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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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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가루 노부유키는 히로사키 번의 9대 다이묘인 쓰가루 야스치카의 차남으로, 1800년에 태어났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를 위해 정략 결혼을 여러 번 했으나, 과도한 재정 지출과 무능함으로 인해 '바보 영주'라는 조롱을 받았다. 결국 1839년 강제 은퇴당하고, 186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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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노부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쓰가루 노부유키
쓰가루 노부유키 (히로사키 번 역대 번주 그림, 쇼덴지 소장)
이름쓰가루 노부유키 (津軽信順)
시대에도 시대 후기
출생간세이 12년 3월 25일 (1800년 4월 18일)
사망분큐 2년 10월 14일 (1862년 12월 5일)
계명간코인덴신다쓰료기다이코지 (寛廣院殿深達了義大居士)
묘소간에이지의 지쓰료인
관위종4위하 데와노카미, 시종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나리 → 도쿠가와 이에요시
무쓰 히로사키번 번주
씨족쓰가루 씨
아버지쓰가루 야스치카
어머니스기우라 마사카쓰의 딸, 후쿠히메
형제자매노리아키, 노부유키, 안도 노부요시의 정실, 호리 나오토모의 정실, 모리 다다테루의 정실
배우자정실: 도쿠가와 나리마사의 아홉 번째 딸, 기미히메
약혼자: 고노에 모토사키의 딸
약혼자: 도쿠가와 나리마사의 여섯 번째 딸, 에이히메
양자쓰구아키라
별칭바카도노사마 (馬鹿殿様), 요타카도노사마 (夜鷹殿様)
정치
번주 재임 기간1825년 ~ 1839년
전임쓰가루 야스치카
후임쓰가루 유키쓰구
기타
특기 사항요타카 (夜鷹)

2. 생애

쓰가루 야스치카가 은퇴하면서 분세이 8년(1825년) 4월 10일, 쓰가루 노부유키는 가독을 상속받아 히로사키 번의 번주가 되었다.[1] 분세이 7년 12월 16일(1825년)에는 종4위하로 승진했고, 덴포 5년 12월 16일(1835년)에는 지주에 임관되었다.

1821년, 모리오카 번의 난부 씨족 사무라이들이 소마 다이사쿠 사건을 일으켜 야스치카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

노부유키는 아버지보다 더 어리석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실권은 아버지 야스치카가 쥐고 있었고, 노부유키는 사실상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그는 '바보 영주'라는 뜻의 '바카토노사마(馬鹿殿様)'라고 조롱받았다.[2]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쓰가루 야스치카의 차남으로 간세이 12년(1800년) 3월 2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야스치카는 원래 4,000 고쿠 영지를 다스리는 하타모토였으나, 히로사키 번의 다이묘가 되기 위해 쓰가루 씨족의 본가로 입양되었다. 야스치카는 쓰가루 노부아키라 시대부터 시작된 개혁을 시행하여 재해에 취약한 번에 번영을 되찾으려 했지만, 기득권과 가신들의 부패 문제로 인해 반대에 직면했다.[1] 분카 8년(1811년) 1월 28일,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오메미했다. 노부유키는 히로사키의 후계자로 임명되었고, 분카 11년 12월 16일(1815년)에는 종5위하·오스미노카미에 서임되었다. 분카 12년(1815년) 6월, 아버지와 함께 오쿠니이리했다.[1]

야스치카는 도쿠가와 막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1811년에는 노부유키와 교토의 구게인 고노에 모토사키의 딸과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신부는 2년 후에 사망했고, 야스치카는 노부유키와 도쿠가와 씨족의 고산쿄인 다야스 분가의 수장인 도쿠가와 나리마사의 여섯째 딸과의 새로운 결혼을 주선했다. 그녀 또한 1820년에 사망했고, 1822년에는 노부유키와 도쿠가와 나리마사의 아홉째 딸과의 세 번째 결혼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결혼에 대한 궁정 및 막부에 대한 재정 지출은 엄청나서 수십만 에 달했다.[1]

