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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동인도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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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1731년부터 1813년까지 존재했던 스웨덴의 무역 회사로, 유럽 국가 중 마지막으로 동인도 무역에 참여했다. 이 회사는 중국과 인도 상품을 수입하여 스웨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차례의 특허를 통해 무역 활동을 이어갔다. 초기에는 외국인 투자와 기술에 의존했으나, 점차 스웨덴 상인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37척의 선박을 이용하여 131번의 항해를 했으며, 차, 도자기, 직물 등을 주요 수입품으로, 철, 은, 모직물 등을 수출했다. 1806년 이후 영국과의 경쟁 심화로 쇠퇴하였고, 1813년에 해산되었다. 1993년에는 회사의 복제품인 예테보리호를 건조하는 새로운 회사가 설립되어, 스웨덴의 해상 무역과 문화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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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동인도 회사 - [회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회사 이름스웨덴 동인도 회사
스웨덴 동인도 회사 인장
SOIC의 작은 인장 (마지막 특허 기간인 1806-1813년)
회사 유형공개 회사
설립일1731년 6월 14일
설립자헨리크 코니히
콜린 캠벨
니클라스 살그렌
해산일1813년 12월 13일
소재지예테보리, 스웨덴
산업무역
웹사이트스웨덴 동인도 회사 웹사이트
역사
설립1731년 6월 14일
해산1813년 12월 13일

2. 역사적 배경

17세기 초, 중국과 인도에서 들여온 상품들이 스웨덴에 수입되면서, 차를 마시고 인도산 친츠 옷을 입으며 중국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스웨덴 사교계와 중산층 사이에서 유행했다.[1] 드로트닝홀름 궁전의 중국 정자와 그릴 가문의 고데고르드 정원처럼, 문화, 철학, 예술, 농업, 건축 등 다양한 분야가 연구되고 모방되었다.[1] 18세기에는 많은 스웨덴 과학자와 정치인들이 중국식으로 주권을 가진 왕이 이끄는 지식인 관료, 즉 만다린에 의해 통치되는 체제를 제안할 정도로 중국 문화의 영향력이 컸다.[1]

스웨덴은 다른 주요 유럽 해양 국가들보다 거의 한 세기 늦게 동인도 무역에 참여했다.[1]

2. 1. 초기 시도

빌렘 위셀링크스는 플라망 상인으로, 스웨덴 동인도 회사를 조직하려는 첫 번째 시도를 했다.[1] 17세기 동안, 네덜란드 상인들은 새롭게 설립된 스웨덴 서해안의 예테보리를 지배했다. 예테보리는 스웨덴의 국제 무역에 이상적인 곳으로 여겨졌는데, 대부분의 상품이 배로 운송되었고, 덴마크외레순 해협 세관을 통과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스웨덴의 유일한 주요 항구였기 때문이다.[2] 1626년 6월 14일, 위셀링크스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12년 동안의 무역 회사에 대한 왕실 특권을 받았다. 이 특권에는 외국 원주민과의 무역 윤리에 대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첫 번째 우선순위는 양 당사자에게 상호 이익이 되는 우호적이고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국왕을 포함한 많은 저명한 스웨덴인들의 지원을 받았지만,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것은 더 어려웠다. 30년 전쟁에 구스타브 2세 국왕이 참전하여 사망하면서 계획은 중단되었다. 대신 자원은 유럽 내 무역을 하는 더 작은 회사에 사용되었다.[3]

1661년, 독일 상인 에를렌캄프가 무역 회사를 설립하려는 다음 시도를 제안했다. 북극해와 북해 항로를 거쳐 일본을 지나 중국인도로 가는 경로였는데, 그 목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봉쇄를 우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음 장벽이 훨씬 더 어려워서 이 계획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4] 1660년대 말, 외교관이자 런던 거주자인 요한 레이온베르흐는 18년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일한 올레 보르에 관한 청원을 칼 11세 스웨덴 국왕에게 보냈다. 보르는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인도 타랑감바디에 있는 덴마크 요새를 스웨덴에 넘겨줄 수 있다고 말했다. 크누트 쿠르크, 페테르 스나크, 요한 올리브크루츠가 회사의 이사로 임명되었지만, 당시 스웨덴의 정치적 불안과 투자자로부터 약속된 자금을 실제로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이 사업도 실패했고, 1674년에 특허가 해산되었다. 남은 자원은 소금 확보를 위해 ''솔렌''(Solen, 태양)과 ''트룸슬라가렌''(Trumslagaren, 고수) 두 척의 배를 리스본으로 보내는 데 사용되었다.[5]

마다가스카르에서 출항한 해적들은 동인도에 대한 스웨덴 무역을 설립하려는 후기 시도를 했다. 다른 무역선들을 공격한 후, 그들은 부유해졌고 합법적인 사업에 돈을 투자하고 정착할 곳을 찾고 있었다. 해적은 약 1,500명이었고, 상당한 수의 무장 함대를 지휘했다. 그들은 칼 12세 스웨덴 국왕에게 보호를 위해 500000GBP와 무장선 25척을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718년, 해적 대표들은 노르웨이와의 전쟁 중 국왕의 진영에서 다시 만났다. 새로운 제안은 스웨덴 국기로 동인도와 무역을 시작하고 예테보리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건으로 무장하고 상품을 실은 배 60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모건이라는 이름의 한 사략선은 동인도 회사에 대한 특허와 그러한 사업의 결과가 될 수 있는 식민지의 총독으로서의 임명장을 실제로 받았다. 1718년 11월 30일에 국왕이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이 사업은 중단되었다.[6]

2. 2. 대북방 전쟁 이후

스웨덴은 대북방 전쟁 이후 빈곤해졌고, 무역은 국가를 재건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여겨졌다. 동인도와의 무역이 충분한 수익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1] 가장 큰 우려는 스웨덴이 회사의 선박과 무역 기지를 방어할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무역 회사들은 경쟁을 막기 위해 다른 선박을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오스텐드 회사에서 경쟁 무역 회사를 설립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었다.[2]

결국 스웨덴의 사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외국 상인과 무역상, 특히 영국인과 네덜란드인들의 강력한 지원이었는데, 이들은 각국 회사에서 배제되었었다. 투자자의 대다수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수입한 상품의 구매자 또한 외국인이었다.[3]

