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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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방궁은 진시황이 건설을 시작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은 대규모 궁전으로, 현재는 유적지로 남아있다. 명칭은 여러 발음으로 불렸으며, 사마천은 궁전의 크기를 묘사했으나 현대 고고학 연구 결과와 차이를 보인다. 진나라 멸망과 함께 불탔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존재하며, 이후 문학 작품과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현재 유적지 주변에는 테마 파크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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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궁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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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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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방궁 |
로마자 표기 | Ēpáng Gōng |
다른 이름 | 아방궁 유적 |
로마자 표기 | Ēpáng Gōng Yízhǐ |
종류 | 고고학 유적지 역사 박물관 |
위치 | 시안 시, 산시 성, 중국 |
역사 | |
설립 | 1961년 |
2. 명칭
아방궁의 이름에 대한 일반적인 발음에는 '어팡(Epang)', '어팡(Efang)', '아팡(Afang)' 세 가지가 있다.[2] 어떤 발음이 "정확한" 발음인지에 대한 논쟁이 많았는데, 강희자전에서는 '어팡(Epang)'을, 규범사전에서는 '어팡(Efang)'을 옹호했다.[3][4][5]
진 시황제는 효공이 세운 함양궁이 좁다고 여겨 황하 지류 남쪽의 상림원(上林苑)에 새로운 궁전 건설을 계획했다. 아방(阿房) 지역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이 궁전은 진시황제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다.[1]
전한 시대의 역사학자 사마천은 이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후대 주석가 안사고는 세 가지 가능한 설명을 제시한다. 첫째는 궁전의 넓은 방(房, ''fang'')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어(e)'가 언덕의 지역 이름이고, 이름이 언덕 위에 있는 방의 높이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방(fang)' 자가 때때로 '팡(pang)'으로 발음되며, 옆을 의미하고, 궁전이 진나라 수도 함양 옆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5]
3. 역사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전국 시대를 통일한 후, 그는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위수 남쪽 기슭, 수도 함양 외곽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아방궁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6] 궁전의 배치는 우주론적 원리를 반영하도록 설계되었다.[6][5]
기원전 212년에 시작된 궁전 건설은[12] 진시황제가 2년 후 사망한 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여산 건설에 집중하기 위해 1년 동안 공사가 지연되었다.[13] 진이세는 무능한 통치자로 평가받았으며, 이로 인해 진나라의 권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복잡한 권력 투쟁 끝에 진이세는 환관 조고에 의해 자결을 강요당했고, 그 후 진나라는 붕괴되었다. 사마천에 따르면, 반(反)진나라 반란군이자 초나라 귀족인 항우가 기원전 206년에 수도 함양에 입성했을 때, 도시는 약탈당하고 진나라의 궁전은 불에 탔다고 한다. 사마천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아방궁도 함께 불탔다고 추정되었다.[5]
사마천은 사기에서 궁전의 크기를 길이 693m, 너비 116.5m로 묘사했지만, 유적에 대한 현대 연구 결과, 다짐 흙으로 만든 기초 플랫폼은 동서 1,320m, 남북 420m, 높이 8m로 측정되었다.[6] 이는 이 궁전을 세계에서 건설된 단일 통치자의 묘역 중 가장 큰 규모로 만들었다.[7] 고고학자들은 사마천의 기록에 나타난 치수는 궁전 건설이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궁전의 최종 크기를 나타내도록 의도된 것으로 추정한다.[5]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진나라의 영토가 넓어지고 함양의 인구가 증가하자, 효공이 세운 함양의 궁궐이 좁아졌다.[10] 이에 시황제는 위수 남쪽에 위치한 상림원에 조궁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아방의 땅에 그 전전을 지으려 했다. 죄수 70만 명 이상이 동원되어 전전(아방궁)과 여산릉 (시황제릉) 건조에 투입되었다.[11] 아방궁은 기원전 219년에 착공되어[12] 시황제 사후에도 공사가 계속되었지만,[13] 진나라의 멸망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아방궁의 명칭은 당시 사람들이 지명에 연유하여 불렀다[14]고 한다. 혹은 궁궐의 형태가 '사아방광(四阿旁広)'이기 때문에,[15] 혹은 '궁아기방(宮阿基旁)'이기 때문에 아방궁으로 명명되었다[16]고도 한다.
