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후 (남당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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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주후는 남당 후주 이욱의 후궁으로, 대사도 주종의 딸이자 대주후 주아황의 이복 동생으로 추정된다. 언니의 병간호를 위해 궁에 들어간 후 이욱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욱이 쓴 시 《보살만》은 두 사람의 관계를 묘사한다. 대주후가 사망한 후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녹색 의상을 즐겨 입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남당이 멸망한 후 송나라에 포로로 잡혀 송 태종에게 강간을 당했으며, 이욱이 독살된 후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소주후와 관련된 그림인 《희릉행소주후도》가 전해지며, 여러 드라마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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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후 (남당 후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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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주황후 |
다른 이름 | 정국부인 |
출생 | 보대 8년 (950년) |
사망 | 태평흥국 3년 (978년) |
배우자 | 후주 |
아버지 | 주종 |
어머니 | 적모 증씨, 생모 엄씨 |
자매 | 대주후 |
남당 국후 | |
재위 기간 | 건덕 5년 - 개보 8년 11월 27일 (967년 - 976년 1월 1일) |
이전 | 대주후 |
이후 | 없음 (북송 효장황후) |
2. 생애
주씨는 대사도 주종의 차녀로, 아마 대주후 주아황의 이복동생으로 추정된다.[1] 이욱의 정실인 대주후와 재능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언니와 함께 전국에서 제일가는 미인 자매로 유명했다.
건덕 3년(965년) 궁중에 들어가 병든 언니를 간호할 무렵 이욱에게 눈에 띄어 총애를 받았다. 이욱은 대주후 주아황과 결혼했으나, 몇 년 후 대주후가 병이 나자, 병문안 온 주씨는 형부인 이욱과 사통을 했다.[1] 이욱이 쓴 유명한 《보살만(菩萨蛮)》은 두 사람의 만남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꽃 밝은 달은 안개를 날리고, 오늘 밤은 랑쪽으로 가기 쉬우며, 양말을 신고 향계를 걷고, 금루신을 신는다."라는 구절이 있다.[1] 대주후는 남편과 여동생의 이중 배신때문에 병세가 급속히 악화[1]되어, 이욱은 죄책감에 밤낮으로 함께 하였으나, 차남 충선의 죽음으로 대주후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망하고, 시호는 소혜(昭惠)이며, 의릉에 묻혔다. 회환이 교차한 이욱은 사망한 아내를 위해 《의소혜주후애(衣昭惠周后诔)》를 포함한 여러 편의 시를 썼다.[1]
3년 후, 주씨는 황후로 봉해졌고, 소주후라 불렸다. 당시 대신은 이욱에게 다시 봉한 축하문에 주씨가 형부와 간통해 언니를 화나게 한 것을 공개적으로 비꼬아, 이욱이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소주후는 녹색을 매우 좋아해서 옷차림은 모두 청록색이었고, 고계(高髻)와 푸른색 옷을 입고, 멋을 부렸다. 궁녀들은 소주후의 푸른 옷을 보고 따라하려고 노력했다. 궁녀들이 염색한 견직물들이 원 안에 널렸는데 걷는 것을 잊어서 이슬에 젖었다. 그러나, 다음날 색상이 유난이 선명하게 되었다. 이욱과 소주후는 모두 좋다고 했다. 이후 궁녀들은 모두 이슬로 옷을 물들이고는 그렇게 염색한 직물을 "천수벽(天水碧)"이라 불렀다.
소주후는 매일 발을 드리우고 향을 피우니, 방 안이 자욱해졌다. 소주후가 구름 안개와 같이 앉아있었고, 바라보니 신선같았다. 잠자리에 들 때엔 장막에 불이 날까봐 향을 피울 수 없고, '거위 배 찜 및 침향'을 사용하여 장막에 넣으면 달콤하고 촉촉하며, 폐에 스며드는데, 이것을 소주후는 "장중향"이라고 붙혔다. 이욱은 동백꽃씨를 화전으로 만들었는데,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여 궁빈을 담백하게 하고, 얼굴에 금실을 입히고, 화전으로 이마에 뿌렸는데. "북원장"이라 하여, 걸으면 옷이 펄럭이고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광한선자처럼 멋이 있었다.
