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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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도 전투는 1185년 3월 22일, 야시마 전투에서 패배한 다이라씨가 시도지에 머물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다이라씨를 추격하며 다이라 가문의 가신인 다구치 노리요시를 귀순시키고 세력을 강화했다. 이후 겐지 세력이 커지자 다이라씨는 해상으로 도망쳐 단노우라로 향하게 되었으며, 4월 25일에는 단노우라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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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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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시도 전투 |
갈등 | 겐페이 전쟁 |
![]() | |
시기 | 겐랴쿠 2년/주에이 4년 2월 21일 (1185년 3월 24일) |
장소 | 사누키국 시도 도장 (현재 가가와현 사누키시 시도의 시도지) |
결과 | 겐지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겐지 |
교전국 2 | 헤이시 |
지휘관 | |
겐지 측 지휘관 |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
헤이시 측 지휘관 | 다이라노 무네모리 |
병력 규모 | |
겐지 측 병력 | 80여 기 (헤이케모노가타리) |
헤이시 측 병력 | 1,000여 명 (헤이케모노가타리) |
2. 전투 이전의 경과
2. 1. 시도 전투 (1185년 3월 22일)
1185년 3월 22일(분지 원년 음력 2월 19일), 야시마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기습당한 다이라씨는 본진이었던 야시마를 버리고 해상으로 도망쳐 사누키국 시도지에 틀어박혔다. 요시츠네는 80 기마군사를 이끌고 다이라씨를 추격했고, 다이라씨의 가신이었던 덴나이 사에몬노조가 요시츠네에게 귀순했다. 고노 무네노부는 30척의 배를 정비하여 합류했다.요시츠네 측의 세력이 작은 것을 눈치챈 다이라가 쪽 1,000여 명이 공격해 왔으나, 야시마에 남아있던 겐지 세력 200여 기마병사가 달려오자 대군이 계속되어 온다고 판단, 다시 배로 돌아가 해상으로 도망쳤다. 시코쿠에서 쫓겨, 육지는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에 눌려 규슈로 건너갈 수도 없었고, 다이라가는 해상에 고립되 세토나이카이를 전전하며 히코시마로 물러갔다.
시도에서 벤 적의 수급을 확인한 요시츠네는 낭당(郎党)의 이세 요시모리를 불러 덴나이 사에몬노조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요시모리는 군세를 모두 흰 옷을 입게하고, 겨우 16기를 이끌고 향하여 사자를 세워 전의가 없음을 전하고, 노리요시와 대면했다. 요시모리는 노리요시에게 그의 아버지 아와 민부 시게요시가 포로로 잡혀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항복을 권유했고, 노리요시는 3천여 기병들과 함께 요시츠네에게 귀순했다. 이는 단노우라 전투에서 아와 민부 시게노리가 다이라가를 배신했다는 복선이 되고 있다.
3월 25일 (분지 원년 2월 22일)에는 수군을 조달한 가와하라 가게토키가 140 여 척의 배를 가지고 야시마에 도착했다.
2. 2. 겐지의 전력 보강
2. 3. 단노우라로 진군
1185년 4월 15일(분지 원년 3월 14일), 가마쿠라의 요리토모는 규슈를 지배하고 있는 노리요리에게 헤이시 토벌에 신중을 기하고 삼종신기를 무사히 되찾도록 서한을 보냈다.[1]1185년 4월 22일(분지 원년 3월 21일), 요시쓰네는 단노우라(시모노세키시 단노우라정 일대)의 헤이시를 공격하기 위해 출진하려 했으나 폭우로 연기되었다. 그곳에 스오국의 재청관인이자 선소(배를 관장하는 국아의 관공서)였던 고로 마사토시가 수십여 척의 배를 헌상했고, 요시쓰네는 고로를 가마쿠라의 고케닌으로 삼는다는 문서를 주었다.[1]
1185년 4월 24일(분지 원년 3월 22일), 수십 척의 병선을 징발한 요시쓰네는 단노우라를 향해 출발했다. 스오국에서 수비를 맡고 있던 미우라 요시즈미는 요시쓰네의 출발 소식을 듣고 오오시마노츠(야마구치현 슈난시 남부)에서 요시쓰네 군에 합류해, 이미 모지세키를 정찰하고 있었기에 안내인으로 선봉을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요시쓰네 군은 군선 840여 척으로, 헤이시의 진에서 30여 정 떨어진 단노우라 오쿠즈(시모노세키시 다이지토요우라정 앞바다에 있는 만쥬시마 · 칸쥬시마) 부근에 도착했다. 헤이시는 이를 알고 히코시마를 출발해, 아와 나리요시, 야마가 히데토오 등의 세력을 포함한 군선 500여 척을 이끌고 아카마세키를 지나 24일 저녁 무렵, 타노우라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모지구)에 집결했다. (군선의 수는 여러 설이 있음)[1]
1185년 4월 25일(분지 원년 3월 24일), 지쇼·주에이의 난의 마지막 전투인 단노우라 전투가 벌어졌다.