중상주의가 무역에 대한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당시, 헌장을 허가하는 것은 완전히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1735년 ''프리데리쿠스 렉스 스웨시에스''호가 첫 항해를 한 후 반대가 더욱 분명해졌다.[4] 릭스다그에서는 무역 회사에 대한 제재와 제한을 요구했으며, 스웨덴의 강철과 목재가 차와 도자기와 같은 "가치 없는 상품"과 낭비적으로 교환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다수의 팸플릿이 작성되었다. 헌장에 가장 열렬한 비판자 중 한 명은 요한 아르켄홀츠였다. 그는 심지어 도덕적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웨덴 인구가 "더 따뜻한 기후의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일과 공예에서 멀어지고 건강, 힘, 정신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5]

새롭게 부상하는 스웨덴의 섬유 산업 또한 이 무역으로 위협을 받았고, 새로운 회사는 곧 섬유 운송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했다. 1733년부터 1767년까지 61번의 성공적인 귀항 항해 중 3번(1735년, 1740년, 1742년)만이 벵골에서 면 및 실크 섬유와 생사를 운반했다. 어떤 반대는 스웨덴 동인도 회사(SOIC)가 무역으로 얻는 이익에 대한 순수한 질투심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6] 스웨덴 무역 회사 설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중국에서 상품을 원한다면 어차피 구매할 것이고, 스웨덴 선박과 무역 회사를 이용하여 수입하여 이익을 스웨덴 내부에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7]

3. SOIC 설립

1727년 5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오스텐드 회사의 특허를 중단시키면서 투자자들은 동인도 무역에 참여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3]

스코틀랜드 상인 콜린 캠벨은 니클라스 살그렌과 함께 스웨덴 무역 회사 설립을 계획했다.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의심 때문에, 회사를 대표할 스웨덴인으로 헨리크 쾨니히가 참여했다.

1729년 쾨니히는 특허 신청을 했지만, 스웨덴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1731년 빈 조약으로 오스텐드 회사가 폐쇄되면서, 쾨니히는 스웨덴 의회에서 1731년 6월 14일에 회사에 대한 왕실 특권을 얻는 데 성공했다.

3. 1. 설립 주역

콜린 캠벨(1686–1757), 스웨덴 동인도 회사의 공동 설립자이자 이사


니클라스 살그렌(1701–1776), 스웨덴 동인도 회사의 공동 설립자이자 이사


헨리크 쾨니히(1686–1736), 스웨덴 동인도 회사의 공동 설립자이자 이사


1727년 5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오스텐드 회사의 특허를 중단시키면서 해당 회사의 투자자들은 수익성 있는 동인도 무역에 참여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들은 이제 스웨덴을 주시하게 되었다.[3]

오스텐드 회사에서 활동했던 스코틀랜드 상인 콜린 캠벨은 1720년대 후반 살그렌이 암스테르담에 머무는 동안 스웨덴의 니클라스 살그렌을 만났다. 그들은 함께 스웨덴 무역 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지만, 캠벨이 이 사업의 추진력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스웨덴에서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회사를 앞세울 존경할 만한 스웨덴인이 필요했다. 그 인물은 독일 브레멘 출신 스웨덴인인 위원 헨리크 쾨니히가 될 것이다.

1729년, 헨리크 쾨니히는 두 척의 배에 대한 특허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전에 다른 신청자에게 주어진 특허를 근거로 요청했지만, 스웨덴 정부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1731년 빈 조약의 일환으로 영국 외교적 압력에 따라 오스텐드 회사가 폐쇄되면서, 무역과 정치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때 스웨덴이 주요 강대국과 경쟁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쾨니히는 이 문제를 스웨덴 의회로 가져갔고, 1731년 6월 14일에 회사에 대한 왕실 특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15년 동안이었다.

3. 2. 왕실 특허 (Octroi)

1727년 5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오스텐드 회사의 특허를 중단시키면서, 해당 회사의 투자자들은 수익성 있는 동인도 무역에 참여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들은 스웨덴을 주시하게 되었다.[3]

오스텐드 회사에서 활동했던 스코틀랜드 상인 콜린 캠벨은 1720년대 후반 니클라스 살그렌이 암스테르담에 머무는 동안 그를 만났다. 그들은 함께 스웨덴 무역 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지만, 캠벨이 이 사업의 추진력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스웨덴에서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회사를 앞세울 존경할 만한 스웨덴인이 필요했다. 그 인물은 독일 브레멘 출신 스웨덴인 헨리크 쾨니히였다.

1729년, 헨리크 쾨니히는 두 척의 배에 대한 특허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전에 다른 신청자에게 주어진 특허를 근거로 요청했지만, 스웨덴 정부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1731년 빈 조약의 일환으로 영국 외교적 압력에 따라 오스텐드 회사가 폐쇄되면서, 무역과 정치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때 스웨덴이 주요 강대국과 경쟁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쾨니히는 이 문제를 스웨덴 의회로 가져갔고, 1731년 6월 14일에 회사에 대한 왕실 특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15년 동안이었다. 이러한 특권은 제1차 특허 또는 제1차 옥트루아였다.

특허장은 Henrik König & Compagnie에 주어졌으며, 무역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18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번호내용
1회사는 희망봉 동쪽에서 일본까지의 모든 무역과 해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다른 유럽 국가의 무역 기지는 미리 자유로운 동의를 얻지 않는 한 예외로 한다.
2모든 출발과 도착은 예테보리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화물은 도착 즉시 예테보리에서 경매에 부쳐야 한다.
3스웨덴 정부는 선적마다 läst(약 2.5MT)당 100 릭스달러와 예테보리 시에 2 릭스달러를 지불해야 하며, 여기에 세금이 추가된다.
4회사는 원하는 만큼 많은 선박을 사용할 수 있지만, 다른 국가에서 자재를 구매해야 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 한 스웨덴에서 건조되고 장비를 갖춰야 한다.
5선박은 스웨덴 국기를 게양하고 스웨덴 선박 서류를 소지해야 한다.
6회사는 원정에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며, 벤처 사업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
7회사는 스웨덴 주화 은을 국내로 반입하거나 반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은과의 거래는 허용되었다.
8선박이 출항을 위해 적재되었을 때와 반환되었을 때, 스웨덴의 모든 항구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9회사에 필요한 모든 장비, 무기, 물품은 스웨덴 관세에서 면제되었다.
10선박에서 나온 상품은 우선순위가 부여되어 모든 도로 또는 모든 마을에서 통행료 없이 운송되거나 보관될 수 있었다.
11회사의 임원은 스웨덴 해군 장교와 동일한 권한을 갖게 된다.
12승무원은 스웨덴 군 복무에서 면제되었다.
13회사의 임원은 탈영하거나 도망치려는 승무원을 체포하고 구금할 권리가 있었다.
14선박에서 나온 화물이 판매되었을 때, 구매자는 상품에 대한 추가 수수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15회사의 이사회는 항상 최소 세 명의 이사로 구성되어야 했다.
16회사는 선박에 필요한 만큼의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가장 숙련된 사람이기만 하면 스웨덴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었다.
17회사는 "힘에 힘으로 맞서는" 자위권을 가졌다.
18회사는 재정과 주주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도록 명령받았다.



