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마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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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즈마 시로는 일본군으로 난징 대학살에 가담한 후, 자신의 경험을 담은 일기를 출판하여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고 사죄한 인물이다. 그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증언과 일기 출판으로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렸으나, 일본 법원은 그의 증언의 신뢰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즈마 시로는 중국에서 지지와 연대를 받았으며, 그의 증언은 난징 대학살의 진실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는 미국 입국이 거부되었으며, 200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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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시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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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아즈마 시로 |
원어 이름 | 東 史郎 |
로마자 표기 | Azuma Shirō |
출생 | 1912년 4월 27일 |
출생지 | 교토부다케노군하시우도무라 |
사망 | 2006년 1월 3일 |
직업 | 군인(소집병), 저술가, 사회운동가 |
학력 | 교토부립 제2중학교 |
대표작 | 『나의 난징 플래툰』 |
2. 생애
아즈마 시로는 1937년 25세의 나이로 징집되어 육군 제16사단 보병 제20연대 소속으로 화북 전투에 참전했고,[8] 같은 해 11월 난징 전투 공략에 참여하였다.[8]
전후에는 공작 기계 제조업 등에 종사했다.[14] 1987년 자신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저서 『나의 난징 소대』를 출판하여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고, 가해자로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사죄를 하였다.[15][13]
미국 법무부는 아즈마의 입국을 거부했다.[43] 뉴욕 거주 기념 난징 대학살 희생 동포 연합회 회장 사오쯔핑은 아즈마가 3명의 중국인에 대한 비인도적인 학살을 스스로 공표했기 때문에 입국이 거부된 것이라고 말했다.[16][17][43]
2006년 1월 3일, 대장암으로 사망했으며,[15] 향년 93세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18] 및 침화 일본군 난징 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19]에서 아즈마의 사망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2. 1. 참전
1937년(쇼와 12년), 아즈마 시로는 25세의 나이로 징집되어 육군 제16사단 보병 제20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상등병으로 화북 전투에 참가하였다.[8] 그해 11월 16일, 양쯔강 옌푸진에 상륙하여 난징 전투 공략에 참여하였다.[8]2. 2. 전후 활동
전후 아즈마 시로는 공작 기계 제조업 등에 종사했다.[14] 1987년(쇼와 62년) 자신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저서 『나의 난징 소대』를 아오키 서점에서 출판하여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고, 가해자로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사죄를 하였다.[15][13] 같은 해 12월 13일, 난징 50주년을 기념하여 난징 사건 조사 연구회(호라 토미오)와 함께 난징시를 방문했을 때 가해자로서 처음으로 사죄했으며, 아즈마가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본 중국인들이 감동했다고 한다.[14]아즈마는 미국 법무부로부터 입국이 거부되었다.[43] 매기 필름의 첫 번째 발견자이자, 존 라베를 간행한 뉴욕 거주 기념 난징 대학살 희생 동포 연합회(Alliance in Memory of the Victims of the Nanking Massacre)[16] 회장 사오쯔핑(Shao Tzping)[17]은 아즈마가 스스로 3명의 중국인에 대한 비인도적인 학살을 공표했기 때문에 입국이 거부된 것이라고 말했다.[43]
2006년(헤이세이 18년) 1월 3일, 대장암으로 사망했으며,[15] 향년 93세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18] 및 침화 일본군 난징 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19]에서 아즈마의 사망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3. 난징 대학살 증언
1987년, 아즈마는 난징 대학살에 관한 내용을 담은 '나의 난징 소대'라는 일기를 출간했다. 그의 완전한 일기는 2001년 일본어와 중국어로 출판되었고, 2006년에는 영어로도 출판되었다.[2]
1998년 인터뷰에서 아즈마는 일본군이 천황을 위해 살기 때문에 우월한 민족이라고 배웠지만,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아 경멸했다고 말했다. 또한 강간이 많았고, 강간 후에는 여자들을 돼지고기처럼 취급했다고 증언했다.[2] 그는 상관 하시모토 미츠하루가 중국 민간인을 우편 가방에 넣고 등유를 적셔 불태운 뒤, 수류탄을 넣어 강에 던지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묘사했다.
