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시게토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시마즈 시게토시는 사쓰마 번의 번주로, 1729년 시마즈 츠구토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732년 카지키 시마즈가의 당주 시마즈 히사스에의 양자가 되었고, 1749년 형 시마즈 무네노부의 사망으로 사쓰마 번주가 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실학 탄압 사건과 키소 삼천 분류 공사를 겪었으며, 특히 호레키 치수 사건으로 인해 많은 비용과 사망자가 발생했다. 1755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남 시마즈 시게히데가 뒤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가지키 시마즈가 - 시마즈 시게히데
시마즈 시게히데는 에도 시대 후기 사쓰마 번의 번주이자 가지키 시마즈 가문의 당주로서, 난학에 대한 관심과 교육 진흥, 정략결혼을 통해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로 번의 재정을 악화시켜 비판받기도 한다. - 사쓰마번주 - 시마즈 나리노부
시마즈 나리노부는 에도 시대 사쓰마번의 9대 번주로, 아버지의 은거로 번주가 되었지만 실권은 아버지에게 있었고, 번정 개혁 추진 중 권력 다툼으로 강제 은거당했으며, 고국학자 다카야마 히코쿠로와 친교가 있었고, 현재 일본 천황의 증조부이다. - 사쓰마번주 - 시마즈 시게히데
시마즈 시게히데는 에도 시대 후기 사쓰마 번의 번주이자 가지키 시마즈 가문의 당주로서, 난학에 대한 관심과 교육 진흥, 정략결혼을 통해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로 번의 재정을 악화시켜 비판받기도 한다.
시마즈 시게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씨명 | 시마즈 씨 |
이름 | 시마즈 시게토시 |
원어 이름 | 島津 重年 |
로마자 표기 | Shimazu Shigetoshi |
아명 | 젠지로 |
초명 | 히사카도 |
통칭 | 효고 |
신호 | 영국본사주명 |
계명 | 원덕원전각만량의대거사 |
생애 | |
출생 | 교호 14년 2월 11일 (1729년 3월 10일) |
사망 | 호레키 5년 6월 16일 (1755년 7월 24일) |
묘소 |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이케노우에정의 시마즈 가 묘지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사쓰마노카미, 좌근위소장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시게 |
번 | 사쓰마가고시마 번 번주 |
가계 | |
아버지 | 시마즈 츠구토요 |
어머니 | 시마즈 히사후사의 딸 도메 |
형제 | 무네노부 시게토시 히사타카 가네(鐘) 테츠(鉄) 신간인 이리키인 사다카츠 카바야마 히사토네의 아내 |
배우자 | 정실: 시마즈 토미 계실: 시마즈 히사나오의 딸 무라 |
자녀 | 시게히데 |
기타 | |
전임 | 시마즈 무네노부 |
직책 | 제7대 사쓰마 번주 |
후임 | 시마즈 시게히데 |
임기 | 1749년 ~ 1755년 |
2. 약력
교호 14년(1729년) 2월, 시마즈 츠구토요의 차남으로 가고시마성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11월 25일, 분가 필두인 시마즈 츠나히사의 차남이자 카지키 시마즈가 당주 시마즈 히사스에의 양자가 되었다. 유아명은 젠지로(善次郎)였다. 교호 17년(1732년)에 카지키 시마즈가 4대 당주가 되었고, 겐분 2년(1737년)에 원복하여 시마즈 효고 히사카도(久門)라 칭했다.
간엔 2년(1749년) 7월 10일, 형인 시마즈 무네노부가 사망하자, 에도 막부의 허가를 받아 본가로 복귀하여 그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종4위하, 시종에 임명되었으며, 사쓰마노카미로 칭했다. 또,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로 부터 편휘를 받아, 히사카도에서 '''시게토시(重年)'''로 개명했다.[7]
간엔 3년 (1750년), 번정 및 인물 비판을 하고 있던 실학파에 대해 "실학 붕괴"라고 하는 사쓰마번 최초의 학파 탄압 사건을 일으켜, 요닌인 미나요시 츠쿠야스(皆吉続安) 등 10명을 유배 보냈다.
