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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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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르자는 12세기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데 아타레스로부터 가계가 이어진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 귀족 가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 갈리스토 3세,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특히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시대에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으나, 권력욕과 사치, 근친상간 등의 소문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보르자 가문은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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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자가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가문 정보
이름보르자
토착 이름보르하
토착 이름 언어카탈루냐어
유형교황 귀족 가문
문장보르자 가문의 문장(금색 바탕에 붉은 소가 녹색 테라스 위에 있으며, 금색 테두리에는 녹색 불꽃 8개가 있음)
국가[[File:Royal Banner of Aragón.svg|25px]] 아라곤 왕국
[[File:Flag of Spain (1760–1785).svg|25px]] 스페인 왕국
[[File:Flag of the Kingdom of France (1790-1794).svg|25px]] 프랑스 왕국
[[File:Flag of Andorra.svg|25px]] 안도라
[[File:Flag of the Kingdom of Naples.svg|25px]] 나폴리 왕국
[[File:Flag of the Papal States (1825-1870).svg|25px]] 교황령
어원스페인 도시 보르하에서 유래
설립1455년
설립자교황 칼리스토 3세(사실상)
현재 수장R.N. 보르하; 2020년에 계승; 직계는 단절됨
해체1748년
마지막 통치자마리아 아나, 제12대 간디아 공작부인
칭호교황(세습되지 않음)
안도라 공동 공작
간디아 공작
title=16세기 획득 및 상실(1501–03)|스퀼라체 공작(1494–1728)|우르비노 공작(1501–03)|로마냐 공작(1501–53)|카메리노 공작(1501–48)|발렌티노 공작(1498–53)|디오아 백작(1498–53)]]
전통로마 가톨릭교회
구성원교황 칼리스토 3세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조반니 보르자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
프란치스코 보르하
특징그리스도 최고 훈장
황금 장미(교황)
성 미카엘 훈장
웹사이트두칼 하우스 오브 메디나셀리 재단
인물
주요 인물교황 갈리스토 3세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루크레치아 보르자
체사레 보르자
조프레 보르자
후안 보르자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기타
관련 가문카탈루냐 귀족 가문

2. 가문의 기원과 초기 역사

보르자 가문은 아라곤 왕관의 보르자 마을에서 유래한 귀족 가문으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교황 갈리스토 3세(알폰소 데 보르자)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드리고 보르자)를 배출하며 가문의 위세를 떨쳤다. 가문의 초기 역사와 관련해서는 그 기원과 유대인 혈통 논란 등이 전해진다.

2. 1. 기원

보르자 가문은 당시 아라곤 왕관에 속했던 보르자 마을 출신의 귀족 가문이었다. 이 시기 가문이 원래 유대인 혈통이며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인 척한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소문은 특히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와 같은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퍼뜨려졌으며, 가문은 종종 마라노(강제 개종한 유대인)로 묘사되었다. 이 소문은 1912년 '세미 고타'(Semi-Gotha)라는 서적에까지 실리면서 수 세기 동안 대중문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퍼져나갔다.[9][10][11] 한편, 보르자 가문 스스로는 12세기 아라곤 왕국의 왕위를 요구했으나 자녀 없이 사망한 보르자 영주 페드로 데 아타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12]

2. 2. 유대인 혈통 논란

보르자 가문은 당시 아라곤 왕관에 속했던 보르자 마을에서 유래한 귀족 가문이었다. 이 시기에는 가문이 원래 유대인 출신이면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인 척한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퍼졌다. 이러한 소문은 특히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와 같은 정치적 경쟁자들에 의해 유포되었으며, 가문은 종종 마라노라고 비난받았다. 이 소문은 1912년 Semi-Gothade라는 출판물에 등재되면서 수 세기 동안 대중문화 속에서 지속되었다.[9][10][11] 하지만 보르자 가문 스스로는 자녀 없이 사망한 보르자 영주이자 12세기 아라곤 왕국의 왕위 요구자였던 페드로 데 아타레스로부터 가문의 계보가 이어진다고 주장했다.[12]

