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우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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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타우알파는 잉카 제국의 마지막 사파 잉카로, 16세기 초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하면서 제국의 멸망을 맞이했다. 그는 형 우아스카르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제국을 통치했지만, 스페인의 침략으로 인해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아타우알파는 몸값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역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잉카 제국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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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우알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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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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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타우알파 |
원어 이름 | lang: qu text: Atawallpa |
통치 | |
작위 | 사파 잉카 (잉카 제국) |
재위 | 1532년–1533년 |
즉위 방식 | 자칭 - 즉위 |
대관식 | 1532년 4월 |
선임자 | 우아스카르 |
후임자 | 투팍 왈파 (괴뢰 사파 잉카, 잉카 제국) |
왕족 정보 | |
왕조 | 하나 쿠스코 |
아버지 | 와이나 카팍 - 잉카 황제 |
어머니 | 토크토 오클로 코카 파차 두치셀라 투팍 팔라 |
배우자 | 코야 아사르파이 (왕비) 쿠시리메이 오클로 (제2 왕비) |
생애 | |
출생일 | 1502년경 |
출생지 | 키토, 잉카 제국 |
사망일 | 1533년 7월 26일 (약 31세) |
사망지 | 카하마르카, 잉카 제국 |
매장일 | 1533년 8월 29일 |
매장지 | 카하마르카, 타완틴수유 |
기타 정보 | |
언어 | 케추아어 |
로마자 표기 | Atawallpa |
2. 정복
1531년 1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원정대가 잉카 제국 정복 임무를 띠고 푸냐 섬(Puná Island)에 상륙했다. 피사로는 169명의 병사와 69필의 말을 데리고 왔다.[2] 스페인인들은 남쪽으로 향해 툼베스를 점령했고, 거기서 후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가 서로 벌이고 있는 잉카 내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2] 약 1년 반 후인 1532년 9월, 스페인에서 증원군이 도착한 후 피사로는 산 미구엘 데 피우라 시를 건설하고 106명의 보병과 62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부대로 잉카 제국의 중심부로 진군했다.[2] 카하마르카(Cajamarca)에 있던 아타우알파는 이방인들이 제국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잉카 귀족을 보내 조사하도록 했다.[2] 이 귀족은 이틀 동안 스페인 진영에 머물면서 스페인인들의 무기와 말을 평가했다. 아타우알파는 168명의 스페인인들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카하마르카를 방문하여 자신을 만나도록 초대했다. 그는 스페인인들을 사로잡을 계획이었다.[2] 그리하여 피사로와 그의 부하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매우 험난한 지형을 통과했다. 그들은 1532년 11월 15일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2]
Atawallpaqu는 자신의 석방을 위해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아타우알파는 가로 6.7m, 세로 5.2m, 높이 2.4m에 달하는 방 하나를 금으로 채우고, 같은 방을 두 번 은으로 채워주겠다고 했다.[2] 스페인 군인들은 잉카 대군의 기습을 두려워하여 아타우알파를 포로로 잡아두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아타우알파의 유해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역사가 타마라 에스투피난은 그의 유해가 안전을 위해 현재의 에콰도르에 묻혀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지명의 이름은 '말퀴-말퀘이'인데, 이는 케추아어로 '미라'를 뜻한다.[15][16] 이 곳에서는 정교하게 짜맞추어진 석벽이 발견되었고, 지하 수로 또한 발견되었다. 다만 그녀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타우알파는 잉카 제국의 마지막 실질적인 통치자로, 그의 죽음은 제국의 멸망과 스페인의 식민 지배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아타우알파의 죽음은 잉카인들의 저항 의식을 고취시켰고, 망코 잉카 유팡키 등 후계자들은 스페인에 맞서 잉카의 부흥을 꾀했다.[4][5] 비록 후계자들이 스페인의 봉신 또는 반란군 지도자로서 황제의 칭호를 주장했지만, 누구도 아타우알파와 비교할 만한 권력을 갖지 못했다.[4][5]
[1]
웹사이트
Atahuallpa Biography & Facts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2-11-23
잉카 제국의 역대 사파 잉카들은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 9대 황제 파차쿠티는 북부 페루까지 영토를 넓혔고, 그의 아들 투팍 잉카 유팡키는 현재의 에콰도르 지역을 정복했다. 1460년대, 투팍 잉카 유팡키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에콰도르 남부와 페루 북부 지역을 정복했으나, 현지 부족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특히 키투 지역 부족 연합군은 잉카 군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1520년경, 키토의 토착민들이 우아이나 카팍 황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고, 반란군 여왕과의 결혼을 통해 평화가 회복되었다.
