공간
역사
건립 시기헤이안 시대
소실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
재건현재 건물은 1790년에 재건
건축
특징히노키 껍질 지붕
고시키노 니와 (五色の庭) 정원
내부겐지노마 (源氏の間)
고코노마 (弘徽殿)
나이시노 쓰보네 (内侍局)
관련 문화재
지정 문화재중요문화재 (교토고쇼의 일부)
기타 정보
관련 항목교토고쇼
침전조
겐지모노가타리

2. 구조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천황의 일상생활 거처로 닌주덴과 조네이덴이 사용되었지만, 중기에는 세이료덴이 주로 천황의 어전으로 사용되었다. 시신덴이 의식을 거행하는 전각인 데 반해, 세이료덴은 일상적인 정무 외에 사방배, 서위, 제목 등의 행사도 거행되었다. 다만 이 세이료덴도 점차 의식의 장으로서의 색채를 더해, 중세 이후에는 세이료덴을 대신하여 조고쇼가 일상적인 거처가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화재로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않았지만, 임시 황거인 사토다이리에서 세이료덴의 대용으로 재건되었으며, 현재의 교토 고쇼(이 또한 원래 사토다이리이다)에도 안세이 2년(1855년)에 고식에 따라 재건된 것이 전해지고 있다.

건물 규모는 9간 4면이며, 몸채는 남북 5간, 동서 2간으로 사방에 부속채가 있으며, 동쪽의 부속채를 히로비사시라고 부른다. 지붕은 히와다부키의 이리모야즈쿠리. 정면은 동쪽이며, 세이료덴 동쪽에 있는 정원을 동정이라고 칭하고 북쪽에는 오죽의 대, 남쪽에는 카와타케다이가 있다. 이 동정에서 메이지 이전까지 소조배 등의 행사가 행해졌다.

천황이 주로 거주하는 곳은 중심의 주어좌 (천황 출어의 장) · 밤어전 (천황의 침소인 누리고메)이며, 그 북쪽에는 고키덴 상어국 · 비향사 상어국 (후비가 시중드는 방)이 있다[1]。 서쪽 부속채에는 북쪽부터 차례대로 어탕전 상 (천황의 식사를 준비하는 곳), 어수간 (천황의 조발을 행하는 곳), 조석간 (천황이 아침 식사를 하는 곳), 대반소 (식사를 실은 대를 놓는 곳)이 있다.

남쪽 부속채의 덴조노마는 공경 · 덴조비토 등이 시중드는 곳이며, 주어좌와 귀의 간 사이에는 빗 모양의 창이 열려 있었다. 덴조노마에는 그날 당직하는 공경들의 이름을 적은 일급의 간이 놓였다. 또한 천황의 옥좌인 어의(고이시), 그 옆에는 문장(분죠)이 있다.

동쪽 부속채의 동남쪽에는 바닥을 회반죽으로 다진 석회의 단이 있으며, 그곳에서 이세 신궁 등에 대한 요배가 매일 아침 행해졌다. 석회의 단에는 진호라는 화로가 있으며, 한중에는 그곳에서 불이 지펴졌다.

2. 1. 귀의 방

세이료덴 남서쪽 구석, 즉 뒤쪽 귀문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방이다. 야마토에 화가 아스카베노 쓰네노리가 고호 원년(964년)에 귀신을 쫓는 백택왕의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2] 준토쿠 천황이 쓴 『금비초』에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이 있다. 벽에 그려진 왕은 혼자 칼을 들고 귀신을 쫓는 용감한 모습이었으며, 백택왕이라고 불렸다. 고대 인도 파라나국의 왕으로, 귀신을 사로잡은 강한 무장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건물에는 백택왕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다.[3] 에도 시대 중기의 수필 "가잔 잡담"에는 백택왕이 이 장군, "백택왕"으로도 기록되어 있다.[4]

쇼와 43년(1968년), 고쿄 히가시 교엔이 일반에 공개되었고, 교토 고쇼도 GHQ 관리 하에 있었지만 쇼와 21년(1946년) 11월에 일반 공개[4]되었으나, 현재까지도 귀의 방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4]

가상(풍수)을 연구하는 고이케 야스토시는 자신의 책 『일본인이라면 알아두어야 할 올바른 가상의 책』에서, 교토 고쇼나 천황가가 귀신의 재앙, 신의 재앙(자연 재해, 화재, 역병 등)을 두려워하여 쓰키지 헤이를 움푹 들어가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민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도록 황실이 움푹 들어간 곳(사루가쓰지)에서 재앙을 받아들여, 어전 내부의 세이료덴 귀의 방으로 이끌어 귀신을 베어 세상의 평안을 기원(궁중 제사)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았다. 밖에서 본 어전 담의 움푹 들어간 곳만 보고 서민들이 귀문 제거 발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한다.

