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프림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슈프림스는 1959년 결성된 미국의 여성 보컬 그룹으로, 다이애나 로스, 메리 윌슨, 플로렌스 발라드 등을 거쳐 1977년 해체되었다. 모타운 레코드사의 지원을 받아 "Baby Love", "Stop! In the Name of Love", "You Can't Hurry Love"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1960년대 최고의 아이돌 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다이애나 로스가 솔로로 독립한 후에도 그룹은 활동을 이어갔으나, 1970년대 후반 해체되었다. 슈프림스는 흑인 음악 그룹 최초로 백인 관객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50년대 음악 그룹 - 비지스
비지스는 기브 삼 형제를 중심으로 결성된 호주 출신 팝 그룹으로, 스키플과 록앤롤로 시작해 1970년대 디스코 음악으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막대한 음악적 영향력을 남겼다. - 1950년대 음악 그룹 - 포 탑스
포 탑스는 1953년 디트로이트에서 결성되어 모타운 레코드에서 다수의 히트곡을 내며 1960년대 전성기를 누린 미국의 남성 보컬 그룹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음악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 1959년 결성된 음악 그룹 - 비틀즈
1960년대 영국에서 결성되어 혁신적인 음악과 문화적 현상을 일으키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멤버 간의 갈등으로 1970년 해산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로 구성된 록 밴드가 비틀즈이다. - 1959년 결성된 음악 그룹 - 더 로네츠
더 로네츠는 로니 스펙터, 에스텔 베넷, 네드라 탈리로 구성된 1960년대 미국의 걸 그룹으로, 필 스펙터의 프로듀싱 아래 "Be My Baby" 등의 히트곡으로 인기를 얻고 비틀즈 투어 오프닝을 맡는 등 음악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 디스코 음악 그룹 - 어스, 윈드 & 파이어
어스, 윈드 & 파이어는 모리스 화이트가 이끄는 미국의 펑크, 소울, R&B, 재즈 퓨전 밴드로서, 1970년대 중후반 전성기를 누리며 "샤이닝 스타" 등의 히트곡으로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고 긍정적 메시지와 사회 비판적 시각을 담은 가사, 독특한 보컬, 풍성한 악기 구성으로 많은 후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디스코 음악 그룹 - 비지스
비지스는 기브 삼 형제를 중심으로 결성된 호주 출신 팝 그룹으로, 스키플과 록앤롤로 시작해 1970년대 디스코 음악으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막대한 음악적 영향력을 남겼다.
슈프림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그룹 정보 | |
이름 | 슈프림스 |
원어 이름 | The Supremes |
별칭 | 더 프라이메츠 다이애나 로스 & 슈프림스 |
결성지 |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
장르 | 리듬 앤 블루스 소울 음악 팝 음악 두왑 디스코 |
활동 기간 | 1959년–1977년 1983년 2000년 |
레이블 | Lu Pine 모타운 |
관련 아티스트 | 다이애나 로스 & 더 슈프림스 |
멤버 | |
이전 멤버 | 다이애나 로스 메리 윌슨 플로렌스 발라드 베티 맥글로운 바바라 마틴 신디 버드송 진 테럴 린다 로렌스 셰리 페인 수세이 그린 |
![]() |
2. 역사
슈프림스는 1959년 더 프라이메츠(''The Primettes'')로 결성되어, 다이애나 로스, 메리 윌슨, 플로렌스 발라드, 베티 매그로운의 4인조로 시작했다.[90] 베티가 바바라 마틴으로 교체된 후, 바바라도 탈퇴하면서 1961년에 슈프림스(The Supremes)로 이름을 바꾸고 모타운과 계약할 당시에는 3인조가 되었다.
모타운 사장 베리 고디의 적극적인 지원과 홀랜드-도저-홀랜드의 프로듀싱으로 슈프림스는 1960년대에 많은 히트곡을 냈다. 1964년 "Baby Love"로 첫 전미 1위를 기록한 후, 5곡 연속 전미 1위를 달성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1966년에는 걸그룹 최초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96] 1969년까지 총 12곡의 전미 1위 히트곡을 발표했다.