SOIC에 대한 왕실 특권, 1731년 6월 14일


주식 발행은 초기 가입자들이 각 항해에 대해 구독하고 항해 완료 후 자본을 철회할 수 있는 옵션을 가졌으며, 이는 전통적인 형태의 기업 무역 파트너십과 같았다. 1753년,[3] 이것이 불편한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다른 동인도 회사 모델에 따라 자본은 회사 전체에 투자된 것으로 간주하기로 결정되었다. 자금을 인출하려는 파트너는 자신의 자본을 기꺼이 대체할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책임이 있었다.

재정과 주주에 대한 비밀 유지는 내부 및 외부적인 이유가 있었다. 영국 시민은 스웨덴 동인도 회사를 대신하여 아시아에서 무역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스웨덴 내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의심이 높았으며, 그들이 이 지역에서 스웨덴의 이익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속하지 않은 상인들의 질투심도 한몫했다. 따라서 장부는 닫히고 수정된 후 소각되어 회사의 거래를 동시대 사람들과 역사학자로부터 효과적으로 숨겼다.

특권 서한은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번역되어 주요 강대국에 배포되었다. 그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으며, 그들은 새로운 회사를 가장 달갑지 않은 경쟁자로 간주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영국 주재 스웨덴 대사는 영국 정부에 서한을 제시하는 것을 감히 하지 못했다. 필요한 경우 기지에 대한 지원 약속은 응답이 없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스웨덴을 경쟁자로 간주하며 그러한 벤처에 기여하거나 지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4. 무역 활동

1787년 예테보리, 오른쪽에 스웨덴 동인도 회사 건물, 엘리아스 마틴


1782년 5월 2일 발행된 스벤스카 오스트-인디스카 콤파니에의 주식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1731년부터 1813년까지 37척의 선박을 이용하여 총 131번의 항해를 했다.[8] 선박들은 예테보리에서 철, 구리, 목재 등을 싣고 카디스에 기항하여 중국 무역에 필수적인 스페인 은을 확보했다.[9] 또한 바르바리 해적의 습격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알제리의 데이에게 세금을 지불하고 모로코 여권을 소지했다.[9]

원정대의 수익률은 투자 자본의 약 25~30%였지만, 최대 60%까지 달성하기도 했다. 이는 상인과 선장의 능력에 크게 좌우되었다. 선박의 길이는 약 50m였으며, 각 선박에는 25~30문의 대포가 탑재되었다. 1766년 이후 대부분의 해에는 한두 척의 스웨덴 동인도 회사 선박이 광저우에서 적재되었고, 많게는 네 척(1785~86년)이 적재되었다. 마지막 선박은 1806년 3월에 예테보리로 돌아왔고, 회사는 1813년에 해산되었다. 선상 생활은 힘들고 위험했으며, 선원들은 영양 부족과 질병에 시달렸다. 회사에 복무하면서 약 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4. 1. 항해 및 손실

1731년부터 1813년까지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37척의 선박을 이용하여 총 131번의 항해를 했다.[8] 이 중 8척의 배가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손실되었다. 가장 큰 손실은 1745년 예테보리호였는데, 중국을 안전하게 왕복하고 예테보리 입구에서 침몰했다.[8] 항해는 주주들에게 매우 수익성이 좋았고, 많은 스웨덴인들이 스웨덴 동인도 회사로 인해 부유해졌다.

선박은 예테보리에서 철괴, 도끼, 닻, 강철 등 가공된 철과 구리, 목재를 운반했다. 원정대는 카디스에 기항하여 중국 무역에 필수적인 스페인 은을 획득하기 위해 상품을 거래했다.[9] 또한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바르바리 해적의 습격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알제리의 데이에게 세금을 지불하고 모로코 여권을 소지해야 했다.[9]

원정대의 수익률은 투자 자본의 약 25~30%였지만, 최대 60%까지 달성했다. 선박의 길이는 약 50m였으며, 화물과 선원 외에도 각 선박은 자체 방어 및 신호용으로 약 25~30문의 대포를 탑재했다. 1766년 이후 대부분의 해에는 한두 척의 스웨덴 동인도 회사 선박이 광저우에서 적재되었고, 많게는 네 척(1785~86년)이 적재되었다. 마지막 선박은 1806년 3월에 예테보리로 돌아왔고, 회사는 1813년에 해산되었다.

선상 생활은 힘들고 위험했는데, 선원들은 영양 부족에 시달렸고 항해 중에 방문하는 항구의 더위와 습도에 익숙하지 않았다. 회사에 복무하면서 약 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4. 2. 수익성

대북방 전쟁 이후 스웨덴은 빈곤한 상황이었고, 무역은 국가 재건의 한 방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동인도와의 무역이 충분한 수익을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7]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무역 회사들의 경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오스텐드 회사 설립 시도가 실패한 것도 이러한 우려를 더했다.[7]

하지만 외국 상인, 특히 영국인과 네덜란드인들이 스웨덴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들은 각국 회사에서 배제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스웨덴 동인도 회사에 투자하고 상품을 구매하는 데 적극적이었다.[7]

당시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중상주의는 수출 상품 생산을 장려하고 수입을 줄이는 규제를 옹호했기 때문에, 헌장을 허가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1735년 ''프리데리쿠스 렉스 스웨시에스''호가 첫 항해를 한 후 반대가 더욱 거세졌다.[7] 릭스다그에서는 무역 회사에 대한 제재와 제한을 요구했고, 스웨덴의 강철과 목재가 차와 도자기와 같은 "가치 없는 상품"과 낭비적으로 교환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7] 요한 아르켄홀츠는 스웨덴 인구가 "더 따뜻한 기후의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일과 공예에서 멀어지고 건강, 힘, 정신을 잃을 것"이라고 비판했다.[7]

새롭게 부상하는 스웨덴의 섬유 산업 또한 위협을 느꼈고, 회사는 곧 섬유 운송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했다. 1733년부터 1767년까지 61번의 귀항 항해 중 3번(1735년, 1740년, 1742년)만이 벵골에서 면 및 실크 섬유와 생사를 운반했다.[7] 이러한 반대는 무역으로 얻는 이익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7] 스웨덴 무역 회사 설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중국 상품을 원한다면 어차피 구매할 것이고, 스웨덴 선박과 무역 회사를 이용하여 수입하여 이익을 스웨덴 내부에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7]

