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지리토게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시오지리토게 전투는 1548년 8월 13일에 벌어진 전투로, 다케다 신겐이 오가사와라 나가토키 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우에다하라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고 시나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케다 신겐은 기습 작전을 통해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가사와라 군의 허점을 찌르며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의 결과로 오가사와라 가문은 쇠퇴하고, 다케다 가문은 시나노 지배를 더욱 공고히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48년 분쟁 - 우에다하라 전투
우에다하라 전투는 1548년 다케다 하루노부가 시나노 국을 침공하다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패배한 전투로, 다케다 군은 주요 가신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시나노 공략을 계속했으며, 다케다 신겐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고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발발 원인이 되었다. - 1548년 일본 - 우에다하라 전투
우에다하라 전투는 1548년 다케다 하루노부가 시나노 국을 침공하다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패배한 전투로, 다케다 군은 주요 가신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시나노 공략을 계속했으며, 다케다 신겐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고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발발 원인이 되었다. - 1548년 일본 - 덴분의 난
덴분의 난은 1542년부터 1548년까지 다테 가문의 당주 다테 다네무네와 그의 아들 다테 하루무네 사이에서 벌어진 오슈 지방의 대규모 내전으로, 다네무네의 세력 확장에 대한 하루무네의 반발, 주변 다이묘들의 개입,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중재를 거쳐 다테 가문의 쇠퇴와 오슈 지역 정치적 판도 변화를 야기했다. - 다케다 신겐 - 가와나카지마 전투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부터 1564년까지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시나노 국 가와나카지마에서 시나노 지방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다섯 차례의 전투로,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 배경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다케다 신겐 - 우에다하라 전투
우에다하라 전투는 1548년 다케다 하루노부가 시나노 국을 침공하다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패배한 전투로, 다케다 군은 주요 가신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시나노 공략을 계속했으며, 다케다 신겐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고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발발 원인이 되었다.
시오지리토게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 이름 | 시오지리토게 전투 |
부분 | 센고쿠 시대 |
날짜 | 1548년 |
장소 | 시나노국 시오지리토게 (현재의 나가노현 시오지리시, 오카야시) |
결과 | 다케다 가문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다케다 가문 |
교전 2 | 오가사와라 가문 |
지휘관 및 지도자 | |
다케다 가문 지휘관 | 다케다 신겐 |
오가사와라 가문 지휘관 | 오가사와라 나가토키 |
오가사와라 가문 전사 | 간다 쇼겐 |
병력 규모 | |
다케다 군 | 3000명 |
오가사와라 군 | 5000명 |
캠페인 | |
캠페인 목록 | 나시노키다이라 전투 운노쿠치 전투 세자와 전투 우에하라 공성전 쿠와바라 공성전 후쿠요 공성전 나가쿠보 공성전 고진야마 공성전 다카토 공성전 (1545) 류가사키 공성전 우치야마 공성전 오다이하라 전투 시카 공성전 우에다하라 전투 시오지리토게 전투 후카시 공성전 토이시 공성전 가쓰라오 공성전 기소 후쿠시마 공성전 간노미네 공성전 마쓰오 공성전 가와나카지마 전투 가쓰라야마 공성전 무사시-마쓰야마 공성전 (1563) 스루가-사가미 분쟁 구라가노 공성전 미노와 공성전 하치카타 공성전 (1568) 오다와라 공성전 (1569) 미마세토게 전투 간바라 공성전 하나자와 공성전 후카자와 공성전 도네가와 전투 후타마타 공성전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와무라 공성전 노다 성 공성전 다카텐진 공성전 (1574) 요시다 공성전 아케치 공성전 나가시노 전투 오모스 전투 다카텐진 공성전 (1581) 다카토 공성전 (1582) 덴모쿠잔 전투 |
2. 배경
1541년(덴분 10년) 6월, 다케다 노부토라를 스루가 국으로 추방하고 당주가 된 다케다 신겐은 아버지 시대부터 진행되던 시나노 침공을 계속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1548년(덴분 17년) 2월,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대패하여, 이타가키 노부카타가 전사하고 신겐도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시나노에서 다케다 씨의 권익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이 결과, 신겐의 시나노 침공으로 평정되었던 지역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우에다하라 전투 한 달 후인 4월 25일,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군대가 다케다 령 사쿠 군에 침공, 우치야마 성을 불태웠다.
