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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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해박해는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전라도 진산(현 충청남도 금산)의 선비 윤지충이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진산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 권상연은 체포되어 신앙을 버리지 않아 참수되었으며, 이 사건은 당쟁으로 번져 정조 사후 신유박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신해박해는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유교적 가치관의 충돌을 보여주며, 이후 천주교가 탄압받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8세기 조선에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전래되어, 초기에는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여겨졌다.[2] 점차 종교로 인식되며 교세가 성장했는데, 성리학의 한계를 느낀 진보적 사상가와 소외된 남인 소장파 학인들이 유교를 보완하는 관점에서 접근했다.[4] 또한 부패한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에게도 확산되었다.
1783년 윤지충은 진사시에 합격한 후 상경하여 고종사촌 정약용을 통해 천주학을 접하고, 1787년 세례를 받았다.[22] 1789년 북경에서 견진성사를 받고 귀국하였으나,[22]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자 낙향하여 유교 제사 금지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집안의 신주(神主)를 불살랐다.[23] 1791년 여름 모친상을 당했을 때 로마 가톨릭 예식으로 장례를 치렀고, 외사촌 권상연도 제사를 폐지하고 자신의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다.[24][25]
2. 역사적 배경
정조는 유교가 흥하면 천주교는 소멸될 것이라며 천주교를 묵인했다.[5][6] 그러나 천주교는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신분제 철폐,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 거부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유교 사회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7]
특히 조선의 발달된 관혼상제 문화에서 천주교는 장례 문제로 정면 충돌을 일으켰다.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선언했는데,[8] 이는 1656년 알렉산데르 7세의 선언을[9] 뒤집는 조치여서 혼란을 야기했다. 이후 조상 제사 거부는 천주교 박해의 주요 이유로 활용되었다.[10]
남인 학인들은 천주학 연구 모임을 가졌으나 자료 부족을 겪었다.[13] 1783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많은 자료를 가지고 귀국했다.[14][15][16][17][18] 1784년부터 교리를 가르쳤으나 이듬해 발각되어 모임이 와해되었다. 1786년 이승훈은 자치교회를 만들어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790년 북경 교구는 가성직제 운영이 교회법 위반이라며 제재하고, 조선 천주교도들에게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19]
2. 1. 천주교 전래와 초기 수용
18세기 조선 사대부의 서가에는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가 꽂혀 있을 정도로, 초기 중국을 통해 전래된 천주교는 종교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서학(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2] 18세기 말, 천주교는 점차 종교로 받아들여지며 교세가 크게 성장하였다.[3] 성리학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진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관직 사회에서 소외된 남인의 소장파 학인들이 보유론(補儒論)적인[4] 관점에서 천주교에 접근했다. 또한 부패하고 무기력한 지배 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갔다.
2. 2. 문화 충돌과 갈등의 심화
정조(1776~1800)는 유학이 흥하면 천주교는 소멸될 것이라 하면서 천주교를 묵인하였다.[5][6] 그러나 천주교는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신분제 철폐,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 거부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유교 사회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7]
특히 조선은 관혼상제 문화가 매우 발달하여 장례 문화에서 천주교와 정면 충돌을 일으켰다.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제사를 우상 숭배라고 선언하였는데,[8] 이는 1656년 알렉산데르 7세의 선언을[9] 뒤집는 조치여서 혼란을 야기했다. 이후 조상 제사 거부는 천주교 박해의 주요 이유로 활용되었다.[10]
2. 3. 조선 천주교의 자생적 성장
18세기 조선 사대부 사이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읽히는 등, 천주교는 초기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여겨졌다.[2] 점차 종교로 인식되며 교세가 성장했는데, 성리학의 한계를 느낀 진보적 사상가와 소외된 남인 소장파 학인들이 유교를 보완하는 관점에서 접근했다.[4] 또한 부패한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에게도 확산되었다.