이욱과 소주후는 차와 우유조각을 만들어 다양한 향을 만들고 요리를 하니,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욱은 오랑캐가 생산한 향신료와 식품을 모아 요리하거나, 케이크와 미끼, 수프를 만들어 92가지 종류가 있으며, 모두 향긋한 맛을 내었다. 이욱은 각 요리에 이름을 짓고, 레시피를 남겼다. 황실 요리사는 새로운 음식을 준비하고 성찬을 준비하고, "내향연"이라는 종실 대신을 연회에 초대하도록 명했다. 이욱이 밤에 곷불을 켜지 않아도 궁궐에는 야명주가 매달려 있어, 밤이 되면 야명주가 대낮처럼 빛이 났다.
주씨가 황후가 된 후, 금릉 황궁에는 점점 더 많은 미녀들이 들어왔지만, 소주후는 후궁에 대해 매우 엄격하고 철저한 태도로 단속하여, 궁중의 미인은 그에 상응하는 명분을 얻을 수 없었고, 만약 원한을 품고 참지 못하는 사람은 소주후가 권고를 하거나 궁에서 내보내기도 했다.
975년, 이욱이 개봉에서 포로로 잡히자, 소주후는 정국부인(봉호는 소주후의 덕행을 풍자함)에 봉해졌다.[2] 태종 조광의는 왕위를 계승한 후, 여러 차례 소주후를 강간했다.[3] 975년 정월대보름 밤부터 978년 칠석까지 3년 동안 소주후가 송 황제에게 여러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3] 소주후가 돌아갈 때마다 울며 욕했고,[3] 이욱은 고통과 답답함 속에 《망강남(望江南)》, 《자야가(子夜歌)》, 《우미인(虞美人)》등의 명곡을 썼다. 후대에는 송 태종이 소주후를 강간하는 장면을 그린 『희릉행소주후도(熙陵幸小周后圖)』가 전해진다. 원나라 사람인 풍해속은 "강남에서 남은 자두꽃도 임금에게 강제로 꺾여왔다"고 평했다. 명나라 사람 심덕부의 《야획편(野獲編)》에는 "송나라 사람은 희릉행소주후도를 그렸고, 태종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얼굴은 검은 빛이고, 몸은 뚱뚱하다.... 주후는 사지가 가냘프고, 많은 궁인들이 껴안고, 주후는 이마를 찡그리며 어쩔 수 없는 모양을 하고 있다[4]"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숙상은 《견지편(見只篇)》에서 장기가 이 그림을 모사한 것을 본적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림에서는 "소주후는 머리에 화관을 쓰고 몸을 드러냈다. 벌거벗은 몸으로 다섯 시녀에게 의지했고, 두 사람은 겨드랑이를, 두 사람은 허벅지를 부축하고, 한 사람은 등 뒤에서 감싸 안아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태종은 몸소 당연히 후에 왔다. 뒤로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태종의 뺨을 손으로 거절했다"고 했다.
태평흥국 3년 (978년), 이욱은 《우미인》의 "고국은 돌이킬 수 없다(故国不堪回首)", "한강 춘수는 동쪽으로 흐른다(一江春水向东流)"라는 구절 때문에 독살되었고, 소주후도 얼마 지나지 않아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1. 언니의 병간호와 이욱과의 만남
주씨는 대사도 주종의 차녀로, 아마 대주후 주아황의 이복동생으로 추정된다.[1] 언니와 함께 전국에서 제일가는 미인 자매로 유명했다.건덕 3년(965년) 궁중에 들어가 병든 언니를 간호할 무렵 이욱에게 눈에 띄어 총애를 받았다. 이욱은 대주후 주아황과 결혼했으나, 몇 년 후 대주후가 병이 나자, 병문안 온 주씨는 형부인 이욱과 사통을 했다.[1] 이욱이 쓴 유명한 《보살만(菩薩蛮)》은 두 사람의 만남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꽃 밝은 달은 안개를 날리고, 오늘 밤은 랑쪽으로 가기 쉬우며, 양말을 신고 향계를 걷고, 금루신을 신는다."라는 구절이 있다.[1] 대주후는 남편과 여동생의 이중 배신때문에 병세가 급속히 악화[1]되어 사망했다.