3. 1. 주요 증언 내용
아즈마 시로는 자신의 일기와 증언을 통해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의 잔혹 행위를 구체적으로 폭로하였다.1998년 인터뷰에서 아즈마는 "우리는 인간 신, 즉 우리의 천황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우월한 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경멸했다"라고 말했다.[2] 그는 또한 "강간이 많았고, 여자들은 항상 죽임을 당했다. 강간을 당할 때는 여자들도 인간이었다. 그러나 강간이 끝나면 그들은 돼지고기가 되었다."라고 증언했다.[2]
집단 강간: 산케이 신문에 따르면, 아즈마는 숨어 있는 중국인 여성을 발견하면 100% 강간했고, 1명이 아닌 5명이서 범행을 저질렀으며, 그 후 살해하고 불을 질러 태웠으며, 죄악감은 없었다고 고백했다.[21] 201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공립 고등학교 세계사 수업에서 사용된 교재에 따르면, 아즈마는 전쟁 당시 중국인 여성을 발견하면 반드시 5명이 집단 강간하고, 강간 후 불을 질러 태웠다고 증언했다.[21]
포로 학살 및 기타 만행: 아즈마는 그의 상관 중 한 명인 하시모토 미츠하루가 중국 민간인을 우편 자루에 넣고 등유를 적신 다음, 자루를 태웠다고 한다. 그 후 수류탄을 자루 안에 넣고 강에 던져 "자극적인 쾌감"을 느끼려 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1938년 1월 23일, 난징으로 이동하기 위해 들른 시모노세키의 부두에서 적군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매일 트럭으로 패잔병들을 실어와 강에 밀어 넣고 쏘아 죽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20]
3. 2. 증언의 의미와 영향
아즈마 시로의 증언은 난징 대학살의 실상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1987년, 아즈마는 중국에서의 경험을 담은 일기 '나의 난징 소대'를 출간하여 난징 대학살에 관한 내용을 공개했다.[15] 그의 완전한 일기는 2001년 일본어와 중국어로 출판되었고, 2006년에는 영어로도 출판되었다.[2]1998년 인터뷰에서 아즈마는 "우리는 인간 신, 즉 우리의 천황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우월한 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경멸했다"라고 말하며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2] 그는 상관이었던 하시모토 미츠하루가 중국 민간인을 우편 가방에 넣어 등유를 적신 후 불태우고, 수류탄을 가방 안에 넣어 강에 던졌다고 묘사했다.
아즈마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이러한 묘사에 대해 전 상관은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재판부는 공표 및 출판에 공공성과 공익 목적성은 인정했지만, 사실인지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최고재판소는 상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손해배상이 확정되었다.[21]
아즈마의 증언은 중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타 이쿠히코는 아즈마가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영웅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언급했다.[23] 그의 증언은 침화 일본군 난징 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 건립과 추모 활동에 영향을 미쳤으며,[19] 2006년 아즈마가 사망했을 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기념관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18][19]
쓰다 미치오는 아즈마의 증언을 인용하며 "한 사람의 아즈마 시로의 행위는 대일본 제국=일본 국가의 죄업을 영원한 폭로대에 못 박고 있다"라고 평가했다.[24] 요시다 유는 아즈마 일기의 '유희'는 군사적 필요성이나 합리성을 결여한 방종하고 학대적인 가해 행위의 한 예라고 지적했다.[25][44]
4. 명예훼손 소송
아즈마 시로는 자신의 일기에 상관이 중국인을 큰 우편 자루에 넣고 수류탄을 묶어 산 채로 연못에 던져 폭사시켰다는 내용을 기록했다. 이 일기가 공개되자, 우익 단체 카이코샤의 지원을 받은 상관은 아즈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3] 그는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부인하며, 우편 자루에 사람이 들어갈 수 없고, 범행 장소인 난징 최고 법원 근처에는 연못이 없으며, 목격자도 없다고 주장했다.[3]
