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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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뇨리아는 중세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서 코무네 정부의 쇠퇴와 함께 등장한 지배 체제로, 강력한 인물이 도시를 통치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12세기 이후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공화제의 전통을 가졌으나, 전쟁 등의 위기 상황에서 한 사람에게 주권을 위임하는 경우가 발생했고, 이는 점차 세습화되어 르네상스 시대에 세습 참주 국가로 발전했다.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등이 대표적인 시뇨리아 가문이며, 이들은 신성 로마 황제나 교황으로부터 봉건 영주로 봉해져 지배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외세의 개입과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시뇨리아 국가들은 쇠퇴하고 멸망했으며, 이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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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2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공화국의 세습 통치자가 되면서 시작된 피렌체 공국은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초대 공작으로 세우고 세습 군주제를 확립하여 코시모 1세 시대에 번성했으며, 1569년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격상되어 1737년 메디치 가문이 단절될 때까지 이어졌다. - 이탈리아 도시국가 - 시에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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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뇨리아 | |
---|---|
개요 | |
유형 | 국가 |
존속 기간 | 중세 후기 ~ 르네상스 시대 |
지역 | 이탈리아 |
설명 |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정부 형태 및 지배 계급 |
특징 | |
정부 형태 | 과두정 또는 군주정 |
구성원 | 유력 가문, 상인, 길드 대표 |
권력 기반 | 경제력, 정치적 영향력, 군사력 |
주요 시뇨리아 국가 | |
국가 |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만토바, 페라라, 우르비노 등 |
역사적 맥락 | |
배경 |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정,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력 약화 |
발전 과정 | 유력 가문이나 개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세습 통치를 확립 |
쇠퇴 | 르네상스 시대의 종식, 외세의 침략, 중앙 집권 국가의 등장 |
역할 | |
정치 | 도시 국가의 통치, 법률 제정, 외교 관계 |
경제 | 상업 장려, 금융업 발전, 도시 개발 |
문화 | 예술 후원, 학문 장려, 르네상스 문화 발전에 기여 |
관련 개념 | |
관련 개념 | 코뮌, 포데스타, 콘도티에리, 르네상스 군주정 |
기타 | |
참고 문헌 | 이탈리아 백과사전 - 시뇨리아 |
2. 시뇨리아의 등장 배경
이탈리아 역사에서 시뇨리아(signoria)의 등장은 중세 코무네 정부 시스템의 쇠퇴와 왕조 국가의 부상과 연관된다.[1] "시뇨리아"라는 단어는 코무네 또는 도시 공화국이라는 제도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된다.[1]
당대의 관찰자와 현대 역사가들은 시뇨리아의 부상을,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당파 싸움과 시민 분열을 억제하는 데 실패한 코무네에 대한 반작용으로 본다.[1] 중세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서 만연했던 무정부 상태에서, 사람들은 질서를 회복하고 분쟁하는 엘리트들을 무장 해제할 강한 인물들을 찾았다.[1] 무정부 상태나 위기 상황에서, 도시들은 때때로 국가를 구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여겨지는 개인들에게 시뇨리아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토스카나의 피사는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시에나는 체사레 보르자에게 시뇨리아를 제안했다.
12세기 이후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도시 국가 (코무네) 형태를 취하며 공화제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그러나 전쟁 등 긴급 상황에서는 로마 공화정에서의 독재관과 마찬가지로, 임시로 한 사람에게 주권을 맡기는 경우가 있었고, 이는 점차 종신화되었으며, 이후 세습화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세습 참주 국가가 각지에 나타났다. 이후 많은 참주들은 신성 로마 황제 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공·후 등의 봉건 영주로 봉해졌다. 또한 페라라 공국의 에스테 가문처럼, 원래 봉건 영주였던 자가 시뇨레로서 실권을 장악한 예도 있다.
북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는 비스콘티 가문이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했다. 1277년, 오토네 비스콘티가 밀라노의 시뇨레가 되었고, 1395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신성 로마 황제 벤체슬라오로부터 밀라노 공작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1450년에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이 되면서 밀라노 공작의 지위는 스포르차 가문에게 넘어간다.