2. 2. 황후 책봉과 남당에서의 생활
주씨는 대사도 주종의 차녀로, 대주후 주아황의 이복동생으로 추정된다. 이욱의 정실인 대주후와 재능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1]대주후가 병이 나자, 병문안 온 주씨는 형부인 이욱과 사통했다. 이욱이 쓴 《보살만(菩萨蛮)》은 두 사람이 사통할 때의 모습이라고 한다. "꽃 밝은 달은 안개를 날리고, 오늘 밤은 랑쪽으로 가기 쉬우며, 양말을 신고 향계를 걷고, 금루신을 신는다." 대주후는 남편과 여동생의 이중 배신때문에 병세가 악화[1]되어, 이욱은 죄책감에 밤낮으로 함께 하였으나, 차남 충선의 죽음으로 대주후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망하고, 시호는 소혜(昭惠)이며, 의릉에 묻혔다. 이욱은 사망한 아내를 위해 《의소혜주후애(衣昭惠周后诔)》를 포함한 여러 편의 시를 썼다.[1] 3년 후, 주씨는 황후로 봉해졌고, 소주후라 불렸다.
소주후는 녹색을 매우 좋아해서 옷차림은 모두 청록색이었고, 고계(高髻)와 푸른색 옷을 입고, 멋을 부렸다. 궁녀들은 소주후의 푸른 옷을 보고 따라하려고 노력했다. 궁녀들이 염색한 견직물들이 원 안에 널렸는데 걷는 것을 잊어서 이슬에 젖었다. 그러나, 다음날 색상이 유난이 선명하게 되었다. 이욱과 소주후는 모두 좋다고 했다. 이후 궁녀들은 모두 이슬로 옷을 물들이고는 그렇게 염색한 직물을 "천수벽(天水碧)"이라 불렀다.
소주후는 매일 발을 드리우고 향을 피우니, 방 안이 자욱해졌다. 소주후가 구름 안개와 같이 앉아있었고, 바라보니 신선같았다. 잠자리에 들 때엔 장막에 불이 날까봐 향을 피울 수 없고, '거위 배 찜 및 침향'을 사용하여 장막에 넣으면 달콤하고 촉촉하며, 폐에 스며드는데, 이것을 소주후는 "장중향"이라고 붙혔다. 이욱은 동백꽃씨를 화전으로 만들었는데,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여 궁빈을 담백하게 하고, 얼굴에 금실을 입히고, 화전으로 이마에 뿌렸는데. "북원장"이라 하여, 걸으면 옷이 펄럭이고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광한선자처럼 멋이 있었다.
이욱과 소주후는 차와 우유조각을 만들어 다양한 향을 만들고 요리를 하니,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욱은 오랑캐가 생산한 향신료와 식품을 모아 요리하거나, 케이크와 미끼, 수프를 만들어 92가지 종류가 있으며, 모두 향긋한 맛을 내었다. 이욱은 각 요리에 이름을 짓고, 레시피를 남겼다. 황실 요리사는 새로운 음식을 준비하고 성찬을 준비하고, "내향연"이라는 종실 대신을 연회에 초대하도록 명했다. 이욱이 밤에 곷불을 켜지 않아도 궁궐에는 야명주가 매달려 있어, 밤이 되면 야명주가 대낮처럼 빛이 났다.