1967년, 베리 고디가 다이애나 로스를 중심으로 그룹을 운영하면서 플로렌스 발라드가 해고되고 신디 버드송이 합류했다. 그룹 이름도 다이애나 로스 & 더 슈프림스(''Diana Ross & the Supremes'')로 변경되었다.[97] 1969년에는 다이애나 로스가 솔로로 독립하면서 진 테렐이 새로운 리드 보컬로 합류했다.
다이애나 로스 탈퇴 이후인 1970년대에도 슈프림스는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전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멤버 교체가 계속되었고, 1976년에는 플로렌스 발라드가 사망했다.[97] 1977년, 마지막 원년 멤버였던 메리 윌슨이 탈퇴하면서 슈프림스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986년, 진 테렐, 셰리 페인, 린다 로렌스는 '더 플로스(The FLOS)'라는 이름으로 슈프림스 활동을 재개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1988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0년 재결합 투어가 무산된 후, 2021년 메리 윌슨이 사망했다.[98][99]
2. 1. 결성 및 초기 (1959년 ~ 1963년)

1958년 디트로이트의 브루스터-더글러스 주택 단지에서 중학생 플로렌스 발라드는 남성 그룹 "프라임스"의 멤버였던 폴 윌리엄스와 에디 켄드릭스를 만났다.[2] 프라임스의 매니저는 여성 그룹 "프라임메츠"를 결성하기로 하고, 발라드는 친구 메리 윌슨을, 윌리엄스는 다이애나 로스를 영입했다.[2] 이들은 두왑 그룹 프랭키 라이먼 & 더 틴에이저스의 영향을 받아 발라드, 로스, 윌슨이 동등하게 리드 보컬을 맡았다.[4] 몇 달 후 기타리스트 마빈 타를핀이 합류하여 라이브 공연을 가능하게 했다.[5]
1960년, 프라임메츠는 모타운과의 계약을 희망하며 미라클스의 리드 싱어인 스모키 로빈슨에게 오디션을 요청했다. 로빈슨은 그들을 돕기로 했지만, 기타리스트 타를핀을 더 마음에 들어 하여 프라임메츠의 허락을 받고 미라클스의 기타리스트로 고용했다.[8] 베리 고디는 프라임메츠가 너무 어리다고 판단하여 고등학교 졸업 후 다시 오라고 격려했다.[8][7] 그해 말, 프라임메츠는 루 파인 레코드에서 싱글 "슬픔의 눈물"을 발매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했다.[9] 곧 맥글로운이 약혼으로 탈퇴하고, 바바라 마틴이 합류했다.[9]
프라임메츠는 히츠빌 U.S.A. 스튜디오를 자주 방문하며 마빈 게이, 메리 웰스 등 모타운 아티스트들의 백 보컬을 맡았다.[12] 1961년 1월, 고디는 그룹 이름을 바꾸는 조건으로 계약을 허락했다.[12][13] 더 템테이션스가 된 프라임스와 분리된 후, 발라드는 "더 수프림스"라는 이름을 선택했다.[16][11] 1962년 봄, 마틴이 가정을 위해 탈퇴하여 수프림스는 3인조가 되었다.[17]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수프림스는 탐라에서 "아이 원트 어 가이", "버터드 팝콘"등 6개의 싱글을 발매했지만, ''빌보드'' 핫 100 상위 40위에 들지 못했다.[18] "히트곡 없는 수프림스"라는 별명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은 번갈아 리드 보컬을 맡으며 활동했다.[19] 1963년 12월, "웬 더 러브라이트 스타츠 샤이닝 스루 히스 아이즈"가 ''빌보드'' 핫 100에서 23위에 올랐다.[63]
2. 2. 전성기 (1964년 ~ 1969년)
