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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인 여단 (스페인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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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인 여단은 스페인 내전 중 프랑코를 지지하기 위해 결성된 아일랜드 출신 의용군 부대이다.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지원과 오언 오더피의 주도로 모집되었으며, 약 700명의 아일랜드인이 참전했다. 그러나 훈련 부족, 지휘 문제, 전투에서의 부진 등으로 인해 군사적 효율성이 낮았고, 결국 해체되었다. 아일랜드로 귀국한 후에는 정치적, 윤리적 논란에 휩싸였으며, 아일랜드 정부는 관련 기록을 파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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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인 여단 (스페인 내전)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아일랜드 여단의 성 파트리치오 깃발
아일랜드 여단의 성 파트리치오 깃발
아일랜드 여단 배지
아일랜드 여단 배지
별칭블루셔츠
활동 기간1936년–1937년
소속국가주의 스페인
규모700명
병과보병
주둔지카세레스, 스페인
참전 전투스페인 내전
하라마 전투
주요 지휘관이오인 오더피

2. 배경

2. 1.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역할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수석 주교인 조셉 매크로리 추기경은 1936년 8월 초, 스페인 민족주의자이자 나바라 출신 칼리스타인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 백작으로부터 민족주의 반군을 돕기 위한 도움 요청을 받았다. 매크로리는 에오인 오더피가 1932년에 더블린 성체 대회를 조직하는 등 그의 정치 성향을 고려하여 오더피가 적임자라고 제안했다.[1]

아일랜드인 참전에 대한 지원은 대부분 아일랜드인의 가톨릭적 신념에 기초했다. 많은 ''아일랜드 인디펜던트'' 신문 사설은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으며, 1936년 8월 10일에는 오더피가 자신의 "반(反) 적색 십자군"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게재했다. 가톨릭 교회는 당연히 그의 편이었다. 맥로리 추기경은 '스페인 분쟁에서 쟁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더 이상 없다... 그것은 스페인이 오랫동안 그래왔듯이 기독교적이고 가톨릭적인 땅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볼셰비키적이고 반(反) 신적인 땅으로 남을 것인가의 문제이다'라고 말했다.[2] 많은 지방 정부 군 의회는 8월 21일 클론멜을 시작으로 지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아일랜드 정부와 고위 공무원들은 스페인 전쟁에 대한 교회의 강경한 입장에 당황했으며, 외무부의 한 관리는 이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지침'이라고 묘사하고 아일랜드 시민들이 '이 끔찍한 성격의 외국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3] 아일랜드 지도자 데 벌레라는 엄격한 중립을 유지했다.[4]

아일랜드 기독교 전선이라는 가톨릭 단체는 프랑코를 지지하는 전국 집회를 열었으며, 코크 시에서 공화주의자와 프랑코 지지자들 사이에 약간의 폭동이 발생한 4만 명의 대중 집회가 포함되었다.[5]

이러한 지원은 아일랜드 자유국 밖에서도 반영되었다. 미국에서 대부분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프랑코와 반군을 지지하는 소수였지만, 미국 의회에서 스페인 공화국에 무기 판매를 허용하자는 제안은 가톨릭 조셉 케네디가 주도한 캠페인으로 성공적으로 반대했다.[6]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 소수 집단 내 지지가 매우 강하여 북아일랜드 노동당을 거의 버렸는데, 그 지도자 해리 미들리는 스페인 공화국을 지지했다. 미들리는 한 정당 회의에서 "우리는 프랑코를 원한다"는 구호를 받았다.[7]

2. 2. 오언 오더피와 국가 기업당

조셉 매크로리 추기경은 1936년 8월 초, 스페인 민족주의자이자 나바라 출신 칼리스타인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 백작으로부터 민족주의 반군을 돕기 위한 도움 요청을 받았다. 매크로리는 오언 오더피가 1932년에 더블린 성체 대회를 조직하는 등 그의 정치 성향이 지지적이라는 점을 들어 오더피가 적임자라고 제안했다.[1] 1935년 오더피는 소규모 파시스트 단체인 국가 기업당을 결성했으며, 스페인에서의 참여가 득표율을 높일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1936년 말에 스페인으로 건너가 프랑코와 라미레스를 만나 5,000명의 지원자가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약속했다.

