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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노부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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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가루 노부요시는 히로사키 번의 2대 다이묘로, 1619년에 태어나 1655년에 사망했다. 그는 1631년 아버지 쓰가루 노부히라의 사망으로 13세의 나이에 번주가 되었으며, 후나바시 소동과 쇼호 소동 등 가신들의 반발을 겪었다. 노부요시는 치수 공사, 광산 개발 등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나,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조팟파리'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호색과 술주정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는 37세에 사망했으며, 장남 쓰가루 노부마사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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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노부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쓰가루 노부요시
쓰가루 노부요시
이름쓰가루 노부요시 (津軽信義)
시대에도 시대 전기
출생1619년 2월 15일
사망1655년 12월 22일
초기 이름헤이조 (平蔵)
개명노부요시 (信吉) → 노부요시 (信義)
계명계광원전설봉종서대거사 (桂光院殿雪峰宗瑞大居士)
묘소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의 조쇼지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의 호온지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묘수지
관위종5위하・토사노카미 (土佐守)
막부에도 막부
섬긴 주군도쿠가와 이에미쓰 → 이에쓰나
무쓰 히로사키번 번주
씨족쓰가루 씨
아버지쓰가루 노부히라
어머니이시다 미쓰나리의 딸
형제자매노부요시
노부히데
노부타카
사다 노부미쓰
다메모리
다이도지 다메히사
다메요
이누이 야스토시
토미
우메
시시
마츠
고코라
양형제다이도지 나오히데
배우자정실: 마쓰다이라 야스히사의 딸・토미우히메 (富宇姫)
측실가라우시 진에몬의 딸・규쇼인 (久祥院)
소에다 사다나리의 딸・요소코 (与曽子)
구도 씨
젠큐인 (全久院)
조센인 (長泉院) 등
자녀25남 26녀
아들노부마사
노부쓰네
노부아키라
마사토모
다메사다
다메하루
가소쿠
스케오키
마사히
마사요시
다메나가 등
만, 이쓰, 야에, 미요, 이요, 이토히메 등
정치 경력
영주 기간1631년 ~ 1655년
이전 영주쓰가루 노부히라
다음 영주쓰가루 노부마사

2. 생애

쓰가루 노부요시는 에도 시대 히로사키 번의 2대 다이묘로, 초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의 장남이다. 겐나 5년(1619년) 1월 1일, 번의 영지가 아닌 고즈케 국 오다테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타츠히메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을 이끌었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셋째 딸이었으나, 아버지 노부히라가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와 혼인하면서 첩으로 신분이 낮아져 고즈케 국으로 보내졌다.

겐나 9년(1623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에도의 히로사키 번 저택으로 옮겨와 살았다. 간에이 8년(1631년), 아버지 노부히라가 사망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았고, 이복동생 쓰가루 노부후사와 함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알현하였다.

그러나 노부요시가 첩의 아들이라는 점과 어린 나이에 번주가 된 것은 번 내부에 갈등의 소지가 되었다. 특히 도쿠가와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정실 부인의 아들 노부후사를 지지하는 세력과의 대립으로, 두 차례의 오이에 소동(후나바시 소동(1634년)과 쇼호의 소동(1647년))을 겪었다. 이 소동들은 막부의 개입으로 진압되었고, 노부요시는 이를 계기로 번주 권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통치 면에서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새로운 개발(쓰가루 신전), 치수 및 관개 시설 개선, 오타 광산 등 구리·은 광산 개발, 목장 개설 등 번의 경제력을 높이는 데 힘썼다. 또한 와카를 애호하여 스승 히키타 호안을 두고 직접 가집 '구에이 와카집'을 집필할 정도로 교양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간에이 12년(1635년)에는 야나가와 건으로 유배된 쓰시마 번 가로 야나가와 스케오키를 맡아 돌보기도 했다.

하지만 성격이 고집 세고 거칠어 'じょっぱり殿様|조팟파리 도노사마일본어'(고집불통 나으리)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기행과 난행이 잦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호색과 술주정이 심해 여성 관계 추문이나 술에 취한 난동 등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으며, 수많은 첩을 두어 슬하에 25남 26녀라는 매우 많은 자녀를 두었다.

