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리아 에우독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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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는 4세기 후반 서로마 제국 군 기병대 사령관의 딸로, 동로마 제국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아내가 된 인물이다. 395년 아르카디우스와 결혼하여 404년 사망할 때까지 황후로 지내며,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에우독시아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종교 문제에도 관여했으며, 특히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갈등을 빚었다. 그녀는 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는 기독교 분파를 후원하고, 유물 도착을 기념하는 행사를 주최하는 등 종교적인 활동을 펼쳤으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그를 두 차례 추방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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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리아 에우독시아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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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아우구스타 |
재위 기간 | 395년 4월 27일 – 404년 10월 6일 |
재위 유형 | 재임 |
배우자 | 아르카디우스 (395년 결혼, 사망 시까지) |
자녀 | 플라킬라 풀케리아 아르카디아 테오도시우스 2세 마리나 |
왕조 | 테오도시우스 |
이름 | |
로마자 표기 | Aelia Eudoxia |
출생과 사망 | |
사망일 | 404년 10월 6일 |
매장 장소 | 성 사도 교회 |
아버지 | |
아버지 | 바우토 |
2. 가계와 초기 생애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는 380년대 서로마 제국 군대에서 기병대 사령관으로 복무한 플라비우스 바우토의 딸이었다.[1] 그녀의 아버지는 385년 아르카디우스와 함께 로마 집정관을 지냈으며, 388년 이전에 사망했다.[1] 에우독시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로마 제국의 군사령관인 프로모투스의 보호 아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이는 두 군사령관의 친분이나 정치적 동맹 관계 때문으로 추정된다.[1]
프로모투스는 391년에 사망했고, 이후 에우독시아는 402년 니코메디아의 주교가 된 판소피우스에게 교육을 받았다.[1]
2. 1. 가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는 380년대 서로마 제국 군대에서 마기스테르 에퀴툼으로 복무한 플라비우스 바우토의 딸이었다.[1] J. B. Bury의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부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망까지의 후기 로마 제국사''(1923)와 케네스 홀럼의 ''테오도시우스 시대의 황후: 후기 고대 시대의 여성과 제국의 지배''(1982)는 에우독시아의 어머니를 로마인으로, 에우독시아를 "세미바르바라", 즉 반야만인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1차 사료는 그녀의 어머니의 혈통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1]에우독시아의 아버지는 385년 아르카디우스와 함께 로마 집정관으로 마지막으로 언급되었으며, 388년에는 이미 사망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에우독시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로마 제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인 프로모투스의 가신으로 생애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 당시 고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1] 프로모투스 가문에 들어간 것은 두 군사령관의 친분 또는 정치적 동맹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1]
프로모투스는 391년에 사망했으며, 조시무스에 따르면 그의 미망인 마르사와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그의 동생 호노리우스를 남겼는데, 이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 및 공동 황제들과 함께 자랐다. 조시무스는 에우독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살아남은 아들 중 한 명과 함께 살았으며, 아버지의 후계자로서의 아르카디우스와 이미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에우독시아는 402년에 니코메디아의 주교로 승진한 판소피우스에게 교육을 받았다.
2. 2. 초기 생애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는 380년대에 서로마 제국 군대에서 기병대 사령관으로 복무한 플라비우스 바우토의 딸이었다.[1] J. B. Bury의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부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망까지의 후기 로마 제국사''(1923)[2]와 케네스 홀럼의 역사 연구 ''테오도시우스 시대의 황후: 후기 고대 시대의 여성과 제국의 지배''(1982)는 그녀의 어머니를 로마인으로, 에우독시아를 "세미바르바라" 즉, 반야만인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1차 사료는 그녀의 어머니 혈통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1]아일리아 에우독시아의 아버지는 385년 아르카디우스와 함께 로마 집정관으로 마지막으로 언급되었으며, 388년에는 이미 사망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에우독시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로마 제국의 군사령관인 프로모투스의 가신으로 생애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 당시 고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1] 프로모투스 가문에 들어간 것은 두 군사령관의 친분 또는 정치적 동맹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1]
프로모투스는 391년에 사망했으며, 조시무스에 따르면 그의 미망인 마르사와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그의 동생 호노리우스를 남겼는데, 이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 및 공동 황제들과 함께 자랐다. 조시무스는 에우독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살아남은 아들 중 한 명과 함께 살았으며, 아버지의 후계자로서의 아르카디우스와 이미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에우독시아는 402년에 니코메디아의 주교로 승진한 판소피우스에게 교육을 받았다.