이러한 사태에 신겐에게 압박받던 시나노 수호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호기라 판단, 4월 중순 무라카미 요시키요, 아즈미 군의 니시나 모리요시와 연합하여 스와를 공격, 6월 10일 스와 하사를 점령했다.
2. 1. 시나노 국의 정세
1541년(덴분 10년) 6월, 다케다 노부토라를 스루가 국으로 추방하고 당주가 된 다케다 신겐은 아버지 시대부터 진행되던 시나노 침공을 계속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1548년(덴분 17년) 2월,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대패하여, 이타가키 노부카타가 전사하고 신겐도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시나노에서 다케다 씨의 권익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이 결과, 신겐의 시나노 침공으로 평정되었던 지역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우에다하라 전투 한 달 후인 4월 25일,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군대가 다케다 령 사쿠 군에 침공, 우치야마 성을 불태웠다.
이러한 사태에 신겐에게 압박받던 시나노 수호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호기라 판단, 4월 중순 무라카미 요시키요, 아즈미 군의 니시나 모리요시와 연합하여 스와를 공격, 6월 10일 스와 하사를 점령했다.
2. 2. 다케다 신겐의 부상
1541년(덴분 10년) 6월, 다케다 신겐은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를 스루가 국으로 추방하고 당주가 된 후, 아버지 시대부터 진행되던 시나노 침공을 계속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1548년(덴분 17년) 2월,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대패하여 이타가키 노부카타가 전사하고 신겐도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시나노에서 다케다 가문의 세력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2. 3. 우에다하라 전투의 패배와 위기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신겐이 큰 손실을 입은 후, 복수를 다짐하며 연승을 이어가고자 했다.신겐은 소규모 기습 부대를 활용하여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의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밤에 접근하여 새벽에 공격을 시작한 신겐은 적의 허를 찔렀고, 오가사와라 군이 "갑옷과 칼을 잡기도 전에" 진영을 점령했다.
이 전투는 다케다 신겐이 기병을 최대한 활용하는 그의 전문성과 능숙함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 중 하나이다.
1541년(덴분 10년) 6월,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를 스루가 국으로 추방하고 당주가 된 신겐은 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오던 시나노 침공을 계속하며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1548년(덴분 17년) 2월, 북시나노의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이타가키 노부카타가 전사하고 신겐도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시나노에서 다케다 가문의 입지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결과, 신겐의 시나노 침공으로 평정되었던 지역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우에다하라 전투가 끝난 지 한 달 뒤인 4월 25일,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무라카미 군이 다케다 영지인 사쿠 군에 침입하여 우치야마 성을 불태웠다.
이러한 상황을 본 시나노 슈고이자 신겐에게 압박받던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좋은 기회라 판단하고, 4월 중순 무라카미 요시키요나 아즈미 군의 니시나 모리요시와 연합하여 스와를 공격, 6월 10일 스와 하사를 점령했다.
3. 경과
1548년(덴분 17년) 8월 13일(음력 7월 10일), 하나오카 씨, 야지마 씨 등 스와 니시카타슈(西方衆)는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와 손잡고 다케다에 반기를 들었다. 다케다의 스와 성주대리는 시나노의 거점 우에하라성으로 철수했다.
하루노부는 8월 14일에 군사를 이끌고 출진했지만, 8월 21일까지 본국 가이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는 오가사와라 군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작전이었다. 8월 21일부터 은밀하게 진군을 서둘러 8월 22일에는 우에하라성에 입성했다. 그리고 같은 날, 시나노 시오지리토게에 진을 친 오가사와라 군 5000명을 급습했다.
다케다 군의 기습에 방심하고 있던 오가사와라 군은 허를 찔려 대혼란에 빠졌다. 오가사와라 군은 1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패주했다. 하루노부는 부중(府中)을 모조리 불태우고 가이로 귀환했다.