남인 학인들은 천주학 연구 모임을 가졌으나 자료 부족을 겪었다.[13] 1783년 이승훈의 부친이 북경에 사절단으로 가게 되자, 이들은 이승훈에게 동행을 설득하고 여비를 모아주며 천주교 서적을 구해올 것을 부탁했다.[14][15][16][17]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많은 자료를 가지고 귀국했다.[18]
1784년, 이승훈은 정기모임을 통해 교리를 가르쳤으나 이듬해 발각되어 모임이 와해되었다. 1786년 이승훈은 자치교회를 만들어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790년 북경 교구는 가성직제 운영이 교회법 위반이라며 제재하고, 조선 천주교도들에게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19] 이는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제사를 우상숭배로 선언한 것에 근거했다.
3. 진산 사건의 전개
윤지충의 행동에 대한 소문은 당쟁으로 번졌고,[26] 서인은 남인을 공격했으며, 남인 또한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로 분열하였다. 당시 서학 탄압에 앞장섰던 홍낙안은 윤지충의 체포와 사형을 요구했다.[28][29]
윤지충과 권상연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굽히라는 진산 군수의 강요를 듣지 않고,[31]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32] 윤지충은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에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도 천주께 죄를 짓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가난 때문에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9][26]
조상 제사 거부는 유교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이는 곧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무부무군(無父無君) 사상은 유교 이념으로 유지되던 조선의 지배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3. 1. 폐제분주(廢祭焚主)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 금산)의 선비 윤지충은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상경하였다. 이때 고종사촌 정약용을 통해 천주학을 접하고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열리는 '명례방공동체'에 참여했으며, 1787년 세례를 받았다. 1789년 북경에서 견진성사를 받고 귀국하였으나[22],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낙향하여 조용히 지내며 제사 금지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집안의 신주(神主)를 불살랐다.[23] 1791년 여름 모친상을 당했을 때 유교식 상장(喪葬)의 예를 따르지 않고 조문도 받지 않았으며, 로마 가톨릭 예식으로 장례를 치렀다.[24] 이에 종친들이 분노하였다. 같은 천주교인이자 외사촌인 권상연도 제사를 폐지하고 자신의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다.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운 일은 그의 일가인 권상희를 통해 알려졌다.[25]
3. 2. 당쟁 비화와 체포
윤지충의 처사에 대한 소문이 조정에 전해지면서 당쟁으로 비화되었다.[26] 윤지충과 권상연이 남인이었기 때문에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인 또한 천주교를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와 탄압해야 한다는 공서파(攻西派)로 분열하였다. 당시 서학 탄압에 앞장섰던 홍낙안은 좌의정 채제공[27]에게 보낸 글에서 "저들 지충의 무리는 제사를 폐한 것도 부족하여 부모의 상을 당하고서도 혼백을 세우지 않았고 부모가 죽었음에도 조문을 받지 않으니 천지가 생겨난 이래 어찌 이와 같은 변괴하고도 사악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죄는 살인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지충의 체포와 사형을 요구하고 나섰다.[28][29]
3. 3. 심문과 항변
윤지충과 권상연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굽히라는 진산 군수의 강요를 듣지 않았다.[31]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32]
3. 4. 처형과 그 명분
윤지충은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에 모든 것을 털어놓은 후,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도 천주께 죄를 짓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가난 때문에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서도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다.[29] 그러나 윤지충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6]
조상 제사 거부는 유교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이는 곧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무부무군(無父無君) 사상은 유교 이념으로 유지되던 조선의 지배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천주교도들은 '나라를 원망하며 세상을 뒤엎고자 하는 무리'로 규탄받으며 처형되었다. 조선 지배층은 천주교를 체제와 정통에 도전하는 사악한 종교로 보았으며,[43] 정조 역시 1787년 반회사건 이후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었기[44] 때문에 사형으로 처결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4. 진산 사건의 영향
진산 사건은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윤지충과 권상연의 처형은 당쟁으로 번졌다. 남인에 속했던 두 사람으로 인해 서인은 남인을 공격했고, 남인은 천주교를 묵인하는 신서파와 탄압해야 한다는 공서파로 분열되었다. 당시 좌의정 채제공에게 홍낙안은 윤지충의 죄가 살인과 같다고 주장하며 사형을 요구했다.[28][29]
정조는 천주교 박해를 확대하지 않고 마무리하려 했으나, 조정은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신서파와 홍의호 등의 공서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이 갈등은 1801년 신유박해로 신서파가 타격을 입을 때까지 10여 년간 지속되었다.[45]
이 사건으로 천주교가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받자, 많은 양반 계층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중인 계층이 그 자리를 채웠고, 1794년 무렵 신자 수는 4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17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서울에 잠입하여 활동하면서 5년 후 교세가 1만 명에 육박했다.[48]
정약용의 집안도 진산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윤지충이 정약용의 외사촌이었기 때문이다. 정약용과 둘째 형 정약전은 배교했지만,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셋째 형 정약종은 교리에 따라 제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양근으로 이사했다.