3. 황후 시절
에우독시아는 결혼 후 10년 동안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고, 두 번의 사산을 겪었다.[1] 조시모스는 에우독시아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가 궁정 신하와의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소문을 기록했지만, 신뢰성은 낮다.[1]
399년, 에우독시아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가이나스와 함께 에우트로피우스를 처형하고 그의 영향력을 제거했다. 이후 에우독시아의 영향력은 커져 아르바자키우스 장군에게 뇌물을 받는 등 법적 문제에도 관여했다.[1]
400년 1월 9일, 에우독시아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고, 보라색 팔루다멘텀 착용과 로마 주화에 묘사되는 등 황후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녀의 시동생 호노리우스는 이에 대해 아르카디우스에게 불만을 표출했다.[1]
에우독시아의 영향력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필로스토르기우스는 그녀의 지성을 높이 평가했지만 "야만적인 오만함"을 언급했고, 조시모스는 그녀가 의지는 강했지만 궁정 환관과 여성들에게 조종당했다고 평가했다. J. W. H. G. 리에베슈츠는 영향력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한 반면, ''케임브리지 고대사 XIII''는 그녀가 40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정부를 지배했다고 본다.[1]
40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지사 심플리키우스는 에우독시아를 위해 반암 기둥과 대리석 받침대 조각상을 세웠다. 아르카디우스는 셀림브리아(실리브리) 마을 이름을 ''에우독시오폴리스''로 변경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1]
3. 1. 결혼
395년 1월 17일,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밀라노에서 부종으로 사망했다.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 제국을,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을 계승했다. 아르카디우스는 동방의 프라이토리아니 현감인 루피누스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았다. 루피누스는 자신의 딸을 아르카디우스와 결혼시켜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관계를 맺으려 했다고 전해진다.[1] 버리는 "황제의 장인이 된 그는 [루피누스] 스스로 황제가 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2]그러나 루피누스는 서방의 군사령관인 스틸리코와의 갈등으로 정신이 팔렸다. 에우독시아와 아르카디우스의 결혼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근무하는 환관 관리 중 한 명인 에우트로피우스가 주선했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에우트로피우스가 아르카디우스에게 에우독시아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그녀의 매력을 설명하여 아르카디우스가 사랑에 빠졌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황제가 이미 6, 7년 동안 에우독시아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황후 선택은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3]
결혼은 395년 4월 27일에 루피누스의 사전 인지나 동의 없이 이루어졌다.[1][2] 에우트로피우스에게는 황제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새로운 황후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한 시도였다. 루피누스는 프로모투스의 적이었고, 에우독시아를 포함한 군사령관의 생존자들은 그를 훼손하려 했을 수도 있다.[1] 아르카디우스 자신도 섭정의 의지보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4] 조시무스는 아르카디우스가 신부의 뛰어난 미모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아르카디우스는 대략 18세였고, 에우독시아도 비슷한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 2. 정치적 영향력
에우독시아는 399년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었던 가이나스와 함께 에우트로피우스가 자신의 영향력과 궁정에서의 권력을 확대하려 하자, 그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처형하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우트로피우스 처형 이후 그녀의 개인적인 영향력은 더 커졌다. 그녀는 법적 문제에도 관여했는데, 아르바자키우스 장군이 이사우리아인과의 전쟁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재판을 피하기 위해 그녀에게 뇌물을 준 경우가 있었다.[1]400년 1월 9일, 에우독시아는 공식적으로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그녀는 황제의 지위를 나타내는 보라색 팔루다멘텀을 착용할 수 있었고, 로마 주화에도 묘사되었다. 또한, 남성 아우구스투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녀를 묘사한 공식적인 이미지도 유포되었다. 그녀의 시동생 호노리우스는 나중에 아르카디우스에게 그들이 자신의 궁정에까지 이르렀다고 불평했다.[1]
궁정과 국가 문제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다. 필로스토르기우스는 그녀가 남편보다 더 지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야만적인 오만함"에 대해 언급했다. 조시모스는 그녀가 의지가 강했지만, 궁정의 환관들과 주변 여성들에게 결국 조종당했다고 생각했다. J. W. H. G. 리에베슈츠는 1차 자료에서 그녀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 ''케임브리지 고대사 XIII''는 그녀가 400년부터 404년 사망할 때까지 정부를 지배했다고 평가한다.[1]