1998년 3월 12일, 아즈마는 일기가 난징 대학살의 기록임을 변호하기 위해 일본 최고 법원에 출두했으나, 2000년 항소는 기각되었다.[4] 판사는 문제의 행위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명예훼손이라고 판결했다.[5]
이 소송은 일본에서 아즈마의 증언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지만, 중국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4. 1. 소송 배경
아즈마 시로의 일기에는 그의 상관이 중국인을 큰 우편 자루에 넣어 수류탄을 묶은 뒤 산 채로 연못에 던져 폭사시켰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3] 이 일기가 공개되자, 우익 단체 카이코샤의 지원을 받은 해당 상관은 아즈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며 어떠한 전쟁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편 자루에 사람이 들어갈 수 없고, 범행 장소인 난징 최고 법원 근처에는 연못이 없으며, 목격자도 없다고 반박했다.[3]이 소송은 일본에서 아즈마의 증언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지만, 중국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아즈마 시로의 저서에서 당사자는 가명으로 처리되었고, 원고는 처음에는 책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타쿠라 요시아키와 전우회 관계자들의 권유로 사단명이 붙은 책이 출간되자 오명을 씻고자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 측 변호사 타카이케 카츠히코는 이타쿠라 요시아키가 교과서 재판 등에서 난징 사건을 전문으로 다루었고, 1992년 9월 제1차 교과서 재판의 도쿄 지방 법원 판결 이후 여론을 바꾸기 위해 이길 수 있는 재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즈마 시로 책의 내용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제안했다고 밝혔다.[37] 원고는 부대 관계자 및 이타쿠라 요시아키와 상의하여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타카이케 카츠히코 변호사 사무실에 "난징 사건의 허구를 바로잡는 모임"이 설치되었다.[14]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이 소송을 통해 보병 제20연대의 잔학 행위가 허위임을 증명하고, 더 나아가 '난징 대학살'의 허구를 밝히고자 했다.[38][14]
4. 2. 재판 과정 및 결과
아즈마 시로는 자신의 일기가 공개된 후, 일기에 묘사된 상급자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3] 이 상급자는 어떤 전쟁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우편 가방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고, 범행 장소 근처에 연못이 없으며, 목격자도 없다고 반박했다.[3]아즈마 시로는 더 많은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난징으로 가서 많은 난징 시민들과 난징 대학살 기념관 관장 쑤청선의 지원을 받았다.[3] 그들은 1937년 12월에 제작된 난징 지도 7개와 항공 사진 2장을 포함한 물증을 제공하여 해당 지역에 3개의 연못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3] 또한, 당시 난징의 범행 장소 근처에 살았던 26명의 지역 주민들이 일본군 병사들이 저지른 유사한 잔혹한 전쟁 범죄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3]
1996년 4월, 도쿄 지방 재판소는 1심 판결에서 일기 기술을 허구로 인정하고, 아즈마 시로 등에게 500000JPY의 배상금 지급을 명령했다.[13][14] 재판부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평가는 피했지만, 우편 봉투 사건에 대해서는 부자연스럽고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며 실행 가능성이 없다고 판결했다.[39]
아즈마 시로는 항소했지만, 1998년 12월 22일 도쿄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했다.[13][40] 항소심에서는 아즈마 시로가 전전에 썼다고 여겨지는 '일기' 현물이 제출되었지만, 난징 전투에 관한 부분은 당시의 '일기' 현물이 제출되지 않았다.[41] 재판부는 아즈마 일기가 전전에 쓰여진 것인지 의문이며, 전후에 가필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아즈마의 진술은 전면적으로 채용하기 어렵다"고 판정했다.[13]