호레키 3년(1753년), 막부 명령으로 키소삼천분류공사(호레키 치수)를 명령받고, 가로 히라타 유키에를 총책임자로 하여 다수의 번사가 공사에 종사하였으나, 막대한 비용과 사망자 80여 명을 냈다. 히라타는 공사 완성을 지켜보고, 호레키 5년(1755년)에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 다음 달, 시게토시도 병약한데다가 근심이 겹쳐 27세의 나이로 형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보다 앞서 사망했다.[7]
2. 1. 가문 계승 및 초기 활동
교호 14년(1729년) 2월, 시마즈 츠구토요의 차남으로서 가고시마성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11월 25일에 분가 필두인 시마즈 츠나히사의 차남이자 카지키 시마즈가 당주 시마즈 히사스에의 양자가 되었다. 유아명은 '''젠지로(善次郎)'''였다. 어머니 토메(시마즈 히사후사의 딸)는 덴메이 연간까지 생존해 있었지만, 츠구토요와 토메 사이의 아이는 젠지로 한 명뿐이었다.교호 17년(1732년)에 카지키 시마즈가 4대 당주가 되었고, 겐분 2년(1737년)에 원복하여 시마즈 효고 '''히사카도(久門)'''라 칭했다. 겐분 3년(1738년)에 시마즈 타카토모와 함께 가문을 일소지에서 신설된 일문가로 개편하였다. 그 해에 타카토모의 이복동생인 시마즈 타다노리가 시게토미 시마즈가를 일으키자, 이 가문도 일문가 반열에 올라 일문가 필두격이 되었다.[5] 카지키 시마즈가는 일문가 중 위치는 2번째였으나, 세 번째로 여겨졌던 타루미즈가가 타카토모의 대에 한해 일문가 필두가 되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히사카도의 위치는 3번째였다.[6] 하지만, 히사카도는 일문가 중에선 혈통상, 츠구토요나 무네노부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무네노부의 임시 양자가 되어 있었다.
간엔 2년(1749년) 7월 10일, 형인 시마즈 무네노부가 사망하자, 에도 막부의 허가를 받아 본가로 복귀하여 그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다. 카지키가는 장남 시마즈 히사카타(후의 시마즈 시게히데)가 이었다.
2. 2. 사쓰마 번주 시대
간엔 2년(1749년) 7월 10일, 형 무네노부가 사망하자, 막부의 허가를 받아 본가에 복귀하여 그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다. 카지키가는 장남 시마즈 히사카타 (후의 시마즈 시게히데)가 이었다. 같은 해 11월, 종4위하, 시종에 임명되었으며, 사쓰마노카미로 칭했다. 또,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로 부터 편휘를 받아, 히사카도에서 '''시게토시(重年)'''로 개명했다.[7]간엔 3년 (1750년)에 번정 비판이나 인물 비판을 하고 있던 실학파에 대해 "실학 붕괴"라고 하는 사쓰마번 최초의 학파 탄합 사건이 일어나, 요닌인 미나요시 츠쿠야스(皆吉続安) 등 10명을 유배 보냈다.
호레키 3년(1753년)에 막부 명령으로, 키소삼천분류공사 (호레키 치수)를 명령받고, 가로 히라타 유키에를 총책임자로 하여 다수의 번사가 공사에 종사하였으나, 막대한 비용과 사망자 80여 명을 냈다. 히라타도 완성을 지켜보고, 호레키 5년(1755년)에 책임을 지고 할복, 다음 달에 시게토시도 병약한데다가 근심이 겹쳐 27세의 나이로 형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보다 앞서 사망했다.[7]
이 전의 호레키 4년(1754년) 8월에 장남 히사카타가 (시마즈 종가로서)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본가에 들어와[3], 타다히로로 개명하고, 시게토시 사후, 10살의 나이로 번주에 취임하지만, 원복할 때, 같은 시기 쇼군 이에시게로부터 편휘를 받아, 시게히데로 개명했다.