3. 1. 건설 배경
진 시황제는 효공이 세운 함양궁이 좁다고 여겨 황하 지류 남쪽의 상림원(上林苑)에 새로운 궁전 건설을 계획했다. 이 궁전은 아방(阿房) 지역에 건설될 예정이었으나, 진시황제 생전에는 완성되지 못했다.[10]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전국 시대를 통일한 후, 그는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중 하나는 이전에는 반신적인 인물에게만 사용되었던 "황제"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에는 도로와 방어벽 건설과 같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도 포함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위수 남쪽 기슭, 수도인 함양 외곽에 대규모 궁전을 건설하는 것이었다.[6] 궁전의 배치는 우주론적 원리를 반영하도록 설계되었다.[6][5]
궁전 건설은 기원전 212년에 시작되었으며,[12] 진시황제가 2년 후 사망한 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여산 건설에 집중하기 위해 1년 동안 공사가 지연되었다.[13] 진시황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진이세는 무능한 통치자로 평가받았으며, 이로 인해 진나라의 권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복잡한 권력 투쟁 끝에 진이세는 환관 조고에 의해 자결을 강요당했고, 그 후 진나라는 붕괴되었다. 사마천에 따르면, 반(反)진나라 반란군이자 초나라 귀족인 항우가 기원전 206년에 수도 함양에 입성했을 때, 도시는 약탈당하고 진나라의 궁전은 불에 탔다고 한다. 사마천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아방궁도 함께 불탔다고 추정되었다.[5]
사마천은 사기에서 궁전의 크기를 길이 693m, 너비 116.5m로 묘사했지만, 유적에 대한 현대 연구 결과, 다짐 흙으로 만든 기초 플랫폼은 동서 1,320m, 남북 420m, 높이 8m로 측정되었다.[6] 이는 이 궁전을 세계에서 건설된 단일 통치자의 묘역 중 가장 큰 규모로 만들었다.[7] 고고학자들은 사마천의 기록에 나타난 치수는 궁전 건설이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궁전의 최종 크기를 나타내도록 의도된 것으로 추정한다.[5]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진나라의 영토가 넓어지고 함양의 인구가 증가하자, 효공이 세운 함양의 궁궐이 좁아졌다.[10] 이에 시황제는 위수 남쪽에 위치한 상림원에 조궁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아방의 땅에 그 전전을 지으려 했다. 죄수 70만 명 이상이 동원되어 전전(아방궁)과 여산릉 (시황제릉) 건조에 투입되었다.[11] 아방궁은 기원전 219년에 착공[12] 되어 시황제 사후에도 공사가 계속되었지만,[13] 진나라의 멸망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아방궁의 명칭은 당시 사람들이 지명에 연유하여 불렀다[14]고 한다. 혹은 궁궐의 형태가 '사아방광(四阿旁広)'이기 때문에 아방궁으로 명명되었다[15]고도 한다. 혹은 '궁아기방(宮阿基旁)'이기 때문에 아방궁으로 명명되었다[16]고도 한다.
3. 2. 건설 과정
진 시황제는 효공이 세운 함양궁이 좁다고 여겨 황하 지류 남쪽의 상림원(上林苑)에 새로운 궁전 건설을 계획했다. 기원전 219년 아방(阿房) 땅에 궁전 건설을 시작했지만, 진시황제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다.[12]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전국 시대를 통일한 후, 이전에는 반신적인 인물에게만 사용되었던 "황제" 칭호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등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다.[6] 이러한 노력에는 도로와 방어벽 건설과 같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도 포함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수도 함양 외곽 위수 남쪽 기슭에 대규모 궁전을 건설하는 것이었다.[6][5] 궁전의 배치는 우주론적 원리를 반영하도록 설계되었다.[6]
궁전 건설은 기원전 212년에 시작되어 2년 후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여산 건설에 집중하기 위해 1년 동안 공사가 지연되었다. 진시황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진이세는 무능한 통치자로 평가받았으며, 이로 인해 진나라의 권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복잡한 권력 투쟁 끝에 진이세는 환관 조고에 의해 자결을 강요당했고, 그 후 진나라는 붕괴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항우가 기원전 206년 이미 항복한 수도 셴양에 입성했을 때 도시는 약탈당하고 진나라의 궁전은 불에 탔다고 한다. 사마천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아방궁도 함께 불탔다고 추정되었다.[5]
사마천은 궁전의 크기를 길이 693m, 너비 116.5m로 묘사했지만, 현대 연구 결과 다짐 흙으로 만든 기초 플랫폼은 동서 1,320m, 남북 420m, 높이 8m로 측정되었다.[6] 이는 이 궁전을 세계에서 건설된 단일 통치자의 묘역 중 가장 큰 규모로 만들었다.[7] 고고학자들은 사마천의 기록에 나타난 치수는 궁전 건설이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궁전의 최종 크기를 나타내도록 의도된 것으로 추정한다.[5]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진나라의 영토가 넓어지고 함양의 인구가 증가하자, 효공이 세운 함양의 궁궐이 좁아졌다.[10] 이에 시황제는 위수 남쪽에 위치한 상림원에 조궁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아방의 땅에 그 전전을 지으려 했다. 죄수 70만 명 이상이 동원되어 전전(아방궁)과 여산릉 (시황제릉) 건조에 투입되었다.[11] 아방궁은 기원전 219년에 착공[12] 되어 시황제 사후에도 공사가 계속되었지만,[13] 진나라의 멸망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아방궁의 명칭은 당시 사람들이 지명에 연유하여 불렀다[14]고 한다. 혹은 궁궐의 형태가 '사아방광(四阿旁広)'이기 때문에,[15] 혹은 '궁아기방(宮阿基旁)'이기 때문에 아방궁으로 명명되었다[16]고도 한다.