2. 2. 정략결혼과 재정 파탄

쓰가루 야스치카는 도쿠가와 막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1811년에는 노부유키와 교토의 구게인 고노에 모토사키의 딸과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1] 하지만 이 신부는 2년 후에 사망했고, 야스치카는 노부유키와 도쿠가와 씨족의 고산쿄인 다야스 분가의 수장 도쿠가와 나리마사의 여섯째 딸이자 쇼군의 여동생과의 새로운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이 여성 또한 1820년에 사망했고, 1822년에는 노부유키와 도쿠가와 나리마사의 아홉째 딸과의 세 번째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다.[2] 이러한 연이은 정략결혼에 들어간 막대한 자금은 수십만 에 달했고, 이로 인한 세금 인상은 농민 봉기를 야기했다.

히로사키 번에서는 7대 번주 노부야스와 8대 번주 노부아키 아래에서 번정 개혁이 이루어져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개혁 도중에 노부아키가 요절했다. 노부아키에게는 친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양자인 야스치카가 번주가 되었다. 야스치카는 노부아키와 달리 유능하지 않다고 평가받았고, 그의 아들 노부요리 또한 번정에서 유능하지 않았다.

이 부자에게는 중앙 정계 진출, 즉 막정에 참여하려는 야망이 있었다. 이를 위해 야스치카는 세자인 노부요리의 정실로 신분이 높은 여성을 선택하여 강력한 문벌 관계를 만들려고 했다. 분카 8년(1811년), 노부요리는 내대신 고노에 모토마에의 딸과 약혼했지만, 2년 후 이 여성은 요절했다. 다음으로 노부요리는 타야스 도쿠가와 나리타다의 여섯째 딸인 에이히메와 약혼했다. 나리타다는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동생으로, 이 결혼을 통해 쇼군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분세이 3년 12월(1821년)에 에이히메는 요절했다. 다음 해인 분세이 4년(1821년) 4월, 노부요리는 나리타다의 아홉째 딸인 킨히메와 약혼하여 분세이 5년 12월(1823년)에 결혼했다. 그러나 이 세 번에 걸친 혼인 정책으로 인해 공가와 막부에 쏟아부은 자금은 수십만 량에 달했고, 엄청난 낭비로 인해 노부아키 시대에 회복되었던 번의 재정은 다시 파탄났다.

2. 3. 번주 취임과 실정

쓰가루 야스치카의 은퇴로 분세이 8년(1825년) 4월 10일, 쓰가루 노부유키는 가독을 상속받아 히로사키 번의 번주가 되었다.[1] 그러나 실권은 아버지 야스치카가 쥐고 있었으며, 노부유키는 사실상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는 '바보 영주'라는 뜻의 '바카토노사마(馬鹿殿様)'라고 조롱받았다.[2]

노부유키는 산킨코타이 때 숙소에서 밤에는 여자와 술에 빠져 아침에 출발하지 못하고 낮에야 일어나는 등 불건전한 생활을 반복했다. 이 때문에 산킨코타이 행렬이 늦어져 번이 개역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가로 다카쿠라 모리타카가 이에 대해 간언하며 할복했으나, 노부유키는 "유흥은 나의 병이다"라며 반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분세이 10년(1827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태정대신 임명일에 노부유키가 가마(轅輿)를 타고 에도성에 등성한 것을 문제삼아 70일간의 비색 처분을 받았다. 이는 10만 석 격식에 맞는 가마 사용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뇌물 정치로 유명했던 막부 중진 미즈노 타다아키라가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미즈노는 "내가 뇌물을 받았다면 용서해 주었을 것"이라며 부인했다.

노부유키는 쇼군가와 연결된 정실을 두고도 에도 니혼바시의 기름집 딸을 측실로 삼는 등 사치를 일삼았다. 덴포 5년(1834년)에는 불필요한 행렬을 꾸려 영내를 순찰하고 불꽃놀이, 네부타, 달맞이 구경 등으로 번 재정을 낭비했다.