프랑코가 아일랜드의 지원을 원하는 방식은 기회주의적으로 변했다. 전쟁 초, 프랑코는 종교적 성향이 같은 칼리스타 그룹의 지지를 굳건히 하여 민족주의자들의 지도력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36년 12월까지 그는 칼리스타의 지지를 확신했고, 이후 아일랜드 자원병의 필요성을 축소했다.

아일랜드인 참전에 대한 지원은, 스페인 정치 자체에 대한 의견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의 가톨릭적 신념에 기초했다. 많은 ''아일랜드 인디펜던트'' 신문 사설은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으며, 1936년 8월 10일에는 오더피가 자신의 "반(反) 적색 십자군"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게재했다.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는 당연히 그의 편이었다. 맥로리 추기경은 '스페인 분쟁에서 쟁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더 이상 없다... 그것은 스페인이 오랫동안 그래왔듯이 기독교적이고 가톨릭적인 땅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볼셰비키적이고 반(反) 신적인 땅으로 남을 것인가의 문제이다'라고 말했다.[2] 많은 지방 정부 군 의회는 8월 21일 클론멜을 시작으로 지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아일랜드 정부와 고위 공무원들은 스페인 전쟁에 대한 교회의 강경한 입장에 당황했으며, 외무부의 한 관리는 이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지침'이라고 묘사하고 아일랜드 시민들이 '이 끔찍한 성격의 외국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3] 아일랜드 지도자 데 벌레라는 엄격한 중립을 유지했으며, 피네 게일 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지지를 받아 1937년 2월 다국적 불개입 위원회에 아일랜드를 가입시켰다.[4] 1936년 말, 데 벌레라의 홍보 담당자 아오 드 블라캄은 프랑코를 지지하는 "신을 위해 스페인을 위해; 스페인 전쟁에 대한 진실"을 썼다.

아일랜드 기독교 전선이라는 가톨릭 단체는 프랑코를 지지하는 전국 집회를 열었으며, 코크 시에서 공화주의자와 프랑코 지지자들 사이에 약간의 폭동이 발생한 4만 명의 대중 집회가 포함되었다.[5]

이러한 지원은 아일랜드 자유국 밖에서도 반영되었다. 미국에서 대부분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프랑코와 반군을 지지하는 소수였지만, 미국 의회에서 스페인 공화국에 무기 판매를 허용하자는 제안은 가톨릭 조셉 케네디가 주도한 캠페인으로 성공적으로 반대했다.[6]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 소수 집단 내 지지가 매우 강하여 북아일랜드 노동당을 거의 버렸는데, 그 지도자 해리 미들리는 스페인 공화국을 지지했다. 미들리는 한 정당 회의에서 "우리는 프랑코를 원한다"는 구호를 받았다.[7]

2. 3. 아일랜드 사회의 분위기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은 가톨릭 신앙에 기반하여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는 것을 지지했다.[2] ''아일랜드 인디펜던트'' 신문은 이러한 생각을 지지하는 사설을 게재했고, 1936년 8월 10일에는 오더피가 "반(反) 적색 십자군"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실었다. 가톨릭 교회는 오더피를 지지했으며, 맥로리 추기경은 스페인 분쟁이 기독교적이고 가톨릭적인 스페인과 볼셰비키적이고 반(反) 신적인 스페인 중 어느 쪽이 될 것인가의 문제라고 말했다.[2] 많은 지방 정부 군 의회는 이러한 움직임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2]