슈프림스 내부와 모타운 레코드 소속 가수들 사이의 문제는 멤버들 간의 긴장으로 이어졌다. 다른 많은 모타운 가수들은 베리 고디가 슈프림스, 특히 다이애나 로스에게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고 느꼈다.[18] 1967년 초, 그룹의 이름은 잠시 "다이애나 로스와 슈프림스(the Supremes with Diana Ross)"로 공식 변경되었다가 여름 중반에는 "다이애나 로스 & 슈프림스"로 다시 변경되었다.[12] 미라클스는 2년 전에 "스모키 로빈슨 & 미라클스"가 되었고, 1967년 가을에는 마사 & 밴델라스가 "마사 리브스 & 밴델라스"가 되었다.[38] 데이비드 러핀은 템테이션스의 이름을 "데이비드 러핀 & 템테이션스"로 바꾸려고 했지만 실패했다.[39] 그러나 고디는 두 명의 아티스트, 즉 리드 보컬과 그룹을 제공하기 때문에 모타운이 라이브 공연 예약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0]슈프림스의 이름 변경은 이미 존재하던 로스의 솔로 데뷔 루머에 불을 지폈고, 그룹의 직업적, 개인적 해체에 기여했다. 고디는 1966년 가을 초에 로스를 바바라 랜돌프로 교체하려고 했지만, 마음을 바꿔 로스를 몇 년 더 그룹에 남겨두었다.[41]
로스가 슈프림스의 중심이 되면서, 발라드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과도하게 음주하며 체중이 늘어 무대 의상을 더 이상 편안하게 입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격동적인 시기에 발라드는 그룹 동료 메리 윌슨의 조언에 크게 의존했는데, 그녀는 윌슨과 깊은 우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윌슨은 겉으로는 조용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그룹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사적으로는 로스와 고디가 발라드를 몰아내려 한다고 발라드에게 조언했다.[42]
1967년까지 발라드는 녹음 일정에 나타나지 않거나, 공연에 너무 취한 상태로 나타났다. 1967년 초 일부 공연에서는 모타운 백업 그룹 앤댄츠(The Andantes)의 멤버인 말린 배로가 그녀를 대신했다. 고디는 더 영구적인 대체자를 찾아 다시 한번 바바라 랜돌프를 생각했는데, 로스가 솔로로 나가기로 결정되면 랜돌프를 그룹의 리드 보컬로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로스는 랜돌프를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1967년 4월, 고디는 패티 라벨 & 블루 벨스(Patti LaBelle & the Blue Belles)의 멤버이자 발라드와 외모가 비슷한 신디 버드송에게 연락하여 발라드를 대체할 계획을 세웠다.[43] 그는 4월 중순 회의에서 발라드와 그녀의 그룹 동료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분명히 밝혔고, 버드송은 연습을 시작하기 위해 합류했다.[43] 고디는 당시 발라드를 해고하지 않았고, 대신 발라드에게 스스로 그만두라고 요청했다.[43]
버드송은 1967년 4월 29일 할리우드 보울에서 열린 자선 콘서트에서 발라드 대신 슈프림스와 처음 무대에 섰다.[43][44] 공연 후, 고디는 블루 벨스의 변호사가 고디에 대해 금지 명령을 신청하면서 버드송이 여전히 블루 벨스와 계약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5월에 발라드는 시험 기간이라고 생각했던 기간 동안 돌아왔지만, 실제로는 고디가 버드송의 계약을 매입할 수 있을 때까지의 임시 조치였다. 5월과 6월 동안 해고될 위기에 처해 있던 발라드는 체중을 줄이고 약속 시간에 술에 취하지 않고 나타나는 등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드송은 몰래 슈프림스와 함께 여행하며 그들의 루틴을 연구하고 있었다.[43]
1967년 6월 29일, 그룹은 "다이애나 로스 & 슈프림스"로 라스베이거스의 플라밍고 호텔로 돌아왔다. 플라밍고 공연 첫 이틀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7월 1일, 저녁 첫 공연을 앞두고 메이크업과 의상을 준비하던 발라드는 신디 버드송을 위해 가져온 여분의 드레스와 의상을 발견했다. 화가 난 발라드는 그날 밤 첫 번째 콘서트를 취한 상태로 공연했고, 춤을 추는 동안 고의로 배를 내밀면서 배가 드러나는 당황스러운 무대 사고가 발생했다. 격분한 고디는 그녀를 디트로이트로 돌려보내고 그룹에서 영구적으로 해고했다. 버드송은 7월 1일 두 번째 공연에서 공식적으로 그녀의 자리를 차지했다.[45]