3. 3. 진나라 멸망과 아방궁
《사기》에 따르면, 초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3개월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2003년에는 항우가 불태운 것은 함양궁이고 아방궁은 불타지 않았다는 학설이 제기되었다.[18]
212년에 건설이 시작된 아방궁은 진시황이 2년 후 사망한 뒤에도 계속 건설되었지만, 여산 건설에 집중하기 위해 1년 동안 공사가 지연되었다.[6] 진시황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진이세는 무능한 통치자로 평가받았으며, 이로 인해 진나라의 권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복잡한 권력 투쟁 끝에, 진이세는 조고에 의해 자결을 강요당했고, 그 후 진나라는 붕괴되었다.[5]
사마천에 따르면, 반진(反秦) 반란군이자 초의 귀족인 항우가 206년에 이미 항복한 수도 함양에 입성했을 때, 도시는 약탈당하고 진나라의 궁전은 불에 탔다. 오랫동안 아방궁도 함께 불탔다고 추정되었다.[5]
사기의 항우본기에는 "항우가 함양에 들어가 진왕 자영을 살해한 후, 진나라의 궁실을 불태웠는데 3개월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 때문에 아방궁이 소실된 것으로 오랫동안 통설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2003년에 "항우에 의해 불태워진 것은 咸阳城|함양성중국어이며, 아방궁은 불타지 않았다"는 새로운 설이 공표되었다.[18]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방궁은 진나라 멸망 후에도 전한 왕조에 의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4. 규모
《사기》에 따르면, 아방궁 궁전 건축물은 동서로 500보(3000척), 남북으로 50장(500척)이었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동서로 600m~800m, 남북으로 113m~150m에 이른다.[17]
궁전 위에는 10,000명이 앉을 수 있었고, 전하에는 높이 5장의 기를 세울 수 있었다. 전 외에는 책목(柵木)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어 이곳으로 남산에 이를 수 있었고, 복도를 만들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궁에 연결되었다.[17]
5. 구조 및 시설
《사기》에 따르면, 아방궁의 건축물 규모는 동서로 5백 보(3000척), 남북으로 50장(500척)이었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동서로 600m~800m, 남북으로 113m~150m에 이른다. 궁전 위에는 10,000명이 앉을 수 있었고, 전하에는 높이 5장의 기를 세울 수 있었다. 전 외에는 책목(柵木)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어 남산에 이르게 했으며, 복도를 만들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궁에 연결했다.
아방궁 전당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었고, 전하에는 높이 5장의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 전당 밖에는 책목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어 남산까지 연결했으며, 아방궁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의 궁전까지 복도로 연결했다. 이는 천극성 중 각도라는 별이 은하수를 건너 영실성에 이르는 것을 본뜬 것이다.[17]
그 건축에 동원된 인력은 70여 만 명에 달했다. 관중에 300개, 관외에 400여 개, 함양 부근 100리 내에 270여 개의 궁전을 세웠고, 민가 30,000호를 여읍(驪邑)에, 50,000호를 운양(雲陽)에 각각 이주시켰다. 6국의 궁전을 모방하여 6국에서 데려온 비빈들을 배치하고, 진나라 궁전을 만들어 진나라 미인들을 배치했다. 조(趙)의 비(肥), 연의 수(痩), 오의 희(姫), 월의 여(女) 등 각국의 미인들이 조가야현(朝歌夜絃)하며 ‘삼십육궁혼의 봄’이라는 광경을 연출했다는 두목의 ‘아방궁부’(阿房宮賦)는 과장이 아니다.
