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마이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코마이누는 일본의 신사나 사찰 입구에 배치되는 한 쌍의 상징적인 조각상으로, 입을 벌린 '아교'와 입을 다문 '운교'의 형태로 만물의 시작과 끝을 상징한다. 고대 오리엔트, 인도, 중국의 수호 사자상에서 기원했으며, 악귀를 쫓고 신성한 영역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중국 당나라 시대의 사자상이 직접적인 기원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되면서 독특한 형태를 갖게 되었다. 코마이누는 헤이안 시대에 사자와 코마이누로 분화되었고, 에도 시대부터 신사로 배치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해태와 유사성을 보이며, 고구려, 고려와의 연관성도 존재한다. 이나리 신사의 여우, 오키나와의 시사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조각품 - 충견 하치코
충견 하치코는 주인이 사망한 후에도 10년간 시부야역 앞에서 주인을 기다린 아키타견으로, 그의 충성심은 '충견'의 상징이 되어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으로 만들어졌고 현재 시부야역 앞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일본의 신사 - 칙제사
- 산예 - 백택
백택은 덕망 있는 통치자에게 나타나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요괴와 귀신에 대한 지식을 전하고 액막이, 질병 치료, 부적 등으로 활용되며, 현대에는 대중문화에서도 등장한다. - 산예 - 시사 (오키나와)
시사는 오키나와에서 악귀를 쫓고 복을 불러온다고 여겨지는 사자 형상의 상징물이며, 중국의 산예에서 유래하여 류큐 왕국의 상징으로 발전했고, 한 쌍으로 배치되어 수컷은 복을, 암컷은 재난을 막는 역할을 하며, 현재는 관광 상품으로도 널리 판매된다.
코마이누 | |
---|---|
개요 | |
![]() | |
![]() | |
일반 정보 | |
일본어 명칭 | 狛犬/高麗犬 (こまいぬ) |
설명 | 신사나 절 입구에 놓이는 짐승의 상 |
2. 상징적 의미
고마이누 한 쌍은 보통 한쪽은 입을 벌리고 다른 한쪽은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이는 각각 '아교(阿形)'와 '운교(吽形)'라고 불리며, 통칭 '아-운'이라고 한다.[2] '아'는 산스크리트어 알파벳의 첫 글자를, '운'은 마지막 글자를 발음한 것으로, 만물의 시작과 끝을 나타낸다.[3] 이 둘을 합쳐 'Aum' 소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 여러 종교에서 신성한 음절로 여겨진다.[3]
코마이누는 중국 사자상과 매우 유사하며, 실제로 당나라 시대 중국에서 유래되었다.[4] 중국 사자상은 아시아사자의 가죽과 사자 묘사, 즉 중동 또는 사자가 존재했고 힘의 상징이었던 인도에서 무역을 통해 유입된 것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5] 이 전통은 이후 중국으로 전해져 수호 사자로 발전했고, 이는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 오키나와로 전래되었다.
이러한 도상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두 명의 불교 문지기 신인 니오와도 관련이 있다. 악령을 쫓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현대의 고마이누 조각상은 대개 거의 동일하게 생겼지만, 예외적으로 두 고마이누 모두 입을 벌리거나 다문 경우도 있다.[1]
고마이누의 기원은 페르시아, 인도의 사자(獅子)를 본뜬 조각상이라는 설이 있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성한 영역을 지키는 사자상 또한 기원으로 여겨진다. 메이지 신궁에서는 고마이누가 고대 오리엔트·인도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자를 본뜬 조각상으로, 고대 오리엔트 여러 나라에서 성스러운 것, 신과 왕위의 수호신으로 사자를 사용했으며, 그 예로 스핑크스가 있다고 한다.[14]
3. 역사
나라 시대(710–794)에는 다른 아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 쌍은 항상 두 마리의 사자로 구성되었다.[6] 헤이안 시대(794–1185)에는 나무 또는 금속으로 된 한 쌍이 무게추와 문 스토퍼로 사용되었고, 황궁에서는 병풍이나 접이식 병풍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14세기까지는 실내에서만 사용되었으며,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다.