1731년부터 1813년까지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37척의 선박을 이용하여 총 131번의 항해를 했다.[8] 이 중 8척의 배가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손실되었는데, 1745년 ''예테보리''호가 예테보리 입구에서 침몰한 것이 가장 큰 손실이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해는 주주들에게 매우 수익성이 좋았고, 많은 스웨덴인들이 이 회사 덕분에 부를 얻었다.[7]

선박은 예테보리에서 철괴, 도끼, 닻, 강철 등 가공된 철과 구리, 목재를 운반했다. 원정대는 카디스에 기항하여 중국 무역에 필수적인 스페인 은을 획득하기 위해 상품을 거래했다.[9] 헌장에 따르면 중국으로 운반되는 은은 주조되었든 주조되지 않았든 스웨덴 소유일 수 없었기 때문에, 동전, 페소 두로 형태로 거래되었다.[9] 또한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알제리의 데이에게 세금을 지불하고 모로코 여권을 소지하여 바르바리 해적의 습격으로부터 보호받았다.[9]

원정대의 수익률은 투자 자본의 약 25~30%였으며, 최대 60%까지 달성하기도 했다. 이는 상인과 선장의 능력에 크게 좌우되었는데, 상인들은 유리한 거래를 성사시켜야 했고, 선장은 배를 안전하게 중국으로 왕복시켜야 했다.[7] 1766년 이후 대부분의 해에는 한두 척의 스웨덴 동인도 회사 선박이 광저우에서 적재되었고, 많게는 네 척(1785~86년)이 적재되었다.[7] 마지막 선박은 1806년 3월에 예테보리로 돌아왔고, 회사는 1813년에 해산되었다.[7]

선상 생활은 힘들고 위험했으며, 선원들은 영양 부족과 열악한 환경에 시달렸다. 회사에 복무하면서 약 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7]

5. 특허 기간 (Octroi)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1731년부터 1813년까지 4차례에 걸쳐 특허(Octroi)를 받아 무역을 독점했다.


  • 제1차 특허 기간(1731~1746년): 25척의 선박으로 15차례 원정을 떠났고, 4척이 손실되었다. 주로 광저우와 무역했으며, 평균 39%의 배당금을 지급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견제를 받았다.
  • 제2차 특허 기간(1746~1766년): 36척의 선박이 파견되었고, 1척이 손실되었다. 수라트로 3척이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광저우로 향했다. 주식회사 형태로 재편되었고, 평균 30~40%의 이익을 냈다.
  • 제3차 특허 기간(1766~1786년): 39번의 항해가 이루어졌고, 선박 손실은 없었다. 중국과의 무역 수익은 감소했지만, 미국 독립 전쟁으로 차 무역에서 일시적 호황을 누렸다.
  • 제4차 특허 기간(1786~1806년): 12척의 선박으로 31번 항해했고, 3척이 손실, 1척은 매각되었다. 영국의 새 차 수입 규정으로 이익이 감소, 주주들은 배당금을 받지 못했다. 1811년 회사는 파산했다.

5. 1. 제1차 특허 (1731–1746)

1725년에 제작되어 스웨덴 동인도 회사 선박에서 사용된 소총


스웨덴 동인도 회사의 초대 이사 3인은 헨릭 쾨니히(Henrik König), 콜린 캠벨(Colin Campbell), 프랑스 베도이어(Frans Bedoire)였다. 쾨니히는 스톡홀름 출신의 상인이었고, 베도이어는 프랑스 포도주를 수입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이주한 프랑스 가발 제작자의 아들이었다.[10] 캠벨은 오스텐드 회사의 감독상인으로 중국 무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얻었기 때문에 이 사업 전체의 원동력이었다. 그는 프레드리크 1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고, 첫 번째 원정을 조직하기 위해 예테보리로 이주했다.[10]

초기 두 차례의 원정은 다른 무역 국가들이 스웨덴의 무역 참여 시도를 달가워하지 않아 위험하고 복잡했다. 첫 번째 선박은 네덜란드에 의해 나포되었고, 두 번째 선박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는 스웨덴 내에서 무역에 대한 반대를 부추겼고,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동인도와의 무역의 이점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중국에서 수입할 상품에 대한 특정 양보를 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무역 국가와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회사는 인도와의 무역을 추구하지 않고 대신 중국에 집중했다.

첫 번째 특허 기간 동안 총 25척의 선박이 15차례의 원정을 떠났으며, 이 중 4척이 항해 중 손실되었다. 원정 중 3차례만 벵골로 향했고, 나머지는 직접 광저우로 향했다.

초기 원정의 서적과 회계 장부들은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유실되었지만, 8차 원정(1740년의 ''Fredericus Rex Sueciae'', ''Stockholm'' 및 ''Riddarhuset'' 선박)부터 1748년 마지막 원정의 종료까지 기록이 매우 완벽하여 이익을 추정할 수 있었다. 수입 상품의 총 수입은 24649000USD였으며, 이는 평균 약 39%의 배당금을 발생시켰다. 그 해 동안 5명의 이사에 대한 이익의 총액은 27280000USD였으며, 53명의 감독상인에게 돌아간 총액은 약 39670000USD였다.

초창기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기존의 무역 국가들이 스웨덴 동인도 회사를 돕고 인정하려 하지 않은 것은, 이 회사가 자국 내 동인도 무역의 규칙과 규제를 피하려는 상인들의 위장이라는 의혹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혹은 근거가 있었는데, 스웨덴 동인도 회사의 창립자들은 모두 스웨덴인이 아니거나 외국 출신이었다. 스웨덴 법은 회사에 투자하는 모든 사람이 스웨덴 시민권을 받을 수 있게 했고, 첫 번째 및 두 번째 특허 기간 동안 선박에 탑승한 승무원의 대부분은 외국인이었다. 첫 번째 특허 기간 동안 활동한 53명의 감독상인 중 약 22%가 스웨덴인이었다.

바타비아 성벽 내 총독 관저와 VOC 건물. 중앙에는 예배당이 있다.


첫 번째 탐험은 캠벨에 의해 조직되었다. 1986년에 재발견된 그의 항해 일지 재구성본에는 탐험에 대한 완전한 기록이 담겨 있다. 1732년 2월 9일, 배 ''프레데리쿠스 렉스 스웨디아에''가 예테보리를 출항했다. 캠벨은 선상에서 첫 번째 수퍼카고였으며 국왕에 의해 중국 궁정에 대사로 임명되었다. 다른 세 명의 수퍼카고는 찰스 그레이엄, 찰스 모포드, 존 파이크로, 모두 영국인이었다. ''프레데리쿠스''의 선장은 암스테르담에서 성장했으며 이전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선박에서 복무한 게오르그 헤르만 아프 트롤레였다. 그는 사략선으로 미델부르흐 마을에 고용되기도 했으며, 캠벨과 마찬가지로 이전에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배의 선원은 약 100명이었다.