그러나 아일랜드 정부와 고위 공무원들은 스페인 전쟁에 대한 교회의 강경한 입장에 당황했다.[3] 데 벌레라는 중립을 유지했고, 피네 게일 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지지를 받아 1937년 2월 아일랜드를 다국적 불개입 위원회에 가입시켰다.[4] 아일랜드 기독교 전선은 프랑코를 지지하는 전국 집회를 열었고, 코크 시에서는 4만 명 규모의 대중 집회가 열렸으며, 이 과정에서 공화주의자와 프랑코 지지자들 사이에 약간의 폭동이 발생했다.[5]

아일랜드 자유국 밖에서도 이러한 지원이 나타났다. 미국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프랑코와 반군을 지지하는 소수였다.[6] 조셉 케네디가 주도한 캠페인으로 미국 의회에서 스페인 공화국에 무기를 판매하자는 제안은 무산되었다.[6]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 소수 집단 내에서 프랑코 지지가 매우 강하여 북아일랜드 노동당을 거의 버릴 정도였는데, 그 지도자 해리 미들리는 스페인 공화국을 지지했다.[7]

3. 아일랜드 의용군의 참전

1936년 말, 약 7,000명의 남성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기 위해 자원했으며, 이 중 약 700명이 실제로 스페인으로 갔다.[8] 이들 중 다수는 에오인 오더피의 정당과 연계되어 있었지만, 대다수는 NCP 당원이 아니었고, 전직 청색셔츠단으로서 오더피에게 충성하는 이들이었다.[8] 전 IRA 또는 국군 출신으로, 오더피처럼 조약 지지자였던 아일랜드 내전의 베테랑도 있었다.[8] 그러나 상당수는 젊고 경험이 부족했으며, 아일랜드 외무부는 이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러 간다는 인상에 가족으로부터 유혹된 매우 젊은 남성'이라고 묘사했다.[9] 한 작가는 이 여단의 일부를 '20세기의 와일드 기즈로 자신을 생각한 사회 부적응자'와 설교단의 수사학에 의해 입대를 설득당한 시골 청년이라고 묘사했다.[10] 전 여단원인 맷 둘란에 따르면, "아일랜드 여단은 당시 아일랜드 삶의 매우 공정한 단면이었으며, 구 IRA의 저명한 회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라고 하였다.[11]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아일랜드 여단을 받는 것에 대해 처음만큼 열정적이지 않았고, 오더피는 병력을 수송할 배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0월에 도착 예정이었던 배는 취소되었다.[12] 200명은 소규모 그룹으로 스페인으로 갔고, 1936년 11월에는 500명이 골웨이에서 독일 선박 ''우룬디''에 탑승했다.[12] 자원병들은 사제들에게 축복을 받고 성심 배지, 기적의 메달, 기도서를 받았으며, 많은 군중이 '우리 아버지의 신앙'을 불렀다.[12] 오더피의 측근인 리암 월시는 나치 독일로부터 아일랜드 자원병을 수송하기 위해 ''우룬디''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았다.[13] 1936년 12월, ''우룬디''는 페롤에 정박했다.[12]

3. 1. 모집과 훈련

1936년 말, 약 7,000명의 남성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기 위해 자원했으며, 이 중 약 700명이 실제로 스페인으로 갔다.[8] 이들 중 다수는 오더피의 정당과 연계되어 있었지만, 대다수는 NCP 당원이 아니었고, 전직 블루셔츠로서 오더피에게 충성하는 이들이었다.[8] 전 IRA 또는 국군 출신으로, 오더피처럼 조약 지지자였던 아일랜드 내전의 베테랑도 있었다.[8] 그러나 상당수는 젊고 경험이 부족했으며, 아일랜드 외무부는 이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러 간다는 인상에 가족으로부터 유혹된 매우 젊은 남성'이라고 묘사했다.[9]