1525년 우아이나 카팍 사후, 우아스카르는 아타우알파를 키토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형제간의 잉카 내전에서 승리한 아타우알파는 쿠스코를 점령하고 황제가 되었지만, 곧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콘키스타도르들에 의해 통치가 끝났다. 1532년 11월,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아타우알파는 스페인 군대에 사로잡혔다. 포로 상태에서 아타우알파는 석방을 조건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우아스카르의 처형을 주선했다. 몸값을 받은 후 스페인인들은 아타우알파를 반역, 음모, 우아스카르 살해 혐의로 재판에 회부하여 화형에 처하도록 판결했다. 그러나 1533년 7월 세례를 받은 후, 그는 교살되었다.[3]
이후 후계자들은 스페인의 봉신으로서 또는 반란군 지도자로서 황제의 칭호를 계속 주장했지만, 누구도 그에 필적하는 권력을 갖지 못했다.[4][5]
3. 잉카 내전
후아스카르는 아타우알파를 자신의 권력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여겼으나, 아버지 우아이나 카팍의 유언을 존중하여 그를 제거하지 않았다. 5년 동안 긴장된 평화가 지속되었고, 후아스카르는 이 기간 동안 제국 북부의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아타우알파가 아버지의 원정 중에 싸웠던 카냐리족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카냐리족은 아타우알파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2] 1529년까지 두 형제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었다. 페드로 피사로에 따르면 후아스카르는 북쪽으로 군대를 보내 투메밤바에서 아타우알파를 기습하여 패배시켰다. 아타우알파는 차스키를 위해 건설된 길가의 피난처인 "탐보"에 잡혀 투옥되었으나 탈출했다. 감금 기간 동안 그는 상처를 입고 귀를 잃었다. 그 후 그는 상처를 숨기기 위해 턱 밑에 고정되는 머리 장식을 착용했다. 그러나 미겔 카베요 데 발보아는 이 포로 이야기는 아타우알파가 후아스카르의 군대에 붙잡혔다면 즉시 처형했을 것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2]
아타우알파는 키토로 돌아와 대규모 군대를 모았다. 그는 투메밤바의 카냐리를 공격하여 방어 시설을 무너뜨리고 도시와 주변 지역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는 툼베스에 도착하여 뗏목을 이용하여 푸냐 섬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해상 작전 중 아타우알파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 육지로 돌아왔다. 그의 후퇴를 이용하여 "푸냐네뇨스"(푸냐 주민)는 툼베스를 공격했다. 그들은 도시를 파괴하여 1532년 초 스페인 사람들이 기록한 폐허 상태로 남겨 두었다.
쿠스코에서 아톡 장군이 이끄는 후아스카르 군대는 칠로팜파 전투에서 아타우알파를 패배시켰다. 아타우알파의 장군들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흩어진 군대를 모아 반격하여 멀리아밤바토에서 아토크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아 고문하고 살해했다.
아타우알파 군대는 키스키스와 찰쿠치마크의 전략적 능력 덕분에 계속 승리했다. 아타우알파는 쿠스코로 느리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마르카우아마추코에 주둔하는 동안 그는 카테킬 신의 후아카(신)의 신탁을 묻기 위해 사절을 보냈고, 신탁은 아타우알파의 진격이 잘못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언에 격분한 아타우알파는 성소로 가서 사제를 죽이고 사원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처음으로 피사로와 그의 원정대가 제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
아타우알파의 주요 장군은 키스키스, 찰쿠치마크, 루미냐위였다. 1532년 4월, 키스키스와 그의 동료들은 멀리아밤바토, 침보라소, 키파이판 전투에서 아타우알파의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다. 키파이판 전투는 전쟁 중인 형제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였다. 키스키스와 찰쿠치마크는 후아스카르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그를 사로잡아 그의 가족을 죽이고 수도 쿠스코를 장악했다. 아타우알파는 안데스 도시 카하마르카에 남아 있었고,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사람들을 만났다.