그런데 실제로 작전을 지휘한 것은 다케다 노부시게이며, 하루노부는 최후까지 가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3. 1. 반(反) 다케다 세력의 봉기
1548년(덴분 17년) 8월 13일(음력 7월 10일), 하나오카 씨(花岡氏), 야지마 씨(矢島氏) 등의 스와 니시카타슈(西方衆)는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와 손잡고 다케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다케다의 스와 성주대리는 어쩔 수 없이 시나노의 거점 우에하라성으로 후퇴했다.다케다 노부토라를 추방하고 가이의 다이묘가 된 다케다 신겐은 아버지 시대부터 진행되던 시나노 침공을 계속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1548년 2월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대패하여 이타가키 노부카타가 전사하고 신겐도 부상을 입는 등, 시나노에서 다케다 씨의 권익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은 신겐의 시나노 침공으로 평정되었던 지역에서 동요를 일으켰다. 우에다하라 전투가 끝난 한 달 뒤인 4월 25일,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군대가 다케다 령인 사쿠 군을 역으로 침공하여 우치야마 성을 불태웠다.
이러한 사태를 본 시나노 슈고이자 신겐에게 압박받던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 4월 중순에 무라카미 요시키요나 아즈미 군의 니시나 모리요시와 연합하여 스와를 공격했고, 6월 10일 스와 하사를 점령했다.
3. 2. 다케다 신겐의 반격
1548년(덴분 17년)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대패하여 큰 타격을 입은 다케다 신겐은 복수를 다짐하며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8월 13일(음력 7월 10일) 하나오카 씨, 야지마 씨 등의 스와 니시카타슈(西方衆)는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와 손잡고 다케다 가문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다케다의 스와 성주대리는 시나노의 거점 우에하라성으로 철수했다.
하루노부는 8월 14일에 군사를 이끌고 출진했지만, 8월 21일까지 본국 가이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는 오가사와라 군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작전으로, 8월 21일부터 은밀하게 진군을 서둘러 8월 22일에는 우에하라성에 입성했다. 그리고 같은 날, 시나노 시오지리토게에 주둔한 오가사와라 군 5000명을 급습했다. 방심하고 있던 오가사와라 군은 허를 찔려 대혼란에 빠졌고, 1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패주했다. 하루노부는 부중(府中)을 모조리 불태우고 가이로 귀환했다.
이 작전을 실제로 지휘한 것은 다케다 노부시게이며, 하루노부는 최후까지 가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신겐은 소규모 기습 부대를 이용하여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의 진영을 기습했다. 밤에 접근하여 새벽에 공격을 시작한 신겐은 적의 허를 찔렀고, 오가사와라 군은 "갑옷과 칼을 잡기도 전에" 진영을 점령당했다.
이 전투는 다케다 신겐이 기병을 최대한 활용하는 그의 전문성과 능숙함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 중 하나이다.
3. 3. 시오지리 고개 전투
1548년 8월 13일(음력 7월 10일), 하나오카 씨(花岡氏), 야지마 씨(矢島氏) 등의 스와 니시카타슈(西方衆)는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와 손잡고 다케다(武田)에 반기를 들었다. 다케다의 스와 성주대리는 시나노의 거점 우에하라성으로 철수했다.하루노부는 8월 14일에 군사를 이끌고 출진했지만, 8월 21일까지 본국 가이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오가사와라 군의 눈을 속이는 작전으로, 8월 21일부터 은밀하게 진군을 서둘러 8월 22일에는 우에하라 성에 입성했다. 그리고 같은 날, 시나노 시오지리토게에 진을 친 오가사와라 군 5000명을 급습했다. 방심하고 있던 오가사와라 군은 허를 찔려 대혼란에 빠지고, 1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패주한다. 하루노부는 부중(府中)을 모조리 태워버리고 가이로 귀환했다.
그런데 실제로 작전을 지휘한 것은 다케다 노부시게이며, 하루노부는 최후까지 가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는 설도 있다.
음력 7월 10일, 하나오카 씨나 야지마 미쓰키요 등 다케다 가문에 속했던 스와 서방중은 배반했다.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스와군 다이(郡代)인 이타가키 노부카타를 잃고 동요가 심했던 가미스와(다케다 측)로 들이닥쳤다.
