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우알파 유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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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타우알파 유판키는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가수, 기타 연주자, 작가, 민족지학자로, 본명은 엑토르 로베르토 차베로이다. 그는 잉카 제국 황제의 이름을 따서 예명을 사용했으며, 아르헨티나 팜파스 지역에서 태어나 북서부와 알티플라노 지역을 여행하며 원주민 문화를 연구했다. 유판키는 정치 활동을 하였으며, 망명 생활과 유럽에서의 활동을 거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대표곡으로는 "인디오의 작은 길" 등이 있으며, 여러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을 받았고, 아르헨티나 코넥스 재단으로부터 다이아몬드 코넥스 상을 수상했으며, 구글 두들로 기념되기도 했다. 유판키는 1992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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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우알파 유판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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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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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엑토르 로베르토 차베로 아람부루 |
출생 | 1908년 1월 31일 |
출생지 | 페르가미노 파르티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후안 A. 데 라 페냐 |
사망 | 1992년 5월 23일 |
사망지 | 프랑스 님 |
국적 | 아르헨티나 |
직업 | 싱어송라이터, 작가 |
악기 | 기타, 보컬 |
장르 | 파야다, 트로바 |
발음 |
2. 생애
아타우알파 유판키의 본명은 엑토르 로베르토 차베로(Héctor Roberto Chavero)이다. 잉카 제국의 역대 황제 두 명의 이름을 조합하여 아타우알파 유판키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 페르가미노에서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후 아버지의 전근으로 북서부 투쿠만으로 이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케추아계 원주민 혈통이었고, 어머니는 바스크계 이민자였다.[7]
1929년 "인디오의 작은 길"(Caminito del indio)로 데뷔하여[8] 1950년대 초까지 활동하다 유럽으로 망명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로 귀국했지만, 말년에는 다시 프랑스에 정착하여 사망 직전까지 세계 각국에서 연주 활동을 펼쳤다. 그는 왼손잡이였지만, 왼손잡이용 기타를 사용하지 않고 지미 헨드릭스처럼 오른손잡이용 기타에 현을 거꾸로 매달아 연주했다.
1960년대에 유판키의 민족지학적 연구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졌고, 누에바 칸시온 아티스트들이 그의 작품을 녹음하면서 젊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돈 아타"로 불리며 유명해졌다.[2] 1964년, 1966년, 1967년, 1976년에는 일본에서 공연했다.[9] 1976년 호르헤 비델라 군사 독재 정권 이후 아르헨티나 방문은 뜸해졌다.
2. 1. 유년 시절과 음악적 영향
아타우알파 유판키는 아르헨티나 팜파스 지역인 페르가미노(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태어났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약 200km 떨어진 곳이다. 그의 아버지는 케추아족과 바스크족 혼혈이었고, 어머니는 바스크 지방 출신이었다.[2]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있는 산 미겔 데 투쿠만으로 이사했다. 그는 두 명의 전설적인 잉카 제국 왕을 기리는 의미에서 예명인 아타우알파 유판키를 사용했다.어린 시절 유판키는 아르헨티나 북서부와 알티플라노를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원주민 문화를 연구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활동하며 아르헨티나 공산당에 가입했다.