2. 3. 초기 주요 인물

보르자 가문은 당시 아라곤 왕관에 속했던 보르자 마을을 기원으로 하는 귀족 가문이었다. 이 시기 가문이 원래 유대인 출신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이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와 같은 인물들이 이러한 소문을 퍼뜨렸으며, 가문은 종종 마라노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소문은 1912년 ''세미 고타''에 등재되면서 오랫동안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9][10][11] 가문 스스로는 12세기 아라곤 왕국의 왕위 요구자였던 페드로 데 아타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12]

초기 가문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알폰소 데 보르자(1378–1458)는 당시 발렌시아 왕국에 속했던 카날스의 라 토레타에서 프란시나 랴숄과 도밍고 데 보르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레리다 대학교에서 법학 교수로 활동했으며, 추기경이 되기 전에는 아라곤 왕국의 외교관으로 일했다. 1455년, 비교적 고령의 나이에 타협 후보로서 교황 갈리스토 3세로 선출되었으며, 145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년간 교황으로 재위했다.

3. 전성기: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시대

보르자 가문은 로드리고 보르자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즉위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가문의 세력 확장과 교황령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이 과정에서 족벌주의와 세속적인 행태로 비판받았다. 그의 통치 아래 보르자 가문은 권력욕, 탐욕, 잔혹함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게 되었으며, 정적 독살설이나 근친상간과 같은 부정적인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30] 이러한 악명은 유럽 사회에 깊이 각인되어, 후대의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타락과 음모를 상징하는 소재로 자주 등장했다. 예를 들어 영화 《제3의 남자》의 대사[31]나 《대부 3》,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3. 1. 로드리고 보르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로드리고 보르자(1431년–1503년)는 발렌시아 왕국의 사티바에서 이사벨 데 보르자 이 카바니예스와 호프레 얀솔 이 에스크리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볼로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그의 삼촌이자 교황교황 갈리스토 3세(알폰스 보르자)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492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재위명으로 알렉산데르 6세를 선택했다. 추기경 시절, 그는 바노차 데이 카타네이와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하며 네 명의 자녀, 즉 조반니,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 조프레 보르자를 두었다. 또한 로드리고는 그의 정부였던 줄리아 파르네세를 포함한 다른 여성들과의 사이에서도 자녀를 가졌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서 로드리고는 능숙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은 과도한 지출, 시모니(교회 직위 매매), 방탕함, 그리고 족벌주의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교황의 권력과 부를 증대시키려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보르자 가문을 귀족으로 만들고 재산을 늘리는 데 힘썼다. 그는 아들 조반니를 교황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주요 군사 대리인으로 삼았고, 다른 아들 체사레는 추기경으로 만들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유력 가문들과 동맹을 구축했다. 당시 밀라노를 기반으로 유럽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스포르차 가문과의 결속을 위해 딸 루크레치아를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시켰다. 또한 막내아들 조프레를 아라곤 왕관과 나폴리의 아라곤의 산차와 혼인시켰다. 아들 조반니의 결혼을 통해서는 스페인 왕가와 연을 맺었는데, 이는 나폴리 왕국을 둘러싸고 프랑스스페인 간의 분쟁이 반복되던 이탈리아 전쟁 시기에 이루어졌다.