발라드의 모타운과의 계약 해지는 1968년 2월 22일, 그녀가 139804.94USD의 로열티와 수입을 일시불로 받으면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46] 그녀는 ABC 레코드에서 솔로 경력을 시도했고, 합의의 일환으로 모타운이 제공한 솔로 계약을 공식적으로 거부해야 했다.[47] 발라드의 1968년 두 개의 싱글은 차트에 오르지 못했고, 솔로 앨범은 보류되었다.[48] 1971년, 발라드는 고디와 다이애나 로스가 공모하여 자신을 그룹에서 쫓아냈다고 주장하며 모타운을 상대로 8700000USD의 소송을 제기했다.[49] 판사는 모타운의 손을 들어주었다. 발라드는 결국 빈곤에 빠졌고, 1976년 2월 22일, 32세의 나이에 관상 동맥 혈전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50]
2. 3. 다이애나 로스 & 더 슈프림스 (1967년 ~ 1970년)
1968년 초, 홀랜드-도지어-홀랜드가 로열티 및 이익 배분 문제로 모타운을 떠났다.[51] 1967년 〈Reflections〉부터 1969년 〈The Weight〉까지 발매된 11개의 싱글 중 6개만이 톱 20에 진입했고, 1968년의 〈러브 차일드〉[52]는 1위를 차지했다. 그룹 내부의 긴장과 빡빡한 투어 일정으로 인해 메리 윌슨과 신디 버드송은 많은 싱글에 참여하지 못했고, 세션 가수인 앤단테스 등으로 대체되었다.[53]아레사 프랭클린과 같은 여성 가수들의 복음 음악 기반 소울이 인기를 얻으면서, 슈프림스의 팝 기반 사운드는 상대적으로 뒤처지게 되었다. 반문화 운동과 블랙 팬서당 같은 반문화 운동의 영향으로, 슈프림스는 "흑인스럽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흑인 음악 시장에서 입지를 잃었다.[54]
1968년 중반, 모타운은 슈프림스와 템테이션스의 협업을 추진했다. 슈프림스는 주로 백인 팬층을, 템테이션스는 주로 흑인 팬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재정적으로도 타당한 결정이었다. 1969년, 레이블은 다이애나 로스의 솔로 경력을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55] 시리타 라이트 등 여러 후보가 고려되었으나, 진 테렐이 로스의 후임으로 선택되었다. 테렐은 모타운과 계약 후 낮에는 윌슨, 버드송과 함께 로스 이후의 슈프림스 노래를 녹음하고, 밤에는 로스와 함께 투어를 다녔다. 동시에 로스는 첫 솔로 녹음을 시작했고, 1969년 11월 2일, 로스의 솔로 경력은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에 처음 보도되었다.[56]
〈언젠가 우리는 함께할 거야〉는 원래 다이애나 로스의 솔로 싱글로 발매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디는 마지막 슈프림스 1위 기록을 원했기 때문에, 윌슨과 버드송이 녹음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이 노래를 다이애나 로스 & 슈프림스 싱글로 발매했다. 이 곡은 미국 팝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슈프림스의 12번째이자 마지막 1위 히트곡이 되었고, 1960년대의 마지막 1위 히트곡이 되었다. 이 싱글은 1969년 12월 21일 ''에드 설리번 쇼''에서 로스와 함께 슈프림스의 마지막 TV 출연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57]
2. 4. 다이애나 로스 탈퇴 이후 (1970년 ~ 1977년)