프랑코는 아일랜드 여단을 받는 것에 대해 처음만큼 열정적이지 않았고, 오더피는 병력을 수송할 배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0월에 도착 예정이었던 배는 취소되었다.[12] 200명은 소규모 그룹으로 스페인으로 갔고, 1936년 11월에는 500명이 골웨이에서 독일 선박 ''우룬디''에 탑승했다.[12] 자원병들은 사제들에게 축복을 받고 성심 배지, 기적의 메달, 기도서를 받았으며, 많은 군중이 '우리 아버지의 신앙'을 불렀다.[12] 오더피의 측근인 리암 월시는 나치 독일로부터 아일랜드 자원병을 수송하기 위해 ''우룬디''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았다.[13] 1936년 12월, ''우룬디''는 페롤에 정박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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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레스의 훈련 기지에서 자원병들은 스페인 외인 부대의 "15번 대대"로 배속되어 4개 중대로 나뉘었다.[15] 이들의 제복은 밝은 녹색으로 염색된 독일군 제복이었고, 은색 하프 배지를 달았다.[15] 피츠패트릭과 낸글 두 장교는 이전에 영국 육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던 아일랜드인이었는데, 오더피는 이들이 영국 정부의 고용인이라고 의심했고, 피츠패트릭은 오더피를 "쓰레기"라고 생각했다.[15] 카세레스에서 여단의 기강, 특히 과도한 음주는 스페인 상급자들의 비판을 받았으며, 자원병들과 채플린 멀리언 신부 사이의 불화도 있었다.[16] 많은 자원병은 카세레스에서 포로로 잡힌 공화주의자들의 기관총 대량 처형을 목격하기도 했다.[17]

1937년 2월 19일, 아일랜드 여단은 하라마 전투 지역의 시에엠포수에로스 우익 측면의 일부로 배치되었으나, 최전선에 접근했을 때 새로 창설된 카나리아 제도 출신의 팔랑헤당 부대에게 공격을 받았다. 한 시간 동안의 아군 사격 교전에서 아일랜드 여단원 2명과 스페인 팔랑헤당 최대 9명이 사망했다.[18][19][20]

3. 2. 전투 참여와 문제점

카세레스 훈련 기지에서 자원병들은 "15번 대대"로 스페인 외인 부대에 배속되어 4개 중대로 나뉘었다. 제복은 밝은 녹색 독일군 제복에 은색 하프 배지를 달았다.[14] 훈련 기지에서 여단의 기강, 특히 과도한 음주는 스페인 상급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16] 많은 자원병들은 카세레스에서 포로로 잡힌 공화주의자들을 기관총으로 대량 처형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17]

1937년 2월 19일, 아일랜드 여단은 하라마 전투 지역의 시에엠포수에로스 우익 측면에 배치되었지만, 최전선 접근 중 카나리아 제도 출신 팔랑헤당 부대의 아군 사격으로 아일랜드 여단원 2명과 팔랑헤당원 최대 9명이 사망했다.[18][19][20] 이후 여단은 시에엠포수에로스에서 참호를 지키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포격, 박격포 사격, 질병, 건강 악화로 인한 사상자가 꾸준히 발생했다.[21] 티툴시아 마을 공격 작전에서 6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당한 후 다음 날 공격을 거부하고 라 마라노사에 방어 위치를 잡았다.[22][23] 이 두 사건이 여단이 관여한 유일한 전투였다.[24]

스페인에서 여단원들은 기름진 음식과 익숙하지 않은 와인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6] 1937년 4월, 오더피의 부관 거닝 대위는 임금과 다수의 여권을 가지고 도망갔고, 부하들은 오더피에게 좋지 않은 별명을 붙였다.[27] 한 여단원은 일기에 사기가 무너지고 있다고 기록했다.[28] 티툴시아 공격 실패 후, 후안 야구에 장군은 프랑코에게 아일랜드 여단의 군사적 효율성이 전혀 없다고 보고하고 해체를 권고했다.[29]