알렉산데르 6세의 통치 아래 바티칸 궁전에서 보르자 가문이 향연을 열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특히 "밤의 연회"는 이러한 연회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례로 꼽힌다. 요한 부르카르트는 연회 손님들의 유흥을 위해 50명의 매춘부가 동원되었다고 기록했으며,[13] 이 자리에는 교황뿐 아니라 그의 자녀인 루크레치아와 체사레도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몬시뇰 피터 데 루(1839–1926)와 같은 일부 연구자들은 "50명의 매춘부"에 대한 소문이 알렉산데르 6세의 본래 성격과는 맞지 않다며 이를 일축하기도 했다.[14]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1503년 로마에서 병으로 사망했으며, 사인은 일반적으로 말라리아로 알려져 있다. 그의 후임 교황 중 식스토 5세와 우르바노 8세는 그를 성 베드로 이후 가장 뛰어난 교황 중 한 명으로 평가하기도 했다.[15]

알렉산데르 6세는 세속화된 교황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그는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이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가문의 번영과 교황령의 군사적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보르자'라는 이름은 호색, 탐욕, 잔혹함, 냉혹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게 되었다. 보르자 가문이 칸타렐라라는 특유의 독약을 사용하여 정적들을 독살했다는 소문이나, 체사레와 루크레치아가 근친상간 관계였다는 등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30]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유럽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여러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예를 들어, 영화 《제3의 남자》에서는 "보르자 가문의 악정은 르네상스를 낳았지만, 스위스의 평화는 뻐꾸기 시계를 낳았을 뿐이다"라는 대사가 등장하며,[31] 영화 《대부 3》에서는 바티칸의 복잡한 일 처리에 불만을 느낀 주인공이 "보르자 녀석들!"이라고 내뱉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등장하는 보물은 보르자 가문에 의해 암살된 로마추기경이 숨겨둔 재산으로 설정되어 있다.

3. 2. 알렉산데르 6세의 자녀들

로드리고 보르자는 추기경 시절 바노차 데이 카타네이와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하며 네 명의 자녀, 즉 조반니,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 조프레 보르자를 두었다. 또한 그는 정부였던 줄리아 파르네세를 포함한 다른 여성들과의 사이에서도 자녀를 가졌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알렉산데르 6세는 족벌주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치며 자녀들을 이용해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고 부를 축적하는 데 힘썼다. 그는 아들 조반니를 교황군 사령관으로 삼고, 또 다른 아들 체사레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또한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이탈리아스페인의 유력 가문들과 동맹을 맺고자 했다. 루크레치아는 밀라노의 강력한 스포르차 가문의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했고, 막내아들 조프레는 나폴리 왕국의 아라곤의 산차와 혼인했다. 장남 조반니 역시 스페인 왕족과 결혼하여 가문의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자녀들은 수많은 스캔들과 부정적인 소문에 휩싸였다. 바티칸 궁전에서 열린 방탕한 연회, 특히 50명의 매춘부가 동원되었다는 "밤의 연회"에 대한 기록은 보르자 가문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13]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14] 또한 체사레와 루크레치아 사이의 근친상간 소문[30] 등은 보르자 가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확산시켰다. 알렉산데르 6세는 자녀들을 정치적 도구로 삼아 일족의 번영을 추구했지만, 그 결과 보르자 가문은 권력욕, 탐욕, 잔혹함의 대명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3. 2. 1. 체사레 보르자

The painting shows (from the left) Cesare Borgia, his sister Lucrezia and his father Pope Alexander VI.
존 콜리어의 그림, ''"체사레 보르자와 와인 한 잔"''. 왼쪽부터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교황 알렉산데르 6세, 그리고 빈 잔을 들고 있는 젊은 남자가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보르자 가문의 배신적인 본성에 대한 대중적인 시각을 나타내며, 젊은 남자가 와인에 독이 들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듯한 모습을 통해 이를 암시한다.


체사레 보르자는 로드리고 보르자와 그의 정부 바노차 데이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그의 교육은 아버지에 의해 세심하게 계획되었으며, 12세까지 로마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전쟁과 정치에 능숙하며 매력적인 인물로 성장했다.[16] 페루자 대학교에서 법학과 인문학을 공부한 후, 피사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체사레는 형 조반니를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조반니의 죽음으로 체사레는 성직을 떠나 평신도가 되어, 아버지가 형에게 부여했던 명예와 지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17] 추기경이었던 그는 권력을 추구하며 형이 맡았던 용병대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성직을 포기했다. 이후 프랑스 공주인 샬롯 달브레와 결혼했다.