9세기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두 조각상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바뀌면서 다르게 불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었으며, 사자|獅子|사자일본어라고 불렸다. 다른 하나는 입을 다물고 개의 모습과 비슷했으며, 코마이누|狛犬|고마이누일본어 또는 "고구려 개"라고 불렸고, 때로는 머리에 뿔이 하나 있었다.[7] 점차 이 동물들은 입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모습으로 돌아왔다.[7]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는 양식이 간략화된 코마이누가 등장했는데, 좌우 모두 뿔이 없는 형태가 많아졌다. 쇼와 시대 이후 만들어진 것들은 입을 벌리고 닫는 모습 외에는 외관상 차이가 거의 없어, 본래 '사자'라고 불러야 하지만 오늘날에는 양쪽 모두 '코마이누'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에도 시대에는 코마이누를 신사 참배길(산도)에 배치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参道狛犬|산도 고마이누일본어라고 부른다.[6][8]
3. 1. 기원
아시아에서 사자는 악을 물리치는 힘을 가진 것으로 널리 믿어져 문을 지키는 데 사용되었다. '''코마이누'''는 중국 사자상과 매우 유사하며, 실제로 당나라 시대의 중국에서 유래되었다.[4] 중국 사자상은 아시아사자의 가죽과 사자 묘사, 즉 중동 또는 사자가 존재했고 힘의 상징이었던 인도에서 무역을 통해 유입된 것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5] 인도의 최초 사자 조각상은 기원전 3세기경 아소카 대왕이 세운 기둥 꼭대기에 나타난다.[5] 이 전통은 이후 중국으로 전해져 수호 사자로 발전했고, 이는 다시 한국, 일본, 오키나와로 수출되었다.
페르시아, 인도의 사자를 본뜬 조각상이 기원이라는 설이 있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역을 지키는 사자상도 그 기원으로 여겨진다. 메이지 신궁에서는 기원이 고대 오리엔트·인도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자를 본뜬 조각상으로, 고대 오리엔트 여러 나라에서는 성스러운 것, 신과 왕위의 수호신으로서 사자를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고, 그 좋은 예가 스핑크스라고 한다.[14]
나라 시대(710–794)에는 다른 아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 쌍은 항상 두 마리의 사자로 구성되었다.[6] 14세기까지 실내에서만 사용되었으며,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헤이안 시대(794–1185)에는 나무 또는 금속으로 된 한 쌍이 무게추와 문 스토퍼로 사용되었고, 황궁에서는 병풍이나 접이식 병풍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고대 시대에 고구려와 고려는 옛 이름으로 "코마"라고 불리기도 했다.[15] 메이지 신궁에서는 전래 시기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 기이한 형태의 동물을 개로 착각하여 조선으로부터 전래되었기 때문에 고려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다.[14]
뿔을 가졌다는 코마이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엔기시키 권 제46 좌우위문부식에는 "무릇 큰 의식의 날[16]에 (좌위문부는) 시(兕)상을 회창문 좌측에 두며, 일이 끝나면 본부(좌위문부)로 돌려 보낼 것. 우부(우위문부)는 (회창문의) 우측에 둘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7] 이 시는 물소를 닮은 외뿔 짐승으로 갑옷의 재료가 될 정도의 단단한 가죽을 가지고 있으며 뿔은 술잔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시"가 코마이누라는 설도 그중 하나이다.