3. 3. 철수와 결과

오더피는 이후 자신의 부대 철수를 제안했고, 프랑코가 이에 동의했다. 새로운 외인 부대 장군 후안 야궤는 오더피를 혐오했다. 여단의 대부분은 카세레스로 돌아와 포르투갈에서 배를 타고 귀국했다. 1937년 6월 말 더블린에 도착했을 때, 예상했던 수천 명이 아닌 수백 명의 환영을 받았고, 오더피의 정치 경력은 끝이 났다. 이 사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며, 케리주와 아일랜드 북부 출신 지원병들은 오더피와 관계를 끊고 주 부대와 별도로 행진했다.[30]

아일랜드 친 프랑코 지원병들이 아일랜드로 돌아왔을 때, 이미 프랑코의 대의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는 사라진 상태였다. 페르갈 맥가리는 "전쟁이 길어지고 독일의 게르니카 폭격과 같은 만행, 카톨릭 바스크 지역의 마을이 알려지면서, 프랑코가 종교적인 십자군을 이끌고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기회주의적인 친 프랑코 로비의 붕괴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1937년 여름까지 아일랜드 여단은 실패로 돌아왔고, 크리스찬 전선은 자체적인 내부 압력으로 인해 격렬하게 붕괴되었다. 심지어 카톨릭 교회도 크리스찬 전선이 다소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스페인에 대한 전국적인 모금 활동을 통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친 프랑코 입장을 완화했다."라고 기록했다.[31]

여단의 손실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한 반데라 대원은 스페인에서 35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다.[32] 다른 추산에 따르면 10명이 전투 중 사망하고 21명이 부상 또는 질병으로 사망했다.[33] 역사학자 페르갈 맥가리는 "그들은 15명의 사망한 동료와 6명의 입원한 군인을 남겨두고 떠났다."고 기록했다.[34]

아일랜드 정부는 1940년 5월 여단과 관련된 기록을 파기했다.[35]

4. 평가와 논란

오더피는 이후 자신의 부대 철수를 제안했고, 프랑코가 이에 동의했다. 새로운 외인 부대 장군 후안 야궤는 오더피를 혐오했다. 여단의 대부분은 카세레스로 돌아와 포르투갈에서 배를 타고 귀국했다. 1937년 6월 말 더블린에 도착했을 때, 예상했던 수천 명이 아닌 수백 명의 환영을 받았고, 오더피의 정치 경력은 끝이 났다. 이 사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며, 케리주와 아일랜드 북부 출신 지원병들은 오더피와 관계를 끊고 주 부대와 별도로 행진했다.[30]

아일랜드 친 프랑코 지원병들이 아일랜드로 돌아왔을 때, 이미 프랑코의 대의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는 사라진 상태였다. 페르갈 맥가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쟁이 길어지고 독일의 게르니카 폭격과 같은 만행, 카톨릭 바스크 지역의 마을이 알려지면서, 프랑코가 종교적인 십자군을 이끌고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기회주의적인 친 프랑코 로비의 붕괴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1937년 여름까지 아일랜드 여단은 실패로 돌아왔고, 크리스찬 전선은 자체적인 내부 압력으로 인해 격렬하게 붕괴되었다. 심지어 카톨릭 교회도 크리스찬 전선이 다소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스페인에 대한 전국적인 모금 활동을 통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친 프랑코 입장을 완화했다."[31]

여단의 손실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한 반데라 대원은 스페인에서 35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다.[32] 다른 추산에 따르면 10명이 전투 중 사망하고 21명이 부상 또는 질병으로 사망했다.[33] 역사학자 페르갈 맥가리는 "그들은 15명의 사망한 동료와 6명의 입원한 군인을 남겨두고 떠났다."고 기록했다.[34]

아일랜드 정부는 1940년 5월 여단과 관련된 기록을 파기했다.[35]

4. 1. 군사적 평가

1937년 1월, 골웨이에 모인 600명의 지원병을 위한 두 번째 선박은 보내지지 않았다. 이는 프랑코가 더 이상 정치적인 이유로 여단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월에는 데 발레라 정부가 더 이상 양측을 위해 싸우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는 자원병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켜 더 많은 아일랜드 증원군이 도착할 가능성이 배제되었다.[25]