정조는 유학이 흥하면 천주교가 소멸될 것이라 여겼지만,[5][6] 천주교는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신분제 철폐와 유교적 의례 거부를 주장하여 유교 사회와 지배 체제에 위협이 되었다.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선언했고,[8] 이후 조상 제사 거부는 천주교 박해의 주요 이유가 되었다.[10]
4. 1. 당파 다툼과 신유박해
윤지충의 처사에 대한 소문이 조정에 전해지면서 당쟁으로 비화되었다.[26] 남인에 속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으로 인해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남인 또한 천주교를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와 탄압해야 한다는 공서파(攻西派)로 분열하였다. 당시 서학 탄압에 앞장섰던 홍낙안은 좌의정 채제공[27]에게 보낸 글에서 "저들 지충의 무리는 제사를 폐한 것도 부족하여 부모의 상을 당하고서도 혼백을 세우지 않았고 부모가 죽었음에도 조문을 받지 않으니 천지가 생겨난 이래 어찌 이와 같은 변괴하고도 사악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죄는 살인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지충의 체포와 사형을 요구하고 나섰다.[28][29]정조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고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 자신의 측근 중에 천주교에 가까이 한 자들이 많았던 이유도 있었다.[5] 또한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한역 서양서적을 소각하는 등 천주교의 전파를 억제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생각과는 달리 조정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국(相國)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신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 등의 공서파가 대립하였다. 진산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당쟁은 1801년 신유박해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 10여 년간 계속되었다.[45]
4. 2. 천주교 전교 활동의 변화
신해박해로 인해 천주교가 정치적, 종교적으로 박해를 받자, 많은 양반 계층 교인들이 동요하여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다.[35] 그 공백은 중인 계층이 메워나갔는데, 탄압에도 불구하고 1794년 무렵 신자 수는 4천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중국 교회의 구베아 주교는 신해박해로 인해 보류되었던 선교사 파견을 다시 추진하였다.[46] 1795년 초 서울에 잠입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곧 체포령이 내려져[47] 은밀히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완숙 등의 도움에 힘입어 5년 후 교세는 1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48]4. 3. 전동성당 건립과 순교자 현양
전동성당은 윤지충, 권상연 등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터 위에 자리잡고 있다. 1908년 보두레 신부가 이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순교터 위에 전동성당을 건축하였다. 일제강점기 중 도로를 개설하며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을 철거했는데, 이때 윤지충이 참수될 당시 피가 튀었던 돌을 가져와 주춧돌로 삼았다고 한다.[49][50][51] 전동성당은 사적 2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당 한쪽에는 윤지충의 순교 모습이 동상으로 제작되어 있다.[52]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을 복자로 서품하였다.[53]4. 4. 정약용 가문과 천주교
정약용의 집안은 진산 사건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윤지충이 정약용의 외사촌이었기 때문이다. 정약용과 둘째 형 정약전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배교하며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으나, 윤지충과 친척이라는 사실과 윤지충에게 천주교를 소개한 자가 정약용이었기 때문에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54]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은 교리에 따라 집안 제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갔다.[55]천주교의 제사 거부 교리가 널리 알려졌고, 이후 천주교가 탄압을 받는 명분으로 십분 활용되었다.
4. 5. 사회적 파장과 역사적 의의
정조(1776~1800)는 유학이 흥하면 천주교는 소멸될 것이라 하며 묵인하였다.[5][6] 그러나 천주교는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신분제 철폐,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 거부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유교 사회와 지배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였고,[8] 이는 1656년 알렉산데르 7세의 선언을[9] 뒤집는 조치였다. 이후 조상 제사 거부는 천주교 박해의 주요 이유가 되었다.[10]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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