결국 덴포 10년(1839년), 막부는 노부유키에게 강제 은거를 명했다. 가독은 미카와 국 요시다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아키의 아들인 쓰가루 유키쓰구가 상속받았다.

2. 4. 강제 은거와 최후

쓰가루 노부유키는 아버지 쓰가루 야스치카가 은퇴한 후에도 실질적인 권력을 갖지 못하고, 에도 저택에서 비선 실세로 통치하는 아버지의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그는 개인적인 권력 기반이나 가신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으며, "바보 영주"라는 뜻으로 조롱받았다.[1] 그의 게으름, 정신적 예리함 부족, 술, 부적절한 행동, 산킨코타이 여행 중의 방종에 대한 소문이 에도에 퍼졌다. 번의 재정 상황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부유키는 행진, 불꽃놀이, 축제, 달맞이 파티 등 오락에 낭비하고, 평민(에도 기름 상인의 딸)을 으로 삼았다는 보고에 막부는 분노했다.[2]

분세이 10년(1827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태정대신 임명일에 노부유키(엣추노카미)가 궤여(轅輿)를 타고 1370명이나 되는 가신을 거느리고 에도성에 등성한 것을 책망받아, 70일간의 비색 처분을 받았다. ("원여 사건")[1]

결국 노부유키는 1839년에 강제로 은퇴해야 했고, 번은 미카와 국 요시다 번의 영주이자 로주인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의 일곱째 아들인 쓰가루 유키쓰구에게 넘어갔다. 쓰가루 유키쓰구쓰가루 씨족에 입양되었다.[2] 노부유키는 1862년까지 살았으며,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도쿄 다이토구에 있는 씨족 사찰인 신료인(간에이 사의 부속 사찰)에 있다.[1]

후세에 "밤 올빼미 전하"라고 별칭되었다.[2]

3. 평가

쓰가루 노부유키는 아버지 쓰가루 야스치카와 마찬가지로 번정에서 유능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 부자는 중앙 정계 진출을 위해 노부유키의 정실로 신분이 높은 여성을 맞이하려 했다. 고노에 모토마에[1]의 딸, 도쿠가와 나리타다의 딸들과 연이어 약혼했지만 모두 요절하고, 결국 나리타다의 아홉째 딸인 킨히메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낭비하여 쓰가루 노부아키 시대에 회복되었던 번 재정이 다시 파탄났다. 노부유키는 아버지보다 더 어리석었다고 전해지며, 그의 무능함과 방탕한 생활은 여러 일화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평가는 사후에도 이어져 "요타카노도노(밤 올빼미 전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

3. 1. 부정적 평가

쓰가루 노부유키는 아버지 쓰가루 야스치카와 마찬가지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부유키는 개인적인 권력 기반이나 가신들의 존경을 받지 못해 허수아비로 전락했으며, 馬鹿殿様|바카토노사마일본어 (바보 영주)라고 조롱받았다.[2] 그의 게으름, 정신적 예리함 부족, 술, 부적절한 행동, 산킨코타이 여행 중의 방종에 대한 소문이 에도에 퍼졌다.

산킨코타이 때 숙소에서 밤에는 여자와 술에 빠져 아침에 출발하지 못하고 낮에야 일어나는 불건전한 생활을 반복하여 행렬 진행이 늦어졌다고 한다. 산킨코타이에는 정해진 기일까지 에도에 도착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고, 이유 없는 지각은 번의 존폐와 관련된 문제였다. 산킨 지각으로 번이 개역될 것을 두려워한 가로 다카쿠라 모리타카는 노부유키의 행동을 간언하고 할복했다. 그러나 노부유키는 충신의 죽음을 알고도 "유흥은 나의 병이다"라고 말하며 계속 놀았다고 전해진다.[2]

분세이 10년(1827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태정대신 임명일에 노부유키(엣추노카미)가 궤여(轅輿)를 타고 1370명이나 되는 가신을 거느리고 에도성에 등성한 것을 책망받아 70일간의 비색 처분을 받았다. (원여 사건)[2]