스페인의 여단원들은 기름진 음식과 익숙하지 않은 풍부한 고급 와인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6] 1937년 4월, 오더피의 부관 거닝 대위는 임금과 다수의 여권을 가지고 도망갔다. 오더피의 부하들은 그에게 "오스커피"와 "올드 존 볼록스"라는 별명을 붙이기 시작했다.[27] 한 여단원은 일기에 사기가 무너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부대가 무너지고 있다 - 모든 사람들이 아프고 약해지고 있으며, 매일 수십 명이 병원에 간다... 집에 돌아간다는 소문이 무성하다.[28]

한편, 티툴시아 공격이 실패한 후, 프랑코주의자인 후안 야구에 장군은 프랑코에게 '전문적인 지휘관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이 부대의 군사적 효율성은 전혀 없다'고 보고하고 아일랜드 여단을 해체하고 다른 부대에서 복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나머지는 아일랜드로 송환할 것을 권고했다.[29]

4. 2. 정치적, 윤리적 논란

1937년 1월, 프랑코는 더 이상 정치적인 이유로 아일랜드인 여단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골웨이에 모인 600명의 지원병을 위한 두 번째 선박을 보내지 않았다. 2월에는 에이먼 데 벌레라 정부가 더 이상 양측을 위해 싸우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는 자원병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켜 더 많은 아일랜드 증원군이 도착할 가능성이 배제되었다.[25]

스페인에 도착한 여단원들은 기름진 음식과 익숙하지 않은 고급 와인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6] 1937년 4월, 오더피의 부관 거닝 대위는 임금과 다수의 여권을 가지고 도망갔으며, 오더피의 부하들은 그에게 "오스커피"와 "올드 존 볼록스"라는 별명을 붙였다.[27] 한 여단원은 일기에 사기가 무너지고 있다고 기록했다.[28]

티툴시아 공격이 실패한 후, 프랑코주의자 후안 야궤 장군은 프랑코에게 '전문적인 지휘관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이 부대의 군사적 효율성은 전혀 없다'고 보고하고 아일랜드 여단을 해체할 것을 권고했다.[29] 오더피는 부대 철수를 제안했고, 프랑코가 이에 동의하면서 여단의 대부분은 카세레스로 돌아와 포르투갈에서 배를 타고 귀국했다. 1937년 6월 말 더블린에 도착했을 때, 예상했던 수천 명이 아닌 수백 명의 환영을 받았고, 오더피의 정치 경력은 끝이 났다.[30] 케리주와 아일랜드 북부 출신 지원병들은 오더피와 관계를 끊고 주 부대와 별도로 행진했다.[30]

아일랜드 친 프랑코 지원병들이 아일랜드로 돌아왔을 때, 이미 프랑코의 대의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는 사라진 상태였다. 페르갈 맥가리는 "전쟁이 길어지고 독일의 게르니카 폭격과 같은 만행, 카톨릭 바스크 지역의 마을이 알려지면서, 프랑코가 종교적인 십자군을 이끌고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다."고 적고 있다.[31] 1937년 여름까지 아일랜드 여단은 실패로 돌아왔고, 크리스찬 전선은 자체적인 내부 압력으로 인해 격렬하게 붕괴되었다.[31]

여단의 손실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한 반데라 대원은 스페인에서 35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으며,[32] 다른 추산에 따르면 10명이 전투 중 사망하고 21명이 부상 또는 질병으로 사망했다.[33] 페르갈 맥가리는 "그들은 15명의 사망한 동료와 6명의 입원한 군인을 남겨두고 떠났다."고 기록했다.[34] 아일랜드 정부는 1940년 5월 여단과 관련된 기록을 파기했다.[35]

5. 한국의 시각

5. 1. 한국전쟁과의 비교

5. 2. 반공주의와 국제정치

6.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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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문서 Eoin O~Duffy
[35] 뉴스 De Valera ordered top secret war files destroyed http://www.independe[...] 201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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