피렌체 공화국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했다. 코시모 일 베키오, 피에로 일 고토소,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3대에 걸쳐 피렌체 공화국의 황금 시대를 구축했다. 메디치 가문은 1494년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 의해 추방되지만, 1512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로 복귀한다. 1532년에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카를 5세로부터 피렌체 공작 (피렌체 공국) 칭호를, 1569년에 코시모 1세가 비오 5세로부터 토스카나 대공 (토스카나 대공국) 칭호를 얻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메디치 가문 외에 시에나 공화국의 등이 존재했다. 특히 교황령에서는 아비뇽 유수 시기에 교황청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볼로냐의 , 페루자의 , 리미니의 말라테스타 가문, 카메리노의 , 치타 디 카스텔로의 , 파엔차의 등 많은 시뇨리아가 난립했다.
2. 1. 구엘프와 기벨린의 대립
3. 주요 시뇨리아
밀라노는 1259년부터 델라 토레 가문이 통치하였으나, 1277년 데시오 전투에서 비스콘티 가문에게 패배하며 권력을 잃었다. 비스콘티 가문은 기벨린(황제파)으로, 1302년 델라 토레 가문에게 일시적으로 밀라노를 빼앗겼으나, 1311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도움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비스콘티 가문은 1395년까지 밀라노의 시뇨리아를 확립하고, 밀라노 공국으로 발전시켰다.
1272년 보나콜시가가 만토바의 시뇨리아 자리를 차지했다. 보나콜시 가문은 기벨린 세력이었으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때때로 충성 대상을 바꾸기도 했다.
1328년 곤차가 가문이 반란을 일으켜 보나콜시 가문을 몰아내고 만토바를 장악했다. 곤차가는 기벨린(황제파)에 충성했으며, 1433년부터 만토바 변경백 지위를 획득했다.
1283년 다 카미노 가문이 트레비소의 시뇨리아를 장악했다. 다 카미노 가는 구엘프(교황파)에 속했다. 1312년 음모에 의해 다 카미노 가문이 축출되면서 트레비소의 시뇨리아 통치는 막을 내렸다.
1318년 다 카라라 가문이 파도바의 시뇨리아를 장악했다. 이 가문은 구엘프(교황파)에 속했다. 1405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파도바를 통치했다.
에스테 가문은 1209년부터 페라라를, 1336년부터 모데나를 통치했다.[2] 에스테 가문은 구엘프(교황파)에 속했다. 1471년부터는 페라라 공작과 모데나 레조 공작을 칭했다.
볼로냐는 1337년부터 1350년까지 페폴리 가문의 시뇨리아 통치를 받았다. 페폴리 가문은 구엘프(교황파)에 속했으며, 1350년 비스콘티 가문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 1401년부터 1506년까지는 벤티볼리오 가문이 볼로냐를 통치했다. 벤티볼리오 가문은 기벨린(황제파)이었으며,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축출되었다.
다 폴렌타 가문은 1275년부터 1441년까지 라벤나를 통치했다. 이들은 구엘프(교황파)에 속했다. 1441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다 폴렌타 가문을 축출하고 라벤나를 점령했다.
포를리는 1295년부터 1359년까지, 그리고 1376년부터 1480년까지 오르델라피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오르델라피 가는 기벨린(황제파)에 속했으며, 도시 내부 갈등으로 쇠퇴하여 1480년 평화롭게 물러났다.
1480년부터 1499년까지는 리아리오 가문이 포를리를 통치했다. 리아리오 가는 구엘프(교황파)였으나, 1488년부터 사실상 밀라노 공국의 속국이 되어 카테리나 스포르차가 섭정을 하였다. 1499년 체자레 보르지아가 포를리를 점령하면서 리아리오 가문의 통치는 종식되었다.
보르지아 가문은 1499년부터 1503년까지 포를리를 포함한 로마냐 전역을 다스렸으며, 체자레 보르지아는 로마냐 공작을 칭했다. 1503년 오르델라피 가문이 잠시 복귀했지만, 1504년 가문이 단절되면서 포를리의 시뇨리아 통치는 막을 내렸다.