40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도지사 심플리키우스는 그녀를 위해 반암 기둥과 대리석 받침대에 조각상을 세웠다. 아르카디우스는 셀림브리아(실리브리) 마을의 이름을 그녀를 기려 ''에우독시오폴리스''로 바꿨지만, 이 이름은 오래가지 못했다.[1]
3. 3. 종교 정책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의 갈등
에우독시아는 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는 기독교 분파의 후원자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그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밤에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행진에 자금을 지원했다.[1] 또한 새로운 유물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이를 기념하는 공개 축제를 주재하고, 밤에는 스스로 철야에 참여하기도 했다.[1]마르코 디아코노에 따르면, 에우독시아는 400년에 포르피리오 주교를 환영했고, 포르피리우스는 그녀의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아들(훗날 테오도시우스 2세)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가 태어난 후, 에우독시아는 포르피리우스에게 어린 아들을 위해 이교도 사원을 파괴하고 가자 지역의 이교도들을 위협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요청했다. 포르피리우스는 에우독시아의 요청대로 마르나 신전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에우독시아가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한 맹세를 기리는 바실리카를 건설했다. 이 바실리카는 에우독시아 사후에 완공되어 그녀의 이름을 따서 에우독시아네로 명명되었다.
에우독시아는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아우구스티가 맡았던 교회의 후원자 역할을 맡으면서 종교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고, 이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의 갈등을 야기했다.[1] 특히 요한이 에우트로피우스의 실각과 처형에 항의한 이후 갈등이 심화되었다.

3. 3. 1. 오크 시노드(403년)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한이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에 편향되었다고 비난하며, 403년에 오크 시노드를 열어 그를 해임하고 추방했다.[1] 이 시노드에서 오리게네스와의 관계가 요한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요한은 이전에 에우트로피우스의 실각과 처형에 항의했고, 궁정의 사치스러운 여성 의상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는데, 에우독시아는 이를 자신을 겨냥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6]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에우독시아는 테오필루스와 동맹을 맺고 요한을 축출하는 데 힘을 보탰다.
백성들이 요한의 추방에 반발하고, 체포 당일 밤 지진이 일어나자 에우독시아는 이를 신의 분노로 여겨 남편 아르카디우스에게 요한의 복귀를 요청했다.[8]
3. 3. 2. 두 번째 추방과 죽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와 대립하였는데, 특히 그가 에우트로피우스(궁정의 그의 동맹)의 실각과 처형에 항의한 이후였다. 대주교 시절, 요한은 호화로운 사교 모임을 주최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는데, 이는 평민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지만 부유한 시민들과 성직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또한 성직자 개혁도 이들에게 인기가 없었는데, 그는 부재 중인 사제들에게 급여 없이 봉사하도록 지정된 교회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5]거의 같은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는 콘스탄티노플을 자신의 지배 하에 두기를 원했고, 요한의 콘스탄티노플 임명을 반대했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요한이 후자의 가르침에 너무 편향되었다고 비난했다. 테오필루스는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지지한 네 명의 이집트 수도사(일명 "키 큰 형제")를 징계했고, 그들은 도망쳐 요한의 환영을 받았다. 요한은 에우독시아에게 또 다른 적을 만들었는데, 그녀는 (아마도 정당하게) 여성 의상의 사치에 대한 그의 비난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6] 에우독시아, 테오필루스 등은 곧 그에게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403년에 시노드(오크 시노드)를 열어 요한을 고발했고, 그 안에서 오리게네스와의 그의 관계가 그에게 불리하게 사용되었다. 그 결과 그는 해임되고 추방되었다. 백성들이 그의 출발에 대해 "소란스러워"지자 아르카디우스는 거의 즉시 그를 소환했다.[7] 그의 체포 당일 밤에는 지진도 있었는데, 에우독시아는 이를 신의 분노의 징조로 여겨 아르카디우스에게 요한의 복귀를 요청했다.[8]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에우독시아의 은 조각상이 도시 대성당 근처에 세워졌다. 요한은 헌정식을 비난했다. 그는 에우독시아에 대해 "헤로디아스가 다시 광분하고, 다시 괴로워하며, 다시 춤을 추며, 다시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받기를 원한다."[9]라며 가혹한 말로 비난했는데, 그는 자신을 세례 요한에 비유했다.