탐험은 순조롭게 시작되어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을 건너 1732년 9월에 중국의 외국인 무역항인 광저우(현재의 광저우)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후 4개월 동안 성공적인 무역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다양한 향신료가 주요 상품이었고 차, 비단, 기타 사치품과 함께 거래되었지만, 이후 항해에서는 유럽에서 이러한 상품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도자기와 차가 무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귀국길에 배는 자바와 수마트라 사이에서 네덜란드에 의해 정지되었고 바타비아로 끌려갔다. 캠벨은 항의하며 서류를 제시했지만, 네덜란드는 배가 스웨덴 국기를 위조하여 게양한 것을 의심했다. 탐험은 결국 풀려났지만 시간은 낭비되었고 바람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많은 선원들이 항해 중에 사망했고, 배는 노르웨이 해안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노르웨이 선원을 모집해야 했다.

출발한 지 거의 1년 반 만인 1733년 8월 27일에 배는 예테보리로 돌아왔다. 탐험은 엄청난 경제적 성공을 거두어 경매에서 약 900000SEK를 벌어들였다. 지불된 배당금은 투자 자본의 75%였다. 1733년부터 1734년까지 예테보리 해상 무역 본관 세관의 장부에 따르면 518972SEK 상당의 상품이 수출되었고, 나머지는 스웨덴에 남았다.

5. 2. 제2차 특허 (1746–1766)

요한 프레드릭 달만(Johan Fredrik Dalman)의 작품으로, 1748~49년의 광저우 강변 지역


1746년에 헌장이 갱신되어 제2차 특허가 만들어졌다.[1][2] 제2차 헌장에 따라 36척의 선박이 파견되었는데, 이 중 3척은 수라트로, 나머지는 광저우로 향했으며, 단 1척만 손실되었다.[3]

제1차 헌장 기간 동안 주주들에게 돌아간 이익은 제2차 헌장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외국인 투자자들을 제외하면, 제1차 헌장 기간 동안 대부분의 상인들은 예테보리 출신이었다. 제2차 헌장에서는 스톡홀름 출신 상인들이 무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745년 9월 23일, ''아브라함과 야코브 아르프베드손 & Co''(Abraham and Jacob Arfwedsson & Co) 회사가 제2차 옥트루아에 대한 요청을 제출하여 예비 허가를 받았다. 몇 주 후, ''안데르스 플롬그렌 & C:o''(Anders Plomgren & C:o) 회사와 파트너 칼 브로만(Carl Broman)이 옥트루아에 대한 두 번째 요청을 했다. 제1차 헌장 이사들은 1746년 1월 20일에 요청서를 제출했다.[4]

1746년 3월 24일, 신청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임명되었고, 몇 주 후인 5월 14일에 제1차 헌장 이사들이 제2차 헌장도 이끌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렸다.[5] 그러나 이사 수는 3명에서 최소 7명으로 늘어났다. 콜린 캠벨, 니클라스 살그렌, 테오도르 안카르크로나(Teodor Ankarcrona) 외에, 행정 위원회 전 비서인 마그누스 라게르스트룀(Magnus Lagerström), 스톡홀름 상인 안데르스 플롬그렌(Anders Plomgren), 아브라함 그릴이 이사로 임명되었다. 이사회 6명의 멤버는 후에 클라스 그릴, 야콥 폰 우트팔 예손(Jacob von Utfall Jeanson), S. N. 벵그렌(S. N. Wenngren), 닐스 스트룀(Nils Ström)을 이사로 선출했다.[6]

제2차 헌장은 20년 동안 유효했으며, 이사들은 제1차 옥트루아의 방식을 따랐다. 그들은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처음 14척의 선박 각각에 개별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1753년, 회사는 주식을 500RD 이상 구매할 수 있는 고정 기금을 만들어 주식회사로 재편되었다.[7]

회사가 공개된 후에도 사업과 관련된 비밀은 유지되었다. 경영진은 주주들에게 정보를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사업의 수익성 있는 부분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이사들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이익이 감소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무역 규정에 반하여 인도에 선박을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회사에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1749년에 예외가 허용되었고, 한 척의 선박이 인도의 수라트로 파견되었다. 1752년에 돌아온 그 선박은 103%의 이익을 냈고, 두 척의 선박이 더 수라트로 파견되었다. 영국네덜란드는 그 도시의 무역을 대부분 통제했고, 스웨덴이 그곳에서 사업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몇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는 대신 중국 무역에 다시 집중하기로 결정했으며, 그 무역은 제2차 헌장 기간 동안 평균 30~40%의 이익을 냈다.[8]

5. 3. 제3차 특허 (1766–1786)

광저우 13개 공행, 덴마크, 스페인, 미국, 스웨덴, 영국, 네덜란드의 국기, c. 1820


1766년 특허장을 갱신할 당시 초대 이사들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버트 핀레이, 스웨덴 출신의 파비안 뢰벤, 독일 출신의 게오르그 헤르만 콘라디였으며, 모두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경영권은 예테보리에서 스톡홀름으로 이동했으며, 두 척의 새로운 배도 구매되었다.[1] 스웨덴 정부는 스웨덴 동인도 회사(SOIC)에 6% 이자로 대출을 강요하여 1766년부터 1769년까지 상환하도록 했는데, 1813년에는 100000GBP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산되었으며, 그 절반에 해당하는 무이자로 수입 관세로 상환하도록 했다.[2] 이는 본질적으로 관세 선불이었다.[3]

세 번째 특허 기간 동안 광저우로 39번의 항해가 이루어졌으며 배가 손실되거나 손상된 경우는 없었지만, 중국과의 무역으로 인한 수익은 감소하고 있었다. 스웨덴의 전환점은 1780년 미국 독립 전쟁으로,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이 영국에 대항하여 연합하면서 이후 중국과의 무역이 차단되었다. 수요 부족으로 인해 광저우의 차 가격은 하락했지만, 스웨덴이 이제 사실상 유일한 차 공급업체가 된 유럽에서는 가격이 상승했다. 이는 세 번째 특허 기간의 총 수익이 이전 두 번의 특허 기간보다 58% 더 높았다는 사실에 반영되었다.[4]