3. 조도



세이료덴의 중심 건물에는 천황이 주로 거주하는 주어좌와 밤어전이 있다. 주어좌는 천황이 업무를 보는 곳이고, 밤어전은 천황의 침소인 누리고메이다. 그 북쪽에는 고키덴 상어국과 비향사 상어국이 있는데, 이곳은 후비들이 시중드는 방이다.[1]

건물 서쪽 부속채에는 천황의 식사를 준비하는 어탕전 상, 천황의 조발(머리 손질)을 하는 어수간, 천황이 아침 식사를 하는 조석간, 식사를 실은 대를 놓는 대반소, 불상을 놓는 귀의 간이 북쪽부터 차례대로 있다.

남쪽 부속채의 덴조노마는 공경과 덴조비토 등이 시중드는 곳이다. 주어좌와 귀의 간 사이에는 빗 모양의 창이 있었다. 덴조노마에는 그날 당직하는 공경들의 이름을 적은 일급의 간이 놓여 있었다. 또한 천황의 옥좌인 어의(고이시)와 그 옆에는 문장(분죠)이 있다.

동쪽 부속채 동남쪽에는 바닥을 회반죽으로 다진 석회의 단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일 아침 이세 신궁 등에 대한 요배가 행해졌다. 석회의 단에는 진호라는 화로가 있었고, 겨울에는 그곳에서 불을 지폈다.

3. 1. 미쵸다이

히루노오마시 뒤쪽에 있던 천황의 휴식 공간으로, 장(帳) 앞에는 사자상과 코마이누가 놓여 있었다.[1]

3. 2. 아라우미 쇼지

홍향(弘廂) 북쪽에 설치된, 천을 바른 쇼지(후스마)이다. 높이는 9이며, 앞면에는 먹으로 거친 바다 한가운데에 데나가닌(손이 긴 사람)과 아시나가닌(다리가 긴 사람)이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뒷면에는 우지의 아지로(강가에 치는 울타리)에서 빙어를 잡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쇼지는 『마쿠라노소시』와 『타헤이키』에서 언급되었다.

3. 3. 콘메이이케 쇼지

홍향에서 2칸과 우에노츠보네(上御局) 사이에 세워져 있던 쓰이타테 쇼지이다. 표면(남면)에는 콘메이이케의 그림이, 뒷면(북면)에는 사가노 코타카가리(사냥)의 그림이 각각 그려져 있다. 콘메이이케는 중국 무제가 장안 서쪽에 군병에게 수상전을 훈련시키기 위해 만든 둘레 40리의 연못이다.

3. 4. 토키노후다

토키노후다(時の簡)는 시각을 나타내기 위해 덴조(殿上)의 작은 정원에 세워 둔 札(찰)이다. 말뚝으로 지탱하여 시각마다 세웠으며, 나이쥬(内豎)가 그 일을 맡았다. 킨에키 히쇼에 따르면, 토키노후다는 시모자이(下侍) 2칸 중 동쪽 츠마도(妻戸) 옆 1칸의 시토미(蔀)를 둘로 나눈 곳에 설치되었고, 서쪽에는 오젠(御膳) 선반을 세웠다고 한다. 하루 낮과 밤 12시를 각 시마다 4각으로 나누었으며, 제4각 때만 토키노쿠이(時の杙)를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1]

참조

[1] 논문 萩戸について:建築史・建築意匠 日本建築学会 1971
[2] 서적 日本人なら知っておきたい正しい家相の本 プレジデント社 2015
[3] 서적 日本人なら知っておきたい正しい家相の本 プレジデント社 2015
[4] 서적 日本人なら知っておきたい正しい家相の本 プレジデント社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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