4. 스페인의 침공
아타우알파와 그의 군대는 카하마르카 바로 외곽의 언덕에 진을 쳤다. 그는 코노히 온천(Konoj hot springs) 근처 건물에 머물렀고, 그의 병사들은 그의 주위에 천막을 치고 있었다.[2] 피사로가 카하마르카에 도착했을 때, 그 도시는 몇 백 명의 악야(aclla)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광장에 있는 긴 건물들에 배치되었고, 피사로는 에르난도 데 소토가 이끄는 사절단을 잉카에게 보냈다. 이들은 15명의 기병과 통역관으로 구성되었고, 곧이어 데 소토는 잉카의 공격에 대비하여 20명의 기병을 증원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형제인 에르난도 피사로(Hernando Pizarro)가 이끌었다.[2]
스페인인들은 아타우알파에게 피사로를 만나러 카하마르카를 방문하도록 초대했고, 그는 다음 날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2] 한편, 피사로는 잉카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매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페인 기병과 보병은 광장 주변의 세 개의 긴 건물을 점령했고, 일부 머스킷병과 4문의 대포는 광장 한가운데 있는 돌 구조물에 배치되었다.[2] 계획은 아타우알파를 설득하여 스페인인들의 권위에 복종하게 하고, 실패할 경우 기습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만약 잉카 군대가 너무 강력해 보이면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2]
다음 날, 아타우알파는 정오에 그의 진영을 떠났고, 많은 수의 의식복을 입은 사람들이 앞장섰다. 행렬이 천천히 진행되자 피사로는 그의 형제 에르난도를 보내 잉카가 해가 지기 전에 카하마르카에 들어오도록 초대했다.[2] 아타우알파는 오후 늦게 80명의 귀족들이 메고 있는 가마를 타고 마을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가마와 해먹(hammock)을 탄 네 명의 다른 귀족들과 옷 아래 작은 도끼(battle axe), 돌팔매와 돌 주머니를 든 5,000~6,0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2] 잉카는 광장에서 스페인 사람들을 찾지 못했는데, 그들은 모두 건물 안에 숨어 있었다. 나타난 유일한 사람은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 friar) 빈센테 데 발베르데(Vincente de Valverde)와 통역관이었다.[2]
발베르데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서술은 다르지만, 대부분 그가 잉카에게 피사로와 이야기하고 식사하러 들어오라고 초대했다는 데 동의한다. 아타우알파는 대신 스페인인들이 상륙한 이후 빼앗은 모든 것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2]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발베르데는 가톨릭 종교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스페인 왕관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연설인 ''레케리미엔토(requerimiento)''를 하지 않았다.[2] 아타우알파의 요청에 따라 발베르데는 그에게 그의 브레비어리를 주었지만, 간략하게 살펴본 후 잉카는 그것을 땅에 던졌다. 발베르데는 피사로에게 서둘러 돌아가 스페인인들에게 공격하라고 외쳤다.[2] 그 순간 피사로는 신호를 보냈고, 스페인 보병과 기병은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잉카 수행원들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나머지는 공황 상태에 빠져 도망쳤다.[2]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향해 돌격했지만, 그를 메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그의 가마를 뒤집은 후에야 그를 사로잡았다.[2] 이 공격으로 단 한 명의 스페인 병사도 죽지 않았다.
5. 포로 생활과 사형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형식적인 재판을 열어 아타우알파에게 반역, 우상숭배, 우아스카르 살해 등의 죄목을 씌워 화형을 선고했다. 당시 잉카인들은 시체가 불에 타면 내세에 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타우알파는 크게 두려워했다. 이때 빈센테 데 발베르데 수사가 아타우알파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화형 대신 교살형으로 바꿔주겠다고 제안했다. 아타우알파는 이를 받아들여 프란시스코 아타우알파라는 세례명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3]
결국 아타우알파는 1533년 7월 26일 교살되었다.[3] 그의 유해는 가톨릭 식으로 장례가 치러졌지만, 그의 옷과 피부 일부는 불에 태워졌다. 아타우알파의 죽음 이후 잉카 제국은 급속히 쇠퇴했다. 황제의 자리는 그의 형제인 투팍 우알파에게 이어졌고, 그 후에는 만코 잉카가 황제가 되었다.[4][5]
6. 유해
7. 평가 및 영향
아타우알파의 여동생 키스페 시사(이네스 유판키)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결혼했고, 이후 스페인 기사와 재혼하여 스페인으로 떠났다. 그녀의 후손 중에는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 호세 데시데리오 발베르데와 볼리비아 대통령 페드로 호세 도밍고 데 게라 및 호세 구티에레스 게라 등이 있었다.
키토에서 가장 중요한 축구 경기장은 아타우알파의 이름을 딴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아타우알파이다. 마드리드 왕궁 정면에는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와 아즈텍 황제 몬테수마 2세의 동상이 있다.
참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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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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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37億年の物語 宇宙が始まってから今日までの全歴史
文藝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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