말라테스타 가문은 구엘프 가문으로, 1285년부터 1445년까지 페사로를 다스렸다. 1445년 스포르차가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리미니에서는 1295년부터 1500년까지 통치하였으나, 1500년 체사레 보르지아에게 쫓겨났다. 체세나는 1378년부터 1465년까지 통치하였으며, 1465년 가문이 단절되었다.
다 몬테펠트로 가문은 1213년부터 우르비노를 통치했으며, 1234년부터 우르비노 백작을 칭했다.[2] 이들은 기벨린(황제파)에 속했다.[2]
루카 공화국은 1308년부터 1316년까지 콰르티지아니 가문의 통치를 받았다. 콰르티지아니 가문은 구엘프파에 속했으며, 1316년 안텔미넬리 가문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안텔미넬리 가문은 1316년부터 1328년까지 루카를 통치했으며, 기벨린파에 속했다.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가 이끄는 안텔미넬리 가문은 1328년 구엘프파에 의해 축출되었다.
1400년부터 1430년까지는 구이니지 가문이 루카를 통치했다. 구이니지 가문은 구엘프파였으며, 1430년 공화정이 복고되면서 통치권을 잃었다.
피렌체 공화국에서 메디치 가문은 1434년부터 시뇨리아를 확립하여 사실상 피렌체를 지배했다. 이 기간 동안 피렌체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통치는 1494년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 의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종교적, 정치적 개혁을 주도했지만, 그의 급진적인 정책은 반발을 샀고, 결국 1512년 메디치 가문이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1530년 다시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고, 1532년 피렌체 공국을 수립하여 세습 통치를 시작했다. 이후 1569년에는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발전하여 18세기 초까지 피렌체를 포함한 토스카나 지역을 통치했다.
피사 공화국은 1316년부터 1347년까지 델라 게라르데스카 가문의 참주정 통치를 받았다.[2] 델라 게라르데스카 가문은 기벨린(황제파)에 속했다.[2] 1347년 델라 게라르데스카 가문이 축출되고 감바코르타 가문이 피사를 통치하게 되었으며,[2] 이들은 구엘프(교황파)였다.[2]
1392년 감바코르타 가문은 음모에 의해 축출되고, 아피아노 가문이 1399년까지 통치했다.[2] 아피아노 가문의 충성은 불확실하다.[2] 1399년 아피아노 가문은 비스콘티 가문에 의해 축출되었고,[2] 비스콘티 가문은 기벨린에 속했다.[2] 비스콘티 가문은 1406년까지 피사를 통치하다 피렌체 공화국에 축출되었다.[2]
시에나 공화국의 시뇨리아는 1487년부터 1525년까지 페트루치 가문이 통치하였으며, 이들은 기벨린(황제파)에 속했다. 페트루치 가문의 통치는 1525년에 평화롭게 끝나고 공화정이 복고되었다.
3. 1. 밀라노
밀라노는 1259년부터 델라 토레 가문이 통치하였으나, 1277년 데시오 전투에서 비스콘티 가문에게 패배하며 권력을 잃었다. 비스콘티 가문은 기벨린(황제파)으로, 1302년 델라 토레 가문에게 일시적으로 밀라노를 빼앗겼으나, 1311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도움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비스콘티 가문은 1395년까지 밀라노의 시뇨리아를 확립하고, 밀라노 공국으로 발전시켰다.3. 2. 만토바
1272년 보나콜시가가 만토바의 시뇨리아 자리를 차지했다. 보나콜시 가문은 기벨린 세력이었으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때때로 충성 대상을 바꾸기도 했다.1328년 곤차가 가문이 반란을 일으켜 보나콜시 가문을 몰아내고 만토바를 장악했다. 곤차가는 기벨린(황제파)에 충성했으며, 1433년부터 만토바 변경백 지위를 획득했다.