그 기간 동안 스웨덴에서 수출된 상품도 변경되었다. 이전 주요 제품인 철, 나무, 타르 등은 화물 목록에서 빠졌다. 대신 가장 큰 품목은 은이었고, 그 다음은 영국산 납과 스웨덴산 모직물 또는 광목이었다.[5] 세 번째 특허 기간 후반부에는 수퍼카고(supercargo, 선박 화물 관리자) 중 한 명이 몇 년 동안 광저우에 영구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그 중 한 명은 장 아브라함 그릴로, 그곳에서 개인적인 일에 시간을 충분히 활용했으며, 다른 상주 수퍼카고들도 이 관행을 따랐다.[6] 칼 린네와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또한 회사의 배를 이용했다. 그들은 배가 방문하는 모든 곳에서 동물과 식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상세한 일지를 작성하기 위해 과학자와 연구원들을 파견했다. 회사는 한가한 승객의 탑승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신학 "속성 과정"을 받고 서둘러 선상 채플린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두 번째 특허 기간 동안 시작되어 세 번째 특허 기간 동안 절정에 달했다.[7]

1758년, 스웨덴은 유럽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드디어 자국 선박이 케이프타운으로 알려진 케이프(Cape)에서 닻을 내리고 물자를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783년 미국 전쟁이 끝나면서 스웨덴은 차 무역에서 이점을 잃었고, 회사의 쇠퇴가 재개되었다. 1777년 광저우에 있던 SOIC의 수퍼카고인 핀란드 출신 페테르 요한 블라드는 이에 대해 고찰하며, 유럽과 중국의 무역을 스웨덴이 관리하는 단일 유럽 회사에서 수행하도록 제안하는 제안을 중국 황제에게 특사를 보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영국이 "참을 수 없는 지배"를 확보하여 인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을 침투하지 못하도록 시간 안에 막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제안은 이사들이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무역을 지속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결코 보내지지 않았다.[8]

세 번째 특허 기간 동안 SOIC의 상업적 확장은 야콥 발렌베리가 쓴 희극 ''Min son på galejan''("내 아들이 갤리선에")[11]의 배경이 되었으며, 이 작품은 1769~71년 광저우 왕복 18개월 동안 쓰여졌다.

5. 4. 제4차 특허 (1786–1806)

스웨덴 동인도 회사(SOIC)는 네 번째 특허장에서도 세 번째 특허장 후반부와 거의 동일하게 존속했다. 경영진은 동일했고, 고정 자금이 존재했으며 일부 수수료, 세금 및 규정이 변경되었다. 이 기간 동안 회사는 총 31번의 항해에 12척의 선박을 운용했다. 이 중 3척은 손실되었고 1척은 손상되어 매각되었다. 주주들은 네 번째 특허장 기간 동안 배당금을 받지 못했다.[1]

무역 이익은 영국으로의 차 수입에 관한 새로운 규칙과 규정으로 인해 계속 감소했다. SOIC의 이전 차 화물 대부분은 영국으로 밀수되었지만, 더 이상 그러한 사업의 위험을 감수할 만큼 이익이 남지 않았다.[2] 1789년에 회사를 폐쇄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1804년 이후에는 스웨덴에서 더 이상 선박이 출항하지 않았다. 1808년 6월 27일, 회사는 주주들에게 상황을 알렸고, 1811년 5월 18일에 네 번째 특허장의 회사는 파산 선고를 받았다.[3]

6. 쇠퇴와 해산

스웨덴 동인도 회사(SOIC)는 네 번째 특허장에서도 세 번째 특허장 후반부와 거의 동일하게 존속했다. 경영진, 고정 자금은 동일했으며 일부 수수료, 세금 및 규정이 변경되었다. 이 기간 동안 회사는 총 31번의 항해에 12척의 선박을 소유했고, 이 중 3척은 손실, 1척은 손상되어 매각되었다. 주주들은 네 번째 특허장 기간 동안 배당금을 받지 못했다.[1]

무역 이익은 영국으로의 차 수입에 관한 새로운 규칙과 규정으로 인해 계속 감소했다. SOIC의 이전 차 화물 대부분은 영국으로 밀수되었지만, 더 이상 그러한 사업의 위험을 감수할 만큼 이익이 남지 않았다.[2] 1789년에 회사를 폐쇄하자는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1804년 이후에는 스웨덴에서 더 이상 선박이 출항하지 않았다. 1808년 6월 27일 회사는 주주들에게 상황을 알렸고, 1811년 5월 18일 네 번째 특허장의 회사는 파산 선고를 받았다.[3]

1806년에 시작된 다섯 번째 옥트루아는 15년 동안 특권을 부여했지만, 이전과는 상당히 달랐다. SOIC가 2년 이내에 선박을 출항하여 무역을 시작하지 않으면 누구든 희망봉 반대편 국가와 무역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투자자들의 무역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선박은 출항하지 않았고, 1813년 12월 13일 주주총회에서 회사는 옥트루아 종료 8년 전에 해산되었다. 남은 주식과 재고는 외국인 구매자에게 매각되었고, 1814년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선언되었다.

7. 주요 수입품 및 수출품

18세기 스웨덴 동인도 회사가 스웨덴으로 가져온 채색된 중국 실크 직물


스웨덴 동인도 회사의 주요 수입품은 차였으며, 1774년에는 그 비중이 약 90%에 달했다. 대부분의 차는 동인도 회사의 무역 독점 가격을 낮추면서 영국으로 밀수출되었다. 도자기는 화물 가치의 약 5%를 차지했으며, 약 5천만 점이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락주 또한 중요한 수입품이었다.[12] 1813년 윌리엄 밀번이 인쇄한 화물 집계에는 차, 직물, 약재, 기타 물품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북방 전쟁 이후 스웨덴은 빈곤한 상태였고, 무역은 국가 재건의 한 방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동인도 무역의 수익성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중상주의 사상에 따라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에 헌장 허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무역 회사에 대한 제재 요구와 함께 스웨덴의 강철과 목재가 차와 도자기와 같은 "가치 없는 상품"과 교환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무역 회사 지지자들은 중국 상품에 대한 수요가 있다면 스웨덴 회사를 통해 수입하여 이익을 스웨덴 내부에 두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7. 1. 수입품

1770~90년경 중국에서 제작되어 스웨덴 동인도 회사(SOIC)에서 수입한 자기 설탕 그릇, 예테보리 시립 박물관


중국에서 온 주요 가치 있는 화물은 차였다. 1774년의 개요에 따르면 그 비중은 약 90%였다. 차의 대부분은 재수출되어 동인도 회사가 가진 자국 무역 독점의 가격을 떨어뜨리면서 영국으로 밀수출되었다. 도자기 또한 중요하여 화물 가치의 약 5%를 차지했다. 수년에 걸쳐 스웨덴 동인도 회사가 약 5천만 점의 도자기를 수입한 것으로 추정된다.[12] 스웨덴에 새로운 상품인 아락주도 귀중하게 여겨졌다.