3. 2. 전래
코마이누는 중국 사자상과 매우 유사하며, 실제로 당나라 시대의 중국에서 유래되었다.[4] 중국 사자상은 아시아사자의 가죽과 사자 묘사, 즉 중동 또는 사자가 존재했고 힘의 상징이었던 인도에서 무역을 통해 유입된 것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5] 이 전통은 이후 중국으로 전해져 수호 사자로 발전했고, 이는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 오키나와로 전래되었다. 나라 시대(710–794)에는, 다른 아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 쌍은 항상 두 마리의 사자로 구성되었다.[6]
3. 3. 헤이안 시대 (794-1185)
헤이안 시대 초기(9세기)부터 두 조각상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바뀌면서 다르게 불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었으며, 사자|獅子|사자일본어라고 불렸다. 다른 하나는 입을 다물고 개의 모습과 비슷했으며, 코마이누|狛犬|고마이누일본어 또는 "고구려 개"라고 불렸고, 때로는 머리에 뿔이 하나 있었다.[7] 점차 이 동물들은 입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모습으로 돌아왔다.[7]
『우츠호 이야기』에서는 "커다란 백은(しろがね)의 코마이누 4개"에 향로를 부착하여 궁중의 어장(어장대)의 네 모서리에 놓고 사용했으며, 『마쿠라노 소시』나 『에이가 이야기』 등에도 조도구로서 "사자"와 "코마이누"의 조합이 등장하며, 미스와 기초를 누르는 추(鎮子)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자와 코마이누의 배치에 대해서는, 『금비초』와 『유취잡요초』에 공통적으로 사자를 왼쪽에, 코마이누를 오른쪽에 둔다는 기술이 있으며[18], 『유취잡요초』에서는 더 나아가 각각의 특징을 "사자는 색이 황색이며 입을 벌리고, 코마이누(코마이누)는 색이 흰색이며 입을 벌리지 않고, 뿔이 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3. 4. 가마쿠라 시대 ~ 에도 시대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양식이 간략화된 코마이누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좌우 모두 뿔이 없는 형태가 많아졌다. 쇼와 시대 이후 만들어진 것들은 입을 벌리고 닫는 모습 외에는 외관상 차이가 거의 없어, 본래 '사자'라고 불러야 하지만 오늘날에는 양쪽 모두 '코마이누'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에도 시대에는 코마이누를 신사 참배길(산도)에 배치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参道狛犬|산도 고마이누일본어라고 부른다.[6][8] 이보다 오래된 유형은 陣内狛犬|진나이 고마이누일본어라고 불리며, 신사 경내, 불교 사찰, 귀족 저택, 심지어 개인 주택에서도 발견된다. 에도 시대부터는 사자나 개 외에도 멧돼지, 호랑이, 용, 여우 등 다양한 동물을 활용한 코마이누가 등장했다.
근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지의 사찰과 신사에 다양한 형태의 코마이누가 만들어졌다. 교토시 내 신사의 경우, 약 절반 정도가 코마이누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사찰과 신사 경내에서 볼 수 있는 코마이누는 대부분 석재이지만, 금속이나 도자기로 만든 것도 있다. 궁중의 어장대 등에서 사용된 것은 금속제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신과 부처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코마이누는 실내에 놓인 것은 목재가, 옥외에 놓이게 되면서 석재가 주로 사용되었다.
현존하는 오래된 목재 코마이누로는 야쿠시지의 진수휴가오카 하치만구, 다이호 신사(시가현), 고잔지(교토부), 이츠쿠시마 신사(히로시마현) 등이 있으며, 모두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석재 코마이누 중 오래된 예로는 도다이지 남대문에 있는 한 쌍의 상이 있는데, 이는 송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당사자(からじし)'로, 양쪽 모두 사자 모습을 하고 있다.