3. 3. 베로나
델라 스칼라 가문은 1282년부터 1387년까지 베로나를 통치한 기벨린 가문이다. 1387년 비스콘티 가문이 선동한 반란으로 델라 스칼라 가문은 베로나에서 쫓겨났다.3. 4. 트레비소
1283년 다 카미노 가문이 트레비소의 시뇨리아를 장악했다. 다 카미노 가는 구엘프(교황파)에 속했다. 1312년 음모에 의해 다 카미노 가문이 축출되면서 트레비소의 시뇨리아 통치는 막을 내렸다.3. 5. 파도바
1318년 다 카라라 가문이 파도바의 시뇨리아를 장악했다. 이 가문은 구엘프(교황파)에 속했다. 1405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파도바를 통치했다.3. 6. 페라라와 모데나
에스테 가문은 1209년부터 페라라를, 1336년부터 모데나를 통치했다.[2] 에스테 가문은 구엘프(교황파)에 속했다. 1471년부터는 페라라 공작과 모데나 레조 공작을 칭했다.3. 7. 볼로냐
볼로냐는 1337년부터 1350년까지 페폴리 가문의 시뇨리아 통치를 받았다. 페폴리 가문은 구엘프(교황파)에 속했으며, 1350년 비스콘티 가문에 의해 축출되었다.이후 1401년부터 1506년까지는 벤티볼리오 가문이 볼로냐를 통치했다. 벤티볼리오 가문은 기벨린(황제파)이었으며,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축출되었다.
3. 8. 라벤나
다 폴렌타 가문은 1275년부터 1441년까지 라벤나를 통치했다. 이들은 구엘프(교황파)에 속했다. 1441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다 폴렌타 가문을 축출하고 라벤나를 점령했다.3. 9. 포를리
포를리는 1295년부터 1359년까지, 그리고 1376년부터 1480년까지 오르델라피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오르델라피 가는 기벨린(황제파)에 속했으며, 도시 내부 갈등으로 쇠퇴하여 1480년 평화롭게 물러났다.1480년부터 1499년까지는 리아리오 가문이 포를리를 통치했다. 리아리오 가는 구엘프(교황파)였으나, 1488년부터 사실상 밀라노 공국의 속국이 되어 카테리나 스포르차가 섭정을 하였다. 1499년 체자레 보르지아가 포를리를 점령하면서 리아리오 가문의 통치는 종식되었다.
보르지아 가문은 1499년부터 1503년까지 포를리를 포함한 로마냐 전역을 다스렸으며, 체자레 보르지아는 로마냐 공작을 칭했다. 1503년 오르델라피 가문이 잠시 복귀했지만, 1504년 가문이 단절되면서 포를리의 시뇨리아 통치는 막을 내렸다.
3. 10. 페사로, 리미니, 체세나
말라테스타 가문은 구엘프 가문으로, 1285년부터 1445년까지 페사로를 다스렸다. 1445년 스포르차가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리미니에서는 1295년부터 1500년까지 통치하였으나, 1500년 체사레 보르지아에게 쫓겨났다. 체세나는 1378년부터 1465년까지 통치하였으며, 1465년 가문이 단절되었다.3. 11. 우르비노
다 몬테펠트로 가문은 1213년부터 우르비노를 통치했으며, 1234년부터 우르비노 백작을 칭했다.[2] 이들은 기벨린(황제파)에 속했다.[2]3. 12. 루카
루카 공화국은 1308년부터 1316년까지 콰르티지아니 가문의 통치를 받았다. 콰르티지아니 가문은 구엘프파에 속했으며, 1316년 안텔미넬리 가문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안텔미넬리 가문은 1316년부터 1328년까지 루카를 통치했으며, 기벨린파에 속했다.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가 이끄는 안텔미넬리 가문은 1328년 구엘프파에 의해 축출되었다.
1400년부터 1430년까지는 구이니지 가문이 루카를 통치했다. 구이니지 가문은 구엘프파였으며, 1430년 공화정이 복고되면서 통치권을 잃었다.
3. 13.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에서 메디치 가문은 1434년부터 시뇨리아를 확립하여 사실상 피렌체를 지배했다. 이 기간 동안 피렌체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통치는 1494년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 의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종교적, 정치적 개혁을 주도했지만, 그의 급진적인 정책은 반발을 샀고, 결국 1512년 메디치 가문이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다.메디치 가문은 1530년 다시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고, 1532년 피렌체 공국을 수립하여 세습 통치를 시작했다. 이후 1569년에는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발전하여 18세기 초까지 피렌체를 포함한 토스카나 지역을 통치했다.