3. 호레키 치수 사건 (1753년 - 1755년)
호레키 3년(1753년), 에도 막부의 명으로 기소 삼천의 치수 공사(호레키 치수 사건)를 명령받았다. 가로 히라타 유키에를 총책임자로 하여 다수의 번사가 공사에 종사했지만, 막대한 비용과 80여 명의 순직자를 냈다. 히라타 유키에도 공사 완성을 지켜본 후 1755년에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3]
4. 인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병약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구닌 코젠베에로부터 검술 지겐류를 배웠다.[8] 이 사료에서는 사쓰마 번주로서는 오랜만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1749년 7월 10일, 형인 무네노부가 사망했기 때문에, 막부의 허가를 받아 본가로 복귀하여 그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종4위하, 시종에 서임되었으며, 셋쓰노카미를 칭했다. 또한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로부터 편휘를 받아 구몬에서 '''시게토시'''로 개명했다.
1750년에 번정을 비판하거나 인물을 비판하던 실학파에 대해 "실학 붕괴"라는 사쓰마 번 최초의 학파 탄압 사건이 일어나, 요닌 미나요시 쓰구야스 등 유배자 10명을 내보냈다.
1753년에 막부의 명으로 기소 삼천의 치수 공사(호레키 치수)를 명령받아, 가로 히라타 유키에를 총책임자로 하여 다수의 번사가 공사에 종사했지만, 막대한 비용과 순직자 80여 명을 냈다. 히라타도 완성을 지켜보고 1755년에 책임을 지고 할복, 다음 달에 시게토시는 병약한 데다 심로가 겹쳐 27세에 형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전 1754년 8월에 장남 히사카타가 (시마즈 종가로서)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본가에 들어가[3] 다다히로로 개명했고, 시게토시의 사망 후 10세로 번주에 취임했지만, 원복 시에 역시 쇼군 이에시게로부터 편휘를 받아 시게히데로 개명했다.
5. 가족 관계
관계 | 내용 |
---|---|
아버지 | 시마즈 쓰구토요 (1702년 ~ 1760년) |
어머니 | 토메 - 시마즈 히사후사의 딸 |
외조부 | 시마즈 히사후사 (시마즈 미쓰히사의 17남. 통칭 슈메(主馬), 모토메(求馬)) |
정실 | 시마즈 토미 (1727년 ~ 1745년) - 숙부 시마즈 타카토모의 딸. 엔쿄 2년 11월 7일에 젠지로를 낳은 후 사망. 법호는 정각원정범묘아대자(正覚院貞範妙雅大姉). |
장남 | 시마즈 시게히데 (1745년 ~ 1833년) - 젠지로. 시마즈 히사카타, 시마즈 종가의 후계자가 되고 난 후, 타다히로라 칭함. |
계실 | 무라 (? ~ 1754년) - 시마즈 히사나오의 딸. 호레키 4년 2월 2일 사망. |
기타 | 사도와라번주 시마즈 히사모토의 아내 우메 (선처 토미의 동생)는 시게히데의 양동생이지만, 시게토시가 사망한 후 양여동생이 되었기 때문에 시게토시의 양자인 것은 아니다. 참고로 상고집성관의 『시마즈씨정통계보』에서는 시게히데의 양동생이었다는 사실조차 생략되어 있다.[1] |
6. 참고 문헌
- 카지키쵸 향토사
- 지겐류문서긴급록부록계도(示現流聞書喫緊録附録系図)
- 시마즈씨 정통계도
참조
[1]
문서
ただし、島津貴儔の垂水島津家当主在任中限定で筆頭ではなかった
[2]
문서
ちなみに延享年間に島津忠郷が今和泉島津家を興すと、この家が一門家最下位となる。
[3]
문서
重年には久方(重豪)の他に子供がいなかったため、加治木家に関しては、これを継ぐ者がいなくなり、島津久徴 (加治木家)|島津久徴が継ぐまで当主不在となった。
[4]
문서
「示現流聞書喫緊録附録系図」 참조
[5]
문서
하지만, 시마즈 타카토모의 타루미즈 시마즈가 당주 재임 중 한정으로. 필두는 아니었다.
[6]
문서
참고로, 엔쿄 연간에 시마즈 타다사토가 이마이즈미 시마즈가를 일으키자, 이 가문이 일문의 최하위가 되었다.
[7]
문서
시게토시는 히사카타 (시게히데) 외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카지키가에 관해서는 이를 이을 사람이 없어져, 시마즈 히사나루 (1752년)|시마즈 히사나루가 이을 때까지 당주 부재 상태가 되었다.
[8]
문서
「지겐류문서긴급록부록계도」 참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