메이레키 원년(1655년) 11월 25일, 에도 간다에 있는 번 저택에서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뒤는 장남 쓰가루 노부마사가 이었다. 암군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사후 가신 4명이 그를 따라 순사(殉死)했다는 사실은 그의 리더십에 대한 다른 평가의 여지를 남긴다. 그의 묘는 도쿄 세타가야구의 묘주지와 히로사키의 조쇼지(長勝寺), 호온지(報恩寺)에 있다.

임종 시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 '''봄의 꽃 가을의 단풍도 어찌 마지막 폭풍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으랴'''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겐나 5년(1619년) 1월 1일, 히로사키 번의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의 장남으로 고즈케 국 오다테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타츠히메이시다 미쓰나리의 셋째 딸이었으나, 아버지 노부히라가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와 혼인하면서 첩으로 지위가 낮아져 고즈케 국 영지로 보내졌다.

겐나 9년(1623년), 어머니 타츠히메가 사망하자 에도의 히로사키 번 저택으로 옮겨졌다. 간에이 8년(1631년), 아버지 노부히라가 사망하였고, 노부요시는 13세의 나이였다. 가독(家督, 집안의 우두머리 자리)을 상속받기 위해 이복동생 쓰가루 노부후사와 함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알현(謁見, 지위 높은 사람을 찾아 뵘)하였다.

그러나 노부요시가 첩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쓰가루 번의 중신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나뉘었다. 많은 중신들은 도쿠가와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노부히라의 정실부인 아들, 즉 쓰가루 노부후사를 지지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오이에 소동(御家騒動, 다이묘 가문의 내분)으로 번졌다. 간에이 11년(1634년)에 발생한 후나바시 소동(船橋騒動)이 그것이다. 이 소동은 막부의 지원을 받아 진압되었으며, 간에이 13년(1636년)에는 노부후사 지지자 다수가 처벌받거나 유배되었다. 이 사건 이후 노부요시는 번주로서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이후 쇼호 4년(1647년)에는 다시 쇼호의 소동(正保の騒動)이라 불리는 문제가 발생했다. 노부요시의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은 가신들이 그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를 어머니로 둔 이복동생 쓰가루 노부후사(하타모토 신분)를 새 번주로 세우려 한 주군 오시코미(主君押込, 가신들이 주군을 강제 은퇴시키는 행위) 음모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숙청되었다.

2. 2. 후나바시 소동 (1634년)

1631년 아버지 쓰가루 노부히라가 사망하자 쓰가루 노부요시는 13세의 나이로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하지만 노부요시가 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번의 중신들 사이에서는 분열이 있었다. 상당수 가신들은 도쿠가와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으며 노부히라의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이복동생 쓰가루 노부후사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어린 나이에 번주가 된 노부요시의 측근으로는 유모의 남편인 후나바시 한자에몬船橋半左衛門일본어이 권력을 잡게 되었고, 이는 대대로 섬겨온 원로 가신들과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신참 가신들은 후나바시 한자에몬의 편에 섰다.

1634년 7월, 노부요시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따라 교토로 간 사이, 원로 가신들은 에도에 있는 번의 저택에서 농성하며 후나바시 한자에몬 일파의 추방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후나바시 소동'船橋騒動|후나바시 소도일본어이라 불리며, 오이에 소동의 일종이다.

번 내부에서 원로 가신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결국 막부가 개입하여 양측 대표를 소환했다. 1636년, 막부는 겐카료세이바이喧嘩両成敗|겐카료세이바이일본어 원칙에 따라 양측 모두에게 책임을 물었다. 원로 가신들(노부후사 지지자 포함)은 나가토노쿠니로, 후나바시 한자에몬 부자는 이요노쿠니로 각각 추방되었다.

이 소동이 막부의 중재로 진정된 후, 노부요시는 번주로서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쓰게 되었다.

2. 3. 쇼호 소동 (1647년)

쇼호 4년(1647년), 쓰가루 번의 일부 가신들은 당시 번주였던 쓰가루 노부요시를 감금하고 강제로 은퇴시킨 뒤, 그의 이복동생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손자이며 막부의 하타모토였던 쓰가루 노부후사( 信英|노부후사일본어 )를 새로운 번주로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사건을 '쇼호 소동'( 正保の騒動|쇼호노소도일본어 )이라고 부른다.[1]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 전에 밀고로 인해 발각되었고, 관련된 가신들은 대거 숙청되었다. 노부요시의 다른 이복동생들과 매형들도 연루되어 처벌받았으나, 정작 추대 대상이었던 노부후사는 사건에 관여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고 노부요시 개인의 결정으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1][2]