1503년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자, 체사레는 후임 교황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신만의 공국을 세우려는 계획에 방해가 되지 않을 인물을 교황으로 원했다. 체사레가 지지했던 후보(교황 비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한 달 만에 사망했고, 이후 체사레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델라 로베레는 체사레에게 그의 모든 지위와 명예를 유지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교황이 된 후 약속을 어기고 체사레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 되었다.

체사레 보르자는 1507년 스페인 나바라 왕국에서 레린 백작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비아나 성을 포위하던 중 사망했다. 당시 성은 루이 드 보몽이 지키고 있었으며, 체사레는 요한 왕과 함께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견고한 자연 요새였던 성을 점령하기 위해 필사적인 기습 공격을 감행하다가 전사했고, 그의 군대는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령의 군사적 자립과 일족의 번영을 위해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으나, 이 과정에서 보르자 가문은 호색, 탐욕, 잔혹함, 냉혹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다. 칸타렐라라는 특유의 독을 사용하여 정적을 독살했다는 소문, 체사레와 누이 루크레치아가 근친상간 관계였다는 소문 등이 끊이지 않았다.[30]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유럽 전역에 강하게 자리 잡았으며, 여러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3. 2. 2. 루크레치아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이탈리아 수비아코에서 당시 추기경이었던 로드리고 보르자(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정부였던 바노차 데이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세가 되기도 전에 두 명의 스페인 왕자와 약혼했으나,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즉위한 후, 1493년 13세의 나이로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했다. 이는 아버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형적인 정략 결혼이었으나, 교황이 더 이상 스포르차 가문의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결혼은 합의되지 않았다는 의심스러운 명분으로 1497년에 무효화되었다.

결혼이 무효화된 직후, 루크레치아는 페로토(Perotto)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스페인인 페드로 칼데론과의 관계에 대한 스캔들에 휘말렸다. 1498년 2월 14일, 페로토의 시신은 루크레치아의 시녀 중 한 명의 시신과 함께 테베레 강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그녀의 오빠인 체사레 보르자가 다른 결혼 협상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불륜 관계를 막기 위해 이들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한 이 시기에 태어난 조반니 보르자, 일명 ''인판스 로마누스''(로마의 아이)가 루크레치아의 아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18]

루크레치아의 두 번째 결혼 상대는 부유하고 젊은 알폰소 아라곤 왕자였다. 이 결혼 역시 보르자 가문이 다른 강력한 가문과 동맹을 맺기 위한 정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관계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체사레 보르자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나폴리 왕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기를 원했다. 알폰소의 아버지가 나폴리 왕국의 통치자였기 때문에, 젊은 알폰소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의 암살 시도는 실패했지만, 결국 알폰소는 자신의 침실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체사레가 이 암살의 배후로 여겨진다.

루크레치아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남편은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였다. 1503년 아버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한 후,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페라라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19] 하지만 그녀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여러 아이를 출산 후 잃었다. 1519년, 마지막 아이인 이사벨라 마리아를 낳고 열흘 만에 사망했으며, 딸 이사벨라 및 남편 알폰소와 함께 묻혔다.

루크레치아는 당대에 독살에 능하고 정치적 음모에 가담했다는 악명 높은 소문에 시달렸다. 그녀의 이름은 보르자 가문의 부정적인 이미지, 즉 호색, 탐욕, 잔혹함, 냉혹함과 함께 언급되곤 했다. 특히 오빠 체사레와의 근친상간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30] 그러나 최근의 일부 연구자들은 그녀를 동정적인 시각으로 재평가하며, 그녀가 실제로는 가족들의 정치적 야망과 속임수의 희생자였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20] 보르자 가문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유럽 문화 전반에 걸쳐 강하게 남아, 여러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타락과 음모를 상징하는 존재로 자주 등장한다.[31]