2. 2. 정치 활동과 망명
어린 시절 유판키는 아르헨티나 북서부와 알티플라노를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원주민 문화를 연구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활동적이 되었고 아르헨티나 공산당에 가입했다.[2] 1931년,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의 사실상 정부에 대항하고 퇴위된 대통령 이폴리토 이리고옌을 지지하는 실패한 케네디 형제 봉기에 참여했다. 봉기가 실패한 후, 우루과이로 피신해야 했다.[2] 1934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2]1935년, 유판키는 처음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했다. 그의 작품은 인기를 얻고 있었고, 라디오 출연 요청을 받았다.[2] 그 직후, "네네트"라는 별명을 가진 피아니스트 안토니에타 파울라 페핀 피츠패트릭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그의 평생의 동반자이자 "파블로 델 세로"라는 가명으로 음악적 협력자가 되었다.[2]
1952년까지 공산당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안 페론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작품은 검열을 받았다. 그는 여러 번 구금되고 투옥되었다.[2] 1944년부터 1949년까지 우루과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2] 1944년, 사무엘 V. 데 레온에 의해 두라즈노 시에서 공연하도록 고용되었다. 이 도시를 처음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A orillas del Yí"를 작곡하여 훌리오 마르티네스 오양구렌에게 헌정했다. 1949년,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 에디트 피아프는 1950년 7월 7일 파리에서 그를 공연에 초대했고, 르 샹 뒤 몽드 음반 회사와 계약을 맺어 그의 첫 번째 LP인 "Minero Soy"(나는 광부입니다)를 발매했다.[2] 이 음반은 아카데미 샤를 크로에서 열린 국제 민속 경연 대회에서 최우수 외국 음반상을 수상했다.[2] 그는 이후 유럽 전역에서 광범위한 투어를 했다.
1952년, 유판키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공산당과 결별하여 라디오 공연을 예약하기가 더 쉬워졌다. 네네트와 함께 코르도바주의 세로 콜로라도에 집을 지었다.[2]
1963년부터 1964년까지 콜롬비아, 일본, 모로코, 이집트, 이스라엘, 이탈리아를 순회했다.[2] 1967년, 스페인을 순회하고 파리에 정착했다. 정기적으로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1973년 아르헨티나 II에 출연했지만, 호르헤 비델라와 그의 군사 독재가 1976년에 권력을 잡은 후 이러한 방문은 덜 빈번해졌다.[2]
1929년, 처녀작 "인디오의 작은 길"(Caminito del indio)로 데뷔하여, 1930–40년대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8] 그 활동이 반정부적으로 간주되어 1950년대 초 유럽으로 망명해야 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로 귀국했지만, 말년에는 다시 생활의 거점을 해외(프랑스)로 옮겼으며, 사망 직전까지 세계 각국에서 연주 활동을 했다.[9]
2. 3. 유럽 활동과 국제적 명성
아타우알파 유판키는 1949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에디트 피아프의 초청으로 1950년 7월 7일 파리에서 공연했고, 곧 음반사 르 샹 뒤 몽드와 계약하여 첫 LP "Minero Soy"(나는 광부입니다)를 발매했다.[2] 이 음반은 아카데미 샤를 크로의 국제 민속 경연 대회에서 최우수 외국 음반상을 수상했으며, 이 대회에는 전 세계 350명의 참가자가 참여했다.[2] 이후 유판키는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폭넓은 공연 활동을 펼쳤다.
1963년부터 1964년까지 콜롬비아, 일본, 모로코, 이집트, 이스라엘, 이탈리아를 순회 공연했다.[7] 1967년에는 스페인을 순회하고 파리에 정착했다.[7] 1964년, 1966년, 1967년, 1976년에는 일본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9]
2. 4. 귀국과 누에바 칸시온 운동
유판키는 1952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그는 공산당과 결별하여 라디오 공연을 진행하기가 더 쉬워졌다. 네네트와 함께 그들은 코르도바주의 세로 콜로라도에 집을 지었다.[2]1960년대에 유판키의 민족지학적 연구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졌고, 누에바 칸시온 아티스트인 파쿤도 카브랄, 메르세데스 소사 및 호르헤 카프루네가 그의 작품을 녹음하여 그를 "돈 아타"라고 부르는 젊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유명하게 만들었다.[2]
2. 5. 말년과 죽음
유판키는 1992년 프랑스 님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1992년 6월 8일 그가 사랑했던 콜로라도 언덕에 뿌려졌다.[2]본명은 에크토르 로베르토 차베로(Héctor Roberto Chavero)이며, 아타우알파 유판키라는 이름은 잉카 제국 역대 황제 두 명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 페르가미노에서 철도원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아버지의 전근으로 북서부의 투쿠만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케추아계 토착민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어머니는 바스크계 이민자였다.[7]
1929년, 처녀작 "인디오의 작은 길"(Caminito del indio)로 데뷔하여 1930년대에서 40년대에 걸쳐 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8] 그 활동이 반정부적으로 간주되어 1950년대 초에는 유럽으로 망명을 해야만 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로 귀국했지만, 말년에는 다시 생활의 거점을 프랑스로 옮겼으며, 사망 직전까지 세계 각국에서 연주 활동을 했다. 왼손잡이였지만, 특히 왼손잡이용 기타는 사용하지 않고, 지미 헨드릭스처럼 오른손잡이용 기타에 거꾸로 현을 매달아 연주했다고 한다.