2000년 1월 21일, 최고 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하여 아즈마 시로의 패소가 확정되었고,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명령을 받았다.[39][15]
이 소송은 일본에서 그의 증언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지만, 중국에서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 언론은 재판 과정과 결과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했으며, 특히 원고 측의 '난징 대학살 날조 재판 승리'라는 현수막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43]
4. 3. 소송의 영향
이 소송은 일본 내에서 아즈마 시로의 증언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4] 반면, 중국에서는 이 소송이 일본의 역사 왜곡 시도로 비판받으며 아즈마 시로에 대한 지지와 연대가 강화되었다.[4]일본에서 아즈마 시로는 자신의 일기에 중국인을 우편 가방에 넣어 수류탄으로 폭파시켰다는 내용을 썼는데, 그의 상관이 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3][13][14] 원고 측은 이 증언이 허위라고 주장하며 우익 단체의 지원을 받았다.[3][37] 이들은 소송을 통해 '난징 대학살'의 허구를 밝히려 했다.[38][14]
아즈마 시로는 더 많은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난징을 방문, 난징 시민들과 난징 대학살 기념관 관장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3] 그들은 당시 지도와 항공사진 등을 제공하여 현장에 연못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3]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군사 지도와 지역 주민들의 증언도 확보했다.[3] 그럼에도 일본 최고 법원은 2000년에 아즈마 시로의 항소를 기각했다.[4]
원고 측 변호사는 판결로 인해 아즈마 시로 서적 자체의 신뢰성이 없어졌다고 언급했다.[43] 그는 언론이 일본군의 비행을 폭로할 때 고발자 측 취재만으로 진위를 검증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양측 모두에 대한 취재를 요구했다.[43]
중국 언론은 이 판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13][43] 재판관의 지각, 간단한 판결 선고, 원고의 기자 회견 불참 등에 대해 경악하고 분노했다.[43] 원고 측 기자 회견에서 '난징 대학살 날조 재판 승리'라는 현수막에 대해 중국인에 대한 모욕이라며 항의했지만, 제거되지 않았다.[43]
인민일보는 이 판결을 "역사의 왜곡자가 승소, 과오를 뉘우친 고백자가 패소"라고 보도하며, 재판이 역사의 진실을 후세에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에 의해 일어났다고 비판했다.[13]
아즈마 시로와 변호인단은 항소심 판결이 "역사적 사실"을 짓밟았다고 비판하며, 법원이 '허구론'에 가담하여 매우 정치적인 판단을 했다고 주장했다.[13][44] 그들은 이 소송이 진실의 공표를 방해하기 위한 사악한 책략이라고 비판했다.[44]
"노 모어 난징의 회"는 이 판결이 "국제적으로는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당한 판결"이라고 비판하며, 일본의 사법부와 언론이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13]
5. 미국 입국 금지
1998년, 미국 법무부는 아즈마 시로가 1996년에 만들어진 6만 명의 전쟁 범죄 혐의자 감시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의 미국 입국을 거부했다. 이 목록에 기재된 다수는 독일 나치였다. 아즈마 시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설명하며 폭로하기 위해 미국 강연에 참여하려 했다.[6]
6. 평가 및 영향
하타 이쿠히코는 아즈마 시로가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영웅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평가했다.[23] 하야시 보쿠요는 1999년 중국 방문 당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아즈마 시로를 추궁하는 것을 본 경험을 예로 들며, 중국에서 아즈마 시로가 단순하게 영웅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부 일본인은 중국이 아즈마를 이용하여 민족주의를 앙양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일본의 수정주의자들이 중국인의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있다고 보았다.[7]