1813년 윌리엄 밀번이 인쇄한 화물 집계는 다음과 같다.

종류상세 내역
차 상자
직물
약재
기타


7. 2. 수출품

대북방 전쟁 이후 스웨덴은 빈곤한 상태였으며, 무역은 국가 재건의 한 방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동인도와의 무역이 충분한 수익을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1] 가장 큰 우려는 스웨덴이 회사의 선박과 무역 기지를 방어할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무역 회사들은 경쟁을 막기 위해 다른 선박을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오스텐드 회사에서 경쟁 무역 회사를 설립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것도 이러한 우려를 더했다.[2]

중상주의는 수출 상품 생산을 장려하고 수입을 줄이기 위한 규제를 옹호하는 사상이었으며, 당시 무역에 대한 지배적인 사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헌장을 허가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1735년 ''프리데리쿠스 렉스 스웨시에스''호가 첫 항해를 한 후 반대는 더욱 분명해졌다.[3] 릭스다그에서는 무역 회사에 대한 제재와 제한을 요구했으며, 스웨덴의 강철과 목재가 차와 도자기와 같은 "가치 없는 상품"과 낭비적으로 교환되고 있다는 주장을 담은 다수의 팸플릿이 작성되었다. 헌장에 가장 열렬한 비판자 중 한 명은 요한 아르켄홀츠였는데, 그는 심지어 도덕적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웨덴 인구가 "더 따뜻한 기후의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일과 공예에서 멀어지고 건강, 힘, 정신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4]

새롭게 부상하는 스웨덴의 섬유 산업 또한 이 무역으로 위협을 받았고, 새로운 회사는 곧 섬유 운송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했다. 1733년부터 1767년까지 61번의 성공적인 귀항 항해 중 3번(1735년, 1740년, 1742년)만이 벵골에서 면 및 실크 섬유와 생사를 운반했다.[5] 어떤 반대는 스웨덴 동인도 회사가 무역으로 얻는 이익에 대한 순수한 질투심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6] 스웨덴 무역 회사 설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중국에서 상품을 원한다면 어차피 구매할 것이고, 스웨덴 선박과 무역 회사를 이용하여 수입하여 이익을 스웨덴 내부에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7]

8. 선박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1731년부터 1813년까지 132회의 항해에 총 37척의 배를 사용했다.[15] 이 중 8척은 난파되었다. 회사의 선박 목록은 다음과 같다.

스웨덴 동인도 회사 선박 목록[15]
선박건조 장소적재량
(t)
대포
(문)
승무원
(명)
항해 횟수
제1차 옥트루아 (1731년 6월 14일 – 1746년 6월 14일)
프리데리쿠스 렉스 스웨치에스톡홀름 테라 노바 부두520ton201005
드로트닝 울리카 엘레오노라전 영국 선박 더 히트코트650ton-1031
트레 크로노르스웨덴 외부 미상 지역663ton28-1
수에시아스톡홀름 테라 노바 부두735.8ton281202
예테보리 (I)스톡홀름 테라 노바 부두884ton301203
1745년 9월 12일 예테보리에서 침몰
스톡홀름스톡홀름 클라손 부두676ton281203
1745년 1월 12일 셰틀랜드에서 침몰
리다르후세트스톡홀름 클라손 부두884ton301352
칼마르칼마르660.4ton221003
드로트닝겐 아프 스베리에스톡홀름1006.2ton301302
1745년 1월 12일 셰틀랜드에서 침몰
크론프린세산 로비사 울리카-832ton241201
프리덴스톡홀름 테라 노바 부두676ton221201
크론프린센 아돌프 프리드리크스톡홀름 스토라 스타스 부두1006.2ton271401
제2차 옥트루아 (1746년 6월 17일 – 1766년 6월 17일)
프린스 구스타프스톡홀름 테라 노바 부두613.6ton281101
요타 레온-806ton281203
프리덴제1차 옥트루아와 동일 선박676ton221301
호페트스톡홀름 테라 노바 부두728ton28302
크론프린세산 로비사 울리카제1차 옥트루아와 동일 선박832ton241201
에니헤텐스톡홀름 쥬르고르덴 부두975ton281404
크론프린센 아돌프 프리드리크제1차 옥트루아와 동일 선박1006.2ton271402
프린스 칼스톡홀름 클라손 부두910ton301406
프린스 프리드리크 아돌프스톡홀름 테라 노바 부두1034.8ton261304
1761년 9월 3일 남중국해에서 침몰
프린세산 소피아 알베르티나스톡홀름 스토라 스타스 부두1045.2ton261343
스톡홀름스 슬로트스톡홀름 스토라 스타스 부두1180.4ton311543
릭센스 스탠더르스톡홀름 테라 노바 부두1196ton341703
핀란드스톡홀름 스토라 스타스 부두1170ton301502
제3차 옥트루아 (1766년 6월 17일 – 1786년 6월 17일)
아돌프 프리드리크군함으로 건조, 스톡홀름 쥬르고르덴 부두에서 동인도 선으로 개조1281.8ton241607
로비사 울리카스톡홀름 쥬르고르덴 부두988ton241404
크론 프린스 구스타프프레드릭 헨릭 아프 챕먼 설계1248ton281546
릭센스 스탠더르제2차 옥트루아와 동일 선박1196ton161501
핀란드제2차 옥트루아와 동일 선박1170ton201505
스톡홀름스 슬로트제2차 옥트루아와 동일 선박1180.4ton161403
드로트닝 소피아 막달레나스톡홀름 스토라 스타스 부두1261ton181504
테라 노바스톡홀름 테라 노바 부두1307.8ton181504
4번째 항해에서 구스타프 아돌프와 함께 항로를 벗어나 무역풍을 놓쳐 하이난 항구에 10개월 동안 머물렀다.
구스타프 III스톡홀름 쥬르고르덴 부두1331.2ton181554
구스타프 아돌프스톡홀름 스토라 스타스 부두1346.8ton181501
테라 노바와 동일 사건
제4차 옥트루아 (1786년 6월 17일 – 1806년 6월 17일)
구스타프 아돌프제3차 옥트루아와 동일 선박1346.8ton181503
드로트닝 소피아 막달레나제3차 옥트루아와 동일 선박1300ton181505
1801년 10월 27일 영국 해협에서 침몰
예테보리 (II)예테보리 비켄 부두1378ton201703
1796년 3월 8일 케이프타운에서 침몰
크론 프린스 구스타프제3차 옥트루아와 동일 선박1268.72ton181501
구스타프 III제3차 옥트루아와 동일 선박1297.4ton291605
드로트닝겐예테보리 비켄 부두1409.2ton201503
1803년 1월 1일 노르웨이 험베르뇬에서 침몰
마리아 카롤리나프랑스832ton10803
외스테르예틀란드노르셰핑691.6ton14562
베스테르예틀란드예테보리 구 부두421.2ton8-1
케이프타운에서 좌초, 1802년 암스테르담에서 판매
프레드리카일 드 프랑스에서 구입631.8ton12563
프린세산칼스크로나735.8ton16702
바사칼스크로나1239.2ton201671