1970년 스모키 로빈슨 쇼에 출연한 슈프림스는 같은 해 1월 14일 라스베이거스의 프론티어 호텔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다.[58] 이 공연의 라이브 녹음은 ''페어웰''이라는 제목의 2장짜리 박스 세트로 발매되었다. 이 공연에서 다이애나 로스의 대체 멤버로 진 테렐이 소개되었다. 메리 윌슨에 따르면, 베리 고디는 테렐을 시리타 라이트로 교체하려 했으나 윌슨이 거절했고, 고디는 그 이후로 그룹과 관계를 끊겠다고 말했다.[59] 이후 로스는 솔로 가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고, 윌슨과 신디 버드송은 진 테렐과 함께 ''라이트 온'' 작업을 계속했다.[60]
진 테렐이 이끄는 슈프림스(이후 "슈프림스"로 변경, 비공식적으로 "뉴 슈프림스", "70년대 슈프림스"로 불림)는 프랭크 윌슨이 제작한 "업 더 래더 투 더 루프" (미국 10위, 영국 6위), "스톤드 러브" (미국 7위, 영국 3위), "네이선 존스" (미국 16위, 영국 5위) 등의 히트곡을 냈다. 이 세 싱글은 모두 R&B 차트 톱 10에 들었으며, "스톤드 러브"는 1970년 12월 마지막 R&B 1위 히트곡이 되었다. 니콜라스 애쉬포드 & 발레리 심슨은 슈프림스와 포 톱스가 함께 부른 아이크 & 티나 터너의 "리버 딥 – 마운틴 하이"로 또 다른 톱 20 히트곡을 만들었다.[61]
1972년, 슈프림스는 스모키 로빈슨이 작사 및 작곡한 마지막 톱 20 히트 싱글 "플로이 조이"와 진 테렐이 이끄는 마지막 미국 톱 40 히트곡 "오토매틱컬리 선샤인" (미국 37위, 영국 10위)을 발표했다. "오토매틱컬리 선샤인"은 영국에서 그룹의 마지막 톱 10 싱글이 되었다. "플로이 조이"와 "선샤인"에서 테렐은 윌슨과 함께 리드 보컬을 맡았다. 당시 모타운은 디트로이트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하여 영화 제작에 집중하면서 슈프림스의 신곡 홍보에 소홀했고, 인기와 판매량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1972년 4월, 신디 버드송은 ''플로이 조이'' 앨범 녹음 후 가족을 위해 그룹을 떠났고, 스티비 원더의 백업 그룹 서드 제너레이션(원더러브의 전신)의 전 멤버 린다 로렌스가 합류했다. 지미 웹이 ''지미 웹이 제작 및 편곡한 슈프림스''[62]를 제작했지만, 이 앨범과 싱글 "아이 게스 아일 미스 더 맨"은 ''빌보드'' 팝 차트에서 1972년 11월 24일 85위에 그쳤다.[63]
1973년 초, 스티비 원더가 제작한 "배드 웨더"는 미국 팝 차트 87위, 영국 37위에 올랐다.[63][64] 로렌스는 가족을 위해 떠났고, 신디 버드송이 복귀했다.[65] 부진한 기록과 모타운의 홍보 부족에 실망한 진 테렐은 그룹을 떠났고, 인빅투스 레코드 가수 프레다 페인의 여동생 셰리 페인이 합류했다.[65] 모타운과의 불편한 관계는 계속되었고, 버드송은 1974년 피터 맥도널드 기자에게 "모타운과 문제가 있었다… 다른 회사와 더 나은 기회가 생기면 진지하게 고려할 것이다"라고 말했다.[66]
1973년 로렌스와 테렐이 떠난 후 셰리 페인이 참여한 첫 싱글 "히즈 마이 맨"이 나오기까지, 모타운은 페인과 복귀한 버드송의 계약 체결에 소극적이었다. 1975년 앨범 발매 전까지 슈프림스는 영국과 일본 등 해외 투어를 계속했다. 새 앨범은 이전만큼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슈프림스'' 앨범의 "히즈 마이 맨"은 1975년 인기 디스코 히트곡이 되었다. 1976년, 버드송은 다시 떠났고, 원더러브의 전 멤버 수세이 그린이 합류했다.[67]
슈프림스의 마지막 버전은 홀랜드-도지어-홀랜드와 슈프림스를 다시 뭉치게 한 ''하이 에너지''와 ''메리, 셰리 & 수세이'' 두 앨범을 발매했다.[12] 1976년, 슈프림스는 "아임 고나 렛 마이 하트 두 더 워킹"을 발표했는데, 이는 ''빌보드'' 핫 100에서 마지막 톱 40 히트곡이었다.[63]
1977년 6월 12일, 슈프림스는 런던 드러리 레인 극장에서 작별 콘서트를 열었다. 윌슨은 솔로 경력을 위해 떠났고, 페인과 그린은 조이스 빈센트를 새 멤버로 선택했다. 그러나 모타운은 오리지널 멤버가 없으면 슈프림스가 해체될 것이라고 결정했다.[16]
3. 구성원
1973년 ~ 197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