1964년, 1966년, 1967년, 1976년에 4차례 일본 공연을 했다.[9]
3. 작품 세계
아타우알파 유판키는 노래와 책을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쳤다. 그의 작품은 아르헨티나 민속 음악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곡으로는 "로스 에르마노스", "인디오의 작은 길", "투쿠만의 달", "돌의 차카레라", "소달구지에 실려"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Piedra sola''(1940), ''Aires indios''(1943) 등이 있다.
3. 1. 대표곡
다음은 아타우알파 유판키의 대표곡들이다.- 인디오의 작은 길
- 투쿠만의 달
- 돌의 차카레라
- 기타여, 말해줘
- 소달구지에 실려
- 우아후라 (Huajura)
- 돌과 길 (Piedra y camino)
- 귀뚜라미의 삼바 (Zamba de grillo)
- 눈과 바람과 태양 (Nieve,viento y sol)
3. 2. 저서
4. 유산과 평가
1968년 2월, 유판키는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18년간 프랑스 문학을 풍요롭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예술문화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의 노래 중 일부는 카스티야 문학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 및 학교의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다.
1985년, 아르헨티나의 코넥스 재단은 그에게 지난 10년간 자국에서 가장 중요한 대중 음악가로 인정하여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인 다이아몬드 코넥스 상을 수여했다.
1989년, 프랑스 낭테르 대학교는 유판키에게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칸타타의 가사를 의뢰했다. "성스러운 말"(Parole sacrée|파롤 사크레프랑스어)이라는 이 작품은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찬사였다.
2012년 1월 31일, 구글 두들은 아타우알파 유판키의 104번째 생일을 기념했다.[5][6]
5. 누녜스 기타
유판키는 생애 동안 수많은 기타를 사용했지만, 가장 애용한 것은 아르헨티나 누녜스 사의 기타 두 대였다. 이는 LP 재킷이나 당시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대의 누녜스 중 한 대는 1967년 일본인 기타리스트 손코 마주에게 그의 예명과 함께 유판키 본인이 직접 증정했다.[10] 다른 한 대는 1967년경부터 1992년 그가 서거할 때까지 계속 연주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공장을 둔 누녜스 사의 클래식 기타는 뒷판이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포크롤레와 클래식을 가리지 않고 많은 기타리스트에게 애용되었다.
참조
[1]
논문
La Nueva Canción Latinoamericana
http://www.jstor.org[...]
[2]
웹사이트
Interview with Atahualpa Yupanqui
https://unesdoc.unes[...]
[3]
논문
"They're Stealing Our Music": The Argentinísima Controversy, National Culture Boundaries, and the Rise of a Bolivian Nationalist Discourse
http://www.jstor.org[...]
[4]
서적
World Music: The Rough Guide. Latin and North America
Rough Guides
[5]
웹사이트
31 January: Remembering Atahualpa Yupanqui on Birthday
https://observervoic[...]
2023-01-30
[6]
웹사이트
Atahualpa Yupanqui's 104th Birthday
https://doodles.goog[...]
2023-01-30
[7]
서적
濱田滋郎の本 : ギターとスペイン音楽への道
現代ギター社
2007-06-25
[8]
서적
濱田滋郎の本 : ギターとスペイン音楽への道
現代ギター社
2007-06-25
[9]
서적
NHK市民大学 フォルクローレ
日本放送出版協会
1989-10-01
[10]
웹사이트
biography
http://sonkomay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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