쇼호 소동이 일어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 막부 권력 강화와 가신들의 불만: 막부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기존의 기득권을 잃게 된 것에 대한 가신들의 불만이 있었다.[1]
  • 정치적 고려: 이시다 미쓰나리의 외손자인 노부요시보다는 막부 쇼군의 외손자인 노부후사를 번주로 내세우는 것이 막부와의 관계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1] 노부요시의 어머니 다쓰히메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이었고, 아버지 노부히라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와 결혼하며 막부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첩으로 강등된 배경이 있었다.[2] 반면 노부후사는 노부히라의 정실 부인이자 도쿠가와 가문과 혈연관계인 여성의 아들이었다.[2] 이러한 신분 차이는 이전에도 노부후사를 지지하는 세력과 갈등을 일으켜 1634년 후나바시 소동으로 번지기도 했다.[2]
  • 노부후사의 능력: 노부후사가 막부의 관리로서 능력을 보여주며 출세한 점도 추대 요인 중 하나였다.[1]
  • 노부요시의 품행 문제: 노부요시 본인이 과도한 음주와 여성 문제 등으로 물의를 일으켜 가신들의 불만을 산 점도 원인으로 지적된다.[1][2] 이러한 행동 때문에 '조팟파리 영주'(성미 급하고 고집 센 영주)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3]

2. 4. 번 통치와 업적

쓰가루 노부요시는 아버지 쓰가루 노부히라가 사망하자 간에이 8년(1631년)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아 번주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번주가 되었고, 그의 어머니가 첩의 신분이었던 점 때문에 번의 중신들 사이에서는 분열이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도쿠가와 막부와 혈연관계가 있는 이복동생 쓰가루 노부후사를 지지하면서 오이에 소동으로 발전했는데, 이를 후나바시 소동(1634년)이라 한다. 이 소동은 막부의 개입으로 진압되었고, 노부후사의 지지자 다수가 처벌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부요시는 번주 권력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강권적인 통치 방식은 또 다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쇼호 4년(1647년), 노부요시의 과도한 음주와 여색 등을 문제 삼은 가신들이 그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이복 동생 쓰가루 노부히데를 새 번주로 옹립하려는 음모(주군 오시코미)가 발각되었다. 이 사건은 쇼호의 소동이라 불리며, 관련자들은 숙청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노부요시가 강력한 리더십으로 번 통치를 밀어붙였음을 보여주며, 그에게 '조팟파리 영주'(じょっぱり殿様|죳파리 토노사마일본어, 고집불통 나으리)라는 별명이 붙게 된 배경이 되었다.

통치 면에서는 여러 공적을 세웠다. 쓰가루 신전(새로운 ) 개발과 치수 공사, 관개 시설 개선에 힘썼으며, 구리 및 은 광산(오타 광산 등) 개발과 목장 개설을 통해 번의 경제력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이는 아버지 노부히라의 사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와카를 애호하여 히키타 호안을 스승으로 삼았고, 직접 가집 '구에이 와카집'을 집필할 정도로 교양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간에이 12년(1635년)에는 야나가와 건으로 유배된 쓰시마 번의 가로 야나가와 스케오키를 맡게 되었는데, 스케오키는 이후 50년간 쓰가루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의 통치와는 별개로 개인적인 행실에 대한 비판도 있다. 고집이 세고 성미가 거칠었으며, 기행과 난행이 잦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호색과 술주정이 심하여 여성 관계의 추문이나 술에 취한 난행 등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슬하에 25남 26녀라는 매우 많은 자녀를 둔 것도 이러한 배경과 연관될 수 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 때문에 혹자는 그를 암군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메이레키 원년(1655년) 11월 25일, 에도 간다의 번 저택에서 37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의 가신 중 4명이 그를 따라 순사했다는 사실은 그의 리더십이나 인간적인 면모에 다른 평가 여지를 남긴다. 그의 뒤는 장남 쓰가루 노부마사가 이었다.