요한은 다시 한 번 추방되었고, 이번에는 아르메니아의 코카서스로 추방되었으며, 407년에 그곳에서 망명 중에 사망했다.[10] 에우독시아는 오래 살지 못했다. 그녀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임신은 유산으로 끝났거나, 의사-마르티리우스에 따르면 두 번째 사산으로 끝났다. 그녀는 출혈을 겪었고 그 직후 감염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콘스탄티노플의 성 사도 교회에,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가 10세기에 ''De Ceremoniis''에서 묘사한 반암 석관에 묻혔다.[11]
4. 자녀
에우독시아와 아르카디우스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의 출생과 사망에 대한 주요 기록은 마르켈리누스 코메스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1]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플라킬라 | 397년 6월 17일 |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 408년 아버지 사망 당시 생존 기록 없음. | |
풀케리아 | 399년 1월 19일 | 453년 | 마르키아누스와 결혼. |
아르카디아 | 400년 4월 3일 | 444년 | |
테오도시우스 2세 | 401년 4월 10일 | 450년 7월 28일 | |
마리나 | 403년 2월 10일 | 449년 |
유사-마르티리우스에 따르면, 에우독시아는 403년 말과 404년 말에 두 번 임신했으나 유산이 아닌 사산으로 끝났으며, 두 번째 사산은 에우독시아의 출혈과 감염으로 인한 사망을 초래했다.[1]
5. 유산
주디 시카고의 설치 미술 작품인 ''디너 파티''에 등장하는 인물로, 헤리티지 플로어에 있는 999명의 이름 중 하나로 묘사된다.[12][13] 테오도라의 식탁 세팅 아래에 등재되어 있다.[12]
참조
[1]
웹사이트
Roman Emperors – DIR Aelia Eudoxia (Wife of Arcadius)
http://www.roman-emp[...]
2022-08
[2]
웹사이트
J.B. Bury,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from the Death of Theodosius I to the Death of Justinian, chapter V
https://penelope.uch[...]
[3]
웹사이트
Roman Emperors - DIR Aelia Eudoxia (Wife of Arcadius)
http://roman-emperor[...]
2023-05-25
[4]
웹사이트
Roman Emperors – DIR Arcadius
http://www.roman-emp[...]
2022-07-19
[5]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Saints
Oxford University Press
[6]
간행물
John Chrysostom
Garland Publishing
[7]
서적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Volume II: Socrates and Sozomenus Ecclesiastical Histories
http://www.ccel.org/[...]
Hendrickson Publishers
2007-03-29
[8]
웹사이트
St John Chrysostom the Archbishop of Constantinople
http://ocafs.oca.org[...]
Orthodox Church in America
2007-03-29
[9]
웹사이트
Chapter XVIII: Of Eudoxia's Silver Statue
http://www.ccel.org/[...]
[10]
간행물
John Chrysostom
Westminster Press
[11]
논문
Imperial Porphyry Sarcophagi in Constantinople
https://lucazavagno.[...]
1848
[12]
웹사이트
Eudoxia
http://www.brooklynm[...]
Brooklyn Museum
2011-12-16
[13]
문서
Chicago,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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