덴포 5년(1834년), 불필요한 다이묘 행렬을 꾸려 영내를 순찰하고, 불꽃놀이, 네부타 구경, 달맞이 등 번 재정을 자신의 쾌락으로 낭비했다. 막부는 번의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노부유키가 오락에 낭비하고, 평민(에도 기름 상인의 딸)을 으로 삼았다는 보고에 분노했다.[2]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히로사키 번이 추진해 온 재정 재건은 실패했다. 결국 덴포 10년(1839년), 막부는 노부유키에게 강제 은거를 명했다. 가독은 미카와 국 요시다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아키의 아들인 쓰가루 유키쓰구가 상속했다.

후세에 "요타카노도노(밤 올빼미 전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

4. 일화

쓰가루 노부유키는 산킨코타이 때 숙소에서 밤에는 여자와 술에 빠져 아침에 출발하지 못하고 낮에야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 때문에 산킨코타이 행렬이 늦어져 정해진 기일까지 에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산킨 지각으로 번이 개역될 것을 우려한 가로 다카쿠라 모리타카는 노부유키에게 간언하고 할복했다. 그러나 노부유키는 "유흥은 나의 병이다"라며 반성하지 않았다고 한다.[2]

1827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태정대신 임명일에 노부유키(엣추노카미)는 1370명의 가신을 거느리고 에도 성에 등성했다가 70일간 비색 처분을 받았다. 쓰가루가는 10만 석 격식에 맞는 "궤여(轅輿)" 사용 허가를 신청했지만, 허가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권력자이자 뇌물 정치로 유명했던 막부 중진 미즈노 타다아키라가 멋대로 궤여를 허가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미즈노는 "엣추노카미(노부유키)의 비색 처분은 내가 명한 것이다. 뇌물을 받았다면 용서해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원여 사건").

노부유키는 정실로 쇼군가와 연결된 킨히메를 맞이했음에도 에도 니혼바시의 기름집 딸을 측실로 삼는 등 지출을 반복하여 히로사키 번의 빚을 70만 량 가까이 늘렸다.

1834년에는 불필요한 다이묘 행렬을 꾸려 영내를 순찰하고, 불꽃놀이, 네부타 구경, 달맞이 구경 등으로 번 재정을 낭비했다.

이러한 일화들로 인해 후세에 "'''요타카노도노'''(밤 올빼미 전하)"라고 불렸다.

5. 가계

구 분내 용
아버지쓰가루 야스치카
어머니후쿠히메 - 스기우라 마사카츠의 딸
정실킨히메 (1809년 ~ 1851년) - 도쿠가와 나리카타의 아홉째 딸
약혼자고노에 모토사키의 딸, 에이히메 (1807년 ~ 1820년) - 도쿠가와 나리카타의 여섯째 딸
양자쓰가루 노부쓰구 (1800년 ~ 1865년) -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의 다섯째 아들


6. 관련 인물

구 분내 용
아버지쓰가루 야스치카[1]
어머니후쿠히메 - 스기우라 마사카츠의 딸[1]
정실킨히메 (1809-1851) - 도쿠가와 나리카타의 아홉째 딸[1]
약혼자고노에 모토사키의 딸[1]
약혼자에이히메 (1807-1820) - 도쿠가와 나리카타의 여섯째 딸[1]
양자쓰가루 노부쓰구 (1800-1865) -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의 다섯째 아들[1]


참조

[1] 문서 津軽藩主家の津軽氏は五摂家の近衛家の傍系であると自称し、近衛家もこれを認めていた。つまり近衛家は形式上は縁戚の親族であり、付き合いがあった。
[2] 문서 このテロ事件の際、襲撃を避けようと無断で[[参勤交代]]の道筋を変えたことを、寧親は幕府に咎められた、とも伝わるが、寧親は久保田で何日か滞在しており、その間に道筋変更の願いを提出したとする記録がある 北羽歴研史論集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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