4. 명칭의 유래
'고마이누(狛犬)'라는 명칭은 '고려견(高麗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14] 메이지 신궁에서는 일본인이 기이한 형태의 동물을 개로 착각하여, 조선으로부터 전래되었기 때문에 고려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다.[14]
설문해자주에 따르면, "狛"은 "맥(貊)"과 같은 글자이며,[19] 맥은 퉁구스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0] "貊"이나 "고구려"의 훈독인 "고마"는 "개마국"이 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21]
"코마이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액막이에 사용된 데서 유래하여 "거마(拒魔)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5. 변천
초기에는 불상이나 불탑 입구에 좌우 대칭 형태로 배치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 두 조각상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다르게 불리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입을 벌린 사자, 다른 하나는 입을 다물고 개의 모습과 비슷하며 때로는 머리에 뿔이 하나 있는 ''코마이누'' 또는 "고구려 개"라고 불렸다.[7] 점차 이들은 입 모양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며, 결국 둘 다 ''코마이누''라고 불리게 되었다.[7]
『금비초』와 『유취잡요초』에는 사자를 왼쪽에, 코마이누를 오른쪽에 둔다는 기술이 있으며[18], 『유취잡요초』에서는 각각의 특징을 "사자는 색이 황색이며 입을 벌리고, 코마이누는 색이 흰색이며 입을 벌리지 않고, 뿔이 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마주보는 오른쪽의 사자상이 "아형(아교)"으로 입을 벌리고 있으며, 왼쪽의 코마이누상이 "훔형(훔교)"으로 입을 닫고 있으며, 옛날에는 뿔을 가지고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 이후에는 양식이 간략화된 것이 나타났고, 쇼와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은 좌우 모두 뿔이 없는 것이 많아, 입 모양 외에 외관상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본래 "사자"라고 불러야 하지만, 오늘날에는 양쪽 상을 합쳐 "코마이누"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6. 종류
일반적인 고마이누 외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 '''이나리 신의 여우상''': 일본에는 약 3만 개의 이나리 신사가 있으며, 각 신사의 입구에는 한 쌍의 여우 조각상이 고마이누를 대신하여 신사를 지키고 있다.[11] 이들은 종종 입에 경전 두루마리, 열쇠 또는 보석을 물고 있는데, 이는 이나리 신앙의 불교적 기원을 보여준다.[11][10] 흰 여우는 가미의 사자로 여겨지며, 왼쪽 여우는 수컷, 오른쪽 여우는 암컷으로 여겨진다.[12]
- '''오키나와현의 시사''': 시사(shīsā)는 오키나와현에서 집의 문이나 지붕을 지키는 돌 동물로, 시시(shishi) 및 고마이누와 기원, 기능, 상징적 의미를 공유한다.[13]
- '''기타 동물''': 에도 시대(1603–1868)부터 사자나 개 대신 멧돼지, 호랑이, 용, 여우 등 다른 동물들이 사용되었다. 신토에서는 여러 신사를 두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신사에서는 한 신에게 한 신사를 두고 있으며, 그 종류는 포유류, 조류, 파충류, 상상의 생물 등 다양하다. 이나리 신의 여우, 카스가 신의 사슴, 벤자이텐의 뱀, 비샤몬텐의 호랑이, 마리시텐의 돼지, 하치만 신의 비둘기 등이 대표적이다.
- '''지역 전설 관련'''
- '''갓파 고마이누''': 이와테현의 조켄지에는 갓파 전설과 관련된 갓파 고마이누가 있다.
- '''고마네코''': 교토부 교탄고시의 고토히라 신사 경내사 키지마사에는 고마네코상이 있으며, 아웅의 배치도 좌우가 반대이다.
- '''고마토라''': 오사카부 오사카시 텐노지구의 오에 신사에는 고마토라가 있으며, 한신 타이거스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7. 한국과의 관련성
코마이누는 중국 사자상과 매우 유사하며, 당나라 시대 중국에서 유래되었다.[4] 이 상징은 실크로드를 통해 이동하면서 독특한 모습을 갖게 되었고, 인도의 사자 조각상은 기원전 3세기경 아소카 대왕이 세운 기둥 꼭대기에 나타난다.[5] 이 전통은 중국을 거쳐 한국, 일본, 오키나와로 전해졌다.
나라 시대(710–794)에는 한 쌍의 사자상이 사용되었고,[6] 헤이안 시대(794–1185)에는 나무나 금속으로 된 한 쌍이 무게추나 문 스토퍼, 병풍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헤이안 시대 초(9세기)부터는 두 조각상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입을 벌린 것은 사자, 입을 다물고 뿔이 있는 것은 '코마이누'(고구려 개)라고 불렸다.[7] 이후 이들은 점차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고, 결국 둘 다 '코마이누'라고 불리게 되었다.[7]
코마이누는 부적으로 변하여 불교 사찰, 왕궁, 귀족 저택, 개인 주택을 보호하게 되었다. 14세기 이후에는 야외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으며,[6] 일본의 비 오는 날씨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조각되기 시작했다.