3. 14. 피사
피사 공화국은 1316년부터 1347년까지 델라 게라르데스카 가문의 참주정 통치를 받았다.[2] 델라 게라르데스카 가문은 기벨린(황제파)에 속했다.[2] 1347년 델라 게라르데스카 가문이 축출되고 감바코르타 가문이 피사를 통치하게 되었으며,[2] 이들은 구엘프(교황파)였다.[2]1392년 감바코르타 가문은 음모에 의해 축출되고, 아피아노 가문이 1399년까지 통치했다.[2] 아피아노 가문의 충성은 불확실하다.[2] 1399년 아피아노 가문은 비스콘티 가문에 의해 축출되었고,[2] 비스콘티 가문은 기벨린에 속했다.[2] 비스콘티 가문은 1406년까지 피사를 통치하다 피렌체 공화국에 축출되었다.[2]
3. 15. 시에나
시에나 공화국의 시뇨리아는 1487년부터 1525년까지 페트루치 가문이 통치하였으며, 이들은 기벨린(황제파)에 속했다. 페트루치 가문의 통치는 1525년에 평화롭게 끝나고 공화정이 복고되었다.4. 시뇨리아 체제의 특징
12세기 이후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도시 국가 (코무네) 형태를 취하며 공화제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그러나 전쟁 등 긴급 상황에서는 로마 공화정에서의 독재관과 마찬가지로, 임시로 한 사람에게 주권을 맡기는 경우가 있었고, 이는 점차 종신화되었으며, 이후 세습화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세습 참주 국가가 각지에 나타났다.
시뇨리아의 구성과 구체적인 기능은 도시마다 달랐다. 일부 국가(예: 델라 스칼라 가문의 베로나 또는 코시모 데 메디치와 로렌초 데 메디치 시대의 피렌체)에서 국가는 오늘날 우리가 일당 국가라고 부르는 형태였으며, 지배 정당이 국가의 시뇨리아를 단일 가문 또는 왕조에 위임했다. 다른 국가(예: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에서 왕조의 시뇨리아 권한은 코뮌 헌법의 공식적으로 인정된 일부였으며, 이는 국민에 의해 "비준"되었고 교황 또는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인정받았다.
이후 많은 참주들은 신성 로마 황제 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공·후 등의 봉건 영주로 봉해지며, 세습 지배에 대한 제도적 보장을 획득하게 된다. 또한 페라라 공국의 에스테 가문처럼, 원래 봉건 영주 (에스테 가문의 경우 에스테 변방 백작)였던 자가 시뇨레로서 실권을 장악한 예도 있다.
북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는 비스콘티 가문이 초기에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했다. 피렌체 공화국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상기 메디치 가문 외에 시에나 공화국의 페투루치 가문/Petrucci family영어 등이 존재했다. 특히 교황령에서는 아비뇽 유수 시기에 령내 각 도시를 통치하는 대관에 대한 교황청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볼로냐의 벤티볼리오 가문/Bentivoglio (famiglia)it, 페루자의 , 리미니의 말라테스타 가문, 카메리노의 다 바라노 가문/Da Varanoit, 치타 디 카스텔로의 비텔리 가문/Vitelli (famiglia)it, 파엔차의 만프레디 가문/Manfredi family영어 등 많은 시뇨리아가 난립했다.
5. 시뇨리아 체제의 종말
16세기 이후 외세 개입이 심화되고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시뇨리아 국가들은 쇠퇴하고 멸망했다. 이는 훗날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배경이 된다. 12세기 이후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도시 국가(코무네) 형태를 취하며 공화제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그러나 전쟁 등 긴급 상황에서는 로마 공화정에서의 독재관과 마찬가지로, 임시로 한 사람에게 주권을 맡기는 경우가 있었고, 이는 점차 종신화되었으며, 이후 세습화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세습 참주 국가가 각지에 나타났다. 많은 참주들은 신성 로마 황제 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공·후 등의 봉건 영주로 봉해지며, 세습 지배에 대한 제도적 보장을 획득하게 된다. 페라라 공국의 에스테 가문처럼, 원래 봉건 영주였던 자가 시뇨레로서 실권을 장악한 예도 있다.