3. 2. 3. 호프레 보르자

호프레 보르자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오랜 정부였던 바노차 데이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다. 형제로는 조반니,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가 있다.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가문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자녀들의 결혼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는데, 호프레 역시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아라곤 왕관과 나폴리의 아라곤의 산차와 결혼하였다. 이는 보르자 가문과 아라곤 왕가 사이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3. 2. 4. 조반니 보르자 (간디아 공작)

로드리고 보르자와 그의 오랜 정부였던 바노차 데이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 조프레 보르자와 형제 관계이다.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권력과 가문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는데, 그 일환으로 아들 조반니를 교황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군사 대표로 삼았다. 또한 알렉산데르 6세는 조반니의 결혼을 통해 스페인 왕가와 가문 간의 관계를 맺었다. 이는 이탈리아 전쟁 시기 나폴리 왕국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갈등이 반복되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전략적인 조치였다.

4. 보르자 가문의 분가

보르자 가문의 한 분파는 벨레트리에 정착하여 오랫동안 교황령 행정부에 종사했다.[21]


  • 피에트로 보르자, 마돈나 필로메나와 결혼

:** 에토레 보르자, 포르치아 란디와 결혼

:::* 카밀로 보르자, 벨레트리 총독

::::* 클레멘테 에르미니오 보르자, 벨레트리 총독, 세실리아 카르보니와 결혼

:::::* 스테파노 카밀로 보르자 (1681–1763), 마달레나 갈리아르디와 결혼

::::::* 조반니 파올로 보르자, 교황군 장군, 알크메나 바글리오니-말라테스타와 결혼

:::::::* 카밀로 보르자 (1777–1817), 뮈라 군의 부관장 겸 야전 사령관, 아델라이데 퀘이손과 결혼

::::::::* 에토레 보르자 (1802–1892), 이탈리아 정치인

:::::::* 알레산드로 보르자 (1783–1871), 몰타 기사단 대기사장

::::::* 스테파노 보르자 (1731–1804), 추기경

:::::* 알레산드로 보르자 (1682–1764), 페르모 대주교

:::::* 파브리치오 보르자 (1689–1754), 페렌티노 주교

:::::* 안젤라 카테리나 보르자 (1694–1743), 수녀이자 하느님의 종

5. 기타 주요 인물


  • 알폰소 데 보르자 (교황 갈리스토 3세)
  • 체사레 보르자
  • 성 프란치스코 데 보르자
  • 호프레 보르자
  • 후안 보르자
  • 루크레치아 보르자
  • 로드리고 보르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
  • 로드리고 데 보르자 (1349년 출생): 보르자 가문의 수장, 로드리고(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증조부.
  • 로드리고 길 데 보르자 이 페놀레: 로드리고 데 보르자의 아들, 사티바의 배심원 (14세기 후반 생존).
  • 조프레 란솔 이 에스크리바 (1390년경 출생 – 1436년 또는 1437년 사망): 로드리고 길의 아들, 로드리고(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페드로 루이스의 아버지.
  • 페드로 루이스 데 보르자 (1432–1458): 스폴레토 공작이자 치비타베키아 후작.
  • 로드릭 데 보르자 이 에스크리바 (? – 1478)
  • 간디아의 1대 공작 피에르 루이지 데 보르자 (1458년 또는 1460년 출생 – 1488년 또는 1491년 사망).