고대 시대에 고구려와 고려는 "코마"라고 불리기도 했다.[15] 메이지 신궁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에서 전래된 특이한 형태의 동물을 개로 착각하여 고려견이라고 불렀다는 설을 소개한다.[14]
7. 1. 해태와의 유사성
고마이누는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역을 지키는 사자상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메이지 신궁에서는 고마이누의 기원이 고대 오리엔트·인도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자를 본뜬 조각상이며, 고대 오리엔트 여러 나라에서 성스러운 것, 신과 왕위의 수호신으로 사자를 사용한 예로 스핑크스를 들고 있다.[14]7. 2. 고구려, 고려와의 연관성
'고마이누'라는 명칭은 '고려견'을 의미하며, 그 기원이 고구려 또는 고려와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15] 메이지 신궁에서는 조선에서 전래된 특이한 형태의 동물을 일본인들이 개로 오인하여 고려견이라고 불렀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다.[14]진보 진영에서는 고구려와 고려 시대의 문화적 영향력을 강조하며, 고마이누를 통해 한일 문화 교류의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고마이누가 일본 내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한국 문화의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코마이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액막이로 사용된 것에서 유래하여 "거마(拒魔)견"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설문해자주에 따르면, "狛"은 "貊"과 같은 글자이며,[19] 맥은 퉁구스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0] "貊"이나 "고구려"의 훈독인 "고마"는 "개마국"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21]
나라현 호류지의 오중탑 초층 벽면 소조에 조각된 상과 같이, 초기에는 부처나 불탑 입구 양쪽에 놓여 사자와 좌우 공통된 모습이었다. 뿔을 가졌다는 코마이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엔기시키』의 기록에 나오는 "시(兕)"가 코마이누라는 설이 있다.[16][17]
8. 갤러리
9. 같이 보기
- 해태
- 시사
- 중국 사자상
참조
[1]
간행물
Komainu
Shogakukan Encyclopedia
[2]
서적
Kōjien Japanese dictionary
Iwanami
2008
[3]
웹사이트
A un
http://www.aisf.or.j[...]
2010-07-10
[4]
간행물
Komainu
Encyclopedia of Shinto
[5]
웹사이트
Culture of the lion around the world; roots of the shisa
http://www.wonder-ok[...]
2009-10-09
[6]
문서
Kyoto National Museum Dictionary
[7]
웹사이트
Komainu
http://www.aisf.or.j[...]
2010-07-16
[8]
간행물
Shishi
Shogakukan Encyclopedia
[9]
문서
Kotera
[10]
문서
On the fusion of Shintō and Buddhism
[11]
문서
Scheid, Inari Fuchswächter
[12]
문서
Smyers
1999
[13]
웹사이트
The Chinese lion-Guardian dogs
http://www.wonder-ok[...]
2009-10-08
[14]
웹사이트
明治神宮ホームページ内Q&A
http://www.meijijing[...]
明治神宮
2015-08-14
[15]
웹사이트
高麗・狛(こま)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2-06
[16]
문서
元日と天皇即位の日、及び外国使からの上表を受ける日。
[17]
문서
『延喜左右衛門府式』兕像条。
[18]
문서
天皇が南面するときの記述であるため、向かって見た際には左右が逆となる。
[19]
웹사이트
説文解字㹮的解釋/説文解字㹮的意思/漢典“㹮”字的説文解字
http://www.zdic.net/[...]
[20]
웹사이트
濊貊
https://kotobank.jp/[...]
[21]
서적
朝鮮の生活と文化
https://books.google[...]
村田懋麿
1924
[22]
서적
近古文芸 温和叢書 第八編 奈良柴/猿樂傅記/そぞろ物語/望海毎談/狛犬考/近世竒跡考
https://books.google[...]
岸上操
1891
[23]
웹사이트
駒
https://kotobank.jp/[...]
[24]
문서
日本書紀内の御製に「馬ならば 日向の駒」とある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