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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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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석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다.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일제의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항거했다. 광복 후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설립을 반대하다가 체포되어 한국 전쟁 중 평양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충북 청주시 삼일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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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기본 정보
이름신석구 (申錫九)
출생1875년 음력 11월 20일
사망1950년 9월 28일
본관고령 신씨 (高靈 申氏)
가족 관계
배우자김해 김씨
자녀4남 2녀
학력
수학성균관 수학
주요 경력
1919년파리장서운동 참여
1927년신간회 발기인 및 중앙집행위원
1945년건국준비위원회 참여
1948년제헌 국회의원
수감 경력
1942년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 옥고
서훈
1990년건국훈장 애족장

2. 생애

1875년 5월 3일 충청도 청주군 산내이상면(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태어났다. 유교 집안에서 자라 어릴 때는 한학을 배웠으나, 20대 후반이던 1907년 개신교에 입문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경기도와 강원도 등 여러 곳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191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경성부에서 목회 중이던 신석구는 오화영의 권유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1]

3·1 운동 이후에도 일본이 요구하는 신사참배와 전승기원예배를 매번 거부했다. 감리교단이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 강요에 부응하는 결의를 하고 많은 목사들이 이를 따를 때 반대했고, 태평양 전쟁 시기에 대대적으로 대동아전쟁전승기원예배가 열릴 때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는 같은 충북 출신의 감리교 목사로 민족대표 33인이기도 했던 정춘수의 친일 행위와 대비되는 것이었다.[3]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으나 그는 창씨를 거부하였고 당국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광복 당시 평안남도 룡강군의 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북조선인민위원회 설립에 반대하여 반공주의 운동을 했다. 이로 인해 1946년1947년에 각각 한 번씩 투옥되었으며, 한국으로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유에 어린 양들을 버리고 남하할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1]

1949년 4월에 다시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때는 이미 75세의 고령이었으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총살되었다.[1]

2. 1. 초기 생애와 개신교 입문

1875년 5월 3일 충청도 청주군 산내이상면(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태어났다. 유교 집안에서 자라 어릴 때는 한학을 배웠으나, 20대 후반이던 1907년 개신교에 입문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경기도와 강원도 등 여러 곳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191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2. 2. 3.1 운동과 민족대표 33인

1919년 3·1 운동 당시 경성부에서 목회 중이던 신석구는 오화영의 권유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1]

2. 3. 신사참배 및 창씨개명 거부

신석구는 목회 활동을 하였으며 기독교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총독부 당국의 신사참배령을 거부하였다.

그는 3·1 운동 이후에도 일본이 요구하는 신사참배와 전승기원예배를 매번 거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감리교단이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 강요에 부응하는 결의를 하고 많은 목사들이 이를 따를 때 반대했고, 태평양 전쟁 시기에 대대적으로 대동아전쟁전승기원예배가 열릴 때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는 같은 충북 출신의 감리교 목사로 민족대표 33인이기도 했던 정춘수의 친일 행위와 대비되는 것이었다.[3]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으나 그는 창씨를 거부하였고 당국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2. 4. 광복 이후 활동과 최후

광복 당시 평안남도 룡강군의 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북조선인민위원회 설립에 반대하여 반공주의 운동을 했다. 이로 인해 1946년1947년에 각각 한 번씩 투옥되었으며, 한국으로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유에 어린 양들을 버리고 남하할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1]

1949년 4월에 다시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때는 이미 75세의 고령이었으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총살되었다.[1]

3. 사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신석구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1] 청주시 삼일공원에 신석구의 동상이 설치되었다. 감리교단에서 이덕주가 쓴 《신석구 연구》(2000년) 평전이 발간되었다.

3. 1. 대한민국 정부의 건국훈장 추서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신석구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1]

3. 2. 삼일공원 동상 건립

청주시 삼일공원에 신석구의 동상이 설치되었다.

3. 3. 평전 발간

감리교단에서 이덕주가 쓴 《신석구 연구》(2000년) 평전이 발간되었다.

4. 평가

신석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와 창씨개명령을 거부하고, 태평양 전쟁 시기 대동아전쟁전승기원예배에도 불참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과 신앙적 절개를 지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감리교단이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에 동조할 때도,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신앙적 양심을 지켰다.[3][2]

4. 1. 항일 독립운동가로서의 평가

신석구는 3·1 운동 이후에도 일본이 요구하는 신사참배와 전승기원예배를 매번 거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감리교단이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 강요에 부응하는 결의를 하고 많은 목사들이 이를 따를 때 반대했고, 태평양 전쟁 시기에 대대적으로 대동아전쟁전승기원예배가 열릴 때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는 같은 충북 출신의 감리교 목사로 민족대표 33인이기도 했던 정춘수의 친일 행위와 대비되는 것이었다.[3]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으나 그는 창씨를 거부하였고 당국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4. 2. 신앙인으로서의 평가

신석구는 목회 활동을 하면서 기독교 사회 단체 활동에 참여했고, 일제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했다.[2]

3·1 운동 이후에도 신사참배와 전승 기원 예배를 거부했으며, 감리교단이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에 응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반대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 대동아전쟁 전승 기원 예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친일 행위를 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정춘수와 대비된다.[2] 1940년 조선총독부창씨개명 강요에도 불구하고, 창씨를 거부하여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2]

4. 3. 정춘수와의 비교

신석구는 감리교단이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 강요에 부응하는 결의를 하고 많은 목사들이 이를 따를 때도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태평양 전쟁 시기에 대동아전쟁전승기원예배가 열릴 때도 참가하지 않았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령에도 창씨를 거부하였다.[3] 이러한 행보는 같은 충북 출신의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정춘수의 친일 행위와 대비된다.[3]

참조

[1] 웹사이트 신석구(申錫九) http://encykorea.aks[...] 2022-08-20
[2] 뉴스 혹 친일 청산은 우리 역사의 우산이 아닐까 - 전주 역사박물관 '캐리커처로 보는 항일과 친일전'을 보고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7-09-19
[3] 뉴스 혹 친일 청산은 우리 역사의 우산이 아닐까 - 전주 역사박물관 '캐리커처로 보는 항일과 친일전'을 보고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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