3. 단노우라 전투 (1185년 4월 25일)
1185년 4월 25일(분지 원년 3월 24일), 지쇼·주에이의 난의 마지막 결전인 단노우라 전투가 벌어졌다.[1] 『헤이케 이야기』나 『아즈마카가미』(2월 21일(구력) 조)·『교쿠요』(2월 21일, 27일(구력) 조)에 따르면, 스미요시 대사의 신주 쓰모리 나가모리가 상경하여, 3월 19일 (분지 1년 2월 16일)에 보전에서 가부라야가 서쪽으로 날아갔다는 것이 조정에 보고되었으며, 요시쓰네의 도해 성공은 그 신위의 발현이라고 적고 있다.[1] 이는 요시쓰네의 아와 도해에 동행했던 와타나베 당이 스미요시 사의 경호를 맡았던 것에서, 가장 먼저 요시쓰네의 도해 성공 정보를 얻은 스미요시 사가, 조정에 도해 성공과 관련된 신위 게시의 보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1]
4월 15일(분지 1년 3월 14일), 가마쿠라의 요리토모는 규슈를 장악하고 있는 노리요리에게 헤이씨 토벌에 신중을 기하고 삼종신기를 무사히 되찾도록 지시했다.
4월 22일(분지 1년 3월 21일), 요시쓰네는 단노우라(시모노세키시 단노우라 정 일대)의 헤이씨를 공격하기 위해 출진하려 했으나, 폭우로 연기되었다. 스오노쿠니의 재청관인이자 선소(배를 관장하는 고쿠가의 관청)였던 고로 마사토시가 수십 척의 배를 헌상했고, 요시쓰네는 고로를 가마쿠라의 고케닌으로 삼는다는 문서를 주었다.
4월 23일(분지 1년 3월 22일), 수십 척의 병선을 징발한 요시쓰네는 단노우라를 향해 출항했다. 스오노쿠니에서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미우라 요시즈미는 요시쓰네의 출항 소식을 듣고 오시마의 츠(야마구치현슈난시 남부)에서 요시쓰네군에 합류하여, 이미 모지 세키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요시쓰네로부터 안내인으로 선봉을 명받았다. 요시쓰네군은 군선 840여 척으로 헤이씨의 진에서 30여 정 떨어진 단노우라 오쓰(시모노세키시 오아자 도요우라 정의 앞바다에 있는 2개의 섬 만주 섬·간주 섬) 부근에 도착했다. 헤이씨는 이를 알고 히코시마를 출발하여, 아와 나리요시, 야마가 히데토오 등의 세력을 포함한 군선 500여 척을 이끌고 아카마세키를 통과하여 다음 날 24일 저녁 무렵, 타노우라 (후쿠오카현기타큐슈시모지구)에 집결했다(군선의 수는 여러 설이 있다).
『헤이케 이야기』「토리야와 단노우라 전투」에서는, 구마노 수군을 이끄는 탐증이 겐페이 어느 쪽에 붙을지, 붉은 닭과 흰 닭을 사용하여 닭싸움으로 점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탐증의 겐지 측 가담은 그 이전의 일이지만, 겐페이 쟁란 초부터 보인 구마노 세력의 동향의 복잡함에서 생긴 일화로 생각된다.
4. 전투의 영향
4. 1. 정치적 영향
4. 2. 사회문화적 영향
5.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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