  • 간디아의 2대 공작 조반니 보르자 (1474년 또는 1476년 출생 – 1497년 사망)
  • 조프레 보르자 (1482–1516):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자 체사레 보르자와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남동생. 나폴리알폰소 2세의 딸인 아라곤의 산차와 결혼하여 스키라체 공국 (1494)과 알비토 공작령 (1497)을 지참금으로 받았다. 그는 후에 마리아 데 밀라 이 아라곤과 결혼하여 프란체스코 보르자를 낳았다.
  • 간디아의 3대 공작 후안 보르자 (1493–1543): 간디아의 2대 공작 조반니 보르자의 아들.
  • 이자벨 보르자 (1498 - 1557): 간디아의 2대 공작 조반니 보르자의 딸, 프란시스카 데 헤수스라는 이름의 수녀.
  • 안젤라 보르자 (1486년경 – 1520–1522년경): 사수올로의 귀부인.
  • 엔리케 데 보르자 이 아라곤 (1518–1540)
  • 프란시스 보르자, 간디아의 4대 공작 (1510–1572):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증손자. 예수회의 효과적인 조직자가 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1670년 6월 20일 "성 프란시스 보르자"로 시성되었다.[22]
  • 후안 데 보르자 이 카스트로 (1533–1606)
  • 토마스 데 보르자 이 카스트로 (1551–1610)
  • 후안 부에나벤투라 데 보르자 이 아르멘디아 (1564* – 1628)
  • 이니고 데 보르자 (1575–1622): 프란시스의 증손자이자 가스파르의 형.
  • 가스파르 데 보르자 이 벨라스코 (1580–1645): 스페인 비야판도 출생. 스페인식 철자 "보르자"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톨레도 대주교(스페인 수장), 세비야 대주교, 나폴리 대주교 겸 총독을 역임했다.
  • 프란시스코 데 보르자 이 아라곤 (1581–1658)
  • 페르난도 데 보르자 이 아라곤 (1583–1665)
  • 아르투로 보르자 (1892–1912): "데카피타도 세대"로 알려진 그룹에 속한 에콰도르 시인.
  • 로사 보르자 데 이카자 (1889–1964): 에콰도르 작가, 에세이스트, 극작가, 사회학자, 시인, 소설가, 페미니스트, 활동가.
  • 루스 엘리사 보르자 마르티네스 (1903–1927): 에콰도르 시인, 피아니스트, 화가, 조각가.
  • 로드리고 보르자 세발로스 (1935년 출생): 전 에콰도르의 대통령.

6. 대중문화 속 보르자 가문

보르자 가문은 당대에 악명이 높았으며, 이는 후대의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소설, 연극, 오페라, 만화, 영화, 텔레비전 시리즈, 비디오 게임 등 여러 분야에서 보르자 가문을 소재로 다루었다.

대표적인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소설: 세실리아 홀랜드의 『시티 오브 갓: 보르자 가문의 소설(City of God: A Novel of the Borgias)』(1979), 마리오 푸조의 『더 패밀리(The Family)』(2001), 댄 시먼스의 『나이트의 여름(Summer of Night)』(1991) 등이 있다.[24]
  • 영화: 2006년 영화 『보르자(The Borgia)』가 제작되었다.
  • 텔레비전 시리즈: 쇼타임에서 방영된 『보르지아(Borgia)』(2011)와 『보르지아(The Borgias)』(2011)가 있다.[25]
  • 비디오 게임: 유비소프트의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Assassin's Creed: Brotherhood)』(2010)에서는 보르자 가문이 주요 악역으로 등장한다.[26]


이 외에도 코미디 스케치 TV 쇼 『끔찍한 역사(Horrible Histories)』 시즌 4에서는 '급진적 르네상스' 코너에 아담스 패밀리 주제가를 패러디한 "보르자 가문(the Borgia Family)"이라는 노래가 등장했으며,[27] 1959년 디즈니 영화 『늙은 개와 젊은이(The Shaggy Dog)』에서도 보르자 가문의 일화와 유물이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었다. 유튜브 채널 UsefulCharts에서도 보르자 가문의 주요 인물들을 다루었다.[28]