임종 시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 '''봄의 꽃 가을의 단풍도 어찌 마지막 폭풍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으랴'''

2. 5. 말년과 사망

쓰가루 노부요시는 번주 즉위 후 후나바시 소동을 계기로 가신들을 억제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으나, 강력한 리더십으로 번 통치를 밀어붙여 쇼호 소동과 같은 가신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고집불통 나으리'(じょっぱり殿様|죳파리 도노사마일본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혹자는 그를 암군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쓰가루 지역의 신전 개간, 오타 광산 개발 등 경제 발전에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와카를 애호하여 직접 가집 '구에이 와카집'을 집필하는 등 교양인의 면모도 보였다. 그는 수많은 첩을 두어 슬하에 25남 26녀라는 많은 자식을 두었다.

메이레키 원년(1655년) 11월 25일(양력 12월 22일), 에도 간다(현재의 도쿄)에 있는 번의 저택에서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맏아들 쓰가루 노부마사가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노부요시가 사망하자 그의 중신 네 명이 그를 따라 순사(殉死)했다. 그의 묘는 도쿄 세타가야구에 있는 묘주지와 히로사키에 있는 쓰가루 가문의 사찰인 조쇼지(長勝寺), 호온지(報恩寺)에 있다.

임종 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봄의 꽃 가을의 단풍도 어찌 마지막 폭풍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으랴'''"

3. 가족 관계

자녀는 25남 26녀(일설에는 남녀 합쳐 38명)를 두었다.


  • 아버지: 쓰가루 노부히라
  • 어머니: 다쓰히메(다쓰코, 오오다테 고젠, 쇼겐인, 고다이인 양녀 - 이시다 미쓰나리의 셋째 딸)
  • 정실: 후우히메(게이린인) - 마쓰다이라 야스히사(쓰가루 노부히라의 정실 만텐히메의 남동생)의 딸[1]
  • 딸: 만 - 도이 도시후사 정실[2]
  • 딸: 이쓰 - 도이 씨의 양녀, 토다 우지하루 정실 후 고토 모리요시 정실[3]
  • 측실: 큐쇼인(키쿠 고젠) - 카라우시 겐에몬의 딸
  • 장남: 쓰가루 노부마사 (1646년 - 1710년)
  • 측실: 요소코 (? - 1692년) - 소에다 사다나리의 딸
  • 8남: 쓰가루 타메사다 (1649년 - 1731년)
  • 측실: 쿠도 씨
  • 측실: 젠큐인
  • 측실: 쵸센인

  • 생모 불명의 자녀

구분이름비고
차남쓰가루 노부쓰네
삼남쓰가루 노부아키라
사남쓰가루 마사토모 (1648년 - 1705년)쓰가루 노부타카의 양자
7남쓰가루 타메하루
11남쓰가루 카소쿠교토 요겐인 대승정
14남쓰가루 스케오키
15남쓰가루 마사히
17남쓰가루 마사요리
18남쓰가루 타메나가
야에이마오지 치카토시 부인
미요쓰가루 노부토시 정실
이요가로 다이도지 시게키요 부인
이토히메가로 타카쿠라 모리야스 부인


4. 평가

쓰가루 노부요시는 번주 즉위 후 후나바시 소동을 겪으며 가신들을 억제하고 번주로서의 권력 기반을 다졌다. 그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번 통치를 추진했으나, 이는 쇼호 소동과 같이 가신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통치 스타일은 '고집불통 나으리'(じょっぱり殿様|조팟파리 도노사마일본어)라는 별명에 잘 나타나 있는데, '조팟파리'는 쓰가루 지방 사투리로 고집이 센 사람을 뜻한다.[1][2]

이 때문에 노부요시를 암군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 후 가신 4명이 순사했다는 사실은 그의 리더십이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또한 통치 면에서는 쓰가루 지역의 신전(新田) 개간, 오타 광산(太田金山) 개발, 목장 개설 등 경제 발전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1][3] 와카(和歌)를 애호하여 직접 가집(歌集) '구에이 와카집'(寓詠和歌集)을 집필하는 등 문화적인 소양도 갖춘 인물이었다.[1]

반면, 성격이 고집 세고 거칠었으며 기행과 난행이 잦아 가신들과 영지민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여성 관계나 술에 취해 벌인 난행 등은 그의 평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2]

1655년 에도의 번저(藩邸)에서 3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임종 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봄의 꽃 가을의 단풍도 어찌 마지막 폭풍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으랴'''[1]

참조

[1] 서적 青森県人名大事典 東奥日報社
[2] 서적 青森県人名大事典 東奥日報社
[3] 서적 青森県人名大事典 東奥日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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