8. 1. 주요 조선소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1731년부터 1806년까지 존속 기간 동안 여러 척의 선박을 건조하고 운영했다. 이 선박들은 주로 스톡홀름과 예테보리에 있는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스웨덴 동인도 회사 주요 조선소[15]
조선소위치설립 연도소유주/운영자비고
테라 노바 부두스톡홀름 스트란베겐1716년아브라함 그릴쾨프만바르베트(상인 부두)라고도 불림. 1782년 매각, 1819년 국가 소유.[15]
클라손 부두스톡홀름 블라시에홀멘 반도 남동쪽1725년요한 클라손, 이후 아들이 상속[15]
스토라 스타스 부두스톡홀름 남부, 테겔비켄 서쪽 해안1687년안토니 그릴과 그릴 가문 무역 회사 (1694년까지)1694년까지 스톡홀름 시에서 운영.[15]
쥬르고르덴 부두스톡홀름 쥬르고르덴1735년에프라임 로차크, 구스타프 키에르만 (1752년 이후), 컨소시엄 (키에르만 사후)로차크-키에르만스카 쥬르고르덴 부두라고도 불림. 2014년 현재도 소규모 운영 중.[18]
비켄 부두예테보리1749년피터 사무엘손 바게, 프레드릭 헨릭 아프 챕먼바겐스 부두라고도 불림. 구 부두 서쪽에 위치, 이후 합병.[21][20]
구 부두예테보리, 스티그베르겟 아래1630년 이전알렉산더 포라스 (초기), 피터 사무엘손 바게 (1752-1767, 비켄 부두와 합병)앨브스보리 조선소를 예테보리로 이전하여 설립. 1820년 화재로 대부분 소실.[21][22]


9. 현대의 SOIC

예테보리 항구의 4번 부두에 있는 현대적인 SOIC 본사와 ''예테보리''호


1993년 12월 28일, Svenska Ostindiska Companiet Aktiebolagsv(스웨덴 동인도 회사 유한 회사)라는 새로운 회사가 등록되었다. 이 회사는 ''예테보리''호 복제품을 건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스웨덴의 선박 운송 및 국제 무역과 관련된 조선, 교육, 연구, 광고 및 마케팅을 위해 등록되었으며, 예테보리에 위치해 있다. 2013년 매출액은 1900만스웨덴 크로나였다.[24] 2008년에 등록된 Stiftelsen Ostindiefararen Götheborgsv(동인도 선박 예테보리 재단)의 자회사이다.[25]

참조

[1] 웹사이트 East India Company House https://www.spotting[...] 2019-01-21
[2] 웹사이트 The Swedish East India Company https://www.soic.se/[...] Svenska Ostindiska Companiet
[3] 백과사전 Ostindiska kompanier https://runeberg.org[...] Nordisk familjeboks förl.
[4] 웹사이트 Ordförklaringar http://ostindiska.no[...] Nordic Museum 2014-07-20
[5] 서적 A Consumer Price Index for Sweden 1290–2008, Review of Income and Wealth http://www.historia.[...] 2014-09-28
[6] 웹사이트 Svenska ostindiska kompaniets arkiv http://www.ub.gu.se/[...] Gothenburg University 2014-10-21
[7] 백과사전 Fredrik I https://runeberg.org[...] Nordisk familjeboks förl.
[8] 웹사이트 Expeditionerna: Kompaniets skepp http://ostindiska.no[...] The Nordic Museum 2014-12-17
[9] 웹사이트 Sjöfarten på 1700-talet http://www.ostindisk[...] Stiftelsen för Kunskaps- och Kompetensutveckling 2014-12-17
[10] 백과사전 Colin Campbell http://sok.riksarkiv[...] National Archives of Sweden 2014-10-22
[11] 서적 My son on the galley, translation of the 1769 original: Min son på galejan http://libris.kb.se/[...] Norvik press 1994
[12] 웹사이트 Punsch, A Gift from God (translated) https://naringslivsh[...] 2019-01-26
[13] 백과사전 Hyson skin http://libris.kb.se/[...] Könemann
[14] 서적 Robinson Crusoe https://archive.org/[...] Joseph Mawman
[15] 웹사이트 Expeditionerna: Kompaniets skepp http://ostindiska.no[...] Nordic Museum 2014-07-18
[16] 웹사이트 Holms Tomtbok, södra förstaden östra, 1674 http://www2.ssa.stoc[...] City of Stockholm - City Archive - Digital Archive 2014-07-31
[17] 웹사이트 Strandvägshamnen http://www.stockholm[...] Stockholms Hamn 2014-09-14
[18] 뉴스 Djurgårdsvarvet väcks till liv igen http://www.dn.se/sth[...] 2014-07-31
[19] 웹사이트 30. Götheborg (II) http://www.ostindief[...] Projekt Ostindiefararen Götheborg III 2014-07-20
[20] 서적 Det gamla Göteborg. Lokalhistoriska skildringar, personalia och kulturdrag / Del 1 https://runeberg.org[...] Via Project Runeberg 2014-07-21
[21] 웹사이트 Varvet Viken http://gamlagoteborg[...] Det Gamla Göteborg 2014-07-21
[22] 서적 Det gamla Göteborg. Lokalhistoriska skildringar, personalia och kulturdrag / Del 1 https://runeberg.org[...] Via Project Runeberg 2014-07-21
[23] 서적 Slott och herresäten i Sverige. Södermanland. http://libris.kb.se/[...] Allhems förlag 2014-09-16
[24] 웹사이트 Svenska Ostindiska Companiet Aktiebolag http://www.allabolag[...] Allabolag.se 2014-10-19
[25] 웹사이트 Stiftelsen Ostindiefararen Götheborg http://www.allabolag[...] Allabolag.se 2014-10-19
[26] 웹사이트 The ship https://www.soic.se/[...] Svenska Ostindiska Companiet 2020-04-10
[27] 뉴스 World's largest wooden sailing ship arrives in Norfolk https://www.itv.com/[...] ITV plc 20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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