쓰다 미치오는 자신의 저서 『난징 대학살과 일본인의 정신 구조』에서 아즈마의 증언을 인용하며, "아즈마 시로는 대일본제국이 범했고, 일본국이 계속 범하고 있는 죄책을 한 몸으로 짊어지고, 개인적인 자리에서 공개적인 사죄를 계속하고 있다. 한 사람의 아즈마 시로의 행위는 대일본 제국=일본 국가의 죄업을 영원한 폭로대에 못 박고 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24] 산둥 성의 전직 중학교 교사인 런스이지는 아즈마 시로의 일기를 토대로 현장 조사를 실시하여 『아즈마 시로의 일기와 나: 산둥 성의 전직 교사에 의한 일본군 병사 죄행의 현장 검증』을 출간했다. 쓰다 미치오는 중국 측 연구자의 면밀한 검증을 통해 아즈마 시로의 일기가 신뢰할 수 있다고 평가하며, 아즈마 시로의 '일기'가 허구라는 주장은 중국인 연구자의 노력으로 분쇄되었다고 말했다.[8]
요시다 유는 난징 공략전의 특징 중 하나로 군사적 필요성이나 합리성을 결여한 학대 행위가 빈발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아즈마 일기의 "유희"는 그 한 예라고 언급했다.[25][44]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정박장 사령부가 12월 28일까지 항만의 시체 처리를 끝냈으며, 가지야 일기 등의 기재와 아즈마의 증언은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26] 그러나 당시 양쯔강은 겨울 갈수기였고, 미카미 쇼의 증언에 따르면 수위 저하로 인해 시체가 강둑이나 강바닥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하고 노출되는 일이 반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7] 실제로 가지야 일기에서도 시체의 양쯔강 투기 후 수위 저하로 인해 시체가 다시 나타나는 상황이 반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28] 또한, 난징 함락 직후의 대규모 패잔병 사냥은 1월 5일에 종료되었지만,[29] 그 후에도 난징 주변에서 일본군의 게릴라 소탕과 주민 살해가 계속되었다는 자료가 존재한다.[30]
아즈마가 중국 중앙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 "실화실설"에 출연했을 때, 중국 유학생 미즈타니 나오코는 아즈마에게 명예 훼손 재판에서 제기된 모호한 점에 대해 질문했다. 아즈마는 모호한 것이 아니라 재판관이 일기에 쓴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반박했다.[31] 아즈마와 동행했던 사람들에 따르면, 미즈타니는 재판에 관심이 없는 듯이 대답했으며, 그 후에도 중국 측이나 아즈마 지지자 측에 대한 비판[32]을 계속했다고 한다.[33][31] 나카키타 류타로, 니와 마사오, 소라노 요시히로는 미즈타니가 중화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반일을 위해 아즈마의 재판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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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赤旗連載・東日記の詐話に泣く元兵士
自由
1993-06
[37]
서적
本当はこうだった南京事件
[38]
간행물
南京虐殺の虚構に挑戦 橋本訴訟の経緯とその意義
月曜評論
1993-05-17
[39]
서적
南京大虐殺 記憶の暗殺
世界知識出版社
2008-04-27
[40]
뉴스
1998년 12월 23일자 朝日, 産経, 共同, 每日 각 신문 보도
1998-12-23
[41]
서적 #추정
2000
[42]
간행물
1993
[43]
간행물
中国人留学生が見た東史郎=南京事件裁判
http://www.jca.apc.o[...]
障害者の教育権を実現する会
1999-11
[44]
간행물
東史郎裁判と南京大虐殺
週刊金曜日
1999-11-05
[45]
간행물
東史郎私観 中国紀行印象記5
1999
[46]
웹사이트
司法の最高責任を放棄した最高裁「決定」
http://www.jca.apc.o[...]
2000-04-27
[47]
간행물
高裁も退けた「南京大虐殺」のウソ
正論
1999-03
[48]
뉴스
産経新聞
1999-06-02
[49]
웹사이트
<김길호의 일본이야기> 기억의 암살
http://www.ijejutoda[...]
[50]
웹사이트
난징대학살 폭로 일본인 아즈마씨 사망
http://media.daum.ne[...]
200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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