하루노부는 7월 11일에 고후를 출발하여 7월 18일까지 오이모리에 머물며 군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는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연 행군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병력과 전황에서 우위에 있던 오가사와라 군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나가토키는 하루노부에 대항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병력을 끌어모았기에 징집된 병사들로 결속력이 부족했고, 오히려 대립하기도 했다. 오가사와라 군에서는 나가토키의 장인인 니시나 모리요시가 작전 방침을 두고 나가토키와 대립하여 군을 이끌고 퇴각했고, 야마가 씨나 미무라 씨 등의 무장들은 하루노부의 책략으로 내응했다고 한다.
7월 18일, 하루노부는 군을 이끌고 우에하라 성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새벽, 하루노부는 은밀히 군을 이동시켜 나가토키가 있는 시오지리 고개에 오전 6시경 기습을 시작했다. 다케다의 지연 행동에 방심하고 있던 오가사와라 측은 무구를 풀고 쉬고 있었고, 군세의 과반수는 아직 취침 중이었기 때문에 다케다 군의 행동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아침 기습을 받은 오가사와라 군은 천 명 정도가 전사하고 총 붕괴되었다.
오와다 테쓰오는 오가사와라 군은 군장 준비할 틈도 없이 패배했다고 한다.
4. 전후
다케다 하루노부는 시오지리토게 전투에서 승리하여 우에다하라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고 시나노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하야시성으로 도망쳤으나, 1550년 7월에 하루노부에게 성을 빼앗기고 몰락했다.
4. 1. 다케다 가문의 시나노 지배 강화
하루노부는 영지의 기반을 공고히 한 후, 시나노의 오가사와라 영지에 재차 침공을 개시했다. 이때 다케다 가문에 두려움을 느껴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자가 속출했다. 1550년에는 궁지에 몰린 나가토키가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의지해 멀리 달아났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켰던 스와 니시카타슈는 영지를 빼앗기고 추방당했다.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거성인 하야시성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패전의 상처는 깊었다. 한편, 다케다 하루노부는 우에다하라에서의 대패를 이 대승으로 만회하게 되었고, 9월 6일에는 스와에서 사쿠로 침공하여 마에야마성을 비롯한 13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10월 2일에는 지쿠마군에 진입하여 하야시성에서 불과 2ri에 위치한 지점에 오가사와라 씨에 대한 견제와 스와군에 대한 방어를 위해 무라이성(고야성)을 축성하고, 25일에는 스와 가미하라성으로 귀진했다. 이 패전으로 오가사와라 씨는 두 번 다시 스와, 이나군으로 군사 행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550년 7월에 나가토키는 하루노부에게 하야시성을 쫓겨나게 된다 (하야시성의 전투).
4. 2. 오가사와라 가문의 몰락
1550년, 다케다 하루노부는 시나노의 오가사와라 영지에 재차 침공을 개시했다. 이때, 다케다 군에 두려움을 느껴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자가 속출했다. 궁지에 몰린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의지해 멀리 달아났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켰던 스와 니시카타슈는 영지를 빼앗기고 추방당했다.우에다하라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직후, 다케다 신겐은 복수를 맹세하고 연승 가도를 재개하려 했다. 신겐은 소규모 기습 부대를 이용하여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의 진영을 밤에 기습 공격했다. 새벽에 공격을 시작한 신겐은 적의 허를 찔렀고, 오가사와라 군은 "갑옷과 칼을 잡기도 전에" 진영을 점령당했다.
이 전투는 다케다 신겐이 기병을 최대한 활용하는 그의 전문성과 능숙함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 중 하나이다.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거성인 하야시성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패전의 상처는 깊었다. 한편, 다케다 하루노부는 우에다하라에서의 대패를 이 대승으로 만회하게 되었고, 9월 6일에는 스와에서 사쿠로 침공하여 마에야마성을 비롯한 13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10월 2일에는 지쿠마군에 진입하여 하야시성에서 불과 2리(ri) 위치한 지점에 오가사와라 씨에 대한 견제와 스와군에 대한 방어를 위해 무라이성(고야성)을 축성하고, 25일에는 스와 가미하라성으로 귀환했다. 이 패전으로 오가사와라 씨는 두 번 다시 스와, 이나군으로 군사 행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550년 7월에 나가토키는 하루노부에게 하야시성을 쫓겨나게 된다 (하야시성의 전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