북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는 비스콘티 가문이 초기에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했다. 1277년, 오토네 비스콘티가 밀라노의 시뇨레가 된다. 1395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신성 로마 황제 벤체슬라오로부터 밀라노 공작의 칭호를 얻는다 (밀라노 공국). 1450년에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이 되면서 밀라노 공작의 지위는 스포르차 가문에게 넘어간다.
피렌체 공화국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했다. 메디치 가문에 의한 피렌체 지배는 코시모 일 베키오, 피에로 일 고토소,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3대에 걸쳐 피렌체 공화국의 황금 시대를 구축했다. 메디치 가문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 사후인 1494년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 의해 추방되지만, 1512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 군과 함께 피렌체로 복귀한다. 1532년에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로부터 피렌체 공작 (피렌체 공국), 1569년에 코시모 1세가 로마 교황 비오 5세로부터 토스카나 대공 (토스카나 대공국)의 칭호를 얻어 명실상부 피렌체의 군주가 된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메디치 가문 외에 시에나 공화국의 페투루치 가문/Petrucci family영어 등이 존재했다. 교황령에서는 아비뇽 유수 시기에 령내 각 도시를 통치하는 대관에 대한 교황청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볼로냐의 벤티볼리오 가문/Bentivoglio (famiglia)it, 페루자의 , 리미니의 말라테스타 가문, 카메리노의 다 바라노 가문/Da Varanoit, 치타 디 카스텔로의 비텔리 가문/Vitelli (famiglia)it, 파엔차의 만프레디 가문/Manfredi family영어 등 많은 시뇨리아가 난립했다.
6. 시뇨리아와 르네상스
12세기 이후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도시 국가(코무네) 형태를 취하며 공화제의 전통이 뿌리내렸으나, 전쟁 등 긴급 상황에서 한 사람에게 주권을 맡기는 경우가 점차 종신화 및 세습화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세습 참주 국가가 각지에 나타났으며, 많은 참주들은 신성 로마 황제 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공·후 등의 봉건 영주로 봉해지며 세습 지배에 대한 제도적 보장을 획득했다. 페라라 공국의 에스테 가문처럼, 원래 봉건 영주였던 가문이 시뇨레로서 실권을 장악한 예도 있었다.
북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는 비스콘티 가문이 초기에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했다. 1277년, 오토네 비스콘티가 밀라노의 시뇨레가 되었고, 1395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신성 로마 황제 벤체슬라오로부터 밀라노 공작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0년에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이 되면서 스포르차 가문에게 지위가 넘어갔다.
피렌체 공화국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했다. 코시모 일 베키오, 피에로 일 고토소,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3대에 걸쳐 피렌체 공화국의 황금 시대를 구축했다. 1494년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 의해 추방되지만, 1512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로 복귀했다. 1532년에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카를 5세로부터 피렌체 공작 (피렌체 공국) 칭호를, 1569년에 코시모 1세가 비오 5세로부터 토스카나 대공 (토스카나 대공국) 칭호를 얻어 군주가 되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메디치 가문 외에 시에나 공화국의 페투루치 가문/Petrucci family영어 등이 존재했다. 교황령에서는 아비뇽 유수 시기에 령내 각 도시를 통치하는 대관에 대한 교황청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볼로냐의 벤티볼리오 가문/Bentivoglio (famiglia)it, 페루자의 , 리미니의 말라테스타 가문, 카메리노의 다 바라노 가문/Da Varanoit, 치타 디 카스텔로의 비텔리 가문/Vitelli (famiglia)it, 파엔차의 만프레디 가문/Manfredi family영어 등 많은 시뇨리아가 난립했다.
7. 한국 역사와의 비교
참조
[1]
웹사이트
Signoria
http://www.treccani.[...]
[2]
웹사이트
PIO -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http://www.trecc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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