주씨가 황후가 된 후, 금릉 황궁에는 점점 더 많은 미녀들이 들어왔지만, 소주후는 후궁에 대해 매우 엄격하고 철저한 태도로 단속하여, 궁중의 미인은 그에 상응하는 명분을 얻을 수 없었고, 만약 원한을 품고 참지 못하는 사람은 소주후가 권고를 하거나 궁에서 내보내기도 했다.
2. 3. 남당 멸망과 송에서의 핍박
이욱이 대주후와 결혼하고 몇 년 후, 대주후가 병이 나자, 병문안 온 주씨는 형부인 이욱과 사통했다.[1] 이욱이 쓴 《보살만(菩萨蛮)》은 두 사람의 사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대주후는 남편과 여동생의 배신에 병세가 악화[1]되어 사망했고, 이욱은 죄책감에 사망한 아내를 위해 여러 편의 시를 썼다.[1] 3년 후, 주씨는 황후(소주후)로 봉해졌다.[1]975년, 이욱이 개봉에서 포로로 잡히자, 소주후는 정국부인(봉호는 소주후의 덕행을 풍자함)에 봉해졌다.[2] 태종 조광의는 왕위를 계승한 후, 여러 차례 소주후를 강간했다.[3] 975년 정월대보름 밤부터 978년 칠석까지 3년 동안 소주후가 송 황제에게 여러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3] 소주후가 돌아갈 때마다 울며 욕했고[3], 이욱은 고통과 답답함 속에 《망강남(望江南)》, 《자야가(子夜歌)》, 《우미인(虞美人)》등의 명곡을 썼다.[3] 후대에는 송 태종이 소주후를 강간하는 장면을 그린 『희릉행소주후도(熙陵幸小周后圖)』가 전해진다.[4] 명나라 사람 심덕부의 《야획편(野獲編)》에는 이 그림에 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다.[4]
태평흥국 3년 (978년), 이욱은 《우미인》의 "고국은 돌이킬 수 없다(故国不堪回首)", "한강 춘수는 동쪽으로 흐른다(一江春水向东流)"라는 구절 때문에 독살되었고, 소주후도 얼마 지나지 않아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4. 이욱의 죽음과 소주후의 최후
이욱은 대주후 주아황과 결혼했으나, 몇 년 후 대주후가 병에 걸리자 병문안을 온 주씨와 사통했다.[1] 이들의 사통은 이욱의 《보살만(菩萨蛮)》에 묘사되어 있다. 대주후는 남편과 여동생의 배신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고,[1] 이욱은 죄책감에 시달렸으나 3년 후 주씨를 황후로 봉했다. 소주후는 녹색을 좋아하고 화려한 옷차림을 즐겼으며, 궁녀들은 그녀를 따라 했다.[1] 소주후는 향을 피우고 이욱과 함께 다양한 요리를 개발했으며, 밤에는 야명주를 사용했다. 주씨가 황후가 된 후, 궁중의 미녀들은 소주후의 엄격한 단속을 받았다.[1]975년, 이욱이 개봉에서 포로로 잡히자, 소주후는 정국부인(鄭國夫人)에 봉해졌다.[2] 송 태종 조광의는 왕위를 계승한 후, 소주후를 여러 차례 강간했다.[3] 975년 정월대보름 밤부터 978년 칠석까지 3년 동안 소주후는 송 황제에게 여러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3] 소주후는 돌아갈 때마다 울며 욕했고,[3] 이욱은 고통과 답답함 속에서 명곡들을 썼다. 후대에 송 태종이 소주후를 강간하는 그림인 『희릉행소주후도(熙陵幸小周后圖)』가 전해지며, 풍해속, 심덕부 등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4]
태평흥국 3년 (978년), 이욱은 《우미인》의 내용 때문에 독살되었고, 소주후도 얼마 지나지 않아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3. 평가 및 논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3. 3. 송 태종과의 관계 논란
4. 소주후가 나온 작품
4. 1. TV 드라마
wikitable드라마 제목 | 배우 | 캐릭터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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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南唐书·后纪传
[2]
기타
顏淵問為邦
[3]
기타
묵기
[4]
서적
만력야획편 ·권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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