5. 1. 12금인
진시황제는 그의 통치 기간의 주요 업적 중 하나로, 그의 궁전에 각각 약 70ton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열두 개의 기념비적인 청동 조상인 '''12금인'''을 세웠다고 사마천은 전한다. 이 청동 조상들은 고대 중국에서 매우 유명했으며 수많은 논평의 대상이 되었으나, 서기 4세기경에 사라졌다.[8]6. 고고학적 발굴
아방궁의 정확한 위치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문헌에서 여러 추측이 제기되었다. 고고학 유적지는 1923년에 지역 보고서를 바탕으로 처음 발견되었다.[5] 제2차 세계 대전과 중국 내전 이후, 쑤빙치와 허스싱이 그 위치를 확인했다. 수십 년간의 발굴 결과, 사치스러운 궁궐에 대한 문학적 기록과 달리, 아마도 전전(前殿)만 진나라 시대에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초기에는 흙다짐 기초 위에 벽만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5]
1961년부터 궁궐 유적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1-151)로 지정되었다.
7. 문화적 영향
사마천의 항우에 의한 아방궁 파괴 기록 이후, 아방궁은 진나라의 종말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많은 작가들이 불길 속에서 사라진 호화로움의 비애를 강조했다.[5] 당나라의 시인 두목은 아방궁에 대한 주목할 만한 부를 썼다.
아방궁은 또한 청나라 화가 원요와 일본 화가 기무라 부잔의 그림의 주제가 되었으며, 기무라 부잔은 아방궁의 파괴를 묘사했다. 일본의 식용 국화 품종 중 하나(황색 겹꽃 대륜)에 "아방궁"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 있다.
8. 테마 파크
현재 유적 부근에 아방궁을 재현한 테마파크가 만들어져 관광 명소화되었다.
참조
[1]
뉴스
Epang Palace Legends Blasted
http://english.peopl[...]
[2]
간행물
Ēpánggōng de dúyīn
2007
[3]
간행물
Ēpánggōng de dúyīn zhī wǒ jiàn
2008
[4]
서적
Xiàndài Hànyǔ Guīfàn Cídiǎn
Waiyu jiaoyuxue yu yanjiu chubanshe
[5]
간행물
The Construction and Deconstruction of Epanggong: Notes from the Crossroads of History and Poetry
http://archiv.oriens[...]
2022-01-07
[6]
간행물
The Cosmic Center in Early China and Its Archaic Resonances
2011
[7]
서적
Collapse or transformation? Anthropological and archeological perspectives on the fall of Qi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4
[8]
간행물
The First Emperor and sculpture in China
https://doi.org/10.1[...]
2013-10
[9]
웹사이트
The Great Palace of Ch'in' - A Rhapsody
https://chinaheritag[...]
2022-01-07
[10]
문서
『史記』秦始皇本紀始皇35年の条に「始皇以為咸陽人多、先王之宮廷小」とある。
[11]
문서
『史記』秦始皇本紀始皇35年の条に「隠宮徒刑者七十余万人、乃分作阿房宮、或作驪山」とある。
[12]
문서
『史記』[[六国年表]]
[13]
문서
『史記』秦始皇本紀二世2年の条で[[馮去疾]]・[[李斯]]・[[馮劫]]が阿房宮の造営中止を[[胡亥]]に訴えて拒否されている。
[14]
문서
『史記』秦始皇本紀始皇35年の条に「作宮阿房、故天下謂之阿房宮」(阿房に宮を作る、ゆえに天下はこれを阿房宮と謂う)とある。
[15]
문서
『[[史記索隠]]』秦始皇本紀
[16]
문서
『[[三輔黄図]]』秦宮
[17]
문서
『史記』秦始皇本紀は、阿房宮の規模を東西500歩、南北50丈とする。また『[[史記正義]]』所引『[[三輔旧事]]』は、東西3里、南北500歩とする。さらに『三輔黄図』秦宮は、東西50歩、南北50丈とする。『[[水経注]]』渭水所引『関中記』は、東西1000歩、南北300歩とする。『[[漢書]]』賈山伝は、東西5里、南北1000歩とする。
[18]
웹사이트
「項羽は阿房宮を焼き払っていない、前殿の発掘調査で明らかに」
https://web.archive.[...]
中国通信社
200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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