보르자 가문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행적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그는 세속적인 교황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아들 체사레와 딸 루크레치아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고 교황령의 군사적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이로 인해 보르자라는 이름은 호색, 탐욕, 잔혹함, 냉혹함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특히 가문 특유의 독약인 칸타렐라를 사용하여 정적들을 암살했다는 소문이나, 체사레와 루크레치아 사이의 근친상간 의혹 등은 가문의 악명을 더욱 높였다.[30]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유럽 문화 전반에 걸쳐 강하게 남아 있으며, 여러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 영화 『제3의 남자』에서는 "보르자 가문의 악정은 르네상스를 낳았지만, 스위스의 평화는 뻐꾸기 시계를 낳았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등장한다.[31]
  • 영화 『대부 파트 3』에서는 바티칸의 복잡한 일 처리에 분노한 주인공이 "보르자 녀석들!"이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는 주인공이 발견하는 보물이 보르자 가문에 의해 암살된 로마추기경이 숨겨둔 재산으로 설정되어 있다.

7. 가계도


보르자 가문의 계보도.
보르자 또는 보르자 가문의 계보도

참조

[1] 웹사이트 Mariana de Borja y Córdoba http://en.fundacionm[...] Ducal House of Medinaceli Foundation 2016-07-04
[2] 웹사이트 Borgia, Lucrezia https://web.archive.[...]
[3] 사전 Borgia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2019-05-14
[4] 웹사이트 Borgias, the https://www.ldoceonl[...] Longman 2019-09-28
[5] 웹사이트 Borgia Family – Italian family https://www.britanni[...] 2020-02-09
[6] 문서 Arsenic: A Murderous History Dartmouth Toxic Metals Research Program 2009
[7] 웹사이트 Were the Borgias Really so Bad? https://www.historyt[...] 2013-10-01
[8] 웹사이트 In a nutshell: the Borgias https://web.archive.[...] 2019-02-11
[9] 간행물 The Menorah journal, Volumes 20–23 Intercollegiate Menorah Association 1932
[10] 서적 The Borgias: or, At the feet of Venus P. Dutton & Co. Inc. 1930
[11] 서적 Lucrezia Borgia: Life, Love and Death in Renaissance Italy
[12] 논문 La permanencia de Rodrigo de Borja (Alejandro VI) en el estudio de Bolonia, según documentos originales http://www.raco.cat/[...] Universidad de Barcelona. Departamento de Historia Medieval
[13] 서적 Pope Alexander VI and His Court: Extracts from the Latin Diary of Johannes Burchardus https://archive.org/[...] N.L. Brown 1921
[14] 간행물 Pope Alexander VI and His Latest Biographer https://www.google.c[...] The Month 1925-04
[15] 서적 The Borgias 1969
[16] 서적 The Thames & Hudson Dictionary of the Italian Renaissance Thames & Hudson
[17] 서적 Machiavelli and Cesare Borgia: A Reconsideration of Chapter 7 of The Prince. Review of politics 2013-09
[18] 서적 Lucrezia Borgia: Life, Love and Death in Renaissance Italy Penguin
[19] 서적 The Penguin Biographical Dictionary of Women Penguin
[20] 서적 Lucrezia Borgia: A Biography 1978
[21] 서적 The History of the Borgias https://archive.org/[...] Modern Library 1931
[22] 서적 Who's Who in Christianity Routledge
[23] 웹사이트 City of God by Cecelia Holland http://www.historica[...] 2014-09-05
[24] 웹사이트 Book Review: Summer of Night https://web.archive.[...] 2021-04-17
[25] 뉴스 Back in time and in crime with Borgias Life 2011-03-24
[26] 뉴스 'Assassin' is back with 'Brotherhood' USA Today
[27] Youtube Horrible Histories – The Borgia Family {{!}} Horrible Songs {{!}} Radical Renaissance https://www.youtube.[...] 2021-12-21
[28] Youtube Borgia Family Tree https://www.youtube.[...] UsefulCharts 2023-04-08
[29] encyclopedia ボルジア家 平凡社
[30] 서적 『君主論』の教え: マキャベリの名著 PHP研究所 2010-01-22
[31] 서적 過去の中の真実 文芸社 199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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